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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미의 영화비평] 아름다움의 정도

<유스>의 과잉된 이미지 수사는 영화의 메시지 전달을 어떻게 방해하는가

<유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들로 뒤덮여 있다.” 영화 <캐리>(1976), <쇼생크 탈출>(1994) 등의 원작 소설가 스티븐 킹은 부사를 많이 쓰는 작가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곤 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든다. 그는 [“내려놔요!” 하고 그녀가 소리쳤다. “돌려줘.” 그는 애원했다]와 [“내려놔요!” 하고 그녀가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돌려줘.” 그는 비굴하게 애원했다]를 비교하며 각각의 문장이 전보다 약해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약해진 것은 우리가 문장을 읽고 상상할 수 있는 인물의 감정, 톤과 뉘앙스 같은 것들일 터다. 후자에서 문장이 허용하는 상상의 두께는 얄팍해졌고 표현은 납작해졌다. 독자의 상상을 제한하는 화려한 사족에 그칠 때 수사는 표현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악화시키는 셈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지의 수사학에도 해당하는 지적이 아닐까.

이미지를 향한 소렌티노의 열망

파올로 소렌티노의 영화는 과잉된 스타일 때문에 비판받기도 하고 감각적인 스타일 덕분에 지지를 얻기도 한다. 소렌티노의 가장 야심찬 기획이었던 <그레이트 뷰티>(2013)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그레이트 뷰티>를 격찬한 사람 중 한명인 조너선 롬니는 작품의 면면에 감탄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우려를 덧붙였다. “압도적으로 강렬한 시각적 경험을 안겨주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장황하다.”(<필름 코멘트>) 이는 소렌티노에 관한 평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두 가지 상반된 의견이기도 하다. <유스>에 대해서도 동일한 질문이 가능하다. <유스>(2015)는 이미지들의 독창적인 조합인가 아니면 장황한 나열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스>에는 매혹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그것이 영화의 메시지를 위해 과잉되게 연출된 수사적인 이미지들을 압도하지는 못한다.

프레드(마이클 케인)와 믹(하비 카이텔)은 스위스의 호텔에 머무는 중이다. 은퇴한 지휘자 프레드는 그의 대표작 <심플 송>의 무대에 서달라는 청을 재차 거절하는 반면 감독 믹은 자신의 마지막 작품에 열정을 쏟는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1963)이 창작의 위기에 빠진 감독 귀도(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의 꿈으로 시작하듯 <유스>의 도입부에도 프레드의 꿈이 등장한다. 꿈 장면에서 성 마르코 광장이 물에 잠기는 모습이 쓸쓸하고 아름답게 묘사된다. 이 꿈은 노년에 접어든 프레드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침몰해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음을 시적으로 보여준다. 이때 꿈의 도입부와 교차 편집되는 것은, 소렌티노가 여러 인터뷰에서 존경을 표했던 마라도나를 연상시키는, 이제는 나이가 들어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야 하는 축구 선수다(중반부 등장하는 젊은 시절 환상 장면에서 그의 등 번호는 마라도나를 기리는 의미로 영구 결번된 10번이다). 프레드의 꿈에서 배어나오는 쇠락의 정조를 그도, 소렌티노의 우상도 공유하는 셈이다. 오프닝과 대비되는 젊음이라는 제목 <유스>를 설득하는 것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이후 소렌티노는 전작에서처럼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횡단하며 젊음이 객관적인 나이가 아니라 삶의 태도와 관련된 것은 아닌지에 관해 사색한다. 그 사색의 끝에서 은퇴 후 무력감에 빠졌던 프레드는 다시 무대에 서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영화에는 사색의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을 강조하기 위해 종종 과도하게 연출된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가령 수도승이 공중 부양하는 장면이 그렇다. 공중 부양을 위해 수년간 수양해왔다는 수도승은 영화 중반부 기적처럼 공중 부양에 성공하고 소렌티노는 이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공중 부양 장면은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이 장면은 바로 앞의 “결국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건 열망이니까요” 라고 말하는 지미(폴 다노)의 깨달음을 부각시키기 위해 삽입된 수사적인 이미지다. 영화 초반 지미는 프레드와 자신이 과거의 대표작에 발이 묶였다는 점에서 동일한 문제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 후반 그는 용기를 내어 새로운 배역에 도전한다. 이러한 변화는 엔딩에서 무대에 오르기로 결정하는 프레드에 대한 변주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미의 변화는 프레드의 변화만큼이나 비중 있게 다뤄진다. 지미가 “열망”이라는 단어를 재차 사용하며 자신의 새로운 도전이 갖는 의미에 대해 말하면, 이를 경청하는 믹의 얼굴이 비치고 이어서 수도승이 공중 부양하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두 장면 사이에 흐르는 음악은 공중 부양 장면에서 클라이맥스에 달한다. 이 장면의 연결은 다소 도식적이고 경직된 유머처럼 다가온다.

심플해야 아름답다

이보다 나쁜 수식처럼 느껴지는 것은 엔딩을 위해 호출된 프레드의 아내 멜라니의 얼굴이다. 호텔에서의 마지막 장면, 프레드의 얼굴이 새장에 가려 마치 그가 크고 아름다운 새장에 갇힌 것처럼 연출되었을 때 의사는 “이곳에서 나가면 젊음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의식적인 대사가 가리키는 엔딩의 공연으로 향하기 직전, 소렌티노는 엔딩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젊음’의 대립항으로 멜라니의 얼굴을 등장시킨다. 이때 멜라니가 앓고 있는 병이 치매인 것은 소렌티노에게 필연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앞선 믹의 대사, 젊음이 미래를 가깝게 느끼는 것이라면 늙음은 과거를 멀게 느끼는 것이라는 대사에 따르면, 과거를 잃어버리는 질병인 치매야말로 죽음을 상징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설정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미지를 삽입하고 싶은 소렌티노의 욕망을 드러내듯, 카메라는 딱딱하게 말라비틀어진 멜라니의 시체 같은 얼굴을 극적인 방식으로 비춘다. 더욱이 프레드가 <심플 송>의 의미를 늘어놓는 동안 리버스 숏으로 내내 멜라니의 등만 보여주기 때문에, 그의 대사가 끝난 뒤 정면으로 멜라니의 얼굴을 마주할 때의 충격은 배가된다. 이때 소렌티노는 추하게 병들어버린 노파처럼 묘사된 멜라니의 얼굴을 전시함으로써, 나이 듦의 무력함을 이겨내고 프레드가 연주할 <심플 송>의 감동을, 곧 우리가 보게 될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강조하고 있다.

조수미가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한 <심플 송>의 공연 장면은 아름답다. 하지만 소렌티노가 그 아름다움을 다루는 방식은 아름답지 않다. 프레드가 무대에 오르고 조수미가 <심플 송>을 부르며 공연이 절정으로 향할 때 이상한 이미지의 조합이 등장한다. 영화의 타이틀이 한번 더 등장하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프레드의 얼굴과 그의 시선에 조응하는 조수미의 붉은 입술이 익스트림 클로즈업된다. 그 순간 멜라니의 얼굴이 인서트 숏으로 삽입된다. 젊음이라는 제목, 공연장의 활력, 조수미의 붉은 입술, 그리고 이 모든 것과 대비되는 멜라니의 회색빛 얼굴. 이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강렬한 이미지가 아니라 강렬한 이미지에 대한 소렌티노의 욕망이다. 이 도구화된 이미지의 수사법은 요란하고 공허하다.

아름다운 수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다음의 장면으로 답하고 싶다. 호텔에서의 마지막 장면과 엔딩 사이, 그 막간에 프레드의 상념처럼 보이는 환상 장면이 잠깐 등장한다. 어두운 밤 카메라가 베네치아 골목에 흐르는 물 위를 천천히 유영하고 <심플 송>이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간결한 장면이다. 이 장면은 오프닝에서 보았던 프레드의 꿈과 호응한다. 오프닝의 꿈이 프레드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물속으로 가라앉는다고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면, 후반부의 환상 장면은 이제 프레드가 그 물 위에, 노년의 흐름 위에 평온하게 몸을 맡겼음을 은유한다. 이것이 영화에서 발견한 나이 듦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다. 하지만 이 깊고 적막하고 고요한 이미지는 주목받지 못한 채 흘러간 뒤 이내 멜라니의 얼굴로 치장된 엔딩의 이미지 속에 묻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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