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필립 가렐의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을 보며 제목 그대로 한 ‘여인의 그림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이는 가렐과 동세대 작가인 샹탈 애커만이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주인공 피에르를 연기한 스타니슬라 메하르는 샹탈 애커만의 두편의 영화, <갇힌 여인>(2000)과 <알마이에르가의 광기>(2011)에 출연한 배우다. 그가 조연으로 잠깐 출연한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의 <편지>(1999)를 제외하면 나는 그를 애커만의 영화 속 음울한 표정의 배우로만 기억한다. 그가 벽에 기대어 바게트를 씹으며 종이에 적힌 무언가를 읽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첫 장면에서도 그의 특유의 연악함과 우울함의 검은 흔적이 묻어나고 있었다. 우연이 아니었나 보다. 그 무렵 샹탈 애커만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가렐은 지난해 12월, 서울에서의 강연에서 애커만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애커만과 자신이 누벨바그 세대 이후 십대에 처음 영화를 시작한 거의 유일한 감독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68혁명의 기운과 반문화의 기반 아래 기성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영화를 만든 작가들이다. 근본적으로 언더그라운드에 속했기에, 영화로 많은 대중을 겨냥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당시 영화계에서는 드문 (물론 이제는 만연했지만) 빈곤의 작가들이다. 그는 누벨바그와 자신의 세대, 즉 포스트 누벨바그 세대를 구분짓는 특징으로 자살을 말했었다. 그의 세대 영화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살이라는 암시를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자살은 죽음을 자신이 책임지는, 보다 윤리적인 행위였다. 물론 이 때문에 손실이 현실에서도 벌어진다. 장 외스타슈와 샹탈 애커만이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영화에서 자주 자살하는 젊은이를 다뤘지만, 가렐은 그럼에도 자신이 여전히 살아남았다고 말한다.
변모의 윤리
살아남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가렐의 영화에서 죽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변모의 윤리를 가정해야만 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가령 21세기에 나온 영화들 대부분에서도 젊은이들의 죽음은 반복해 나타났다. 대체로 헤어진 여인의 그림자가 이들의 죽음에 떠돈다. <평범한 연인들>(2005)에서 68혁명 시기에 연애를 했던 남자는 혁명이 실패하고 애인이 떠나자 권총으로 자살한다. <야성적 순수>(2001)에서 자신이 남자친구의 과거 자살한 애인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인은 마찬가지로 그녀의 뒤를 밟아 죽음에 이른다. <뜨거운 여름>(2011)에서 여인과의 결별 이후에 남자는 (의도적인) 교통사고로 죽음을 선택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병실에서 마치 꿈꾸는 것처럼 할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는 자살의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할아버지는 2차대전 때 독일군이 쏜 총에 맞고도 살아남은 행운을 손자에게 말하며 “우리 목숨은 아주 사소한 것에 좌우된다”고 말한다. 아마도 딴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위로와 함께. 하지만 손자는 애인을 대신할 다른 여자는 없을 것이며, 자신을 지켜줄 그런 사소한 것들이나 살아야 할 이유를 잃었기에 할아버지처럼 죽음에서 탈출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아니, 죽는 게 나아요, 나는 죽을 거예요.”
최근작 <질투>에서 상황은 변모한다. 물론 이 영화에도 연애의 실패 후에 자살을 기도하는 일이 벌어지긴 한다. 그럼에도 죽음이란 결말은 회피된다. 무엇보다 연인들 사이에 지켜야 할 (결코 사소하지 않은)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아이는 남녀라는 둘의 연애 문제가 어떤 식으로 정리되든 보호받아야만 한다. <질투>의 마지막 장면이 그토록 아름다운 울림을 자아내는 이유다. 죽다 살아난 남자는 공원에서 아이와 여동생과 함께 밝은 햇살 아래 밤을 까먹으며 지극히 평범한 시간을 보낸다. 가렐의 영화에서는 드물고 낯선 순간이기에, 마치 찬란한 기적의 순간을 맞이한 기운이 들 정도다. 어째서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일까? 가렐이 강연회에서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오른다. “예술은 삶을 살아가는 충동을 주는 것입니다.” 그는 관객이 자신의 영화를 보고 나서 계속 살고 싶다는 충동을 갖기를 바랐다. 이게 틀린 말은 아니다. 신작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은 그런 변모의 윤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처럼 보인다. 가렐의 영화에서 헤어진 연인들이 다시 재결합하는 그런 해피엔딩을 맞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스탠리 카벨식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그렇게 보이긴 하겠지만) 비극이라기보다는 커플의 재결합과 ‘행복에의 추구’를 담은 일종의 재혼 코미디에 가깝다. ‘여인의 그림자’란 원제목은 그러므로 여기서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여인의 그림자는 가렐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지켜줄 것들을 상실하고 삶의 지속을 중단케 하는 죽음의 그림자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비밀스럽게 우리의 삶을 지속시키는 가능성이다. 특별히 비루한 남자들에게 있어서는 더 그렇다.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은 거론한 필립 가렐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그린 영화다. 하지만 무엇보다 연인들의 거짓과 부정, 비밀에 관한 영화다. 주인공 피에르와 마농은 가난한 연인이다. 이들은 함께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생존자를 인터뷰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다. 숨겨진 진실을 담아내고 있다. 레지스탕스 노인은 점령기 시대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이 겪었던 고초와 배신,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레지스탕스였다는 사실을 가족에게조차 비밀로 했음을 고백한다. 피에르와 마농은 지금 ‘그림자 군단’(레지스탕스에 관한 장 피에르 멜빌식의 표현이다)의 비밀에, 혹은 점령기 프랑스 역사의 숨겨진 순간에 접근하고 있는 중이다. 마농은 자신의 경력을 희생하면서까지 피에르의 일에 전적으로 헌신한다. 반면, 피에르는 어찌된 일인지 조금씩 작업에 흥미를 잃어가며 나태함을 보이고, 급기야 필름 보관소에서 처음 만난 엘리자베스(레나 포감)와 비밀스런 연인관계를 맺는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자베스는 마농에게도 다른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피에르에게 말한다. 피에르는 마농의 부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둘은 결별하기에 이른다. 피에르와 마농이 서로에게 숨기는 이야기는 영화에서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레지스탕스에 관한 다큐멘터리와 미묘하게 연결된다. 점령기 프랑스 역사의 비밀스런 과거, 레지스탕스의 영웅주의에 숨겨진 배신과 밀고의 이야기가 연인들의 비밀과 맥을 같이한다. 피에르와 마농은 결국 레지스탕스 노인의 장례식장에서 재결합하기에 이른다.
이 영화에서 서사는 피에르의 질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듯하다. 질투란 보이지 않는 존재의 그림자에 대해 갖는 복잡 미묘한 감정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감정의 드라마는 마농에게 대체로 집중되어 있다. 마농은 피에르에게 헌신하지만 그가 다른 여인과 관계한다는 사실에 슬픔과 분노를 느낀다. 마농을 연기한 클로틸드 쿠로는 그런 혼란에 사로잡힌 여인의 모습을 얼굴의 떨림과 몸짓으로 뛰어나게 표현한다. 첫 등장부터 그녀의 존재는 노출된다. 그녀는 갑작스런 집주인의 불법 침입에 당황해한다. 집주인은 밀린 월세를 내라며 그녀를 다그치고는 무례하게 거실을 돌아다닌다. 마농은 그런 갑작스런 침입에 불안과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어찌할 줄 모르며 당황해한다. 그녀의 몸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장면이다. 그녀의 연기가 뛰어나게 표현된 순간은 피에르가 그녀의 부정을 문제 삼으며 화를 낼 때다. 마농은 피에르의 추궁에 때론 자리를 피해 일어나 거리를 두고는, 다시 되돌아와 의자에 앉아 그 남자와의 관계에 대해 차분하게 이야기하려 한다. 피에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며 피에르를 납득시키려 한다. 하지만 이 순간 그녀는 복합적인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일이란 게 쉽지 않다. “당신만을 사랑해. 그는 단지, 단지….” 그녀는 머뭇거린다. 이 영화의 심장은 그녀의 떨리는 얼굴 표정, 불투명한 목소리, 몸의 사소한 제스처들에 있다. 가렐의 영화에서 시각적 리듬이나 이미지만이 아닌 특별히 배우들의 연기에 주목하는 일은 <평범한 연인들> 이후부터라 볼 수 있는데, 이는 그가 프랑스국립영화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벌어진 변화로 보인다. <평범한 연인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가렐이 가르쳤던 학생들이라고 한다. <질투>에서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격정을 보여준 아나 무글라리스 또한 연기과 학생이었다.
행복에의 추구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에서 그림자는 영화라는 물적 조건과도 관련되어 있다. 피에르가 엘리자베스를 처음 만난 곳은 필름아카이브이다. 주로 프랑스 전쟁의 역사를 담은 기록물 보관소이다. 자유로운 연상일 뿐이지만, 필름 혹은 흑백영화와 그림자는 분리 불가능하다. 가렐은 현재 프랑스에서 35mm 흑백영화를 만들고 있는 거의 유일한 감독이다. 그는 60~70년대 필름 촬영을 했던 탁월한 촬영감독들과 여전히 작업하고 있다.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의 촬영감독인 레나토 베르타는 70년대 장마리 스트라우브의 영화를 촬영했던 베테랑 촬영감독이다. 가렐은 여전히 필름영화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단언한다. 영화 탄생의 비밀의 흔적이 필름에, 그리고 흑백에 간직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전적으로 미학적인 고려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산업과는 떨어져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그만의 경제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는 컬러영화에서 의상과 세트, 분장 등에 들어갈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흑백필름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촬영 시 가능한 한 한번의 촬영으로 장면을 구현하는 원 테이크 원칙을 여전히 고수한다. 이 영화의 경우 촬영은 21일 걸렸고, 러시필름은 4시간 분량이었다고 한다. 물론 촬영 전 배우들과 25일 정도 리허설을 하는 것이 그의 촬영의 비밀이긴 하다.
비극적인 종결 대신 영화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화해에 도달하는 커플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상적인 결말은 고독을 피해, 행복에의 추구와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결심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결심이 장례식장에서 벌어진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농은 피에르에게 레지스탕스 신화에 가린 거짓과 비밀을 들려준다. 그녀는 마치 세계가 혹은 (남성들의) 역사와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농은 레지스탕스인 척했던 노인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을 찍자고 피에르에게 제안하고 둘은 결국 화해에 이른다. 여인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죽음으로 향했던 전작과 달리 이때 피에르는 이제 그림자를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어쨌든 가렐의 영화에서 보기 드문 가장 부드럽고 사랑스런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