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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홍상수 영화 초심자다. 18편에 달하는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을 다 외우지도 못하고 순서대로 보지도 않았기에 그의 영화세계가 어떤 경로로 변해왔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뇌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건 몇몇 인상적인 대사와 장면들 정도인데, 그마저도 남들에게 설명할라치면 영화들끼리 적당히 서로 뒤섞여 엉망진창이 된다. 덕분에 꽤 오랫동안 나는 ‘홍상수 영화는 거의 비슷해’라는 자기변명 속에 있었던 것 같다. 두려움도 있었다.
홍상수 영화에 대한 평자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 정도가 아닐까 싶다. 덮어놓고 칭찬하거나 외면하거나. 그의 영화만큼 언어로 옮기기 난감한 텍스트도 드물다. 홍상수에 대한 격찬은 넘치되 길게 설명하는 글이 드문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 짐작한다. 어느새 홍상수는 영화적 식견을 판단하는 지표가 되어 있다. 이 앞에서 솔직하게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보고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그간 내가 홍상수
[송경원의 영화비평] <밤의 해변에서 혼자>, 홍상수 초심자가 홍상수 초심자를 위해 쓴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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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정치계에 있는 젊은이로 할 것, 어린이는 일체 고려하지 않는다.” <신 고질라>(2016)의 총감독 안노 히데아키는 처음부터 컨셉을 분명히 했다. 영화 대부분은 재난에 대처하는 관가의 움직임을 보여줄 뿐 생생한 시민의 일상에는 도통 무심하다. 정치가 전면에 등장한 대신 거대괴수SF 특유의 과학주의는 힘을 잃었다. 가족도, 로맨스도 구원자도 없다. <신 고질라>는 실제 현실의 일본에 괴수가 나타난다는 설정을 리얼하게 시뮬레이션해 동시대 도쿄를 배경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주인공은 대를 이어 정치를 하는 젊은 야심가이자 내각 관방부(副)장관인 야구치 란도(하세가와 히로키)다.
12년 만에 제작된 29번째 시리즈물 <신 고질라>는 오리지널 작품인 혼다 이시로의 <고질라>(1954)의 고유성을 상기시키며 시리즈의 전면적 쇄신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된다. 총감독·각본·편집은 안노 히데아키가, 공동감독·시각효과는 히구치 신지가 맡았다.
[송효정의 영화비평] 현실 반영의 일본 괴수영화로서 <신 고질라>가 놓친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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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 감독은 <해빙>이 “앞에서 질문을 던지고 뒤에서 답을 제시하는” 구조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스릴러는 사건이 일어나고 조사 과정을 거쳐 사건이 해결되는 서사 구조를 갖고 있다. 이수연 감독은 ‘사건’이라는 말 대신 ‘질문’이라고 표현했다. <해빙>은 스타일과 스토리 모두 스릴러보다는 호러에 가깝다. 그러므로 ‘사건이 발생한다’보다는 ‘질문을 던진다’라는 문장이 어울린다.
호러는 인간과 사회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질문하는 장르다. 스릴러가 사건의 인과관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한다면, 호러는 설명되지 않는 서사의 잉여와 이성의 균열을 끌어안고 있는 장르다. <해빙>을 호러로 받아들일 때 서사의 모호함은 매력으로 작용하지만 스릴러라는 틀로 해석할 경우 사건의 설명이 미진하다고 느낄 수 있다. <해빙>을 되짚어보면 감독의 말과 달리 답은 이미 처음부터 주어졌다. 연쇄살인, 시신 훼손과 유기의 범죄를 저지른 정육식당 부자는 자신들의 범행을 영화
[이현경의 영화비평] <해빙>이 주는 원초적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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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든 사람이든 언젠가는 죽는다. 죽음은 죽는 자의 운명이 결정할 몫이지만 그들에게 어떤 묘지와 장례식을 선물할지는 산 자들의 몫이다. <로건>은 울버린/로건의 장례식을 위한 레퀴엠이다. <로건>에 깔려 있는 수정주의 웨스턴의 그림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수정주의 웨스턴은 서부의 신화를 비판하고 해체하는 작업이 전부가 아니었다. 존 포드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에서 톰 도니폰(존 웨인)의 장례식을 위한 여정을 극의 구조로 삼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용서받지 못한 자>(1992)에서 묘지와 함께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 우리는 이 묘지와 장례의 절차 속에 ‘웨스턴’ 장르에 대한 수정주의 웨스턴의 진짜 태도가 숨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로건>이 수정주의 웨스턴을 경유할 때, 그것은 로건/울버린이라는 신화적 인물이나 그로 대표되는 시리즈의 신화를 해체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그에게 어
[안시환의 영화비평] 수정주의 웨스턴과 <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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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을 읽지 않았지만 이 소설의 어떤 점이 마틴 스코시즈를 매혹하였는가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인 스코시즈가 엄격한 가톨릭 환경 아래 성장했고, 영화학교에 들어가기 전 신부가 될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을 만큼 신앙심이 두터웠으며, 죄의식과 구제라는 종교적 세계관을 바탕에 깐 영화들을 만들어왔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일런스>(2016)에서 스코시즈는 흥미로운 서사의 구축과 가공할 만한 영화적 테크닉을 동원하여 믿음의 본질에 접근한다.
흡사 미조구치 겐지의 재래(再來)를 보는 것 같은 오프닝을 통해, 그리고 존 포드의 <수색자>(1956)처럼 이단적 세계로부터 자아를 지키려는 순혈주의의 여정을 통해 <사일런스>는 가혹한 힘에 대항하는 종교적 항거의 양식을 묘사한다. 이 영화에서 스코시즈는 종교적 믿음과 철학적 탐색 사이에서 씨름한다. 17세기 가톨릭 교회의 노선 안에는 신앙의
[장병원의 영화비평] 서사 구조와 서술 주체로 살펴본 <사일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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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에 남을 걸작은 아니다. 아니, 올해의 영화에 뽑히기도 힘들 것이다. 심지어 제프 니콜스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긴 어렵다고 본다. <러빙>은 얼핏 욕심을 내려놓은 영화 같다. 애초에 제프 니콜스 감독이 실화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연출했다는 게 의외다. 실체 없는 불안의 정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던 감독이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기엔 여의치 않은 조건이다. 아마도 무난하다는 반응은 여기서부터 비롯되는 거라고 생각된다.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제프 니콜스 감독은 <테이크 쉘터>(2011)에서 평범한 미국 중산층 가정을 묵시록의 무대로 변주시키며 불안한 상상력을 펼쳐낸 전력이 있다. 개인의 예민한 심리상태를 고스란히 영화적 공기로 치환시킬 수 있는 재주꾼에게 ‘러빙 부부’의 단조로운 실화는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제프 니콜스의 영화가 <러빙>을 통해 한 단계 도약했다고 생각한다. ‘실화의 재현’이라
[송경원의 영화비평] <러빙>이 실화를 극화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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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배리 젠킨스의 <문라이트>는 주인공 샤이론이 소년에서 어른이 되는 모습을 세 단락으로 나눠 담고 있지만 별다른 사건이 없다. 1, 2부에서 샤이론은 동성애자라고 주변의 핍박을 받는다. 왕따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집단 린치를 당한다. 3부에서 샤이론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몸이 두배로 늘어난 건장한 체격을 지닌 성인 남자이자 거리에서 마약을 파는 소두목이 되어 있다. 샤이론의 주변 삶의 관계도 단출하다. 세 단락에 계속 나오는 인물은 마약 중독자인 샤이론의 엄마와 어릴 적부터 샤이론의 친구인 케빈뿐이다. 첫 번째 단락에서 샤이론을 보살펴주는 쿠바 출신 남자 후안이 나오지만 마약상인 그는 2부에서 죽고 없다. 후안의 여자친구인 테레사는 1부에 이어 2부에도 나오지만 거의 엄마처럼 샤이론을 보살펴주는 천사 같은 캐릭터인데도 그것 말고 별다른 역할이 없다.
잉여적 시선이 만든 자체적 리듬
이것은 요약한 스토리가 아니라 이 영화
[김영진의 영화비평] <문라이트>가 잡아낸 분위기, 그 영화적 접근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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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동성결혼 법제화 이후의 퀴어 무비는 어떠해야 하는가? 혹은 오바마의 8년 임기 이후의 블랙 무비는 어떠해야 하는가? 물론 몇 가지 상징적인 사건만으로 우리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Black_Lives_Matter’ 운동이 상기시키듯 인종간 갈등과 격차는 변함없이 실재하며, 수많은 LGBT 청소년들(그리고 성인들 역시)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상징적 사건 이후의 예술이 그 이전의 것과 동일한 메시지를 계속 송신할 수는 없다. 미국 연방 헌법재판소가 동성결혼 금지에 위헌 판결을 내린 것이 2015년이고 오바마가 2016년에 임기를 마쳤으니, 2016년에 등장한 블랙 퀴어 무비를 이러한 맥락과 완전히 무관하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이 이야기부터 해야만 한다. <문라이트>는 빈민가 흑인 게이 소년의 성장을 다루는 영화이며 흑인, 게이, 소년 세 키워드에는 모두 동등하게 방점이 찍혀야만 한다. <문라이
[황인찬의 영화비평] 2010년대의 블랙 퀴어 무비와 <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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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를 감싸안는 뜨거운 가슴을 거부할 이 누구인가. <재심>은 올바르고 따끈한 영화다. 당신은 아마도 이 영화의 포근한 품에 몸을 내맡기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잠깐, 해주고픈 말이 있다. 그 포근한 품이 당신을 인도하는 곳은 어디인가? 바로 가부장제다. 다른 영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정확히 <재심>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착한 변호사가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풀어주는 그 <재심>?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재심>은 집 나간 탕아가 의붓아버지를 만나 무사히 가부장제의 품으로 돌아오는 내용의 영화다.
모순이 너무 많다
영화는 법적 세계를 가부장적 세계로 파악한다. 현우(강하늘)는 ‘아비 없는 자식’(이 단어는 가부장제하에서 가부장 없는 아들에 대한 편견 섞인 용례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됨을 미리 밝힌다)이며 다방 꼬마로 불린다. “저 아이는 학교 안 다니냐”는 형사들의 질문에 다방 주인은 “애비는 죽었고 저 양아치를 써주는
[홍수정의 영화비평] <재심>이 변호사를 그리는 방식에 대한 의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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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윅: 리로드>(이하 <존 윅>)의 도입부. 건물의 한쪽 벽 위로 버스터 키튼의 <셜록 주니어>(1924)가 영사되는 중이다. 키튼의 꿈속에서 분리된 자아가 탐정 셜록으로 분해 영화 속으로 뛰어든다. 도난당한 진주를 되찾은 그가 악당들로부터 도망치는 거대한 시퀀스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조수의 도움으로 모터바이크 앞에 걸터앉은 그는 조수가 떨어져 나간 걸 모르고 있다. 엄청난 속도로 모터바이크가 달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별로 놀라는 표정을 짓지 않는다. 그의 별명이 ‘그레이트 스톤 페이스’ 아니던가.
그런 그가 극중 드물게 극도의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 그의 모터바이크가 달려오는 철도 및 자동차와 부딪힐 뻔한다. <존 윅>은 키튼이 머리를 감싸쥐며 공포를 체감하는 바로 그 장면을 보여준다. <셜록 주니어>는 1924년에 만들어진 영화이며, 키튼은 몸을 놀려 연기하는 배우들의 위대한 선배다. 이미
[이용철의 영화비평] <존 윅: 리로드>와 고독한 킬러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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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며 아내가 말했다. “뒷정리를 부탁해.” 아내의 부재를 틈타 애인과의 밀애를 즐기려던 남자는 머쓱해져 대답한다. “그러려고 했어.” <아주 긴 변명>(2016)의 오프닝 시퀀스 이야기다. 결혼 생활 10년을 훌쩍 넘긴 중년의 스타 작가 츠무라 케이(사치오)와 헤어디자이너 나츠코는 얼핏 다정해 보이지만 내면은 서늘하다. 아내 나츠코는 일년에 한번 절친한 친구와 여행을 간다. 바로 그날, 출발 전 남편의 머리를 손질하고 부랴부랴 나서던 아내가 남편에게 남긴 말이, 뒷정리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영화는 이때 그녀의 미묘한 눈빛과 표정을 여운으로 남긴다. 그리고 그녀가 탄 관광버스가 눈 덮인 산을 굽이굽이 돌아 올라갈 때, 모든 승객이 잠든 사이 홀로 깨어 있는 그녀가 창밖 풍경을 아련한 시선으로 응시할 때, 관객은 그녀가 이미 다른 세계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흡사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처럼, 그녀는 예시적인 마지막 말과 그리고 미처 남편에게 전송하지 못한
[정지연의 영화비평] <아주 긴 변명>, 한 남자의 뒤늦은 성찰 혹은 성장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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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사랑의 시대>(2016)는 그의 전작들과의 연속성 밖에서 논할 수 없는 영화다. 그는 첫 장편영화 <셀레브레이션>(1998)과 <더 헌트>(2012)에 이어 다시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 앞에 가져다놓았다. 에릭(울리히 톰센)이 상속받은 대저택에 함께 살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공동체가 형성된다. 곧이어 이 공동체는 에릭의 연인 엠마(헬렌 레인가드 뉴먼)의 합류로 변화를 맞는다. 에릭의 외도와 엠마의 등장이 유쾌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영화에서 변화의 시작은 항상 불쾌한 해프닝이다. 일대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집단 안에서 지속되는 긴장과, 꿈틀거리며 변화를 수용하는 공동체를 보여주는 것은 빈터베르그 영화의 특징이다. <사랑의 시대>에서도 공동체의 일원들은 갑작스레 등장한 엠마를 결국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수용의 과정은 어딘가 의심스럽다. 그들은 왜 엠마를 받아들였을까. 엠마가 불편한 존재라는 것은 그들 스스로
[홍수정의 영화비평] <사랑의 시대>와 공동체의 불영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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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면 낯뜨거운 일이 되겠지만 요즘 내가 심각하게 하는 고민은- 나를 포함해- 이토록 다정한 사람들의 오갈 데 없는 다정함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다. 그런 고민은 친구들의 연애 실패담과 결혼 생활의 고충을 들으며 시작되었는데 그러고보니 내 경험으로 돌아봐도 사랑이란, 연애란 그리고 결혼이란, 무언가 수탈의 느낌을 지울 수 없지 않은가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우리를 그 수탈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는가 생각해보니 다정(多情)이 병이었다.
누가 우리의 다정함을 노릴까
<매기스 플랜>(감독 레베카 밀러, 2015)에도 그렇게 해서 곤란에 빠지는 여자 매기(그레타 거윅)가 등장한다. 대학에서 예술비즈니스 강사로 일하는 매기는 이름이 비슷해 잘못 입금된 강사료 때문에 행정과에 갔다가 인류학 강사인 존(에단 호크)을 만난다. 그 뒤 공원에서 조우한 둘은 대화를 나누고 존이 매기에게 자신의 소설 원고를 읽어달라고 부탁하면서 둘은 친구에서 연인으로,
[김금희의 영화비평] 사랑과 연애 그리고 결혼의 한계를 명랑하게 풀어가는 <매기스 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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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루이스(에이미 애덤스)와 이안(제레미 레너)이 처음 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탐사팀이 들고 들어간 새장 속의 새에게 유독 시선이 간다. 뭔가 대단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은 알겠는데 영화는 딱히 왜 새를 들고 들어갔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진 않는다. 돌고래를 연상 시키는 소리와 함께 외계인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만이 공간을 채울 뿐이다. 가능한 한 화면 안의 요소들을 단순화하려 애쓰는 드니 빌뇌브 감독이 이토록 눈에 띄는 장치를 그냥 배치했을 리 없다. 내 호기심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저 새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헵타포트라 불리는 외계인들이 인간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 안전한지 확인하는 장치라고 짐작 가능하다. 호흡하기 적당한 공기인지 치명적인 물질은 없는지를 확인하는 생체 지표라 할 수 있다. 둘째로 미장센 측면에서 보자면 사운드로 장면을 장악하는 이 영화에서 이색적인 음색을 제공한다. 방호복 속 인간의 숨소리, 트럼
[송경원의 영화비평] 드니 빌뇌브가 제시하는 어떤 가능성 <컨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