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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연의 영화비평] <아주 긴 변명>, 한 남자의 뒤늦은 성찰 혹은 성장담

여행을 떠나며 아내가 말했다. “뒷정리를 부탁해.” 아내의 부재를 틈타 애인과의 밀애를 즐기려던 남자는 머쓱해져 대답한다. “그러려고 했어.” <아주 긴 변명>(2016)의 오프닝 시퀀스 이야기다. 결혼 생활 10년을 훌쩍 넘긴 중년의 스타 작가 츠무라 케이(사치오)와 헤어디자이너 나츠코는 얼핏 다정해 보이지만 내면은 서늘하다. 아내 나츠코는 일년에 한번 절친한 친구와 여행을 간다. 바로 그날, 출발 전 남편의 머리를 손질하고 부랴부랴 나서던 아내가 남편에게 남긴 말이, 뒷정리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영화는 이때 그녀의 미묘한 눈빛과 표정을 여운으로 남긴다. 그리고 그녀가 탄 관광버스가 눈 덮인 산을 굽이굽이 돌아 올라갈 때, 모든 승객이 잠든 사이 홀로 깨어 있는 그녀가 창밖 풍경을 아련한 시선으로 응시할 때, 관객은 그녀가 이미 다른 세계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흡사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처럼, 그녀는 예시적인 마지막 말과 그리고 미처 남편에게 전송하지 못한 잔혹한 문자를 휴대폰에 남겨놓은 상태였다.

죽음

그러니까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아주 긴 변명>은 그녀의 죽음 이후를 다루는 영화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 이후의 문제를 다루는 감독이라면, 역시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초기작 <환상의 빛>과 <원더풀 라이프>로부터 근작 <걸어도 걸어도> <바닷마을 다이어리> <태풍이 지나가고>까지 지속적으로 죽음 혹은 사라짐 이후의 문제를 담아왔다. 초기작들이 ‘생의 의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암울하고 침잠된 수묵화 같은 풍경들이었다면, 최근에 이르러 그는 얼핏 부재(죽음)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 남은 자들의 일상적 풍경들을 소소한 듯 담아낸다.

반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연출부로 영화를 시작한 니시키와 미와 감독의 이번 영화가 스승과 달라지는 지점은 ‘설명에 대한 의지’ 같은 것이다. 고레에다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일상의 표면을 묵묵히 지켜볼 뿐 그 감정이 얼마나 격한지, 복잡한지, 슬픈지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내면을 해부하려고도 폭로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한 감정은 객관적 언어로 묘사되거나 규정될 수 없는 어떤 영역에 관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죽음이 야기하는 슬픔과 쓸쓸함, 여전히 지속될 수밖에 없는 일상의 잔혹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보게 된다. 영화 속 캐릭터 누구 하나 통곡하거나 발버둥치지 않아도 영화는 오롯이 그 부재와 상실의 감정을 잔잔하게 공명시킨다. 그러나 니시카와 미와는 질문하고 응답하고 설명한다. 이번 영화의 제목이 <아주 긴 변명>인 것처럼, 우리는 불현듯 아내를 잃은 남자가 왜 그렇게 반응했고, 변화했고, 애도했는지 들어봐야 한다. 어쩌면 구차한 긴 변명일 수도, 그러나 어쩌면 스스로의 내면을 한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남자의 뒤늦은 성찰 혹은 성장담일 수도 있다.

변명

우리에게 니시카와 미와 감독은 성공적인 두편의 영화를 통해 이미 소개된 바 있다. 형의 행위로 야기된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했던 동생의 기억과 질투, 진실과 왜곡에 관한 영화 <유레루>(2006)와 한 마을 의사의 갑작스런 실종으로 비롯된 소란을 담은 <우리 의사 선생님>(2009). 흥미로운 것은 두편 모두 이번 영화처럼 누군가의 죽음 혹은 사라짐을 통해 영화가 시작된다는 것이며, 그리고 서사과정을 통해 그 죽음을 둘러싼 진실 혹은 감정의 실체를 추적해 간다는 것이다. <유레루>가 객관적 진실과 왜곡된 기억의 문제를 중심으로 가족 내 형제 관계를 다루고 있다면, <우리 의사 선생님>은 한 마을에서 칭송받던 의사가 어느 날 가짜임이 폭로됐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을 공동체의 신뢰와 기만의 문제를 추적한다.

그러한 문제의식은 <아주 긴 변명>에서도 유사하게 변주된다. 영화의 시작 직후 죽어버린 아내, 아내의 죽음에 그 어떤 감정적 동요도 일으키지 않는 남편.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동일본 지진 이후 미디어에서 미담 위주로 다뤄지는 유가족들의 이야기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살아남은 자들의 상처와 책무, 죽어간 자들에 대한 기억과 망각, 애도와 상기. 이로부터 야기된 이 영화의 구체적인 질문, 주인공 츠무라가 왜 아내의 죽음에 대해 애도할 수 없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초반 츠무라는 관객의 지지를 전혀 받을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아내의 헌신 덕에 스타 작가가 되었으나 비루했던 자신의 과거와 연루된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혐오한다. 대중에게 알려진 스타로서의 현재에 자만하는 그는 타인의 이야기나 감정에 일체 귀기울이지 않는다. 아내가 그를 성공한 필명이 아니라 지난했던 시절의 본명, 사치오라 부르는 것도 혐오하며, 심지어 아내의 장례식에서조차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한다.

그의 삶과 태도가 변화하는 것은 아내와 함께 사고를 당해 죽은 친구의 유가족을 만나면서부터이다. 트럭 운전으로 며칠씩 집을 비워야만 하는 가장(오미야)과 두명의 어린아이들. 자신과 달리 아내의 죽음에 통곡하고 돌이키고자 하는 남자를 츠무라는 그저 위협적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뜻밖의 일을 계기로 오미야의 어린 아들을 돌보게 된 밤. 그는 이전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을 느낀다. “아이의 잠든 숨소리를 듣는 밤이 뭔지 몰랐다”라는 것을 기록한 그는 오미야 아이들의 보모가 되기를 자처한다. 새로운 글을 쓸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이후, 그는 처음으로 타인의 언어와 감정에 귀기울이게 되고, 교감하기 시작한다.

애도

영화의 중반 즈음, 츠무라의 출판 매니저가 그에게 왜 아이들을 돌보는지 묻는다. 매니저는 그것이 츠무라가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한 목적 혹은 도피라고 본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츠무라도 뭐라 명쾌히 답변을 하지 못한다. 그 자신도 이유를 모른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누구도 자신에게 닥친 사태를 혹은 자신의 내면을 언어화된 방식으로 명백히 인지할 수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피력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때 이미 그는 아이들이 자신을 츠무라가 아니라 ‘사치오’라고 부르는 것에 자연스레 응답하고, 휴대폰에 아이들이 건넨 유치한 장신구를 자랑스레 걸고 있었다. 영화는 그가 자신이 상처받았는지조차 몰랐던 사건으로부터, 그리고 상실과 부재로부터 부지불식간의 치유를 필요로 했음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츠무라는 타인을 존재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보살핀다는 것의 감정과 책무를 처음으로 경험한다. 물론 이 과정 역시 그에게 명쾌한 인생교본처럼 인지되지는 않는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츠무라는 아이들의 정신적 아버지가 된다), 타인이 욕망하는 것은 들어주고 응원해준다는 것, 존재 혹은 부재의 흔적들을 기억할 것인지 망각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오미야와의 논쟁), 그리고 모든 소중한 것들과 언제든지 한번은 헤어질 수 있다는 깨달음은 여러 갈등과 부대낌, 심정적 동요로부터 터득된다. 그리고 그가 드디어 수첩에 ‘인생은 타인이다’라는 메시지를 쓸 수 있을 무렵, 그는 처음으로 아내의 존재와 부재, 자신에게 닥친 비극과 슬픔, 그리고 남겨진 자들이 감당해야만 하는 삶의 문제를 처음으로 내면으로부터 인지한다. 이러한 긴 시간들을 통과하고 나서야, 그에게 처음으로 진실된 애도의 순간이 찾아온다.

<아주 긴 변명>은 츠무라가 다시금 사치오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죽음과 비극, 이별과 사랑, 그리고 아이들을 통해 배우는 성장담이자 한 남자를 위한 기나긴 변명이다. 감독 니시카와 미와는 전작들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어떤 사건의 한 단면만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곤경에 처한 한 남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단면들과 시간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감독이 전제한 해석과 답은 정해져 있지만, 그 과정에 공감하고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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