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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외과나 체중감량 업체의 거리 광고에서 우리는 ‘before & after’의 대조 이미지를 본다. 광고 속 모델의 면과 선이 매끄럽게 바뀌면 인생도 반질반질해질 것처럼 유혹한다. 요즘 스마트폰 카메라는 촬영 단계에서부터 얼굴을 인식해 피부를 밝고 곱게 보정해준다. 사진은 SNS에 올라 ‘좋아요’를 부른다.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으면 요구하지 않아도 기미, 주근깨, 뾰루지를 없애주는 것은 물론 턱선을 갸름하게 매만진 뒤 인화해준다. 전자제품의 버튼은 미끈한 터치패드로 대체되고 있다. 기업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들의 공통된 고민은, 어떻게 하면 두드러지는 선을 없애고 매끄러운 제품 표면을 만들어낼 것인가로 모인다. 솔기 하나 없는 천의무봉의 선녀 옷을 원하는 욕망은 선과 면을 최소화한 디자인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거칠고 복잡한 내부는 매끈한 표면 아래 숨는다. 원래 있던 것(before)은 욕망하는 것(after)에 가려진다.
매끈한 것들 사이에서 발견한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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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형국의 영화비평] 상실로 드러나는 진실 <데몰리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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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지만, 영화 감상에 방해되기보다는 오히려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주인공이 자신의 차에 바이닐(LP)을 ‘한가득’ 싣고 어디엔가 도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 ‘한가득’이다. 마치 주인공의 컬렉션처럼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감독한 영화 <에브리바디 원츠 썸!!>에는 음악이 한가득 담겨 있다. 1960년 7월30일생. 영화 속 시간적 배경은 1980년. 과연, <스쿨 오브 락>(2003)의 감독답게 그는 음악이라는 프리즘을 경유해 자신의 20대를 향한 헌사를 바친다. 따라서 절대 방심하지 말 것. 이 영화에서 짧든 길든 흘러나오는 음악만 30곡이 훌쩍 넘는다. 그것도 모조리 역사에 흔적을 남긴 히트곡이니 음악광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을 것이다.
놀고 놀고 또 놀고
대략의 줄거리를 먼저 살펴본다. 주인공 제이크는 대학 신입생이자 야구 선수다. 대학 생활의 부푼 꿈을 안고 이제 막 기숙사 건물에 도착한
[배순탁의 영화비평] 잠시 일상의 스위치를 끄고 <에브리바디 원츠 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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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쁘면 이쁘다고 미리 말해줬어야지. 당황스럽잖아.” <아가씨>에서 하녀 숙희(김태리)는 아가씨 히데코(김민희)를 만나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이미 전날 저녁, 처음 저택에 들어온 숙회는 아가씨의 갑작스런 비명에 깨어나 그녀를 다독거리며 자장가까지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본 것은 처음이다. 그러고는 깜짝 놀란다.
숙희의 입에서 튀어나온 ‘예쁘다’는 말은 이상한 표현은 아니다. 아가씨는 예쁘다. 우리는 이를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숙희의 독백이 흥미를 끄는 것은 그녀가 예쁘다는 것을 당황스럽다며,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것과 연결시키는 대목이다. 그녀는 아가씨가 예뻐서 놀란 것이 아니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놀란 것인가? 이는 하녀로 위장 잠입해 아가씨의 돈을 갈취하려는 백작(하정우)과의 치밀한 공모의 허점을 드러내는 것인가? 아니면 그녀의 숨겨진 욕망을 드러내는 것인가? 어떻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예쁘다’는 표현
[김성욱의 영화비평] 아가씨는 예쁘다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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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삶, 고통과 치유를 담은 히로카즈의 씨앗들 <환상의 빛>
대학을 갓 졸업한 무렵 한 선배의 부음을 들었다. 나보다 고작 몇 학번 위 선배의 죽음은 당황스러웠다. 누군가의 죽음은 늘 “어떻게?”라는 질문을 이끈다. 그 죽음이 자의에 의한 것이라면 애도 이전에 “왜?”라는 또 다른 질문으로 접어들게 한다. 유서가 있든 없든 그 “왜?”는 늘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지 못한다. 그것은 막다른 골목이다. 살아남은 이들에게 그가 남긴 유서는 그 골목 끝에 끄적인 낙서와 같다. 어쩌면 그 “왜?”는 죽은 이가 아니라 남은 자신들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선배는 술을 마셨고, 바다로 나갔다고 했다. 함께 있었던 이들은 그것이 ‘사고’인지 ‘자살’인지 시원하게 답해주지 못했다. 그 뒤로 한동안 술을 마실 때마다 그녀가 그날 들은 파도 소리는 어땠을까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다 젊은 여성 둘이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 남자는 여자를 진심으로
[김지미의 영화비평] 상실 이후에 당도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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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풍경과 스펙터클이 공존하는 <도리를 찾아서>
몇달 전 픽사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에 대한 글을 쓸 기회가 있었다. 그중 한 꼭지에서는 ‘언성 히어로’(unsung hero)를 꼽아야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캐릭터가 바로 ‘도리’였다. 한 작품에서 주인공에 필적할 만한 활약을 펼쳤으며, 픽사를 뛰어넘어 애니메이션 전체를 보더라도 낙천적 성격과 실행력을 겸비한 가장 출중한 긍정의 아이콘이며, 화려하지 않은 외모이지만 나름의 매력을 한껏 소유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도리를 꼽은 나 자신의 심미안에 적잖이 뿌듯해하는 것도 잠시, <니모를 찾아서>를 검색하자마자 더이상 도리는 언성 히어로가 아니었다. 한창 개봉 준비를 하고 있는 가장 핫한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그럼 그렇지, 일개무명의(더군다나 게으르기까지 한) 평론가가 떠올린 캐릭터의 매력을 픽사에서 놓칠 리가….
<니모를 찾아서>가 개봉한 2003년으로부터 13년이 흘렀다. 그 작품에 참여했던
[나호원의 영화비평] 잊었던 것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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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의 여자주인공들은 창피함을 모른다. 왜일까? 아마도 낯이 두꺼워서, 머리가 나빠서, 눈치가 없어서가 아닐까. 또는 그 모두여서.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이들의 돌진은 희귀한 구경거리이다. 보통 한국에서 이런 허구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여자들은 이야기꾼의 보호를 받기 마련이다. 그들은 일반적인 기준보다 아름답거나 현명하거나 선량하다. 이중 어느 것이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그들 행동의 방어막이 되어주어야 한다.
<갈증>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이경미의 여자들에겐 그런 보호 따위는 없다. 아마 그들도 그런 것 따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내려오는 습관과 전통을 때려부수며 전진하는 둔탁하고 못생긴 장갑차와 같다. 공효진, 서우, 황우슬혜, 손예진, 신지훈과 같은 배우들에게 ‘못생긴’이란 말을 쓰는 건 얼핏 이상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영화를 보면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못생
[듀나의 영화비평] <비밀은 없다>가 중학생 여자아이들의 세계로 돌아가 그곳에 머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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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를 논할 때 자주 언급되는 단어는 퀴어, 여성, 연대 같은 것들이다. 나는 <아가씨>가 이 단어들과 관계가 옅을 뿐만 아니라 거의 무관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단어가 드러내는 가치는, 마치 영화가 가장하는 외피에 감싸인 진실인 양 추앙된다. 그러나 <아가씨>는 외피가 싸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외피가 전부인 영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구조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외피가 내용을 이해하는 방식을 교묘히 조종해, 결국 그 내용까지 바꿔놓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은 관객에게 인물과 사건의 단면을 미리 던져주고는 종국에는 이에 대한 이해에 가닿는 것으로 극을 종결시키는 방식을 즐겨 사용해왔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서 남한 병장 이수혁이 방문객을 막아서다 찍힌 사진이 사건 전후로 제시되는데, 사건 이후의 사진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망 속에 놓인다. <스토커>(2013)의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한 미스터리한
[김소희의 영화비평] <아가씨> 이야기의 구조적 쾌락을 위해 소비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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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소쿠로프가 미술관 ‘애호가’라는 것은 제법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는 미술관에 있을 때, 마치 그곳에서 절대 나올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우는 아이처럼 행복해 보인다(미술관 또는 박물관으로 번역되는 Museum이란 말은 뮤즈 신에게 헌정된 공간이란 뜻, 곧 예술에 헌정된 곳임). 대표적으로 그는 2001년 <긴 여정의 엘레지>를 통해 로테르담의 보이만스 판 보닌헨 미술관을, 그리고 2002년 <러시아 방주>를 통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다룬 적 있다. 로테르담에서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픈 불가능한, 하지만 ‘달콤한 꿈’을,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과거 속에 머물고 싶은 충동을 그린 바 있다. 이번에 소쿠로프가 또다시 방문하는 미술관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곳인 파리의 루브르다.
나치들이 루브르를 접수할 때
루브르의 찬란한 역사 속으로 관객을 초대하기 위해 소쿠로프가 동원한 장치는 ‘알려지지 않은 미담’이다. 소쿠로프는 루브르만
[한창호의 영화비평] <프랑코포니아>, 소쿠로프가 불러낸 루브르의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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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면이 비평을 위해 마련된 자리임을 알고 있다. 작품과 거리를 유지하며 분석과 논리를 바탕으로 차분한 글쓰기가 요구된다는 것을 숙지하고 있지만, 개인적인 감흥을 앞서 드러내는 것으로 이 거리를 뭉개려 한다. 그래서 이 지면이 개인적인 감흥에 골몰한, 순진하고 무지한 모양새일지라도 이것이 이 영화를 대하는 가장 솔직한 방법이라 믿는다.
<우리들>을 보고 아이처럼 신이 났다. 영화의 메인 포스터를 첨부하여 “강추!”라고 이곳저곳에 문자를 보냈다. 도통 무심하던 이가 여러 통의 문자를 보내는 건 수신자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무엇보다 당황한 건 발신자인 나였다. 열성으로 들떠 기분까지 좋아지는 이 ‘신남’, 정말 오랜만이었다. 단명하게 <우리들>이 좋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를 보았다는 것만으로 관객으로서 신나는 일이 또 있을까. ‘좋다’라는 형용사가 묘연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를 감각하는 다른 단어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좋다. 무엇보다 거의
[이미랑의 영화비평] <우리들> 연출가의 눈으로 바라본 ‘섬세함’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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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가씨>는 내가 늘 보고 싶었던 유형의 박찬욱 영화였다. <복수는 나의 것>(2002) 이후 박찬욱의 모든 영화는 서사가 비틀리거나 왜곡된 서사의 틈에 자기 스타일을 밀어넣었다. 원작이 있었던 <올드보이>(2003)와 <박쥐>(2009)의 경우에도 서사는 기승전결로 치고 올라가 예측할 수 있는 지점에 만족스럽게 도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영화는 처음부터 뭔가 과잉결정된 지점들이 있어서 클라이맥스로 올라가야 할 곳에서 그것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안티클라이맥스로 방향을 트는 인상을 주는데, 이 방면으로 최고작은 <친절한 금자씨>(2005)다. 이 방식이 내게는 좀 어색했던 영화 <박쥐>에서는 박찬욱의 예술가로서의 초자아가 유희적이고 전복적인 그의 스타일을 결박하고 있어서, 인간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 에밀 졸라의 원작을 신부의 존재론적 고뇌와 결합시키려 한
[김영진의 영화비평] <아가씨> 계급과 성차의 대립항을 세우고 부순 박찬욱식 영화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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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부는 바람>(2014)은 <달팽이의 별>(2012)을 찍었던 이승준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다. 두 영화는 공통점이 많다. 첫째는 시청각장애인의 일상을 찍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장애를 통해 인간의 감각에 대해 사유케 한다는 점이고, 셋째는 장애에서 출발하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던진다는 점이다.
빛도 소리도 없는 예지의 세계
<달에 부는 바람>은 예지 엄마의 일기를 비추며 시작된다. 일기에는 예지가 무엇을 느끼는지 관찰한 내용들로 빼곡하다. 예지는 시각도 청각도 없이 태어났다. 이제 청소년이 된 예지는 어떻게 세상을 느끼고 인지할까. 예지의 세계는 어떤 것이며, 엄마는 어떻게 예지와 소통할 수 있을까.
예지는 숟가락으로 밥을 먹을 줄 알고, 혼자 신발을 신을 줄 안다. 처음부터 알았던 것은 아니다. 헬렌 켈러의 전기영화 <미라클 워커>(1962)나 인도영화 <블랙>(2005)을 보면, 숟가락으로
[황진미의 영화비평] 장애에서 출발한 ‘관계’의 이야기 <달에 부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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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를 구분 짓는 건 사진적 존재에 근거를 둔 리얼리즘이었다. 그린 것과 찍은 것의 차이, 대상이 카메라 저편에 있고 없음의 구분이 둘 사이 견고한 장벽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컴퓨터그래픽(CG)이 등장한 이래 이 경계는 하루가 다르게 얇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한동안 CG는 그리는 것과 찍는 것 사이 경계를 허물기보다는 완충재 역할에 가까웠다. ‘애니메이션/영화’의 구분이 ‘애니메이션/CG/영화’ 정도로 바뀌었다고 보면 적당할 것이다. 초반에 CG는 어디까지나 그리는 것의 영역에 속해 있었고, 사람들의 눈은 사진의 사실성과 CG의 과도한 정교함을 충분히 구분할 수 있었다. 소위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라고 부르는 낯섦, 머리로 계산하고 그려낸 것의 이질감은 ‘찍은 영화’의 위상을 도리어 견고하게 만들어줬다.
CG가 카메라의 물질성을 절대 따라할 수 없을 것이란 믿음은 한편으론 필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한 반작용처럼 보인다. 여기선
[송경원의 영화비평] 첫 번째 CG영화 <정글북>을 체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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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버드로 감독의 <본 투 비 블루>는 전설적인 재즈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의 생애를 다룬 영화다. 20년 전부터 할리우드에서 늘 소문으로만 돌던 쳇 베이커의 영화가 드디어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전기영화 혹은 음악영화라는, 두 가지 장르를 표방하고 있다.
영화의 내용이 얼마나 사실과 부합하느냐로 전기영화를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전기영화란 전기문학과 마찬가지로 기록, 구술 등과 같은 일차 사료를 바탕으로 많은 부분 꾸며낸 이야기다. 자료가 없는 부분은 상상으로 메우고, 사실을 놓고서도 주관적인 해석을 첨가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전기(傳記)이고 전기영화다.
영화 속 이야기와 실제 쳇 베이커의 삶
<본 투 비 블루>는 쳇 베이커의 삶 중에서 극히 일부분만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1966년 마약 소지 혐의로 이탈리아에 수감되어 있는 쳇 베이커(에단 호크)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그는 그의 전기영화를 찍으
[황덕호의 영화비평] <본 투 비 블루>에서 기능적으로 소비된 쳇 베이커와 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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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영화의 두축을 나누며 들뢰즈는 두 가지 경향을 소개했다. 이 두 가지 사실주의 도식에 사용한 예시는 서부극이나 희극 등 비교적 극단적인 경우들이지만, 우리는 좀더 최근의 영화들에 이를 대입할 수 있다. 먼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움직임이 포함된 ‘상황의 법칙’이다. 이 경우 영화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윤리를 설명하며, 특정 규칙이 주인공을 압박하는 상황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인물은 상황에 의존하고, 그 결과 처음의 상황은 변모하거나 혹은 그대로 유지되거나 한다. 이를 들뢰즈는 ‘S(상황)-A(행동)-S(상황)’의 도식이라 표현했다. 켄 로치의 작품이 이에 속한다. 이어서 두 번째 사실주의 경향은 행동으로부터 상황이 도출되는 영화들이다. 예를 들어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이 그런 경우다. 동일하게 사실주의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상황을 겨냥하더라도, 켄 로치와 다르덴의 방식은 다르다. 그리고 들뢰즈의 두 번째 도식인 ‘A-S-A’의 구도가 영화를 지배할 때, 상황은 암흑 속에
[이지현의 영화비평] <45년 후>가 보여주는 노부부의 삶에 담긴 역설과 부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