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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한 장면. 주인공이 탄 리무진 창밖으로 보이는 뉴욕 중심가가 느린 속도로 전시된다. 도시는 시위자들에게 점거되었다. 희뿌연 연기로 뒤덮인 거리를 소요 군중이 어지럽게 오가고 있다. 널뛰는 주가와 환율이 점멸하던 거리의 전광판에는 이런 문구가 떠오른다.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유령이
이상한 문구다. 1848년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의 첫머리에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고 썼다(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코스모폴리스>가 첫 소개된 지난해 칸영화제 기자회견에서 마르크스의 이 문장을 인용하고, 이것이 자신의 영화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그것은 “현 상태를 지양(止揚)해나가는 현실의 운동”(<독일 이데올로기>), 혹은 현재적인 자본주의 내부에서 엄청난 속도로 에너지를 비축 중인 파괴-창조적 잠재력, 혹은 자본주의의 바깥이며 피안이었다. 그러니까
[신 전영객잔] 한 자본가의 미학적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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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의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이하 <앤젤스 셰어>)를 본 뒤 남다은 평론가가 얼마 전 <씨네21> ‘신전영객잔’에 쓴, 최근 독립영화의 경향에 관한 편지 형식의 글이 생각났다. 나는 그 글이 명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글에 감동받아 필자가 가르치는 대학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프린트해 나눠주려다 말았다. 대신 몇몇 학생들과의 면담에서 그의 글을 언급하며 지적질을 했는데 효과가 있었다. <앤젤스 셰어>를 보고 다시 남다은의 그 글이 떠오른 것은 관객과의 대화 도중 영화청년으로 보이는 한 패기있는 젊은이와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그는 종래의 켄 로치 영화와는 결이 좀 다른 이 영화가 나름 재미있고 연륜을 증명해준다고 한 내 말을 반박하고 그저 능숙함만 보이는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한국의 독립장편영화를 본 최근의 경험을 말하면서 남다은의 글을 인용했다. 역시 효과가 있었다.
무식하고 더럽고 게으른 쓰레기들…
[신 전영객잔] 이 루저들의 무심한 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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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과대평가받은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보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개인적으로는 더 흥미롭게 보았다. 물론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뛰어난 영화가 아니다. 그러니 태작을 수작으로 둔갑시키고 싶진 않다. 다만 그 만듦새와 무관하게 이 영화의 어떤 부분이 ‘문제적’ 흥미를 유발하는지 말해보려는 것이다.
참으로 추상적인 웹툰 그리고 영화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을 독립영화 방식으로 만들어 세계 영화제를 순례한 감독 장철수가 웹툰을 원작으로 한 상업적 기획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만든 것이 의아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장철수는 일단 미학적 기질상 이 영화의 적임자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예컨대 김기덕을 포함하여 그에게서 영화를 배웠거나 그와 함께 일했던 감독들이 비교적 공유하고 있는 점들이 있다. 어떤 미학적 추상성에의 믿음이다. 추상성이란 사실 어떤 구체성도 그리 중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나아가 구체성이 전무한
[신 전영객잔] 번지수를 잘못 찾은 유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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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 쇼 중,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조련사 여인이 한 남자를 만나 육체적 감각을 되찾은 날. 그녀는 의족을 차고 어색한 걸음으로 사고 현장을 찾는다. 대형 수족관 앞에 선 그녀가 수족관 창을 손으로 두드리자, 마법처럼 어딘가에서 거대한 고래가 나타난다. 마치 고래를 쓰다듬듯 창을 쓰다듬던 여인이 손과 팔을 움직여 동작을 시작하자, 고래가 그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는 여인의 표정을 볼 수 없는 대신 고래의 표정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혹은 의족을 찬 다리로 어색하고 꼿꼿하게 서서 우아하고 능숙하게 팔을 움직이는 여인의 뒷모습이 그녀의 얼굴 표정 그 자체라고 느낀다. 둘 사이에 가로막힌 창. 이제는 서로 섞일 수 없는 두 세계. 그 창을 사이에 두고 고래와 여인은 서로를 만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창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이 창은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한계를 리듬으로 전환한다. 여인의 손짓에 고래는 어디론가 다시 사라져버리고 창 앞에 여인 홀로, 하지만 뭔가 달
[신 전영객잔] 내가 만질 수 없는 그러나 나를 만져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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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강우석의 영화는 늘 옛날 미국영화의 무구한 오락적 가치를 떠올리게 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공공의 적> 이후, <한반도>를 제외하곤 난 늘 그의 영화를 일관되게 지지해왔다. <전설의 주먹>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영화가 예상만큼 흥행하지 못한 것을 두고 놀랐다. 나는 이 영화의 건전한 오락적 가치가 충분히 대중적으로 통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편의 영화의 흥행 여부를 작품 자체의 가치만으로 판별할 수는 없다. 다른 대다수 영화에 비해 긴 상영시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한계라는 것도 이 영화의 흥행 스코어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웠던 언론의 호평에 비해 이 영화가 상대적으로 낡았다는 상당수의 비판적 시각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를 옹호하고 싶다. <전설의 주먹>이 다루고 있는 삶의 남루함이라는 소재에 외면할 수 없는 강우석의 윤리적 정직성이 스며들어 있고 그가 묘사
[신 전영객잔] 강우석 스타일을 지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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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가끔 질문을 받곤 합니다. 당신의 글은 누구를 향한 것입니까. 누군가는 단 한명의 감독을 대상으로 글을 쓴다고 하고, 누군가는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쓴다고 대답합니다. 언제나 그 질문 앞에서 망설이는 저는 늘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나는 나를 들여다보기 위해, 그러니까 영화라는 세상을 경유해서 결국은 그 세상을 살고 있는 나의 변화를 보기 위해 글을 씁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기적인 태도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영화가 제게 중요한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2013년 봄,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해 글을 써야겠다는 긴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지면에서 단 한번도 써본 적 없는 편지의 형식이 이번만큼은 저의 근심을 나누는 유일한 방식이 될 것 같았습니다. 지금 저는 학교에서, 현장에서, 혹은 일터에서, 오직 영화 한편을 찍기 위해 힘겨운 삶의 조건과 싸우며 밤잠을 뒤척이다 우연히 <씨네21>을 뒤적일 젊은 감독님들에게 보
[신 전영객잔] “현실을 모방하는 건 아주 나쁜 버릇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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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은 땅 위에 한발은 허공 속에
의기양양한 시인이 이렇게 절룩거린다.
그를 비틀어버리는 낯선 곳에서
완전하게 패배하여 자신의
상상의 형상이 사라져버리는 세계 속으로 되돌아온다.
-장 콕토 <몽유병자> 중에서
레오스 카락스의 짧은 필모그래피에서도 <폴라 X>(1999)는 이례적인 영화였다. 대부분 낮에 찍혔고, 그의 페르소나인 드니 라방이 등장하지 않는다. 어떤 감독의 영화에선, 오즈 야스지로나 에릭 로메르의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나 소재보다 계절이나 밤낮이라는 배경이 더 근원적이다.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도 그런 것 같다. 카락스가 스물넷에 만든 데뷔작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는 거의 모든 장면이 밤이며, 뒤를 이은 <나쁜 피>(1986)와 <퐁네프의 연인들>(1991)도 3분의 2 안팎이 밤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미완성의 조상(彫像)과도 같은 특이한 외모의 드니 라방은 몽유병자의 무표정으로 어둠이 깃든 파
[신 전영객잔] 진실은 막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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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촬영현장이었습니다. 자동차 세대가 굉음을 내며 차례로 터널을 뚫고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두대의 대형 자동차 중간에 끼어 달리는 소형 자동차에는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이 장면이 스크린에 펼쳐질 때 우리는 가운데에 있는 저 소형차와 카메라 덕분에 두대의 대형 자동차가 서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감독은 여러 번 그 장면을 되풀이하며 고심을 거듭했는데 그때 그의 고민의 내용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습니다. 쾌속의 운동감을 어떻게 더 상승시킬 것인가. 그게 그의 고민이었을 겁니다. 한 귀퉁이에 서서 그걸 지켜보다가 지금의 문제를 문득 떠올립니다. 저의 호기심은 그 감독의 고민과 정확히 반대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가 빠르기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저는 느려서 이상한 장면들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실상은 긴요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어느 두편의 영화의 두개의 장면,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 문제에 관한 호기심이 문득 그때 다시
[신 전영객잔] 슬로모션, 넌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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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이후 빈 라덴을 사살하기까지 CIA의 비밀활동을 다루며 여전히 첨예한 정치적 쟁점을 건드린 탓에 <제로 다크 서티>는 비교적 고른 지지를 얻은 <허트 로커>에 비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들에 따라오기 마련인 불평들, 이를테면 실제로 일어난 일을 왜곡했다며 온갖 증거들을 나열하는, 대개의 경우 영화 자체와 별 관계가 없는 비평들은 열외로 두자. <제로 다크 서티>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들이 문제를 삼는 지점은 영화에 등장하는 고문장면에 대한 영화의 태도이다. 빈 라덴에 대한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보여주고 있으므로 결국은 고문을 옹호하는 것이라는 비판적 견해가 한편에, 오히려 현실의 고문을 폭로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다른 한편에 있다(“악은 어디에 있는가?”, <씨네 21> 894호). 캐스린 비글로는 이런 논쟁에 대해 <제로 다크 서티>
[신 전영객잔] 이런 무력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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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커>의 결말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있습니다.
이십세기 폭스 서치라이트 로고가 깔리는 박찬욱의 영화를 한국의 극장에서 보는 경험은 좋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박찬욱이 연출하고 정정훈이 촬영했지만 이것은 니콜 키드먼과 미아 바시코프스카와 매튜 구드가 주연하고 할리우드의 자본과 기술력이 들어간 할리우드영화다. 박찬욱의 영화가 보여주는 형식적 미감과 관객을 습격하는 윤리적 동요의 기운은 <스토커>에서도 여전하다. 훨씬 세련되고 단정하며 여운도 만만치 않다. 동시에 송강호, 최민식, 이영애, 임수정 등이 나오는 박찬욱의 한국영화에서 느꼈던 윤리적 동요보다는 충격이 덜하다. <스토커>는 간단히 정리하면 불온한 피를 타고난 가족의 얘기다. 미친 삼촌이 돌아오고 그 삼촌에게 여주인공 인디아(미아 바스코프스카)는 근친적 욕망을 느낀다. 삼촌 찰리(매튜 구드)는 그녀의 욕망을 격발하는 존재이다. 그녀의 욕망에는 성욕뿐만 아니라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로 접착된
[신 전영객잔] 그녀는 우리와 섞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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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어느 밤에 서간체 형식의 짧은 칼럼 하나를 쓴 적이 있다. 양영희의 다큐 <디어 평양>에 관한 것이었는데 양영희가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그려낸 방식에 대해 내가 느낀 감동을 적었고 그 표현 중에는, “당신의 영화가 보여준 만드는 자로서의 ‘나’와 카메라와 대상으로서의 존재 그 사이에서 뛰던 관계의 맥박을 나는 쉽게 잊기 힘듭니다”라는 감탄의 표현도 있었다.
양영희는 왜 아들들을 북송시킨 아버지의 과오를 역사의 자리에서 냉정하게 다시 생각하지 않는가. 그건 일종의 회피가 아닌가, 하고 비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위의 칼럼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웬만한 영화평론가보다 뛰어나고 날카로운 영화적 안목을 갖춘 유명감독 한분이 사석에서 내게 위의 칼럼을 언급하며 그와 같이 <디어 평양>을 비판했다. 내게는 그 영화의 어떤 결여된 객관성을 지적하는 말로 들렸는데, 그 비판이 일견 정당하다고는 생각했어도 공감은 끝내 못했던 것 같다. 그 영화의
[신 전영객잔] 슬픔은 어디서 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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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처음 본 날, 홍상수의 영화가 20대 여인에게 온전한 시선을 돌렸다는 사실보다 영화 내내 맴돌던 어떤 이상한 기운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영화의 모든 부분이 그 어디에도 붙지 않고 표면을 부유하고 있다는 인상, 그리고 표면이 어떤 기운으로 잠식되거나 포화되고 있는데, 동시에 그 표면에서 뭔가 지워지고 있거나 빠져나가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무언가가 희미하지만 절박하게 드러나고자 애쓰고 있다는 느낌을 잊기 어려웠다. 어딘지 무척 슬프고 외로우며 불안하다, 고 생각했다. 마치 영화 속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정은채)의 처지처럼. 그간 홍상수의 영화를 반복, 차이, 대구, 옴니버스 등과 같은 구조를 빌려 붙잡으려 했다면, 어쩐지 이 영화만큼은 구조와는 다르거나 구조를 넘어서는 방식을 통해서 말해야 하지 않을까, 짐작할 따름이었다.
먼저, 영화의 순서대로 이야기를 살피기
두 번째 볼 때에야 이 영화는 배열에 감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
[신 전영객잔] 또 한번, 이렇게 생이 깨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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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에 대한 반응을 지켜보면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감독이나 관객이나 모두 예상했던 지점에서 충돌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주변의 보통 관객은, 이를테면 한달에 영화 한두편 정도 관람하는 내 동생들 가족은 <베를린>이 무척 재미있는 영화라고 했다. 그러나 보다 전문적인 관객은, 포털에 영화평을 올리는 부지런한 관객까지 포함하여 <베를린>의 내러티브와 액션의 밀도와 독창성에 의문부호를 달았다. 개봉 전 류승완 감독을 만났을 때 그도 이런 반응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야심이 많은 감독이고 그만큼 자기 자신에 회의가 많으며 박찬욱, 봉준호 등의 선배들에 대해 자격지심 비슷한 것이 있다. 지금까지 그가 만들었던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은 예산이 투입된 <베를린>을 찍으면서 그는 제작기간 내내 시간과 불안감에 쫓겨 영화 한편, 책 한권 읽을 수 없었다고, 다른 사람에 비해 밑천이 부족해서 늘 뭔가를 충전
[신 전영객잔] 액션에 정서를 장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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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다뤄졌지만 두 영화가 계속 머리에 남았다. <레미제라블>과 <라이프 오브 파이>는 각기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영화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요청한다는 점에서 재론을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혁명가가 울려 퍼지고 붉은 깃발이 나부낀다. 광장 중앙의 거대한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시민군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 바리케이드의 정상에는 우리의 주인공들이 모두 돌아와 있다. 경찰에 사살된 젊은 혁명가들, 슬픈 사랑을 품고 눈을 감은 여인, 외롭고 고단한 생과 마침내 작별한 장발장, 그리고 혁명의 새벽을 지켜주지 못한 시민들까지. (그들이 부르지 않는) 장엄한 노래가 광장을 가득 채운다. ‘들리는가, 민중의 소리가….’ 그들은 모두 듣고 있다는 듯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에토스의 분열에도 <레미제라블>에 사로잡히다 <레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은 감동적이고도 당혹스럽다. 이 장면은 분명히 판타지다. 죽은 자와 부재자의 귀환이라는
[신 전영객잔] 어쩌면, 가능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