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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패턴화된 폭력이 지워버린 현실의 얼굴들

<천주정>을 옹호하는 해석에 반대함

“나에게 폭력이라는 문제는 사실 생소한 화두였다. … 나에게는 그 폭력을 비주얼로 표현할 수 있는 영화적 언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개의 이야기 속 폭력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다루면 좋을지 그 마법의 언어를 찾지 못해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고전 무협영화 한편, 즉 <협녀>가 생각났다. … 호금전은 영화에서 사회적, 경제적 상황 속의 억압과 불평등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에 반응하는지를 폭력이라는 언어를 통해 보여주었다.”(<씨네21> 906호)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천주정>이 공개된 뒤, 지아장커가 한 말이다. 급변하는 중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폭력 사건들, 그 사건들을 바탕으로 한 네개의 이야기, 그리고 무협 장르. 영화를 보기 전, 감독의 인터뷰를 읽는 편은 아니지만 지아장커와 무협의 만남에 대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인터뷰들을 먼저 읽고 말았다. <천주정>과 관련해 <씨네21>과 진행된 세번의 인터뷰(906호, 925호, 947호)에서 그는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 네개의 이야기가 중국 현실의 폭력이라는 주제로 묶인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리고 네개의 이야기와 영화에 등장하는 요소들이 각각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정한 순간, 이미지, 요소를 특정하게 의미화하는 건 적어도 지아장커의 방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그 어떤 위대한 예술가도 딜레마에 빠뜨리고 마는 ‘폭력’이라는 미묘하고 거대한 주제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었다. 그가 자신의 영화에 대해 말을 아끼는 감독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인터뷰들의 답변들은 종종 지나치게 규정적이며, 영화에 이르는 길을 좁히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영화에 대한 과잉되고 확정적인 그의 설명에서 역설적으로 영화에 대한 그의 불안감과 초조함이 비친다는 느낌도 받았던 것 같다.

물론 감독의 말은 한편의 영화를 결코 포괄하지 못하며, 영화적 세계는 종종 만든 이의 의도를 벗어나 활동한다. 감독이 내뱉은 말 한마디나 감독의 정치적 성향, 심지어 지난 작품들의 기질을 근거로 영화를 보기도 전에 가지는 막연한 느낌과 짐작은 바보 같은 편견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위의 인터뷰들에서 느껴진 것들이 쓸데없는 우려였기를 바라며 <천주정>을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지아장커의 또 다른 세계로 건너가기 위한 과도기적인 영화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솔직히 다음 영화를 보기 전에 알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여기에 감탄할 만한 영화적 새로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지난 작품들과 비교해 <천주정>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나 그 태도를 영화적 질문으로 형상화하는 방식은 확연히 경직되고 둔감하다는 인상과 종종 자기도취적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는 지아장커가 중국의 현실을 여러 장르들, 특히 무협적인 색채 속에서 도전적이고 비판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천주정>은 극단적인 현실과 극단적인 장르의 결합에서 양자의 ‘극단’(적 이미지 혹은 순간)들을 피상적으로 만나게 하는 데 몰두하는 동안, 정작 현실과 장르의 중층적인 매개를 발견하는 데 소홀한 영화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감독이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그 실패의 흔적 혹은 징후가 영화 내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자신만만하고 현란한 스타일과 구조에 달라붙은 의도치 않은 그 실패의 그림자가 이 영화에 대한 실망감에도 불구하고 비평적으로 말을 걸게 만들었다.

실패한 ‘마법의 언어’로서의 무협

왜 무협 장르인가? 지아장커는 중국 현실의 폭력을 영화화하기로 하면서 왜 무협이라는 장르를 중심에 두었을까? <천주정>과 관련해 이상하게도 잘 이야기되지 않는 물음에서 시작해보려고 한다. 지금까지 읽어본 여러 비평들 중에서 이에 대해 납득할 만한 견해를 제시한 글을 아직은 보지 못했다. 무협 장르는 그저 영화의 전제로 받아들여지고 있거나 지아장커의 새로운 스타일에의 시도 정도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그 이유를 말한 건 지아장커 자신이다. 알려진 것처럼, 그는 최근 중국에서 벌어진 폭력 사건을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로 접했고, 이를 바탕으로 네개의 이야기를 구상했으며, 그 네개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영화적인 통로로 무협 장르를 떠올렸다고 했다. 각각의 이야기들에서 기존의 무협영화들이 다루던 주제, 즉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사회에 처한 사람들의 싸움을 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아장커가 단지 주제적인 유사성 때문에 무협 장르를 도입했다고 말하는 건 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글의 도입부에서 인용한 지아장커의 인터뷰를 읽으며 가장 뇌리에 남았던 건, “네개의 이야기 속 폭력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다루면 좋을지 그 마법의 언어를 찾지 못해”라는 말이었다. 즉 분리된 네개의 사건들 사이에 “관계”를 설정해주고 묶어내는 “마법의 언어”로서의 무협. 구체적으로 상상은 불가능하지만, 이 말은 더없이 매혹적으로 들렸다. 그의 고심을 따른다면, 이 영화에서 무협 장르는 그것의 특정 장면이나 설정의 모델이 아니라, 현실 속 폭력의 파편들을 영화적으로 관계 짓고 네개의 이야기들을 서로에게 작용하게 만들어서 어떤 식으로든 구조화하는 역할을 해주는 마법이 되어야 한다. 다큐멘터리 <>에 이어 <스틸 라이프>를 만들면서 지아장커는 대상의 비밀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해진다는 말을 했는데, 이후 우리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 그 원칙의 윤리가 불러온, 현실에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위대한 영화적 순간들을 목도해왔다. 그렇다면 <천주정>에서 무협의 형식은 지금 중국의 현실을 전방위적으로 지배하는,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의 구조적 비밀에 접근하기 위한 필요였을까. <천주정>은 영화 속 현실을 지탱하는 폭력의 구조와 무협의 구조, 혹은 무협의 정신이 어떤 식으로든 연동되리라는 기대를 부추겼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영화는 진행되고 있었다. 우선 네개의 이야기는 폭력이라는 커다란 주제 안에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연결고리 없이 흩어져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산시의 광산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은 인부들과 마을 사람들을 착취하는 자본가, 그리고 저항하지 않고 그 곁에 기생하는 자들에게 내내 당하다 마지막에 그들을 쏴 죽인다.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고향 충칭으로 돌아온 청부살인업자다. 오랜만에 가족과 재회하지만 그는 곧 또 다른 살인을 위해 충칭을 떠난다. 세 번째 이야기는 후베이의 마사지숍에서 일하는 여자 접수원이다. 유부남 애인과 기약 없는 이별을 하고 돌아온 그녀는 애인의 아내가 데리고 온 사내들에게 폭행을 당한다. 얼마 뒤, 마사지숍을 찾은 남자들이 성관계를 요구하며 돈다발로 그녀의 머리를 때리고, 그녀는 품에서 칼을 뽑아 그들을 처단한다. 네 번째 이야기는 공장과 클럽을 전전하는 젊은 노동자다. 돈을 벌기 위해 애쓰지만, 막막한 상황에 내몰린 그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한 이야기가 다음 이야기로 건너갈 때, 주요 인물들이 같은 시공간을 잠시 스쳐지나가는 장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장면들은 각 이야기들을 한편의 영화에 모아두기 위한 표피적이고 무의미한 장치에 불과하다. 네개의 이야기들 사이에는 영화적으로 어떤 작용도 없으며, 매개도 없다. 다만 현대 중국의 실화라는 느슨한 테두리 안에서 폭력의 양상들은 나열되고 있다. 왜 나열의 인상이 문제가 되는가. <천주정>은 옴니버스영화이므로 네개의 이야기들이 구체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폭력의 양상들이 그렇게 단순 나열될 때, 지아장커가 중국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 중 왜 하필이면 이 네개의 사건을 선택해서 영화화했는지를 영화의 구조 안에서, 혹은 배열 안에서 찾기 어려워진다. 이야기의 관계에 대한 태도를 <천주정>은 질문하지 않는다.

무협의 감정이 아니라 행동을 전시한다

옴니버스식 구성은 아니지만, <스틸 라이프>도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 두 사람의 두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영화였다. 일부는 이미 물에 잠기고 남은 마을도 이제 철거를 앞둔 싼샤에 아내를 찾으려는 한 남자와 남편을 만나려는 한 여자가 찾아온다. 영화는 두 남녀를 단 한순간도 만나게 하지 않고, 이들의 이야기를 겹쳐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개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감흥으로 함께 진동하며 나아가 이 영화의 공기를 구조화한다. 지아장커는 정성일과 <스틸 라이프>에 대해 나눈 인터뷰에서 “두 사람은 만나서는 안 되며, 그 둘은 닮아 있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 둘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두명의 자리를 오가면서 그 둘이 함께 살고 있는 시간을 찍고 싶은 것입니다. (중략) 나는 여기서 인물들이 가진 고독감, 내가 가진 문제를 남이 도와줄 수 없다는 고립,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 혼자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씨네21> 575호)라고 말했다. 같은 시공간에서 유사한 상황에 처한 남녀의 이야기를 동일한 사건의 고리를 만들지 않고도 한편의 영화에서 기이하게 접합시키는 것. 의도적인 사건 없이도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지아장커의 말대로 그가 두 이야기 사이에서, 아니 두 이야기를 끌어안은 ‘시간’을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틸 라이프>는 서로 다른 두개의 이야기가 같은 시공간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외롭게, 그러나 기적처럼 공존하는 세계였다.

하지만 동시대 중국 현실을 다룬 <천주정>에 이르러 이야기는 두배로 많아졌지만, 이상하게도 처음 세개의 이야기를 보는 동안 나는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보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물론 내용도 다르고 인물들도 다르며 장소도 다른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인물과 상황의 전형성, 개념화된 폭력의 양상들, 무엇보다 무협의 형식이 이야기들을 동질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무협의 형식은 폭력을 패턴화한다. 패턴화된 폭력에는 지아장커의 지난 영화들이 붙들고 있었던 시간의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폭력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가, 아니 폭력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분리시킬 것인가, 그 폭력들을 네 지역의 공기 안에 어떻게 배치해서 오늘날 중국의 현실에 비가시적으로 확산되고 내재된 폭력의 공기를 어떻게 만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여기에는 없다.

그러니 <천주정>에서 무협 장르의 효용은 기대와는 달리 영화의 구조, 나아가 폭력의 구조와 별 관계를 갖지 않는 것 같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천주정>을 본 정한석은 지아장커가 <스틸 라이프> 때는 무협의 구조를 빌려왔다면, 이 영화에서는 무협의 액션을 가져왔다고 예리하게 구별했는데(906호), 나 역시 그의 지적에 적극 동감한다. 그런데 그 둘은 어떻게 다른가? 지아장커는 <스틸 라이프>가 자신에게는 일종의 무협영화와 같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싼샤에는 매일 많은 배와 사람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중략) 그들은 마음속에 칼을 하나씩 안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싼샤에 온 것입니다. (중략) 지금 중국은 자기가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건 자기 삶의 어느 순간을 칼로 내려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무협소설은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그렇게 주인공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575호) 무협의 액션을 찾아볼 수 없었던 <스틸 라이프>의 뼈대가 무협이라고 밝힌 뒤, 중국의 현실 안에서 무협정신의 필연성을 말하는 그의 대답은 감동적이었다. 마음속에 품은 칼, 그러나 복수가 아닌 감정적인 문제를 대면하기 위한 칼. 아마도 그 정신이 <스틸 라이프>의 두개의 이야기들을 접속시키는 토대일 것이며, 그 감정의 구조가 결국 지아장커가 생각하는 무협의 구조였을 것이다.

<천주정>은 어떤가. 정한석의 말대로 이 영화는 무협의 구조가 아니라 액션에 기대고 있다. 달리 말해, 무협의 감정이 아니라 무협의 행동을 전시하는 영화이며, 이 영화의 칼은 “마음속에 품은 칼”이 아니라 복수를 위한 것이다. 그것이 악덕 자본가에 대한 처단이든(첫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 세상을 향한 무차별적인 폭력이든(두 번째 이야기), 이 영화의 무협은 이야기의 구조나 폭력의 구조가 아니라 개별적 복수를 위해 존재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지만, 대다수 현실의 평범한 인민들에게는 불가능한 분노의 즉각적인 실현, 그것을 위해 <천주정>은 무협을 필요로 한다.

앞선 이야기들을 무력화하는 에필로그

두 가지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 영화 속 이야기들의 무협적인 성격을 복수의 서사와 연관지을 때, 네 번째 이야기의 예외성을 말해야 할 것이다. 다른 세 이야기들에 비해 의외로 덜 말해지는 이 마지막 이야기는 <천주정>에서 가장 장르적이지 않고, 지아장커의 지난 세계들에 가장 가까이 있다. <세계> 속 테마파크의 인공성과 <소무> <임소요>의 소년들을 섞어놓은 듯한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돈을 벌어야 하지만, 일터 한 군데에 정착하지 못한다. 의류공장에서 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동료가 다치고, 그 피해를 대신 물어야 할 처지에 놓이자 그는 도망을 친다. 친구의 소개로 클럽의 웨이터로 취직하게 되고, 거기서 남자들을 상대하는 한 여자를 좋아하게 되지만 그마저도 곧 그만두고 다시 친구가 일하는 공장으로 돌아온다. 집에서는 돈을 더 보내라고 독촉하고 때마침 예전 공장에서 다쳤던 동료와 무리들이 그를 불러낸다. 그들이 그를 폭행하려다 그냥 가버리자, 그는 공장 기숙사로 올라와 복도 난간에 올라 뛰어내린다. 이 젊은 남자의 자살 행위, 자살에 이르는 과정과 그 타이밍은 급작스럽고 충격적이다. 지아장커의 지난 영화들 속 인물들의 선택과 결말을 떠올려도 이 광경은 낯설고, 이 영화 속 다른 주인공들의 행로와 비교해도 예외적이다. 그는 왜 죽어야 할까. 왜 그는 무협 액션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까. 영화는 왜 이 이야기에서만큼은 장르에 기대지 않을까.

앞의 세개의 이야기들에서 주인공들의 액션을 추동하는 건 분노이며, 그 분노는 복수할 개별 대상을 향한다. 하지만 이 마지막 이야기에서 젊은 남자는 복수할 개별 대상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그의 마지막 행동, 즉 자살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 자신 때문에 다친 공장의 동료가 찾아와 자신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고 다시 돌아갈 때 그는 수치심을 느꼈던 걸까. 좋아하던 여자가 알고 보니 아이의 엄마이며, 매일 돈 많은 남자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감당하지 못한 자신의 무기력함이 사무쳤던 걸까. 자신의 비루한 사정에는 아랑곳없이 돈을 보내라는 부모의 요구가 서러웠던 걸까. 외부로 발산되는 분노가 아니라 수치심과 무기력으로, 즉 내부로 삼켜진 분노의 결말이 여기 있다. 복수의 주체들은 분노의 서사 위에서 적어도 영화상에서는 살아남지만, 분노의 서사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 이 젊은 남자는 처참히 죽어버린다. 앞의 세 이야기에서 세계의 폭력은 가시적으로 개별화되고 평면적으로 제시되지만, 네 번째 이야기에서 폭력은 비가시적이고 중층적으로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다. 여기서는 무협의 액션이 불가능하다. 생각해보라, 이 젊은 남자가 칼을 휘두른다면, 대체 누구를 향해 휘두를 수 있겠는가? 세계 전체를 폭파시킬 수 없다면, 그 스스로 파멸하는 길만 남는다. 그러니 앞의 이야기들은 결국 이 가혹한 이야기의 소망충족 혹은 꿈인지도 모른다. <천주정>은 리얼리티 안에 어떤 식으로든 무협 장르를 새겨넣지 못하고 무협(앞의 세 이야기)과 현실(네 번째 이야기)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네 번째 이야기의 이질성은 중국의 현실에 대한 지아장커의 영화적 자의식이기보다는 그 실패의 징후로 보인다.

그런 맥락에서 자오타오가 재등장하는 에필로그는 “영화적 변명”(변성찬, 947호)이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변성찬은 이 에필로그를 사족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는데, 내 생각에 그것은 사족이지만, 지아장커로서는 반드시 삽입해야 하는 사족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이야기와 함께 사라지고, 네 번째 이야기 속 주인공이 현실의 찬 바닥으로 추락해 죽은 뒤에도 자오타오는 살아남아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한다. 그녀는 더이상 머리를 치켜 묶고 협곡을 거니는 장르 속 협객이 아니라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를 바라보며 취직을 원하는 현실의 노동자다. 왜 그녀일까. 다른 두 무협의 주인공들의 폭력이 원인을 넘쳐 과잉되거나 다소 비현실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데 반해, 그녀의 액션은 원인에 대응한다는 인상을 준다. 달리 말해, 그녀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현실과 무협을 오가며 그 괴리를 붙들 수 있는 자이다. 지아장커는 그녀를 에필로그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앞의 세 이야기와 마지막 이야기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메우고 복수의 장르적 폭력과 자기파괴적이고 무력한 현실의 죽음 사이의 간극을 수습하며 영화의 불균형한 구조를 봉합하려는 것 같다.

영화가 끝나기 전, 카메라는 경극을 바라보며 감정으로 일렁이는 자오타오의 얼굴을 비춘다. 무대에서는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니 눈물이 나는구나”라는 여인의 탄식에 이어 “정녕 너의 죄를 모르겠느냐?”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경극을 바라보는 한 무리의 인민들의 기묘한 얼굴이 등장한다. 개별화된 폭력의 서사를 지나 익명의 군중의 얼굴에 도달한 이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는 자신의 자리를 혹은 시선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지아장커의 영화적 과시가 엿보인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그 익명의 얼굴들에는 (영화의 의도와 관계없이) 앞선 이야기들을 무력화하는 힘이 있다고 느낀다. 네개의 이야기들 속 폭력의 양상들을 통해 중국의 현실을 포착했다고 여기는 자들도 마지막에 등장한 이 인민들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할 것이다.

지아장커의 물질성의 감각이 사라지다

이제 위에서 언급한 두개의 문제 중 다른 하나를 말할 차례가 되었다. <천주정>은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며 공개된 뒤, 서구 평론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왔다. 요컨대 <씨네21>이 받은 2013년 ‘해외 평단의 베스트 리스트’(944호)를 보면 설문에 참여한 열명의 비평가 중 일곱명이 <천주정>을 명단에 올렸다. 그리고 그 일곱 명 중 하스미 시게히코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서구 평론가들이다. 지아장커의 영화가 해외 평단의 지지를 받는 건 생경한 현상은 아니지만, 이 영화에 관해서라면 좀더 물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중국의 리얼리티와 무협이 결합한 <천주정>의 무엇에 그토록 환호하는 것일까.

내가 읽어본 비평문들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대체로 그들은 <천주정>의 사건들이 중국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새로운 표현방식으로 전달되는 폭력의 국면들에서 중국의 현실을 읽으며 거기서 이 영화의 정치성을 찾는다. 가령 <천주정>의 영어자막 번역자이자 아시아영화 전문가로 알려진 토니 레인즈는 <천주정>이 “중국에서 벌어지는 불평등과 범죄를 고발”(944호)하며 심지어 “효율적이고 투명성 있는 법 체제가 시급하다고 암시”하는 영화라고 보았다. 같은 지면에서 <호수의 이방인> 다음 순위로 <천주정>을 뽑은 <필름 코멘트>의 평론가 로버트 쾰러는 그간 지아장커의 영화를 지배하던 중국의 현실에 대한 절망감이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과장된 어조를 통해 직설적인 분노로 전환되었다고 보며 지아장커는 여기서 그 어떤 가능성도 제거된 세계를 그려냈다고 평가했다(<시네마스코프>, 55). 즉 <천주정>이 극단적인 장르를 취하고 있음에도, 서구 평론가들에게 이 영화는 지아장커의 작품들 중에서도 중국의 현실을 가장 강렬하게 압축한 영화, 현실에 대한 지아장커의 발언의 강도가 가장 높고 직접적으로 제시된 영화로 이해되는 것 같다. 제3세계의 폭력성을 고발한다는 미명하에 폭력적인 이미지를 전시하는 영화들과 이들을 제3세계의 정치사회적 알레고리로 쉽게 등치하고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로 읽어내려 애쓰는 서구 평론가들의 오해와 편견은 낯설지 않다. 나는 지아장커의 <천주정>이 폭력을 의미화하는 방식과 그것이 서구 평론가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방식이 그러한 맥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이 영화에서 중국 현실의 폭력성을 읽었다고 망설임 없이 믿는 이들이 영화의 마지막 화면을 채운 익명의 인민들의 얼굴에서 무엇을 느꼈을지 궁금하다. 그들에게 그 얼굴들은 영화 속에 출몰하는 동물들의 초현실적이고 신비롭게 대상화된 이미지들, 혹은 중국의 생경한 풍경의 일부였을 뿐일까.

외부의 비평가들이 이 영화의 장르성을 어떤 식으로든 리얼리즘 안에서 사유하려고 하는 데 반해, 지아장커는 종종 장르적 탐닉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그 탐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해도 그건 비판의 근거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가 중국 사회의 폭력이라는 리얼리티를 내세우며 그 욕망을 숨기는 것처럼 느껴질 때 이 영화는 불편해진다). 그렇지 않다면 인물의 역사와 행동의 동기가 거의 제거된 청부살인업자의 이야기를 설명할 방도가 없다. 총성이 울릴 때가 가장 재미있다는 말 외에 이 남자의 잔혹한 행동을 설명해줄 단서를 찾기는 어렵다. 그는 폭력의 미학에 몰두하는 남자다.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새해를 앞두고 남자의 아들이 벌판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있다. 남자가 아들에게 묻는다. “폭죽 터뜨려줄까?” 그가 허공을 향해 총을 쏘는 순간 마치 그의 총이 폭죽을 만들어내듯, 검은 하늘이 불빛들로 가득하다. 멀리서 잡은 이 장면은 아름답다. 하지만 이 장면을 지배하는 건 지아장커의 지난 영화들이 그토록 경계하던 미학화의 욕망이다.

지아장커가 <천주정>에 대한 인터뷰에서 “나에게 폭력이라는 문제는 사실 생소한 화두였다”고 말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폭력을 개별 이미지로 전면화한 적은 거의 없지만, 그의 영화들이 언제나 체제의, 자본의 구조적 폭력을 버티는 사람들의 역사와 기억과 시간과 선택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나 그의 영화가 정작 폭력을 사건화하자, 그의 지난 영화들을 숨쉬게 하던 물질성의 감각은 사라지고 말았다. 영화적 요소들은 전에 없이 요란하게 움직이는데, 정작 영화 자체는 언어로는 닿을 수 없던 그 운동성을 잃어버렸다. 지아장커의 지난 작품들을 사랑하면서 <천주정>에 애정을 주는 건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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