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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책에 담긴 내용을 요약하거나 줄친 정도로 영화 <히치콕 트뤼포>를 바라본다면 곤란할 것 같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 생각해본 적은 없는, 그래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몇 가지 요소들이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부각되고 있다. 앨프리드 히치콕이란 인물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그들이 읽었던 인터뷰집 <히치콕과의 대화>에 대한 이야기가 그 중심에 놓인다. 한마디로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트뤼포가 아니라 ‘히치콕’이다. 트뤼포가 쓴 히치콕에 대한 인터뷰집을 읽은 자를 위해 영화가 제작되었고, 히치콕의 작품 세계 전체를 아우르기 위한 목표로 영화는 자신의 여정을 짜맞추고 있다. <필름 코멘트>의 평론가인 연출자 켄트 존스는 과감하게 나머지 단서들을 삭제해간다. 마틴 스코시즈, 웨스 앤더슨, 리처드 링클레이터, 올리비에 아사야스 등 수많은 감독들의 인터뷰 내용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만, 감독이 목표한 주요한 내용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녹음기
[이지현의 영화비평] 히치콕이 스스로를 영화에 비추어서 표현하는 과정에 주목한 <히치콕 트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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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 와이즈먼의 다큐멘터리 <내셔널 갤러리>가 미술관을 다룬 다른 다큐멘터리와 비교해 확연한 형식적 차이가 있음을 짧게나마 ‘<내셔널 갤러리> 프리뷰’(<씨네21> 1069호)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때 구체적인 작품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혹자는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이름을 비교 대상으로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내셔널 갤러리>가 다른 작품과 어떻게 다른지를 자세히 분석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적절한 비교 대상을 선별하는 것이 곤혹스러울 뿐만 아니라 <내셔널 갤러리>의 방식만이 옳다고 주장하거나 다른 작품과 그저 맥없이 비교하는 데 그치는 글을 쓰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령 과거를 재현하는 것 역시 현재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소쿠로프의 방식이라면 와이즈먼은 철저히 현재를 기록하되 그것이 과거와 상상적 연결점을 갖도록 만든다. 한쪽을 선호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어떤 것이 낫다거나
[김소희의 영화비평] <내셔널 갤러리>와 프레더릭 와이즈먼이 포착한 신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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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에는 두 부류의 동물이 살고 있다. 하나는 두발로 걷는 동물, 다른 하나는 네발로 걷는 동물이다. 전자는 인간을 닮고자 하고 후자는 실제 동물에 다가가 있다. 이러한 구분을 난감하게 하는 작품도 있다. 미키마우스와 플루토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초기의 미키마우스와는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미키는 점차 ‘사람-소년’으로 진화해왔다. 바지에 윗옷을 걸치고, 장갑을 끼고, 밤에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자고, 마침내 반려견으로 플루토를 거느리기에 이른다. 주인인 미키는 사람의 말로 명령을 내리고, 반려견 플루토는 멍멍거리며 따른다.
디즈니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에 이어, 두 번째로 준비한 장편애니메이션은 <밤비>(1942)였다. 라이브 액션의 배우처럼 인간 백설공주를 다루었듯이, 이제 <밤비>에서 동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애석하게도 <밤비>는 중간에 치고 들어온 <피노키오>와 <판타지아
[나호원의 영화비평] 애니메이션에서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마이펫의 이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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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엠 러브>(2009)를 보면서 루카 구아다니노가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를 탐하는가 싶었다. <비거 스플래쉬>(2015)를 보다 비스콘티의 이름을 슬며시 지우기로 했다. 구아다니노의 영화에 귀족형 노스탤지어나 엄격한 스타일은 없다. 차라리 그는 귀족을 닮으려 환장한 인간들을 다루는 쪽에 가깝다. <아이 엠 러브>에서 러시아 복원가의 딸 엠마는 밀라노의 사업가와 결혼하면서 고향을 잊는다. 그녀는 성공한 부르주아의 삶을 몸에 새기며 살았다. 아들의 죽음으로 그녀는 가면의 삶을 깨닫는다. <아이 엠 러브>가 귀족을 열망하는 부르주아에 대한 비판이라면, <비거 스플래쉬>는 신흥 귀족으로 행세하는 문화 권력의 삶으로 시선을 돌린 영화다. 마리안은 스타디움의 관중 앞에 서기 전 침을 퉤 뱉는 가수였다. 과로로 목수술을 감행한 그녀는 판텔레리아 섬에서 안락한 휴가를 즐긴다. 어딜 가나 최고급 복장에 우아한 행동을 잃지 않는 그녀, 과연
[이용철의 영화비평] 타자에 대한 몰이해의 관점으로 본 <비거 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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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의 <부산행>이 비평할 가치가 있는 영화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것이다. 칸국제영화제 상영 직후와 국내 개봉을 위한 언론 시사회 직후에 호평이 대다수였던 것과 달리 내 주변의 영화 종사자들 사이에선 이 영화가 이야기 굴곡이 없고 평평하며 필요 이상으로 신파적이고 전개가 익숙해서 기대만 못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건 영화와 관객이 만나는 사이에 비평이 개입할 편차가 거의 없다는 얘기기도 하다. 재난영화가 흔히 그렇듯이 이 영화 속 재난에도 은유가 들어 있지만 이건 너무 직접적이고 투명한 은유라서 누가 굳이 논평하는 게 촌스러울 것이다. 다만 이 영화가 현재의 한국 사회가 일상적으로 당면한 재난을 정치적 올바름을 지닌 태도로 묘사했다고 보는 평들에 대해선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굳이 평가하자면 이건 누구나 알고 있는 은유를 반박할 수 없는 층위에서 입에 침 바르고 얘기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영화에 가깝다.
<부산행>에 떼로 등장하는 좀비
[김영진의 영화비평] 한국 사회의 일상적 재난을 묘사하는 <부산행>의 방식에 과연 문제의식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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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 코너리의 제임스 본드를 좋아한 적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영화보다 책을 먼저 읽었기 때문인 것 같다. 책에 나오는 본드도 그렇게까지 맘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그만의 역사가 있었고 각각의 책에서 겪은 모험은 그의 몸과 정신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여전히 개망나니 같은 놈이었지만 그래도 죽은 여자친구와 아내에 대한 슬픈 기억을 지우지는 않는 그런 개망나니였다.
그런데 숀 코너리의 본드는 영화가 나올 때마다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당연히 그는 소설 속 본드보다 얄팍했고 나에겐 전혀 매력이 없었다. 남는 건 정부 돈으로 여자를 후리고 다니는 영국인 중년 남자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었는데, 그건 내 관심 밖이었다. 뒤늦게 대니얼 크레이그의 본드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숀 코너리,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넌의 본드와 달리 크레이그의 본드에겐 출생연도와 지울 수 없는 역사가 있었고 그 역사
[듀나의 영화비평] 제임스 본드의 비정상적인 장수와 제이슨 본의 이유 모를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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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로 단순히 가르자면 재미있다고 느낀 쪽이다. 다만 목표는 물론 이를 달성하는 방식이 너무도 선명해서 비평적으로 뜯어볼 여지는 그다지 없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 장면에 도달하기 전까진 말이다. 적당히 익숙하고 간간이 기발한 좀비 활극을 심드렁하게 관람하던 내 몸을 곧추세운 건 15호 칸에 있던 생존자들이 학살당하는 순간부터였다. 서사적으로 15호 칸 승객들의 전멸이라는 선택은 연상호가 세계를 해독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이 영화의 결정적 장면이라 할만하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15호 칸 승객들의 행동이 그렇게 단죄되었어야 할 만큼 이기적이었나. 생존에의 욕망과 이기심은 불가분의 관계인가. 이기심과 악은 동일 선상에서 논할 수 있는가. 연상호 감독이 그간 애니메이션을 통해 지속적으로 던진 화두가 이 한 장면에 녹아 있다.
15호 칸의 학살(이 상징적인 전멸 장면을 어떻게 칭할까 고민했다. 학살이라고 부른 이유에 대해
[송경원의 영화비평] <부산행> 속 15호 칸의 학살을 둘러싼 불투명한 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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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리부트’란 말이 실감난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터져나온 ‘여혐’ 논의는 우리 사회의 성차별 문화를 폭발적으로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역풍도 만만치 않다. 남성들은 여혐 문화를 반성하기보다는 ‘일반화하지 마라’, ‘역차별하지 마라’라는 말로 발뺌하기 바쁘다. ‘나는 일베를 하지 않는다’는 선긋기는 ‘메갈리아’를 ‘여자 일베’로 규정하고 마녀사냥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티셔츠 인증사진의 후폭풍은 ‘일베’와 ‘오유’가 어깨동무하는 진풍경을 연출하며, 이 사회의 강고한 남성 연대를 드러낸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에 있어서 페미니즘 열풍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다. 2016년 상반기 동안, 외국영화 <캐롤> <서프러제트> <로렐>, 한국영화 <아가씨> <우리들> <비밀은 없다> <굿바이 싱글>,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가 잇따라 찾아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굿바이 싱글&g
[황진미의 영화비평] 2016년 상반기 한국영화에서 그려진 여성 서사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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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개봉 기회를 얻지 못한 제프 니콜스 감독의 <미드나잇 스페셜>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간신히 조우했다. 전작 <샷건 스토리> <테이크 쉘터> <머드>에 이어 이 SF 판타지에서도 니콜스는 여전히 가족을 통해 말한다.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여덟살 소년과, 정부와 종교단체를 피해 아들과 탈주하는 아빠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아빠, 무서워?” “그래. 무섭구나.” “아빠,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난 너를 걱정하는 일을 좋아해.” “이제부턴 안 그래도 돼.” “난 널 영원히 걱정한다. 그렇게 정해져 있는 거야.”(That’s the deal.) 마리아와 요셉이 그들의 맏아들로 인해 품은 감정이 저렇지 않았을까 상상하며 영화를 보던 나는 영화가 중반을 넘었을 때 퍼뜩 깨달았다. <미드나잇 스페셜>은, 특별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아이를 세상에 데려오고 다시 떠나보내야 하는 모든 부모에 대한 우화다.
06/29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미트 페어런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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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지지하는 쪽이든, 비판하는 쪽이든 김태곤 감독의 <굿바이 싱글>에 대해 공통으로 지적하는 아쉬움은 영화가 지닌 작위성과 상투성에 관한 것이다. 특히 영화의 뼈대가 되는 설정인 고주연(김혜수)과 김단지(김현수)의 관계 형성과 변화 과정이 억지스럽다는 평이 종종 눈에 띈다. 나 역시 주연과 단지의 만남이 작위적이고 이후 관계의 변화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지닌 작위성과 상투성을, 단지 이야기의 전개를 위한 게으른 선택으로 치부하는 것에 반대한다. 내게 <굿바이 싱글>의 작위성과 상투성은 영화의 메시지와 긴밀히 소통하는 의도적 장치라고 여겨진다. 이것이 곧 작위성과 상투성에 대한 긍정을 담보한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일단 작위성과 상투성이 영화의 메시지와 만나는 방식을 따져보려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두 인물의 관계를 중심으로 영화의 주요 설정들을 다시 통과해야만 한다.
복제로서의 이미지가 삶을 끌어가는 모
[김소희의 영화비평] 극단적인 두축을 나란히 붙여보는 <굿바이 싱글>의 방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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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에서 ‘살인’에 대해 가장 전복적 상상을 꽃피운 사람은 사샤 기트리다.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도덕과 규칙에서 멀리 떨어져 손가락질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정작 영화와 코미디를 조롱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꿈을 꿉시다>(1936)에서 “관객은 결혼 장면만 나오면 행복해져서 ‘좋은 코미디’로 평가하지. 그건 비극의 시작인데 말이야”라고 말했던 그다. 기트리 영화의 진경은 ‘역설’에 있다. ‘살인을 정당화했다’는 오명을 듣는 대표작 <독>(1951)에서 증인으로 나온 아주머니는 “여기서 자기 남편이나 아내가 죽기를 한번쯤 바라지 않은 사람이 있나요? 그건 결혼 생활의 일부와 같아요”라고 말한 뒤 마을 신부를 끌어내 “그런 고백을 많이 듣지 않았어요?”라고 따진다.
웃으며 보다가도 죄의식을 느끼게 만드는 게 기트리 영화다. <독>은 끔찍한 결혼 생활에 환멸을 느낀 중년 남자 폴의 이야기다. 그는, 잘 씻지도 않고 낮부터 폭음을 즐기고 퉁명
[이용철의 영화비평] 살인과 죄의식을 다루는 우디 앨런의 불가해한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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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교육부 고위 공무원의 ‘개, 돼지’ 발언으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대체로 국민들은 이 사건의 두 지점에서 격노했는데, 우선은 그가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공무원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발언자가 ‘교육’부 소속이라는 점이었다. ‘고직’이라는 요소가 놀람과 분노를 유발하는 데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역으로 현재 한국 국민들의 ‘고위층’의 윤리감각에 대한 기대감이 거의 최저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의 발언은 흔히 ‘대중’이라고 칭해지는 수많은 국민에 대한 도덕적, 지적 우월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단어가 과연 이론적으로 성립 가능한 것일까? 타인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존재론적 우월감을 느끼는 순간 ‘윤리적’ 우위란 자동박탈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치 “나는 세상에서 제일 겸손한 인간이야”라는 말이 그 자체로 어불성설인 것처럼 말이다. 우디 앨런의 <이레셔널 맨>은 이
[김지미의 영화비평] 식자들이 결코 도달하지 못할 ‘개, 돼지’들의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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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외과나 체중감량 업체의 거리 광고에서 우리는 ‘before & after’의 대조 이미지를 본다. 광고 속 모델의 면과 선이 매끄럽게 바뀌면 인생도 반질반질해질 것처럼 유혹한다. 요즘 스마트폰 카메라는 촬영 단계에서부터 얼굴을 인식해 피부를 밝고 곱게 보정해준다. 사진은 SNS에 올라 ‘좋아요’를 부른다.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으면 요구하지 않아도 기미, 주근깨, 뾰루지를 없애주는 것은 물론 턱선을 갸름하게 매만진 뒤 인화해준다. 전자제품의 버튼은 미끈한 터치패드로 대체되고 있다. 기업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들의 공통된 고민은, 어떻게 하면 두드러지는 선을 없애고 매끄러운 제품 표면을 만들어낼 것인가로 모인다. 솔기 하나 없는 천의무봉의 선녀 옷을 원하는 욕망은 선과 면을 최소화한 디자인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거칠고 복잡한 내부는 매끈한 표면 아래 숨는다. 원래 있던 것(before)은 욕망하는 것(after)에 가려진다.
매끈한 것들 사이에서 발견한 균열
<
[송형국의 영화비평] 상실로 드러나는 진실 <데몰리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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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지만, 영화 감상에 방해되기보다는 오히려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주인공이 자신의 차에 바이닐(LP)을 ‘한가득’ 싣고 어디엔가 도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 ‘한가득’이다. 마치 주인공의 컬렉션처럼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감독한 영화 <에브리바디 원츠 썸!!>에는 음악이 한가득 담겨 있다. 1960년 7월30일생. 영화 속 시간적 배경은 1980년. 과연, <스쿨 오브 락>(2003)의 감독답게 그는 음악이라는 프리즘을 경유해 자신의 20대를 향한 헌사를 바친다. 따라서 절대 방심하지 말 것. 이 영화에서 짧든 길든 흘러나오는 음악만 30곡이 훌쩍 넘는다. 그것도 모조리 역사에 흔적을 남긴 히트곡이니 음악광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을 것이다.
놀고 놀고 또 놀고
대략의 줄거리를 먼저 살펴본다. 주인공 제이크는 대학 신입생이자 야구 선수다. 대학 생활의 부푼 꿈을 안고 이제 막 기숙사 건물에 도착한
[배순탁의 영화비평] 잠시 일상의 스위치를 끄고 <에브리바디 원츠 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