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가렐의 영화에서 음악의 삽입이 종종 난데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음악이 어떤 장면의 시작에 앞서 장면의 성격을 예견하는 표지점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어색한 지점에서 음악이 돌출되는 경우가 간혹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연인들>(2005)에서 연인의 얼굴 클로즈업 위로 이따금 흘렀다가 멈추길 반복하는 분절된 음악, 혹은 부분적 무성영화라 할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냈다>(1985)에서 영화의 침묵을 찢고 니코의 <All Tomorrows Parties>가 흐르던 장면이 대표적이다. 음악이 흐를 때의 느낌은 마치 장면을 보던 감독이 머릿속에서 불현듯 떠올리고 이것이 영화에 실시간으로 반영되기라도 한 것 같다. 이로 인해 그의 영화 속 음악은 상반된 두 기능을 동시에 취한다. 장면에 갑작스레 끼어들어 몰입을 방해하는 동시에 장면을 어루만지면서 더 깊이 몰입하게 한다.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 속 첫 음악은 피에르와 엘리자베스의 만남에 바쳐졌다. 건물 층계에 기대앉은 피에르가 아카이브 필름이 든 수레를 끌고 나오는 엘리자베스를 목격하고 그녀를 돕는다. 나란히 걸어나오는 두 사람을 카메라가 정면에서 잡을 때 마침 음악이 흐른다. 이들이 사랑에 빠지리라는 건 여기서 예견된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내가 주목한 건 두 사람과 음악의 조응뿐만 아니라 나란히 걷는다는 행위 그 자체다.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에서 몇몇 인물 집합체가 등장하지만 피에르와 마농, 피에르와 엘리자베스 커플을 제외하고는 나란히 길을 걷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인물은 서로 마주 보고 앉은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마주한 채 나누는 이들의 대화는 방해를 받거나 곧 종결된다. 마농과 마농의 어머니가 카페에서 마주 앉아 대화하는 장면은 어머니의 이탈로 끝난다. 마농과 피에르의 결별 후 마농의 어머니와 피에르가 만났을 때도 어머니는 피에르를 뒤로한 채 먼저 떠난다. 엘리자베스가 마농의 외도를 목격하는 장면에서 마농은 그녀의 애인과 카페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이 장면은 놀란 엘리자베스가 그곳을 빠져나오면서 끝난다. 외도를 들킨 마농이 애인과의 결별을 결심했을 때 두 사람은 길 위에서 만난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나란히 걷는 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 나란히 걸으려던 찰나 마농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이별을 고한 뒤 홀로 그 자리를 떠나버린다.
마주 보는 것은 만남의 일시성을 가리키는 데서 더 나아가 적대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행위로도 보인다. 연인이었던 니코의 죽음 이후 그녀를 위해 만든 영화 <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1991)에서 필립 가렐은 니코를 모티브로 만든 미리암과 자신의 부인이 직접 연기한 앨라인을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힌 적이 있다. 남편이 미리암에게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앨라인은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며 은색 숟가락 끝을 미리암쪽으로 내내 겨눈다. 그 숟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살기가 필립 가렐의 영화 속 마주 봄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로 각인된다.
마주 보기 vs. 나란히 걷기
마주 보는 행위와 대척점에 놓인 것은 다시 나란히 걷는 걸음이다. 필립 가렐의 영화로 일반화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에서 나란히 걷는 순간은 피에르와 두 여인의 특권 같은 것이다(그리고 이 세 사람만이 그들이 입장에 대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할당받는다). 앞서 서술한 피에르와 엘리자베스의 걸음은 그들의 감정과 모순되지 않고 합치된다. 반면 마농과 피에르가 나란히 장을 보고 집으로 향하던 장면은 인물의 감정과 행위가 모순된다. 피에르와 마농이 나란히 걷는 장면이 등장한 건 그들이 각자 외도 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후다. 하지만 이 장면만이 거의 유일하게 마농과 피에르가 행복한 커플처럼 그려진다. 필립 가렐의 영화에서 서사의 맥락을 벗어나 나란히 걷는 장면에 매혹된 최초의 순간이 있었다. <평범한 연인들>에서 영화의 전체 줄거리와는 큰 관련이 없는 주인공 릴리와 프랑수아가 길을 걷는 장면이 마음에 남았다. 영화를 다시 보고서야 그 장면이 이별과 비극의 전주에 불과했음을 상기했다. 어쩌면 그 모순이 이 장면에 매혹된 진짜 이유인지도 모른다.
마농과 피에르가 나란히 걷는 순간 스크린을 채우는 것은 상하로 움직이는 신체의 운동성에서 비롯된 활기다. 이 운동성은 행위가 생략된 베드신의 빈틈을 메우는 것처럼 보인다. 피에르와 두 여자 사이에 몇번의 베드신이 등장한다. 이때 베드신의 핵심은 행위의 재현이 아니라 행위의 시작과 끝이다. 이로 인해 마련된 독특한 장면 연결이 있다. 피에르와 엘리자베스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출발한 침실 시퀀스가, 피에르가 잠든 마농의 침대 옆에 눕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앞서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스탠드 조명에 비쳐 밝게 빛난다. 반면 마농의 침대는 조명이 없는 데다 그마저도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로 인해 더욱 어둡다. 빛과 그림자로 표상된 대조적인 두 장면을 연속적으로 배치한 것은 단지 시작되는 연인과 오래된 연인을 대치시키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두 장면은 마치 액션과 리액션처럼, 인물과 그 그림자처럼 밀접해 보인다. 장면 연결에서 인식되는 것은 둘간의 대조보다는 연속성이다.
혁명과 지독히 사적인 이미지 사이에서 요동치는 필립 가렐의 영화에서 나란히 걷는 연인은, 분실된 것으로 여겨졌다가 47년 만에 발견된 초기작 <혁명의 순간들>(Actua1)에서도 볼 수 있듯, 횡을 이룬 시위대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가두시위는 앞서 서술한 나란히 걷는 사람의 집단화된 형태라 할 것이다. <평범한 연인들>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는 젊은이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일렬로 걷는 장면은 없다. 오히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쪽은 시위대 맞은편의 공권력이다. 필립 가렐은 정렬된 형태로 길을 걷는 경찰에 맞선 일체화된 군중을 세우길 거부한다. 이는 이 영화에서 일반적인 의미의 액션-리액션 숏이 부재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공권력의 노동자 탄압에 맞선 학생들의 시위라거나 학생들의 과격 시위에 맞선 공권력의 제압 등 어느 한편의 흐름에 다른 한쪽이 공조하는 일체화된 흐름이 여기서는 단호히 거부된다. 영화가 묘사하는 것은 결정적인 충돌의 순간이 아니라 충돌 전 차막 뒤에서 동태를 살피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화염병을 던지는 장면이 나오지만 카메라는 그것이 상대편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보여주기 위해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부상당한 학생들을 보여주는 장면에서조차 학생들의 부상은 공권력의 폭력과 외따로 떨어져 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시위대의 나란함은 어깨를 맞대고 같은 곳을 응시하며 똑바로 걷는 정형화된 것이 아닌 불규칙하고 무정형적인 나란함에 가깝다.
같은 곳에 닿지 않는 걸음
나란히 걷는 사람들은 때때로 방해받는다. <평범한 연인들>에서 길을 걸어가던 네 친구는 이유 없이 검찰의 검문을 받고, <뜨거운 여름>(2010)에서도 폴과 프레드릭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경찰의 호각 소리에 걸음을 멈춘다. 나란한 걸음을 제지하는 것은 시대마다 모습을 달리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것으로서의 권력과 관계된 것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걸음의 지연이 때론 지극히 사적인 것에서 비롯될 때도 있다. <내부의 상처>는 연인이 나란히 걸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당시 연인이었던 니코와 필립 가렐이 직접 연기한 여자와 남자가 사막처럼 보이는 공간을 연신 걸어가는데 여자는 고통을 호소하며 자꾸만 주저앉는다. 묵묵히 여자를 안고 끌며 함께 가던 남자는 마침내 결심한듯 주저앉은 여자를 뒤로한 채 혼자 걸어나간다. 이때 인상적인 트래킹숏이 등장한다. 카메라가 걸어가는 남자의 옆모습을 수평으로 잡고 남자가 이동하는 만큼 똑같이 움직인다. 때문에 남자가 걸어가면서 배경은 뒤로 밀려나지만 카메라에서 남자가 점하는 위치는 정중앙으로 동일하다. 카메라에 여전히 주저앉은 여자가 스쳐간 이후에야 남자의 걸음이 여자로부터 떠나는 직선의 운동이 아닌 원운동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결국 모든 걸음은 제자리걸음에 불과했으며 나란히 걷는 일은 요원하다.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에서 연인들이 향하는 공간은 비교적 분명해졌다. 그곳은 집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집은 화합의 공간이기보다는 분열의 공간이다. 점하는 순간 숨 막히고, 벗어나는 순간 그리워져 출입을 반복하는 영원회귀의 굴레일 뿐이다. 그래서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거리를 걷는 자인데, 아무런 거리낌 없이 거리를 걷는 장면이 주는 생동감만은 그의 영화에서 어렵게 쟁취된 것이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시선의 문제다. 나란히 걷는 것은 같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시선을 내가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에 가깝다. 어쩌면 같은 곳을 본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인정해야만 하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진실이라 믿으며 함께 바라보고 함께 걸었던 방향이 가짜일 수도 있다.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에서 자신을 레지스탕스 노인이라 소개한 인터뷰이가 실은 동료들의 밀고자인 것처럼 말이다. 마농에게 이를 전해들은 피에르는 자신이 만들던 다큐멘터리를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리얼리즘적 진실). 그러나 마농은 그것을 가짜 레지스탕스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바꾸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너머의 진실). 그 즉시 피에르는 마농에게 자신과 함께 작업해줄 것을 부탁하면서 다큐멘터리 작업의 회복과 관계 회복이 동시에 이뤄진다. 두 연인의 포옹은 단지 서로의 과오에 대한 껴안음만이 아니라 우리가 향하고 있던 것(형식으로의 미래이자 내용으로의 과거)이 설사 거짓이었다 하더라도 그 거짓을 포용하겠다는 단단한 몸짓이다. 필립 가렐의 연인(들)은 그렇게 먼 길을 걸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돌아오는 동안 원풍경은 교정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돌아온 자리는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마농과 피에르가 추구할, 그러나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영화를 기대하고 응원하게 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