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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노동으로 만든 진실의 흔적

<산다>를 만든 박정범 감독의 집요함에 수긍하다

<산다>

나는 <산다>의 공동 제작자이자 기획자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 영화를 평할 수 없다. 지난 일년간 어떤 감독보다 오래 박정범 감독을 만났고 대화했던 나는 완성된 영화 <산다>를 보며 비평에 가까운 장르는 자서전이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떠올렸다. 그의 전기적 삶의 전모에 관해 나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가 그토록 이 영화에 매달려 기어코 완성한 심리적 내력이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는 이 영화의 완성에 오랜 시간을 들였다. 거의 5년의 시간이 흘렀고 시나리오는 여러 번 바뀌었다. 2013년 가을, 박정범이 만든 <두한에게>(인권영화 프로젝트인 옴니버스 장편 <어떤 시선>의 한 에피소드) GV 때문에 CGV압구정에서 그를 만난 날, 나는 전주국제영화제 삼인삼색 프로젝트를 장편으로 전환하는 내 구상을 말해주고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박정범은 선뜻 하겠다고 했다. 오랫동안 묵혀둔 기획이 있다며 그는 당장이라도 찍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산다> 제작은 순탄치 않았다. 박정범은 계속 본 촬영을 미루고 있었다. 주연을 맡은 여배우 이승연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강원도 횡성 된장공장 사택에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박정범의 명령에 따라 스탭들은 그녀를 멀리했다. 지독한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영화 속 캐릭터로 살기 위해 그녀는 고독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 동안 연출부를 비롯한 스탭들은 영화 속 주 배경인 된장공장을 영화 분위기에 맞게 세팅하고 있었다. 영화를 찍는 것이 아니라 미술작업에 필요한 중노동에 시달리던 일부 스탭들이 현장을 떠났다. 들려오는 것은 계속 흉흉한 말들뿐이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참고 참다 방문한 현장은 을씨년스러웠다. 스탭들은 내가 사들고 간 삼겹살 묶음을 팀별로 싸들고 숙소로 들어갔다. 그나마 남은 일부 스탭들은 피곤해죽겠다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열두시 넘어 건성건성 술잔을 받아들었다. 그들 중 가장 피곤해 보이는 사람은 감독이자 주연인 박정범이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외부인은 상상하지 못할 부담감에 짓눌려 함구하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초봄을 넘길 무렵 다시 <산다> 현장을 방문했을 때 분위기는 바뀌어 있었다. 해고된 기존 PD 대신 새로 들어온 PD의 얼굴에는 끝이 보인다는 희망이 적혀 있었다. 마뜩지 않아 하는 감독의 만류를 무시하고 한 시간여 분량의 현장편집본을 된장공장 이층 별실에서 보면서 나는 이 영화가 박정범 감독의 영화답게 진행되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 “아유, 수고 많으십니다. 이쯤 보셨으면 그만 보셔도 될 거 같은데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니 그의 말투는 더욱 위협적으로 변했다. “그만 보시지?” “재미있는데요. 왜?” “아니, 아직 제대로 손을 본 것이 아니라서.” PD가 개입했다. “그럼 50분 분량만 보시고 끝내면 어떨까요?” 나를 협박한 정체불명의 남자는 편집기사였다. 그는 박정범의 명령을 받고 들어와 강제로 컴퓨터를 끄려 한 것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 일행은 촬영지에서 멀지 않은 횡성 읍내의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술을 마셨고 촬영을 마친 <산다>의 주요 스탭들이 합류했다. 박정범은 여전히 신중했으나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깡패 행세를 했던 편집기사는 술자리에서 싹싹 빌었고 만취해 대자로 뻗어 숙소로 실려갔다. 두달 전 분위기와는 딴판이었다. 그들은 <산다>가 좋은 영화가 되리라 믿고 있었다.

<산다>를 관통하는 정서의 핵심은 죄의식이다. 영화 속 박정범이 직접 연기하는 정철은 산사태로 무너진 집에서 사망한 부모를 직접 묻은 죄의식에 시달린다. 정철의 누이 수연도 칼바람이 부는 겨울 벌판 폐가에서 회초리로 자기 몸을 학대할 만큼 외상이 심하다. 이 두 사람이 트라우마에 대응하는 방식은 다르다. 정철은 어떻게든 일하면서 무너진 집을 다시 지으려 애쓴다. 수연은 자신을 학대한다. 자기 몸을 자해하거나 역 근처에 나가 정처없이 떠돌며 외간 남자와 섹스하는 것과 같은 자해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 영화는 이 두 사람과 그들 주변의 관계를 탐구하는데, 수연의 자학과 정철의 노동이 축을 이룬다. 영화 첫 장면, 크레딧이 오르기 전 정철이 도끼질로 나무를 패는 장면들을 이어붙인 인트로 시퀀스는 이 영화의 많은 것을 요약한다. 정철은 그리 능숙해 보이지 않지만 사력을 다해 일한다(영화 말미에 이르면 그의 도끼질이 능숙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다시 오스카 와일드의 말로 돌아가보자. 박정범은 이 영화의 감독이자 주연배우다. 그는 다른 배우에게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아 스스로 주연을 맡았다고 말했다. <산다>는 곧잘 플롯과는 상관없이 주인공 정철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를 상세하게 묘사한다. 그가 일하는 장면과 그의 누이 수연이 발광하는 장면이 스토리의 흐름을 정지시키고 영화의 잉여를 만들어내며 그것들이 이 영화의 긴 호흡을 유지시킨다. 현장에서 그는 나에게 말했다. “힘들었어요. 8시간 동안 도끼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영화는 편집의 예술 아니요? 굳이 그렇게 우둔하게 할 필요가 있어요?” “아닙니다. 가짜로 보이면 안 되니까요. 진짜로 하는 게 맞습니다.” 박정범은 영화 속의 정철과 자신을 동일화시켜 대속의식으로서의 노동에 매달렸다. 그는 자신을 고통받는 순교자로 여겼다.

박정범은 허구로 만들어낸 현실의 구체적인 물성을 자신의 노동하는 모습에 담아내고자 했다. 그가 독립영화로서는 그처럼 오랜 기간 촬영에 매달린 것은 그가 고통받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불어 그의 스탭과 배우들이 덩달아 고통받을수록, 영화에 진실성의 외관이 두텁게 입혀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박정범은 이런 죄의식과 그걸 메우려는 의식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영화에서 정철은 살아남기 위해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다. 정철에게 유일한 윤리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는 임금이 체불된 건설 노동현장에서 동료 노동자들의 편에 서지 않고 사용자의 편에 선다. 된장공장으로 일터를 옮겨서도 그는 비슷한 행동으로 일관한다. 된장공장 사장의 편에 서서 나이든 일꾼들을 내치고 건설현장에서 함께 일했던 젊은 일꾼들을 데려온다. 그때마다 그는 동료들의 비난과 공격을 받는다. 주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철은 미친 듯이 일하는 것으로 그의 누이처럼 자신을 학대하고 징벌한다.

불우한 세상을 위한 자그마한 선행

정철의 행동은 그 자신이 택할 수밖에 없는, 상대편 입장에 따라서는 비윤리적일 수밖에 없는 처신을 필사적으로 정화하기 위한 방법이다. 정철이 결과적으로 배신하게 되는 그의 동료들에게도 합당한 명분이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은 건설현장에서 밀린 임금 대신 자재를 실어나르려다 제지당하자 폭행을 저지르고 폭행 행위자가 누구인지 추궁당하자 서로 책임을 미룬다. 된장공장 일꾼들도 해고당할 때는 피해자의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메주가 썩은 이유를 추궁당하자 희생양을 찾아내기 위해 공격적으로 돌변한다. 된장공장 사장과 그의 딸은 일상적으론 합리적이고 선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공장이 부도 위기에 몰리자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계략을 쓴다. ‘산다’라는 명제 앞에서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매번 윤리적으로 심각한 위반을 저지른다. 자본 소유에 따른 권력의 위계가 있긴 하지만 그들은 모두 각자 어려운 처지에 처해 있고 서로 할퀴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구석에 몰린다. 여기서 어떤 명확한 입장에 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감독이자 배우로서 박정범은 이 영화에서 그가 풀어낼 수 없는 숙제를 감당하는 방법으로 고된 노동을 재현하고 있다.

이 둔중한 이야기에 탈출구를 제시하는 것은 각운을 맞춰 전개되는 인물과 카메라의 움직임이다. 영화 중반, 수연의 딸이자 정철의 조카인 하나가 걸어갈 때 카메라는 아이를 길게 따라간다. 아이는 길을 걸어 친구의 집 안으로 들어가 새장 속의 새를 풀어준다. 별 맥락 없이 한참 동안 전개되는 이 움직임은 영화 속에 자그마한 숨통을 틔워준다. 하나는 병든 엄마와 힘들어하는 삼촌 사이에서 자신의 욕구를 누르며 조숙한 아이가 되어 있다. 아이는 영화 내내 삼촌으로부터 “하나야, 귀 막아”라는 소리를 듣는 게 익숙하다. 엄마가 발광할 때, 삼촌이 누군가와 맞서 싸울 때, 삼촌이나 여타 어른들이 욕지거리를 할 때 아이는 귀를 막는다. 어른들의 지옥 같은 세상에서 아이는 일찌감치 포기를 배운다. 교회에 가서 기도하라는 삼촌의 말에 아이는 기도해봤자 소용없다고 답한다. 피아노를 치고 싶은 유일한 희망도 저당 잡힌 채 자기의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 아이는 어른들이 바빠서 각자 헤맬 때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영웅적인 행동, 새장에 갇힌 새를 풀어주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그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이 행동을 길게 보여주는 카메라 움직임은 영화 내내 곧잘 나오는 다른 카메라 움직임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에서 격하게 카메라가 움직일 때는 하나가 정철을 찾아올 때이다. 영화 초반 부서진 집에서 달걀을 구워먹고 있던 정철은 어둠 속에서 하나의 기척을 듣고 놀라 뛰어나온다. 그가 앞으로 달려나올 때 카메라도 물러서고 정철이 하나를 데리고 화면 밖으로 멀어져갈 때 그들을 따라간다. 수평의 움직임이 아니라 수직의 움직임으로 기세를 만들어내는 이런 장면들은 영화의 후반부, 돈을 훔쳐 달아난 선배의 집에서 떼어낸 문짝을 들고 정철이 다시 그 집을 방문해 문짝을 달아주는 장면, 굳이 길게 들고 찍기로 따라가는 장면에서 희망의 공기를 자아내는 것으로 고조된다. 유일한 조카인 하나의 바람을 정철은 미처 챙겨주지도 보듬어줄 여유도 없다. 이제, 영화적인 장치라는 기적의 도구를 통해, 인물과 카메라 움직임의 리듬 조응을 통해, 정철은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문짝 정도는 달아줄 수 있는 인물로 진화한다(그 장면 직전에 정철은 하나를 위해 어두운 길가에 가로등을 달아줬었다). 망설이면서 힘겹게 나아간 이 영화적 제스처는 박정범이 그 자신이 몸소 수행하는 노동의 고행을 통해 보여주는 진실의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불우한 세상의 일면에 대해 아직 명확하게 답을 내지 못했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가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의 고행을 자신의 육신을 통해 스크린에 재현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을 통해 그는 아주 조금 세상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자그마한 선행과 보시의 다짐을 남겨놓는다.

모두가 패배자

<산다>는 관객에게 이 세상에서 누군가는 우리만큼, 또는 우리보다 더 힘들게 살고 있다는 물리적 징표들을 집요하게 늘어놓는다. 영화 속 정철의 누나 수연, 수연을 짝사랑하는 명훈은 정철과 달리 수동적으로 그들의 상처를 보듬는다. 그 밖의 많은 다른 인물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견딘다. 거기에는 선과 악의 대립이 없으며 각자의 입장에 처한 심리적, 물리적 고통의 반영만이 있을 뿐이다. 일시적인 승리자는 있을지언정 궁극에는 다 패배자다. 행복이라는 명제는 이들 삶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 영화가 이렇게까지 길 필요가 있을까라고 수시로 반문하고 싶어지지만 마침내 우리는 그 집요함의 절실함을 깨닫고 수긍한다. 이미 재능을 증명한 감독 박정범은 <산다>를 통해 신중한 진실성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이 영화의 제작과정이 그토록 산고를 겪었던 것은 필연적 결과였다.

옆에서 지켜본 <산다>의 제작과정은 대단했다. 감독과 주연을 맡은 박정범뿐만 아니라 이승연, 박명훈 등의 배우를 비롯해 스탭들의 정성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의 노고에 이 글이 답례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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