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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후세인 정권이 정말로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후세인이 극단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의 책임감과 자제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즉, 만약 이라크 군대가 뉴욕을 폭격하고 워싱턴을 포위한다면) 우리가 부시 정권에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과연 수천발의 핵탄두를 포장에 싼 채 보관하기만 할까? 생화학무기들은? 탄저병, 천연두, 그리고 신경가스들은? 미안하게도, 웃음이 터져나오려 한다.”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에 나오는 이 구절은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 품을 수 있는 미국과 이라크 전쟁의 본질을 통쾌하게 요약하고 있다. 미국은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후에도 오랫동안 이라크 반군과 전쟁을 치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이 전쟁에 저격수로 참전해 전설이 된, 그럼으로써 미국에서 영웅이 된 크리스 카일의 실화를 옮긴 것이다. 미국인이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보는 내내 불편함을 안긴다.
[신 전영객잔] 이스트우드는 이라크전을 똑바로 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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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해고시키고 복직할 순 없어요.” <내일을 위한 시간>이 첫 상영되었던 2014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적지 않은 관객은 산드라가 이 대사를 하는 순간 일제히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고 그것들은 이례적으로 더 우렁차고 뜨거웠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나는 세상과 영화의 간극을 느끼며 그 박수갈채 속에서 잠시 의문스러워하며 망설였다. 다르덴이라는 진귀한 창작자들이 만들어냈고 우리 사회의 가련하지만 명예로운 한 인물의 초상이 철학적으로 담겨 있는, 하지만 영화적으로 완벽히 동의할 수만은 없는 이 작품에 관한 복잡한 심중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고민된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네편의 진술은 각자 서로 뜻이 다르고 별개의 귀결을 지닌 네개의 단상으로 읽혀도 좋고 하나의 글을 위한 네개의 장으로 읽혀도 좋다.
선택
선택이라는 화두에서 시작해보자. 선택은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 중요한 화두다. 이 영화에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신 전영객잔] 영화와 세상의 ‘투명한’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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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재능 있는 감독 클라우즈는 작고한 감독 빌렘이 20여년 전에 썼던 <말로야 스네이크>를 다시 무대에 올리려고 한다. 그가 중년의 여주인공 헬레나 역으로 점찍어둔 배우는 과거에 헬레나의 상대역 소녀인 시그리드로 분해서 스타덤에 올랐던 마리아(줄리엣 비노쉬)다. 마리아의 비서인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은 마리아가 클라우즈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길 바라지만, 마리아는 망설인다. 심지어 캐스팅을 수락한 뒤에도 싱그러운 시그리드가 아닌 시그리드의 사랑을 갈구하다 자살을 감행하는 헬레나에게 동화되지 못해 내내 갈등한다. 마리아에게 헬레나는 초라하고 비굴하며 무엇보다 늙어버린 여인이다. 그러나 마리아를 헬레나의 적역이라고 믿는 클라우즈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시그리드와 헬레나는 같은 상처를 지닌 두 인물, 달리 말해 결국은 동일인물이며, “시그리드의 20년 후가 헬레나”이므로 마리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라고 설득한다.
그의 논리를 확장하면 <말로야 스네이
[신 전영객잔] 소멸 중인 흘러넘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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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사석에서 독립영화나 학생 실습 작품에서 남용되고 있는 들고 찍기 촬영 스타일에 관해 지인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렇게 찍은 화면들은 아무렇게 붙여도 다음 컷과 연결되는 데다 화면 내의 운동감도 잘 느껴지지 않아서 젊은 감독들이 남용하는 것은 문제라고 내가 말했다. 갑론을박이 오가는 사이 누군가가 다르덴 형제 감독의 <아들>을 예로 들었다. 시종일관 주인공의 가슴팍이나 뒤통수를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그 영화가 6개월 가량 리허설한 영화인 걸 알고 있느냐고 그는 물었다. 저명한 배우인 그는 매우 사실적으로 연출된 그 영화도 아마 기계처럼 반복하는 가운데 감독이나 배우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걸 현장에서 건져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다르덴 형제의 신작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뛰어나게 연기한 마리옹 코티야르의 스크린 형체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씨네21>에 실린 인터뷰에 따르면 마리옹 코티야르는 한달여간 실제 촬영장소에서
[신 전영객잔] 세밀한 예행연습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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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액트 오브 킬링>의 충격은 어디서 오는 걸까.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100만명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일까? 학살자들의 상상하기 힘든 뻔뻔스러움, 혹은 그들이 21세기에도 여전히 한 나라의 지배자라는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이 다큐멘터리의 표현과 형식의 기괴함 때문일까? 아마도 그 모두 때문일 것이다. 이 다큐를 말하면서 100만명의 고통과 죽음, 학살자들의 가공할 만한 그리고 변치 않은 잔인성을 괄호 안에 넣는 것은 정당화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괄호를 푸는 순간, 이 작품을 평자로서 말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 사실들 앞에서 평자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말문을 막는 것이 사건 자체의 악마성뿐인가. 달리 말해 현실의 과도한 끔찍함이 비평이라는 행위를 하찮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뿐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충격의 또 다른 진원은 학살자들의 말이다. 그들은 많은 말을 한다. 진담과 궤변, 허언과 농담, 반성과 정당화, 과장과 위장의 말들을 끝
[신 전영객잔] 기록을 압도하는 표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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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재 감독의 <목숨>은 호스피스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의 최후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감독은 환자들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으면서 그들의 죽음을 착취하지 않으려 애쓴다. 누군가의 죽음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격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런 죽음들 앞에서 우리가 보통 슬픈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듯 카타르시스를 느껴도 되는 것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죽음을 앞두고 그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다. 관객 입장은 좀 다르다. 기껏해야 1시간30여분 동안 누군가의 최후 일상을 들여다본 처지에 그 죽음을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마음을 다잡게 된다. 눈물이 흐르는데도 그런 감정이 든다. 나는 이게 이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목숨>에는 말기 암에 걸린 세 사람이 나온다. 남편이 부도를 맞는 바람에 오랜 기간을 가난과 싸우면서 가정을 건사하기 위해 노력했던
[신 전영객잔] 이생을, 잘 살아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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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간 동일한 배우들을 데리고 매해 일정한 시간 동안 촬영을 해서 그 인물들의 세월을 함께 살아낸 <보이후드>는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인물들의 시간을 내내 공유했다는 행복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12년이라는 긴 시간, 여러 인물들의 각기 다른 세계, 그리고 그 세계들의 작지만 지속적인 움직임들을 지켜보며 그중 단 한순간과도 공명하지 못했다고 말할 이가 과연 있을까. 이미 여러 평자들이 이 영화의 무엇이 자신들을 감화시켰는지에 대한 아름다운 감상기를 제출했다. 아무래도 <보이후드>는 영화비평이 아니라, 보는 이 각자의 기억, 감정,인상을 더욱 환대할 영화인 것 같다. 많은 이들이 시간의 냉정한 흐름에 대면하는 이 영화의 온기에 충분한 감응을 표현했으니 영화를 보는 동안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고 여전히 얼룩처럼 남겨진 잔상들, 따스함과는 거리가 먼 그 느낌에 관해 말해볼 생각이다.
자상하고 친절했던 올리비아의 두 번째 남편, 그러니
[신 전영객잔] 시간은 정말 안온하게 흘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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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나를 찾아줘>의 결말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를 찾아줘>의 부부 닉(벤 애플렉)과 에이미(로저먼드 파이크)의 애증으로 얼룩진 결혼 생활사에 관한 설명이 간략하게나마 필요한 것 같다. 결혼 5주년이 되던 날 에이미가 홀연히 사라진다. 영화는 닉과 에이미의 황홀했던 첫 만남에서부터 결혼 뒤 관계가 서서히 악화되어간 과정까지를 주요하게 술회하는 한편, 속속 드러나는 정황에 따라 닉이 에이미 실종 사건의 주범이자 피의자로 지목받는 과정을 전개해간다. 여기까지를 이 영화의 1부라고 부를 수 있다. 2부에서는 시작과 함께 버젓이 살아 있는 에이미가 돌연 등장한다. 그녀는 실종되지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것은 그녀 스스로 꾸민 일이고 일종의 남편 체벌 프로그램이다. 에이미는 남편이 자신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당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에이미에게도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계획은 수정된다. 결국 에이미는 자신을 짝사랑해온 갑부 콜링스가 자신을
[신 전영객잔] 그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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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시대의 많은 영화인들이 무한한 존경을 보여왔다 해도, 켄 로치는 후대의 영화사에서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진 않을 것이다. 그의 인물들은 투박하고 친밀하고 때로 아름다웠지만 그들의 육체성은 대개 증언자 역할 뒤로 물러났고, 화면에는 간혹 아득한 생기가 번져나왔지만 사건의 강도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명료하고 선형적인 이야기는 종종 멜로드라마적 관습에 의존했다. 켄 로치가 원한 것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로치는 자신의 영화가 하나의 예술품이 아니라, 증언의 영화, 교육의 영화, 개입의 영화가 되기를 원했다. 이 강고한 사회주의자는 이른바 ‘문화에로의 전환’(cultural turn)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쾌락의 선이나 숭고의 미 대신 해방의 정치를 믿었으며 자신의 영화가 미학적 소우주가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기를 그리고 해방의 칼이기를 소망했다.
그렇다 해도 오늘의 유럽 지식인 일반이 이 불굴의 노(老)전사에게 지닌 부채감이나 콤플렉스만이 그에 대한 비평적 존중을 낳은
[신 전영객잔] 정념의 심연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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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영화는 단단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일정한 패턴으로 변주되는 그 구조들은 공간, 주체, 재현에 관한 문제를 던진다. 이번 신작 <자유의 언덕>은 덧붙여 시간을 섞어놓았다. 과거, 현재, 미래의 연대기 순으로는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없다. 이 영화의 주인공 모리(가세 료)는 과거에 결혼하려고 했던 권(서영화)을 찾기 위해 한국에 다시 왔다. 그때 권은 집을 떠나 요양을 가고 없다. 모리는 그녀에게 편지를 남겼고 몸 상태가 나아진 권은 이전에 일했던 학원에 가서 모리의 편지를 전해받는다. 권이 처음 편지를 펼쳐 읽다가 바닥에 떨어트리는 바람에 편지 순서는 뒤죽박죽 섞인다. 권은 그 상태로 편지를 읽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모리가 편지에 쓴 북촌에서의 행적들, 그것들이 뒤섞인 형태의 일상기록은 모리의 내레이션을 통해 그의 회상처럼 화면에서 재현된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연대기 순으로 펼쳐지지 않으므로 그에 대해 관객이 괘념치 않아도 된다는 것은
[신 전영객잔] 현실인가 꿈인가 환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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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여자에게 간절한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받아든 여자가 계단에서 휘청거리자 편지가 땅에 떨어져버린다. 편지의 순서는 뒤섞이고, 여자는 그중 한장을 빠뜨리고 줍는다. ‘자유의 언덕’이라는 카페에 들어온 여자가 편지를 읽기 시작하고, 뒤엉킨 시간의 편지 내용이 펼쳐진다. 흩어진 편지, 생략된 한장, 낯설어진 시간.
홍상수 영화의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의 선상에서 ‘흐른다’는 인상을 준 적은 없다. 시간의 인과론이나 명확한 선후 관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최소의 일관된 시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중심축이 그의 영화에서는 늘 모호하고(<하하하> <북촌방향>), 나아가는 것 같지만 무언가에 막혀 있거나 제자리다(<밤과낮>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그의 시간관은 줄곧 반복, 폐쇄된 순환 등의 용어로 말해져왔지만, 고정된 시간적 틀을 거부하는 그의 영화들 앞에서 그런 용어는 비평적 무력감에 더 닿아 있다. 더욱이 최근 몇년간
[신 전영객잔] 시간의 틀안에서 틀부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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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의 주인공은 실어증에 걸린 젊은 피아니스트 폴 마르셀이다. 사고로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란 그는 두 이모가 운영하는 댄스학원에서 피아노를 친다. 솜씨가 좋긴 하지만 그의 피아노 연주는 기예에 가깝다. 폴은 텅 빈 눈동자로 영혼 없는 연주를 한다. 그의 삶의 유일한 낙은 과자 슈게트를 먹는 것뿐이다. 그가 감정을 유일하게 표현하는 것은 슈게트가 떨어져 먹지 못해 짜증을 낼 때다. 어느 날 두 이모가 마련한 집안 잔치에서 연주를 하다가 슈게트가 떨어지자 폴은 화가 나서 집을 나선다. 집에 돌아온 폴은 마침 엘리베이터가 고장나 계단을 오르다가 우연히 비밀정원이 있는 마담 프루스트의 집에 들어선다. 거기서 과거로 떠나는 마담 프루스트의 묘약, 마들렌 과자와 홍차를 먹은 뒤 폴은 마담 프루스트의 단골손님이 된다.
폴 마르셀과 마담 프루스트의 만남, 이 의도적인 이름 짝짓기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폴이 마들렌을 먹고 혼절해 과거의
[신 전영객잔]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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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색정광 여인 조(샬롯 갱스부르)의 파란만장한 성 편력을 밤새 듣고 난 남자 샐리그먼(스텔란 스카스가드)은 정중하게 “잘 자라”라는 인사를 하고 방문을 나선다. 그는 금방 되돌아온다. 그러고는 갑자기 이불을 들치고 그녀의 질에 자신의 성기를 들이민다. 여인이 소리친다. “안 돼요.” 무지 화면이 뜨고 남자가 말한다. “하지만 당신은 수천명이랑 잤잖아.” 무지 화면이 계속되고 총소리, 여인이 옷 입는 소리, 방을 나서는 발소리가 들린다.
<님포매니악>의 마지막 장면은 황당하다(여기선 볼륨1과 볼륨2를 묶어 한편의 영화로 다룬다). 샐리그먼은 성욕이 없는 무성애자이며 여자와도 남자와도 자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그는 박식한 교양인이며 독서광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무도한 강간자로 돌변한 걸까. 그리고 “생애 첫 친구를 얻었다”며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던 여인은 왜 거부의 과정도 없이 바로 총을 쏘았을까.
우리는 이 남녀의 돌발적인 행동에서 갖
[신 전영객잔] 비웃음에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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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침하고 적막한 골목의 차가운 바닥에 한 여인(조)이 상처를 입은 채 쓰러져 있다. 노년의 남자(샐리그먼)가 우연히 그녀를 발견하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여자는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탓하며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잠시 망설이다가 벽에 꽂힌 낚싯바늘로 시선을 돌린다. 남자가 플라이 낚시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며 아이작 월튼의 책, <조어대전>을 언급한다. 그러자 여자가 말한다. “이제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알겠어요. 대신 내 이야기 전부를 해야 할 거예요. 길고 비도덕적인.” 그리하여 여자의 과거가 열리며 ‘조어대전’이라고 이름 붙여진 첫장이 시작된다.
<님포매니악>(이 글에서는 1부와 2부 모두를 포함한 제목으로 쓸 것이다)은 조와 샐리그먼이 대화를 나누는 한정된 공간의 현재와 조의 성욕 넘치는 과거를 오가며 진행된다. 조의 내레이션으로 과거가 제시되고 현재로 돌아오면 샐리그먼은 자신의 방대한 지식을 경유해서 그 과거를 해석한다. 샐리그먼
[신 전영객잔] 이야기의 욕망에 봉사하는 색정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