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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는 하나의 국가이다. 그리고 기예르모 델 토로와 같은 쾌락주의인 영화광의 정신은 대부분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작은 장르의 국가들이 벌집처럼 촘촘히 모여 있는 지도의 모양을 취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들의 이야기의 여정은 드물게 한 국가에 머물기도 하지만 대부분 하나 이상의 국경을 가로지른다. 종종 그 여정은 엉뚱한 결합으로 끝나곤 한다. <벌집의 정령>(1973)에서 따온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어린 소녀의 이미지가 엉뚱하게도 일본의 거대 괴수, 거대 로봇과 만나는 <퍼시픽 림>(2013) 같은 영화가 그렇다. 이 여정을 하나로 잇는 장르의 지도를 그린다면 정말 이상한 그림이 나올 것이다.
<푸른 수염> <어셔가의 몰락> <드라큘라> 그리고 아서 코난 도일
멕시코 감독이 할리우드를 통해 일본 대중문화에 바치는 예찬이라는 희귀한 괴물이었던 <퍼시픽 림>과는 달리 <크림슨 피크>는 비교적 정통적으로 보인다.
[듀나의 영화비평] 장르의 지도 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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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있긴 있는 겁니까?” “궁금은 하네요.” 영화 초반, 강동원이 던지는 이 말은 바로 관객이 <검은 사제들>이라는 영화를 보기 전 떠올리는 질문이다. 한국 공포영화사에서 ‘구마’(驅魔, exorcism)는 이례적인 낯선 소재다. ‘장미십자회’, ‘12형상 악마’ 같은 단어는 서구영화에서 종종 들어봐 생소하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신부가 악령 들린 소녀에게 구마의식을 치른다는 설정은 언뜻 납득이 되지 않는다. 가톨릭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종교가 된 지는 오래지만 그와는 별도로 기독교적인 악마를 인정하는 정서가 일반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기에 <검은 사제들>이 넘어야 할 첫 번째 장애물은 지금 21세기 한국에서 엑소시즘이 행해지는 배경에 대해 관객을 설득시키는 것이다. <검은 사제들>은 매우 영리하게 첫 번째 장애물을 넘어간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토록 서구적인 포장지 안에 한국 공포영화의 엑기스를 담아 새로운 공포 장르의 맛을 만들어냈다. &l
[이현경의 영화비평] “궁금은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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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서사와 공간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개인은 출신, 계층, 성향 등과 연관되어 도시의 공간을 살아내고, 도시는 이런 개개인의 욕망이 집단적으로 투사된 장소로 나타난다. 자크 오디아르의 새 영화 <디판>(2015)을 보고 영화 속 공간을 설명하는 것이 영화의 서사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는 차례로 텐트로 이루어진 스리랑카 난민캠프, 파리의 방 한칸짜리 난민센터, 파리 변두리의 슬럼화된 집합주거단지의 아파트, 런던의 교외지역 단독주택이 나온다. 영화의 공간은 뒤로 갈수록 사적인 성격이 강화된다.
오디아르는 자신의 새 영화를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말했다고 한다. 많은 영화들은 사랑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오디아르의 설명은 영화를 공간을 통해서 설명하려는 목적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것보다는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한데, 스리랑카 타밀 독립전쟁 중에 자신의 가족을 잃은 남자, 여자, 소녀가
[윤웅원의 영화비평]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가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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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신기하게 생각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비평과 흥행의 온도차’이다. 미지근하게 섞이는 대신 각자의 ‘온도’를 유지하겠다는 양쪽의 패기도 호기롭지만, 이렇게 타협 없이 차이를 낳고 마는 영화들의 목록이 꽤 흥미롭기 때문이다. 샘 멘데스의 두 번째, 대니얼 크레이그의 네 번째 007, <007 스펙터>(이하 <스펙터>)는 최근 이 목록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고, 그래서인지 나는 이 영화가 조금 더 궁금해졌다.
비평의 ‘차가움’
흥행의 ‘뜨거움’은 분명 007 시리즈에 대한 관객의 낮은 진입 장벽과 높은 기대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지난 23편을 거쳐오면서 007 시리즈는 관객을 꾸준히 훈련시켜왔다. 우리는 제임스 본드가 멋지게 슈트를 입고, 신기에 가까운 최첨단 무기를 장착한 다음, 세계 곳곳을 누비며 ‘악당’을 제거하는 MI6의 미션을 수행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총소리와 함께 시작될 타이틀 시퀀스도, 매혹적인
[우혜경의 영화비평] ‘동시대성’이라는 만만찮은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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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가 <슈가랜드 특급>(1974)을 만들었을 때 평론가 폴린 카엘은 “앞으로 수년 내에 청년 스필버그가 미국영화계를 접수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극장 데뷔작 <대결>(1971)이나 <슈가랜드 특급>, <죠스>(1975), <미지와의 조우>(1977), <1941>(1979) 등으로 이어지는 스필버그의 초기 필모그래피는 젊은 영화광이 만들 수 있는 최상의 경지를 보여준다. 할리우드를 타락시킨 블록버스터 멘털리티의 효시로 폄하받은 <죠스>도 지금 다시 보면 고전의 아우라가 풍긴다.
카엘의 눈은 예지력이 있었지만 스필버그가 존 포드의 뒤를 잇는, 신고전주의 영화를 만드는 거장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나도 젊었을 적엔 스필버그 영화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영화광의 유희정신으로 가득 찬 <레이더스>(1981)에 대해서도 시큰둥했다. 1994년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졸업식에서 스필버그는 이런 말
[김영진의 영화비평] 이념보다 강한 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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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맞다면 엑소시즘이 등장한 첫 번째 한국영화는 <너 또한 별이 되어>다. 이장호의 1975년 작품으로 당시 전세계를 뒤흔든 <엑소시스트>(1973)의 영향 아래 있다. 멜로드라마를 결합해 차별화를 기하고 있으나 엑소시즘과 관련된 장면은 거의 카피 수준이다. ‘소녀에게 이상 증세가 생기자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설정, 소녀에게 깃든 악령이 행하는 해괴한 짓들, 외국에서 온 전문구마사가 치르는 최종 의식’ 등은 <엑소시스트>의 장면들을 그대로 본떠 만들어졌다. 다만 <엑소시스트>의 악령이 보편적인 성질의 것임과 비교해, <너 또한 별이 되어>의 귀신은 개인적인 원한을 지닌 원귀에 가깝다. 영화의 대사대로 ‘이승에서 한이 많았던 어느 처녀의 지박령이 소녀에게 빙의된 것’이다. 그녀의 한은 남성의 폭력에서 비롯된다. 사랑했던 남자는 돈과 인기를 좇아 그녀를 버렸고, 방송국의 권력자는 버려진 그녀의 몸을 다시 빼앗고, 종래엔 네명의 동
[이용철의 영화비평] 이유 없는 원혼이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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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유명 시나리오작가 릭의 주변에는 항상 아름다운 여인들이 넘쳐난다. 잘나가는 배우들이 그와의 작업을 고대하고 있으며, 힘 있는 제작자들도 그를 움직이려고 애쓴다. 이렇듯 겉으로는 물질적 풍요함이 넘쳐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릭은 완전히 고갈된 상태다. 마치 황무지에 떨어진 인간처럼 그는 심적으로 상실돼 있다. 이런 릭의 심리를 테렌스 맬릭은 내레이션의 목소리를 빌려 설명한다. 영화 초반부 내레이션에서 ‘진주를 찾아 서쪽의 이집트로 떠나간 동쪽 나라의 통치자 아들의 이야기’는 이 때문에 등장한다. 이야기 속 동방의 왕자는 이집트에 도착해 그곳 사람들이 준 차를 마시고는 기억을 잃는다. 그렇게 자신이 왕의 아들이란 사실과 진주를 찾아 이곳에 왔단 사실도 잊은 채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 왕자의 모습이 릭과 매우 흡사해 보인다.
서사의 삭제와 이미지의 나열
영화 <나이트 오브 컵스>의 인트로 시퀀스에는 이후 이 작품이 향하게 될 복잡다단한 마음의 여정이 고스란
[이지현의 영화비평] 순간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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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억압적인 세계의 뒤틀린 구조와 그러한 구조에 예속된 개인을 초현실주의적인 우화로 풍자해왔다. 그런 란티모스가 사랑을 다룬다고 했을 때 기대와 의심이 동시에 들었다. 영화의 알고리즘에 따라 1g의 감정도 오차 없이 느끼도록 설계된 란티모스의 인물들은 사랑의 파토스와 같은 날것의 감정과 가장 거리가 먼 유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송곳니>에서 중요한 장면은 모두 노란 형광펜으로 하이라이트를 그어놓은 것처럼 연출되어 오히려 감흥이 없었다는 평(스콧 파운더스)은 이와 일정 부분 맥이 닿아 있는 지적일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란티모스는 멜로드라마를 비틀어 지독한 사랑의 우화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더 랍스터>에서 연인-부부 관계는 철저하게 시스템을 통해 통제된다. 세개로 구획된 공간(호텔, 도시, 숲)은 곧 시스템의 질서를 의미한다. 호텔에서 짝을 찾는 데 성공하면 도시로 갈 수 있고 실패하면 동물로 변하게 되며 짝 찾기를 거
[박소미의 영화비평] 사랑이라니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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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말할 것도 없이 잘 만든 영화다. 만약 <스파이 브릿지>를 스티븐 스필버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도 상단에 올려놓고 싶어 하는 그룹이 있다면 아마도 나는 상당히 앞자리에 서 있을 것 같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아무리 깐깐하게 바라보더라도 스필버그가 잘할 수 있는 요소들을 모아,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풀어낸 수작이라는 평가를 크게 벗어나진 않으리라 본다. 보는 내내 우아한 호흡에 경탄했고 한폭의 회화처럼 알뜰하게 구성된 화면을 곱씹으며 박수를 보냈다.
느리고 우아한 거울의 영화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 거슬리는 게 하나 있었다. 도노반(톰 행크스)이 베를린에서의 첫 교섭을 마친 후 열차에 몸을 싣고 베를린장벽을 건너는 장면이 있다. 당시 베를린장벽이라고 해봐야 벽돌 몇장 쌓아올린 수준이라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건널 수 있었다. 그럼에도 쉽사리 건너지 못한 건 동독쪽에서 장벽을 건너는 자들을 문답무용 사살했기 때문이다. 도노반은 장난처럼, 그러나 절박하게 장벽을 넘으려는
[송경원의 영화비평] 스필버그의 거울, 실화라는 이름의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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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에서 제임스 딘은 <이유없는 반항>(1955)에 출연하고 싶어서 안달한다. 반면에 이미 주연으로 출연했던 <에덴의 동쪽>(1955)에 대해선 시큰둥한 반응이다. <에덴의 동쪽>은 개봉을 앞두고 있고, 영화사 워너브러더스는 여러 가지 홍보 작업을 전개하지만, 제임스 딘은 마지못해 그 일에 응한다. <에덴의 동쪽>에서 부친 역으로 출연했던 노배우 레이먼드 매시가 기자들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하고 있을 때, 그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시간이 지겹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 있다. 아직 그는 <에덴의 동쪽>이 어떤 명예를 안겨줄지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아 카잔의 제임스 딘
무명배우나 다름없던 제임스 딘을 주연으로 발탁한 감독은 <에덴의 동쪽>의 엘리아 카잔이다. 당시에 엘리아 카잔은 거칠 게 없는 탄탄대로의 감독이었다. 카잔은 말론 브랜도와 짝을 이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한창호의 영화비평] 아웃사이더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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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리 스콧의 필모그래피에서 <마션>(2015)은 참으로 희한한 작품이다. <마션>의 기이함은 (역설적이게도)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 모험극의 정석을 철저히 따르는 ‘평범성’에 있다. 이 작품의 방점은 화성에 홀로 남겨져 살아남고자 온갖 노력과 지혜를 짜내는 마크 월트니(맷 데이먼)의 분투, 그를 살리고자 방책을 강구하는 나머지 대원들과 나사(NASA)의 인력들,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각각 나뉘어 찍혀 있다. <필사의 도전>(1983)이나 <아폴로 13호>(1995), <스페이스 카우보이>(2000) 등 우주 비행사들의 모험과 역경을 다룬 여러 SF 드라마를 통해 익숙해진 장르의 컨벤션을 <마션>은 충실히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미션 투 마스>(2002)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캐스트 어웨이>(2000)의 생존담. 우주복과 우주선, 나사의 관제탑은 어김없이 등장하며, 고난과 역
[조재휘의 영화비평] 우주와 맞선 인간의 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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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소수민족 타밀족은 완전독립을 목표로 오랫동안 무력 투쟁해왔다. 그리고 지난 2009년 ‘타밀타이거’라 불리는 반군이 정부에 항복했고, 내전은 끝난 듯 보였다. <디판>의 이야기는 타밀타이거 출신의 전직 군인 디판이 스리랑카 내전에서 패하고, 유럽으로 망명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좀더 쉽게 망명자 권한을 얻기 위해서 그는 ‘가짜 가족’을 만들어낸다. 알지 못하는 여인이 그 여정에 동참하고, 전쟁 탓에 부모를 잃은 소녀가 그들의 딸이 된다. 이윽고 프랑스에 도착해서 세 사람은 파리 외곽의 레지던시에 머물며 본격적으로 가족 행세를 한다. 그렇게 ‘진짜 행복’을 찾으려는 디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프랑스 리얼리즘의 현재
난민을 다루는 많은 다른 영화들처럼, <디판> 역시 자신들의 땅을 떠난 이민자들이 새로운 곳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에서의 첫 모습, 길거리에서 2유로짜리 장난감을 판매하는 주인공의 행색은
[이지현의 영화비평] 그것은 ‘진짜 행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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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시대사랑>이라는 제목은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필름시대’와 ‘사랑’ 사이에 어떤 조사가 들어가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필름시대‘의’ 사랑이라면, 필름으로 영화를 찍던 그 시절에나 가능했던 사랑 이야기라는 의미가 될 것이고, 필름시대‘를’ 사랑이라고 한다면, 필름으로 영화를 찍던 시절이나 필름으로 찍은 영화를 사랑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률은 그 이상을 원한다. 필름과 사랑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공유한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필름시대사랑>이다.
다시 쓰기의 묘기
장률은 서울노인영화제의 개막작 의뢰를 받고 <동행>이라는 단편영화를 연출한다. 하지만 그는 이 단편영화를 다 찍고 난 후에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몇명의 스탭과 함께 <동행>의 공간 중심으로 보충 촬영을 진행한다. 그러니까 <필름시대사랑>은 단편영화 <동행>에
[안시환의 영화비평] 사랑과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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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샤츠는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에서 서부극은 자신들이 옹호하는 농민들의 생활방식에 말로만 경의를 표한다며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할리우드 버전의 옛 서부는 역사와 관련이 없듯 농사와도 거의 관련이 없다. 비록 전원적 가치관과는 많은 관련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토미 리 존스의 영화는 서부극들이 지워버린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더 홈즈맨> 속의 서부는 척박한 농토이며, 주인공들은 농부이다. 그들이 사는 곳엔 이상적인 공동체로서의 마을도 없고, 타파해야 할 제도나 부패한 관료 혹은, 타락한 자본가조차 없다. 그들에게 가장 혹독한 적은 자신들을 둘러싼 자연이다. 이 작품의 갈등은 ‘선/악’ 같은 인위적인 이념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문명이라는 원초적인 대립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그 투쟁의 결말에는 전통적인 내러티브가 선사해왔던 영웅적인 승리 대신에 생존과 소멸 같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 존재한다.
세 여자가 서부에서 언어를 상실한
[김지미의 영화비평] ‘서부’는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