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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트 오브 킬링>의 충격은 어디서 오는 걸까.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100만명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일까? 학살자들의 상상하기 힘든 뻔뻔스러움, 혹은 그들이 21세기에도 여전히 한 나라의 지배자라는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이 다큐멘터리의 표현과 형식의 기괴함 때문일까? 아마도 그 모두 때문일 것이다. 이 다큐를 말하면서 100만명의 고통과 죽음, 학살자들의 가공할 만한 그리고 변치 않은 잔인성을 괄호 안에 넣는 것은 정당화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괄호를 푸는 순간, 이 작품을 평자로서 말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 사실들 앞에서 평자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말문을 막는 것이 사건 자체의 악마성뿐인가. 달리 말해 현실의 과도한 끔찍함이 비평이라는 행위를 하찮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뿐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충격의 또 다른 진원은 학살자들의 말이다. 그들은 많은 말을 한다. 진담과 궤변, 허언과 농담, 반성과 정당화, 과장과 위장의 말들을 끝
[신 전영객잔] 기록을 압도하는 표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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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재 감독의 <목숨>은 호스피스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의 최후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감독은 환자들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으면서 그들의 죽음을 착취하지 않으려 애쓴다. 누군가의 죽음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격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런 죽음들 앞에서 우리가 보통 슬픈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듯 카타르시스를 느껴도 되는 것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죽음을 앞두고 그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다. 관객 입장은 좀 다르다. 기껏해야 1시간30여분 동안 누군가의 최후 일상을 들여다본 처지에 그 죽음을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마음을 다잡게 된다. 눈물이 흐르는데도 그런 감정이 든다. 나는 이게 이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목숨>에는 말기 암에 걸린 세 사람이 나온다. 남편이 부도를 맞는 바람에 오랜 기간을 가난과 싸우면서 가정을 건사하기 위해 노력했던
[신 전영객잔] 이생을, 잘 살아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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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간 동일한 배우들을 데리고 매해 일정한 시간 동안 촬영을 해서 그 인물들의 세월을 함께 살아낸 <보이후드>는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인물들의 시간을 내내 공유했다는 행복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12년이라는 긴 시간, 여러 인물들의 각기 다른 세계, 그리고 그 세계들의 작지만 지속적인 움직임들을 지켜보며 그중 단 한순간과도 공명하지 못했다고 말할 이가 과연 있을까. 이미 여러 평자들이 이 영화의 무엇이 자신들을 감화시켰는지에 대한 아름다운 감상기를 제출했다. 아무래도 <보이후드>는 영화비평이 아니라, 보는 이 각자의 기억, 감정,인상을 더욱 환대할 영화인 것 같다. 많은 이들이 시간의 냉정한 흐름에 대면하는 이 영화의 온기에 충분한 감응을 표현했으니 영화를 보는 동안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고 여전히 얼룩처럼 남겨진 잔상들, 따스함과는 거리가 먼 그 느낌에 관해 말해볼 생각이다.
자상하고 친절했던 올리비아의 두 번째 남편, 그러니
[신 전영객잔] 시간은 정말 안온하게 흘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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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나를 찾아줘>의 결말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를 찾아줘>의 부부 닉(벤 애플렉)과 에이미(로저먼드 파이크)의 애증으로 얼룩진 결혼 생활사에 관한 설명이 간략하게나마 필요한 것 같다. 결혼 5주년이 되던 날 에이미가 홀연히 사라진다. 영화는 닉과 에이미의 황홀했던 첫 만남에서부터 결혼 뒤 관계가 서서히 악화되어간 과정까지를 주요하게 술회하는 한편, 속속 드러나는 정황에 따라 닉이 에이미 실종 사건의 주범이자 피의자로 지목받는 과정을 전개해간다. 여기까지를 이 영화의 1부라고 부를 수 있다. 2부에서는 시작과 함께 버젓이 살아 있는 에이미가 돌연 등장한다. 그녀는 실종되지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것은 그녀 스스로 꾸민 일이고 일종의 남편 체벌 프로그램이다. 에이미는 남편이 자신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당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에이미에게도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계획은 수정된다. 결국 에이미는 자신을 짝사랑해온 갑부 콜링스가 자신을
[신 전영객잔] 그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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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의 많은 영화인들이 무한한 존경을 보여왔다 해도, 켄 로치는 후대의 영화사에서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진 않을 것이다. 그의 인물들은 투박하고 친밀하고 때로 아름다웠지만 그들의 육체성은 대개 증언자 역할 뒤로 물러났고, 화면에는 간혹 아득한 생기가 번져나왔지만 사건의 강도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명료하고 선형적인 이야기는 종종 멜로드라마적 관습에 의존했다. 켄 로치가 원한 것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로치는 자신의 영화가 하나의 예술품이 아니라, 증언의 영화, 교육의 영화, 개입의 영화가 되기를 원했다. 이 강고한 사회주의자는 이른바 ‘문화에로의 전환’(cultural turn)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쾌락의 선이나 숭고의 미 대신 해방의 정치를 믿었으며 자신의 영화가 미학적 소우주가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기를 그리고 해방의 칼이기를 소망했다.
그렇다 해도 오늘의 유럽 지식인 일반이 이 불굴의 노(老)전사에게 지닌 부채감이나 콤플렉스만이 그에 대한 비평적 존중을 낳은
[신 전영객잔] 정념의 심연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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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영화는 단단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일정한 패턴으로 변주되는 그 구조들은 공간, 주체, 재현에 관한 문제를 던진다. 이번 신작 <자유의 언덕>은 덧붙여 시간을 섞어놓았다. 과거, 현재, 미래의 연대기 순으로는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없다. 이 영화의 주인공 모리(가세 료)는 과거에 결혼하려고 했던 권(서영화)을 찾기 위해 한국에 다시 왔다. 그때 권은 집을 떠나 요양을 가고 없다. 모리는 그녀에게 편지를 남겼고 몸 상태가 나아진 권은 이전에 일했던 학원에 가서 모리의 편지를 전해받는다. 권이 처음 편지를 펼쳐 읽다가 바닥에 떨어트리는 바람에 편지 순서는 뒤죽박죽 섞인다. 권은 그 상태로 편지를 읽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모리가 편지에 쓴 북촌에서의 행적들, 그것들이 뒤섞인 형태의 일상기록은 모리의 내레이션을 통해 그의 회상처럼 화면에서 재현된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연대기 순으로 펼쳐지지 않으므로 그에 대해 관객이 괘념치 않아도 된다는 것은
[신 전영객잔] 현실인가 꿈인가 환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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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여자에게 간절한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받아든 여자가 계단에서 휘청거리자 편지가 땅에 떨어져버린다. 편지의 순서는 뒤섞이고, 여자는 그중 한장을 빠뜨리고 줍는다. ‘자유의 언덕’이라는 카페에 들어온 여자가 편지를 읽기 시작하고, 뒤엉킨 시간의 편지 내용이 펼쳐진다. 흩어진 편지, 생략된 한장, 낯설어진 시간.
홍상수 영화의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의 선상에서 ‘흐른다’는 인상을 준 적은 없다. 시간의 인과론이나 명확한 선후 관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최소의 일관된 시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중심축이 그의 영화에서는 늘 모호하고(<하하하> <북촌방향>), 나아가는 것 같지만 무언가에 막혀 있거나 제자리다(<밤과낮>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그의 시간관은 줄곧 반복, 폐쇄된 순환 등의 용어로 말해져왔지만, 고정된 시간적 틀을 거부하는 그의 영화들 앞에서 그런 용어는 비평적 무력감에 더 닿아 있다. 더욱이 최근 몇년간
[신 전영객잔] 시간의 틀안에서 틀부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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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의 주인공은 실어증에 걸린 젊은 피아니스트 폴 마르셀이다. 사고로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란 그는 두 이모가 운영하는 댄스학원에서 피아노를 친다. 솜씨가 좋긴 하지만 그의 피아노 연주는 기예에 가깝다. 폴은 텅 빈 눈동자로 영혼 없는 연주를 한다. 그의 삶의 유일한 낙은 과자 슈게트를 먹는 것뿐이다. 그가 감정을 유일하게 표현하는 것은 슈게트가 떨어져 먹지 못해 짜증을 낼 때다. 어느 날 두 이모가 마련한 집안 잔치에서 연주를 하다가 슈게트가 떨어지자 폴은 화가 나서 집을 나선다. 집에 돌아온 폴은 마침 엘리베이터가 고장나 계단을 오르다가 우연히 비밀정원이 있는 마담 프루스트의 집에 들어선다. 거기서 과거로 떠나는 마담 프루스트의 묘약, 마들렌 과자와 홍차를 먹은 뒤 폴은 마담 프루스트의 단골손님이 된다.
폴 마르셀과 마담 프루스트의 만남, 이 의도적인 이름 짝짓기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폴이 마들렌을 먹고 혼절해 과거의
[신 전영객잔]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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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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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정광 여인 조(샬롯 갱스부르)의 파란만장한 성 편력을 밤새 듣고 난 남자 샐리그먼(스텔란 스카스가드)은 정중하게 “잘 자라”라는 인사를 하고 방문을 나선다. 그는 금방 되돌아온다. 그러고는 갑자기 이불을 들치고 그녀의 질에 자신의 성기를 들이민다. 여인이 소리친다. “안 돼요.” 무지 화면이 뜨고 남자가 말한다. “하지만 당신은 수천명이랑 잤잖아.” 무지 화면이 계속되고 총소리, 여인이 옷 입는 소리, 방을 나서는 발소리가 들린다.
<님포매니악>의 마지막 장면은 황당하다(여기선 볼륨1과 볼륨2를 묶어 한편의 영화로 다룬다). 샐리그먼은 성욕이 없는 무성애자이며 여자와도 남자와도 자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그는 박식한 교양인이며 독서광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무도한 강간자로 돌변한 걸까. 그리고 “생애 첫 친구를 얻었다”며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던 여인은 왜 거부의 과정도 없이 바로 총을 쏘았을까.
우리는 이 남녀의 돌발적인 행동에서 갖
[신 전영객잔] 비웃음에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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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침하고 적막한 골목의 차가운 바닥에 한 여인(조)이 상처를 입은 채 쓰러져 있다. 노년의 남자(샐리그먼)가 우연히 그녀를 발견하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여자는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탓하며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잠시 망설이다가 벽에 꽂힌 낚싯바늘로 시선을 돌린다. 남자가 플라이 낚시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며 아이작 월튼의 책, <조어대전>을 언급한다. 그러자 여자가 말한다. “이제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알겠어요. 대신 내 이야기 전부를 해야 할 거예요. 길고 비도덕적인.” 그리하여 여자의 과거가 열리며 ‘조어대전’이라고 이름 붙여진 첫장이 시작된다.
<님포매니악>(이 글에서는 1부와 2부 모두를 포함한 제목으로 쓸 것이다)은 조와 샐리그먼이 대화를 나누는 한정된 공간의 현재와 조의 성욕 넘치는 과거를 오가며 진행된다. 조의 내레이션으로 과거가 제시되고 현재로 돌아오면 샐리그먼은 자신의 방대한 지식을 경유해서 그 과거를 해석한다. 샐리그먼
[신 전영객잔] 이야기의 욕망에 봉사하는 색정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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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곳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어떤 연유로 영화가 그렇게 찍힌 것입니까 질문받을 때 감독 장률은 자주 그와 같이 답해왔다. <경계>의 카메라의 느린 패닝에 관해서는 사막이라는 대지의 성질을, <두만강> 인물들의 무표정에 대해서는 그들 삶에 밴 무표정한 상태를 근거로 들었다. 사막에서도 빠르게 움직이는 것들은 있을 것이고 두만강의 사람들이라고 울고 웃을 일이 전혀 없겠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반박이 중요한 것 같진 않다. 중요한 건 장률이 구체적인 지역(몽골의 사막, 중경, 익산-이리, 두만강 등)을 결정하고 그 지역의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풍속과 환경으로부터 핵심적인 무언가를 추출하여 영화의 공기와 리듬과 표정과 정서 등등을 총괄하는 핵심 층위로도 삼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장률의 영화는 ‘거기에 있는 것들’의 현존하는 성질과 상태를 전적으로 존중하고 따랐다.
<경주>에 관해
[신 전영객잔] 들끓는 정념과 고요한 명상의 변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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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아이를 동정하는 마음은 유별난 것이 아니다. 그 아이를 하룻밤 내 집에서 재워주는 것도 쉽다. 이 아이는 선의를 베푸는 어른에게 처음엔 머뭇거리며 몸을 의탁하지만 차츰 매달리려는 기색을 보인다. 이러면 선의로 시작한 어른이라도 누군가와 함께 지낸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것이 <도희야>의 도입부 설정이다. 나는 그다음이 궁금했지만 예상보다 영화는 뭔가 답답했다. 그 이유를 찾고 싶은 게 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나는 이 영화가 소심하며 어느 쪽으로도 깊게 들어가지 않고 주춤거리는 자세를 취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게 신중한 윤리적 태도로 섬세한 비평적 거리를 유지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앞서 말한 아이가 짐승의 시간을 살았으나 짐승의 내면을 드러낼 기회는 적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온당할 것 같다. 이 아이의 이름은 도희(김새론)이며 영화의 주인공이다. 도희는 의붓아버지에게 상습적인 폭행을 당하고 할머니에게도 인간
[신 전영객잔] 그들의 고통은 제대로 표현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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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크 존즈가 2010년에 만든 단편 <아임 히어>(I’m Here)의 주인공은 때묻은 구형 PC의 머리와 엉성한 기계 몸을 가진 로봇이다. 로봇들은 허드렛일을 하며 인간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주인공 로봇이 날라리 여자 로봇을 사랑하게 된다. 여자 로봇이 클럽에서 춤추다 팔이 잘리자 주인공 로봇은 자기 팔을 떼다 붙여준다. 한쪽 다리도 그렇게 떼준다. 사고로 그녀의 상반신이 으스러지자 주인공은 자신의 몸마저 이식시킨다.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 로봇은 머리만 남은 주인공을 품고 휠체어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이 감상적인 단편을 이주노동자 혹은 사회적 소수자의 고단한 삶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파이크 존즈의 관심사가 거기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가 2009년에 만든 장편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아이가 집을 뛰쳐나와 가는 곳은 투박한 동물인형처럼 생긴 괴물들이 살고 있는 섬이다. 스파이크 존즈는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 같다
[신 전영객잔] 이제, 나 여기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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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이래, <한공주>에 대한 국내외적인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다수의 국제 영화제들에서의 수상소식이 들려오고 있으며, 국내에서 개봉한 지 20여일 만에 20만명 이상의 관객이 이 영화를 보았다. 분명 이 영화는 더 많은 관객의 주목을 끌며 더 많이 회자될 것이다. 평단의 반응도 대체로 호의적이다. 다만 이들이 호평을 전제하면서도 영화의 특정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공통적으로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이 주목할 만하다. 많은 장점을 열거한 뒤에도 이들이 망설이는 지점은 영화의 현재에 개입하는 플래시백, 특히 성폭행 현장이다뤄지는 방식이다. 대표적으로 김혜리는 같은 소재를 이야기하는 다른 영화들과 이 영화의 차별성을 섬세하게 읽은 뒤 “그날의 재현이 감독의 의도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알맞게 통제됐는지”에 대해 조심스레 의문을 제기한다(<씨네21> 950호). 혹은 정한석은 이 영화의 탁월한 면과 지지할 수 없는 면을 나눠 비평을 시
[신 전영객잔] 윤리와 폭력과 연민의 이상한 동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