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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영 감독의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하 <경성학교>)을 보고 나서 뭔가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리뷰가 아닌 아주 ‘조심스런’ 단상을 적고 싶다. 영화 전체를 설명할 생각은 없고, 내가 눌려버린 어떤 이미지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건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것으로, 아니 사실 말을 꺼내기도 힘들고 정확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이미지에 놀란 피할 수 없는 ‘나-관객’의 경험에 속한다. <경성학교>에서 내게 그것은 과다한 물의 이미지이며, 물에 잠긴 소녀들의 끔찍한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들은 놀라울 정도로 영화의 홍보성 자료들, 사진들에서는 결코 보이거나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부터 끝까지 나를 공포에, 때로는 격한 슬픔에 잠기게 한 것들이다. 영화의 초반부 주란(박보영)과 연덕(박소담)이 호수에 빠져들게 될 때. 이미 그 순간부터 물(속에 잠긴 소녀들)의 이미지는
[김성욱의 영화비평]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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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조폭과 함께 한국 상업영화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직업 중 하나다. 수많은 영화들이 경찰을 원한다. 폭력에 대한 명분 있는 이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충무로에서는 격투와 추격, 스릴과 서스펜스를 좇는 데 경찰만 한 직업을 찾기 쉽지 않다. 할리우드에서 심심하면 등판시키는 로봇이며 공룡들에 비해 한국의 경찰관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는 간판급 선수다. 현실도 경찰을 원한다. 2012년 현재 국내 살인 발생 건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멕시코, 에스토니아, 미국 등에 이어 6위다. 더 암울한 사실은 2001년 이후 10년 동안 대다수 유럽 국가들에서 5대 강력범죄 발생이 꾸준히 줄어드는 사이 우리나라는 되레 84.5%가 늘었다는 점이다(한국경찰연구학회). 이 가운데 강간범죄는 1.8배나 늘었다. 한국영화에 경찰이 안 나올 이유보다 나올 이유가 더 많다고 봐도 될 정도다.
아이살리기 vs 실적올리기
역설적이지만 현실적-영화적 이유로
[송형국의 영화비평] 영화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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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두 주체의 욕망과 계급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질 때 그것은 달달한 동화가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은 전쟁 같은 현실이 된다. 가령 ‘백설공주’가 왕자님 대신 일곱 난쟁이들 가운데 하나와 사랑에 빠졌다고 상상해보자. 아마 그 이야기는 동화가 끝나는 그 지점- 결혼 혹은 결혼의 약속- 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사랑이 단순히 낭만적 감정이 아니라 권력 싸움이며, 우리는 사랑을 통해 성적•사회적 욕망이 충족되길 갈구한다는 사실은 어른이 되면 받아들여야 할 진리 중 하나이다. 하지만 대체로 인간이 갖춘 자질들은 정확하게 수치로 환산되지 않고, 때로는 사회적 규약을 위반하는 데서 비롯되는 쾌감이 이성적 판단을 압도하기 때문에 계산은 뒤틀리고 욕망은 정착지를 찾지 못하고 늘 부유한다.
계급차이에서 갈등이 시작되고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희곡 <미스 줄리>는 두 남녀의 ‘사랑’을 신분상의 격차와 젠더와 섹스 사이의 갈등이라는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투과하여 담아낸 작
[김지미의 영화비평] 타자와의 투쟁에서 자기 위안적 파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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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쥘 베른의 소설 <카르파티아 성> 서두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있을 법하지 않으니 진실이 아닐 거라고 단정 짓는 것은 이르다. 지금은 불가능이 없는 시대이며, 온갖 과학적 수단을 통해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바뀔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이 짧은 문구를 통해 어쩌면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하 <경성학교>)의 판타지적 성향을 간파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쥘 베른의 말처럼 과학에 의해 현실화될 수 있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그때의 서사를 판타지라고 단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차라리 이 경우엔 ‘그로테스크하다’거나 ‘있음직하지 않다’라는 식으로 감상을 정리하는 편이 더 적합해 보인다. 실현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비현실적 이야기를 이렇듯 흔히 판타지라 부른다는 점을 떠올리며 영화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트와 의상의 화려함에 비례한 불안
[이지현의 영화비평] 판타지의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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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첫사랑, 요시코’라는 1장과 ‘벚꽃우물’이라는 2장으로 구성된 일종의 옴니버스영화다. 아마도 관객은 정보 전달에 가까운 1장보다는 <비포 선라이즈>(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1996)의 감성에 맞닿아 있는 2장의 매력에 더 빠질 듯하다. 실제로 2장은 ‘한여름의 판타지아’라는 제목이 그리 과장이 아님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1장의 매개 없이 2장과 바로 마주했다면, 우리는 과연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경험할 수 있을까? 물론 김새벽과 이와세 료의 로맨스가 알콩달콩한 재미를 주긴 하지만, 1장 없는 2장은 그저 그런 로맨스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1장과 2장이 서로를 마주볼 때만이 그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영화다. 그 엔딩까지도.
현재의 시간, 생명의 부활
두말할 것도 없이, 1장 ‘첫사랑, 요시코’는 장건재가 경험한 고조에 대한 기록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한여름의 판타지아&g
[안시환의 영화비평] 겸손한 응답 뒤의 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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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판타지아> 1부에서 감독인 태훈(임형국)은 조감독 미정(김새벽)과 함께 영화 촬영을 염두에 두고 고조시를 이틀간 답사한다. 첫날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취재원은 공무원 유스케(이와세 료)다. 고조시의 현황에 대해 말해주고 도시 곳곳을 안내해준다. 둘쨋날 그들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겐지다. 요시노강과 카페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고 시노하라 마을까지 데려가 취재할 수 있게 해준다.
따지고 보면 둘 중 겐지가 더 큰 도움을 주었다. 타지 출신인 유스케와 달리 겐지는 고조 사람이라서 더 상세히 일러줄 수 있었다. 심지어 겐지에겐 첫사랑 추억담을 포함해 영화에 넣을 개인적 이야깃거리가 더 많았다.
유스케와 겐지에게는 묘한 공통점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온 여성과 과거에 만났던 일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스케는 태훈과 미정을 만났듯 공무원으로서 이전에도 고조에 온 한국 여성을 안내한 적이 있었다. 겐지는 오사카에서 일했을 무렵 술집에
[이동진의 영화비평] 그리고 요시코는 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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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0여년 전 <무뢰한>의 시나리오를 읽었다. 모니터를 부탁한 오승욱 감독에게 뭔가 얘기를 해줬겠지만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살인범을 쫓는 형사 얘기에 최소한의 액션은 필요하다는 따위의 철없는 충고가 기억날 뿐이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내가 무슨 말을 했어도 다 괜한 헛소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가 쓴 시나리오 행간에서 이 영화의 무드와 제스처를 떠올리지 못했다. 핏빛 잔상을 남겼던 <킬리만자로>(2000)와는 반대 방향에서 강박적으로 적요한 분위기에 매달리는 것으로 의심했을 뿐이다.
오승욱이 오랜 기다림 끝에 스크린에 구현한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 그들을 감싼 공간의 분위기는 오승욱이 구상한 스토리가 근사한 맥거핀이었음을 알려준다. 오승욱은 형사 누아르물의 외피를 두른 이 영화에서 ‘억압의 미적 제스처’라고 할 만한 것들을 허다하게 만들어낸다. 그것들이 스토리의 인과를 빼곡 메울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이미 이 영화의 스토리가 시작되기 전에,
[신 전영객잔] 남는 것은 제스처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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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다>의 공동 제작자이자 기획자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 영화를 평할 수 없다. 지난 일년간 어떤 감독보다 오래 박정범 감독을 만났고 대화했던 나는 완성된 영화 <산다>를 보며 비평에 가까운 장르는 자서전이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떠올렸다. 그의 전기적 삶의 전모에 관해 나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가 그토록 이 영화에 매달려 기어코 완성한 심리적 내력이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는 이 영화의 완성에 오랜 시간을 들였다. 거의 5년의 시간이 흘렀고 시나리오는 여러 번 바뀌었다. 2013년 가을, 박정범이 만든 <두한에게>(인권영화 프로젝트인 옴니버스 장편 <어떤 시선>의 한 에피소드) GV 때문에 CGV압구정에서 그를 만난 날, 나는 전주국제영화제 삼인삼색 프로젝트를 장편으로 전환하는 내 구상을 말해주고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박정범은 선뜻 하겠다고 했다. 오랫동안 묵혀둔 기획이 있다며 그는 당장이라도 찍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신 전영객잔] 노동으로 만든 진실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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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은 장례 행렬 장면으로 시작한다. 모두 검은 상복을 입은 무리 가운데 앞줄에 선 중년 남자 오정식(안성기)이 문득 뒤돌아본다. 행렬의 끝에 붉은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보인다. 오정식이 상무로 재직 중인 회사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한, 오정식이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여자 추은주(김규리)다. 이 영화는 오정식의 죽어가는 아내(김호정)에 대한 기록과 그런 아내를 간호하면서 젊은 여직원을 마음에 뒀던 오정식의 내면의 추이에 관한 묘사다. 원작소설도 비슷한 구성이었지만 원작에서 독백으로 묘사한 추은주에 대한 오 상무의 마음은 훨씬 건조하게 객관적으로 그려진다.
맹렬한 직설화법
이 영화에서 특이한 것은 때로 돌출하듯이 맹렬한 직설화법으로 오정식의 욕망을 그리는 장면들이다. 현재와 과거가 오가는 가운데, 영화 중반 오정식과 그의 아내가 별장에 가서 마치 의식을 치르듯이 섹스를 하는 장면이 좋은 예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참을 수 없이 비루한 느낌을 주는데 차마 연민이라도 할 수
[신 전영객잔] 인생은 치장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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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거대한 바다괴물이다. 어떤 무기로도 뚫을 수 없는 단단한 비늘로 온몸이 뒤덮여 있는 최강의 생물체이다. 영화 <리바이어던> 중반 대목에 이 괴물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주인공 콜랴가 극단적 절망 상태에 빠져 가게 앞에서 방금 산 술병을 선 채 들이마시고 있을 때 동네 신부가 가게 문을 나온다. 콜랴는 시비 걸듯 묻는다. “자비롭고 전능한 신은 어디 있습니까?” 설전이 오가는 사이에 신부가 리바이어던을 거론한다. “낚시로 리바이어던을 잡겠느냐? 그 혀를 끈으로 묶을 수 있겠느냐? 그것이 네게 계속 간청하고 부드럽게 네게 말하겠느냐? 그에 비할 존재가 없으니 교만한 자에게 군림하는 왕이다.” 왜 선문답을 하느냐고 항의하는 콜랴에게 신부는 욥기 스토리를 들려준다. “욥의 얘기를 아시오? ‘왜 하필 접니까?’라고 물었지요. 그를 불쌍히 여긴 신이 폭풍의 형상으로 그에게 나타나 모든 것을 상세히 말해주셨소.”
모두를 향한 불안과 고통
자신들이
[신 전영객잔] 잡히지 않는 말씀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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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후세인 정권이 정말로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후세인이 극단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의 책임감과 자제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즉, 만약 이라크 군대가 뉴욕을 폭격하고 워싱턴을 포위한다면) 우리가 부시 정권에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과연 수천발의 핵탄두를 포장에 싼 채 보관하기만 할까? 생화학무기들은? 탄저병, 천연두, 그리고 신경가스들은? 미안하게도, 웃음이 터져나오려 한다.”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에 나오는 이 구절은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 품을 수 있는 미국과 이라크 전쟁의 본질을 통쾌하게 요약하고 있다. 미국은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후에도 오랫동안 이라크 반군과 전쟁을 치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이 전쟁에 저격수로 참전해 전설이 된, 그럼으로써 미국에서 영웅이 된 크리스 카일의 실화를 옮긴 것이다. 미국인이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보는 내내 불편함을 안긴다.
[신 전영객잔] 이스트우드는 이라크전을 똑바로 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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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해고시키고 복직할 순 없어요.” <내일을 위한 시간>이 첫 상영되었던 2014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적지 않은 관객은 산드라가 이 대사를 하는 순간 일제히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고 그것들은 이례적으로 더 우렁차고 뜨거웠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나는 세상과 영화의 간극을 느끼며 그 박수갈채 속에서 잠시 의문스러워하며 망설였다. 다르덴이라는 진귀한 창작자들이 만들어냈고 우리 사회의 가련하지만 명예로운 한 인물의 초상이 철학적으로 담겨 있는, 하지만 영화적으로 완벽히 동의할 수만은 없는 이 작품에 관한 복잡한 심중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고민된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네편의 진술은 각자 서로 뜻이 다르고 별개의 귀결을 지닌 네개의 단상으로 읽혀도 좋고 하나의 글을 위한 네개의 장으로 읽혀도 좋다.
선택
선택이라는 화두에서 시작해보자. 선택은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 중요한 화두다. 이 영화에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신 전영객잔] 영화와 세상의 ‘투명한’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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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재능 있는 감독 클라우즈는 작고한 감독 빌렘이 20여년 전에 썼던 <말로야 스네이크>를 다시 무대에 올리려고 한다. 그가 중년의 여주인공 헬레나 역으로 점찍어둔 배우는 과거에 헬레나의 상대역 소녀인 시그리드로 분해서 스타덤에 올랐던 마리아(줄리엣 비노쉬)다. 마리아의 비서인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은 마리아가 클라우즈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길 바라지만, 마리아는 망설인다. 심지어 캐스팅을 수락한 뒤에도 싱그러운 시그리드가 아닌 시그리드의 사랑을 갈구하다 자살을 감행하는 헬레나에게 동화되지 못해 내내 갈등한다. 마리아에게 헬레나는 초라하고 비굴하며 무엇보다 늙어버린 여인이다. 그러나 마리아를 헬레나의 적역이라고 믿는 클라우즈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시그리드와 헬레나는 같은 상처를 지닌 두 인물, 달리 말해 결국은 동일인물이며, “시그리드의 20년 후가 헬레나”이므로 마리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라고 설득한다.
그의 논리를 확장하면 <말로야 스네이
[신 전영객잔] 소멸 중인 흘러넘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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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사석에서 독립영화나 학생 실습 작품에서 남용되고 있는 들고 찍기 촬영 스타일에 관해 지인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렇게 찍은 화면들은 아무렇게 붙여도 다음 컷과 연결되는 데다 화면 내의 운동감도 잘 느껴지지 않아서 젊은 감독들이 남용하는 것은 문제라고 내가 말했다. 갑론을박이 오가는 사이 누군가가 다르덴 형제 감독의 <아들>을 예로 들었다. 시종일관 주인공의 가슴팍이나 뒤통수를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그 영화가 6개월 가량 리허설한 영화인 걸 알고 있느냐고 그는 물었다. 저명한 배우인 그는 매우 사실적으로 연출된 그 영화도 아마 기계처럼 반복하는 가운데 감독이나 배우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걸 현장에서 건져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다르덴 형제의 신작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뛰어나게 연기한 마리옹 코티야르의 스크린 형체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씨네21>에 실린 인터뷰에 따르면 마리옹 코티야르는 한달여간 실제 촬영장소에서
[신 전영객잔] 세밀한 예행연습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