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하나의 의문을 갖고 물고 늘어지며 쓰려 한다. 최근의 주류 한국영화에서 클로즈업된 배우의 얼굴들이 근사하다는 느낌으로 수렴되는 것 외에 왜 지속적인 잔상을 남기지 않을까란 의문이 그것이다. 나와 가끔 문자로 교신하는 어느 영화인은 요즘 한국영화에서의 얼굴 클로즈업은 대사와 표정 외에 어떤 기능도 하지 않는다고 한탄하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스토리는 다양해졌지만 얼굴이 영화적 이미지로 작동하지 못하고 사용가치로 전락해버린 작금의 한국영화 현실은 오염돼 있다는 것이다. 얼굴의 ‘사용가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인데, 이 풍토에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얼굴의 페티시즘에 갇힌 온갖 메시지 영화들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입장들도 머지않아 상투형의 막다른 골목에 막힐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윤리적 감각의 균형이 부재한 <마스터>
이를테면 <마스터>란 영화에 등장하는 숱한 배우들의 얼굴 클로즈업은 그저 배우들이 근사하게 생겼다는 인상 외에 어떤 것도 전달하지 않는다. 이건 ‘15세 관람가, 권선징악’의 연출 전력과 무관하다. 이병헌이 연기하는 희대의 사기꾼 악당 진현필은 이병헌이 ‘연기를 잘한다’는 느낌 이상의 것을 주지 않는다. 관객에게 연기를 잘하고 있다는 느낌을 줌으로써 그는 역설적으로 어떤 수준 이상의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관객은 영화 속의 진현필을 이병헌이 근사하게 연기하는 허구의 악당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심지어 무섭지도, 사악하지도 않은 멋있는 악당, 사악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멋있는 배우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이 느낌을 주기 위해 그는 영화에서 수많은 클로즈업을 할당받는데 이건 끝없이 나열되는 광고 화면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의 이미지는 영화 속의 인물 이미지로 육화된 것이 아니라 배우의 물리적 아름다움에 카메라가 자의적으로 포섭되어 사악한 것조차 멋있게 재현한다는 목적의 도구로 쓰이는 이미지다.
<씨네21> 지난 1089호 인터뷰에서 감독 스스로 ‘사기 캐릭터’라고 밝힌, 진현필 회장을 끝까지 추적하는 엘리트 경찰이자 지능범죄 수사대 팀장인 김재명은 더 나아가 현실에 아예 존재하지 않지만 대리만족 카타르시스를 주기 위해 무한대의 경계로 넓혀진 캐릭터다. 첫 등장부터 영국 수상 처칠이 벌금을 문 일화를 언급하는 그는 청렴결백하고 총명하며 정의감 넘치고 최고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상부의 절대적인 엄호를 받는 무결점의 인물이다. 그의 마지막 퇴장 장면은 진현필을 검거한 후 진현필을 비호하던 정치인들을 검거하기 위해 출동하는 수많은 경찰차들 사이에서 늠름하게 화면 저편으로 걸어가는 모습이다. 좋다. 이런 장면이 정의에 목마른 한국 사람들에게 잠시 동안의 대리만족을 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이 밋밋한 캐릭터를 수행하는 김재명의 멋지고 잘생긴 외모를 강조하기 위해, 드라마의 이야기 기능을 운반하기 위해 인형처럼 대사를 읊는 느낌을 주는 강동원의 소모되는 이미지는 어쩔 것인가, 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잘생겼지만 그가 연기하는 인물은 영화에서 최소한의 극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잉여적으로 발산하지 않는다. 강동원이 연기하는 한국영화 속의 경찰 캐릭터는 그냥 영화 속 캐릭터일 뿐이다. 그래도 된다고 감독이나 배우는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이 캐릭터가 아무런 현실적 환기력도 지니지 않을 때 캐릭터는 강동원이라는 배우의 나르시시즘의 발현도구로만 머물게 된다. 이것은 이 영화가 그가 출연하는 사이비 공익 광고에 불과하다는 전시효과를 낳는다. 공허하게 정의는 살아 있다고 물리적으로 과시하는 이미지를 펼쳐봐야 그것은 강동원은 멋있다, 그렇지만 강동원은 연기를 너무 못한다, 강동원이 전시하는 정의의 담지자로서의 스크린 속 물리적 형상은 가짜다, 라는 느낌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마스터>는 실제 벌어졌던 사기사건을 소재로 현실에서와 달리 권선징악의 결말로 맺음하는 영화다. 현실에서 미제였던 사건을 극화해서 법의 심판을 받는 해피엔딩으로 바꾸는 것이 윤리적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자명한 악을 향해 자명하다고 끊임없이 강조하는 이미지를 나열하고 있으며, 그 악을 처단하기 위해 집요하게 추적하는 경찰의 정의로운 이미지 역시 고루 안배하고 있다. 서사 차원에서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공정한 위치에 서 있다고 떳떳하게 주장하지만 나쁜 것을 나쁘다고 주장하는 게 정의는 아니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주장하는 우리 안의 악 역시 들여다볼 수 있어야 정의에 대한 윤리적 감각의 균형이 선다. <마스터>에는 그런 윤리적 감각의 균형을 가늠할 서사적 자리가 전혀 없다. 진현필의 연기, 누구에게나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달콤한 유혹을 건네는, 그리하여 수많은 고객을 모으는 그의 수법을 드러내는 영화 초반의 경과 보고회 무대 연기는, 그가 가족이라고 부르는 고객들의 마음을 훔치는 고도의 연기라고 영화에선 주장되지만 관객 입장에선 상투적인 연기다. 연출자도 그 점을 아는지 진현필이 무대 연기를 마친 후 다음 장소로 이동할 때 그의 가짜 연기 실력을 드러냄으로써 진현필이 악당 캐릭터로서 서사적으로 이미 지고 들어가고 있음을 실토한다. 진현필 캐릭터는 이병헌이라는 스타가 연기하지 않으면 보고 있을 인내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수준의 캐릭터다.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반해 투자를 결심하게 만들었던 그의 매력을 증명하려면 그에게 자기 인생을 맡겼던 사람들의 어리석음, 무지, 탐욕이 우리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데 이르러야 한다. 그가 사는 방식에서 표출되는 매력은 곧 우리 안의 악함이 반질반질한 최고 자본가의 외형을 향한 것이라는 자각이 있어야 한다. 거칠고 단순하지만 이병헌이 역시 악당으로 나왔던 <내부자들>에선 희미하게나마 그런 악의 공감성에 대한 묘사가 있었다.
기능적인 숏들의 나열로만 완성된 서사
강동원이 연기하는 김재명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없지만 진현필의 수하였으나 그를 배신하게 되는 박장군(김우빈)에 대해서는 조금 더 말할 것이 있겠다. 이 캐릭터도 평면적인 것은 다른 캐릭터와 비슷하지만 진현필의 편에 있다가 자기 생존을 위해 김재명 편에 서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약간의 실존적 동요를 영화에서 경험하므로 관객 입장에선 뭔가 약간의 이입 여지를 남기는 인물이다. 이 영화를 본 다음날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 우연히 직장인들이 <마스터>에 대한 감상 소감을 나누는 걸 옆자리에서 듣게 됐는데 그들은 김우빈이 이 영화에서 가장 연기를 잘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김우빈이 맡은 역할의 캐릭터가 그나마 유일하게 도덕적으로 진화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반영하는데, 흥미롭게도 그는 이 영화의 주인공들 가운데 클로즈업으로 웅변하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가 가장 생생한 캐릭터라는 느낌을 준 건 그에게는 그나마 다른 인물들과 달리 영화 속에서 뻔한 동선을 제공받지 않은 채 관객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공간으로 조금씩 이동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진현필이 점유한 공간이나 김재명이 점유하는 공간은, 영화 중반에 김재명이 터널에서 펼치는 액션이나 영화 후반부 필리핀에서 펼치는 김재명과 진현필의 대결 장면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직 박장군만이 다른 인물들과 달리 현실적 공간을 그나마 돌아다닌다. 형사들의 미행을 따돌리고 그가 비밀 전산기지를 방문하거나 진현필의 사기 피해자들 집회 모임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최소한의 동선 확보를 통해 그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그나마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인물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의 빈약한 캐릭터는 오로지 서사의 문제인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앞에서 낭비되는 클로즈업에 대한 불만을 얘기했다. 빠른 속도감을 지키면서 관객이 지루하지 않게 잘생긴 스타배우들의 클로즈업을 나열하는 이 영화의 연출 호흡은 서사의 기능적 지분을 넘어서는 잉여를 창조하는 데 완벽하게 실패했다. 서사 작법과는 다른 차원에서 <마스터>는 최근 한국영화에서 낭비되는 이미지 문법의 적절한 실례를 보여준다. 하나의 장면이 시작하면 인물의 위치와 동선이 생생하게 재현된다는 느낌을 주는 프레이밍과 연결을 이 영화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근본적으로 텔레비전 드라마의 호흡이지만 빠른 속도감으로 대충 얼버무리고 다음 장면을 향해 초조하게 내달리려는 이런 연출에서 유일하게 생존의 동아줄처럼 붙잡고 있는 것이 클로즈업인데, 유감스럽게도 나 같은 관객은 초반 30분 이후부터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었다. 현장에서 연출, 촬영, 여타 스탭들은 인물과 카메라의 위치, 인물의 동선과 재배치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만들었을 텐데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궁금하다.
하나의 가설을 만든다면 그건 이 영화가 스크린 위의 물리적 현실을 재현하려는 노력 대신 근사한 전시적 이미지에 봉사하는 기능적 숏들만으로도 서사가 완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이함의 소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가 현실을 방패 삼아 현실의 정반대 면을 재현한 가상의 판타지라서가 아니라 정의감의 충족이라는 서사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더라도 의당 심혈을 기울였어야 할 현실의 물리적 단면들의 재현과 복원에 관습적으로 임했기 때문일 것이다. 판타지에도 현재 우리의 삶의 모습이 투영되고 미래의 우리 모습이 어른거린다면 영화 속 이미지들은 우리를 소름 돋게 만들 수 있지만 이 영화에는 그런 이미지의 응결점이 생길 지점이 없다. 예를 들면 필리핀에서 진현필과 김재명이 담판을 지을 때, 경찰과 악당이 대결한다는 긴장감은 서사가 그때까지 감추고 있던 정보를 폭발적으로 풀어놓는 속도감 속에서 소모된다. 여기서 이 두 인물은 그 자체의 존재감으로 화면에 버티는 게 아니라 반전의 도구로서 소용된다. 캐릭터는 남아 있지 않고 이병헌, 강동원의 물리적 인상만으로 버티면서 서사를 다음 단계로 넘기는 데 급급하다. 숏이 정보의 기능적 전달을 넘어 내러티브의 진전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어떤 잉여의 것들을 창조할 때 우리가 그것을 영화적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영화에는 단 한순간도 잉여의 창조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게 발생하지 않는 이미지라면 예쁜 관광엽서의 소모성 이미지와 다를 게 없다.
같은 배우를 계속 언급해서 미안하지만 <마스터>의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강동원은 그 직전에 개봉했던 영화 <가려진 시간>에서도 비슷한 패턴으로 소모된다. 두개의 시공간이 있고 그중 하나의 멈춰진 시공간에 존재하는 소년이자 어른의 육체를 지닌 주인공으로 나오는 강동원의 이미지는 서사적으로 논리적 결함투성이인 플롯과는 별개로 어린아이들이 처한 고립의 절망감을 자기도취적으로 동어반복해 소비하는 곤란함에 봉착한다. 영화 중반에 등장하는 강동원의 존재감은 사슴처럼 맑은 눈망울로 뭔가를 호소하는 익숙한 이미지로 되풀이되지만 여기서는 아예 비현실의 공간에 처한 인물이라는 설정 때문에 위치와 동선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어떤 시도도 불가능한 모순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강동원은 서사적 결함에 덧입혀 자꾸 화면 속에서 겉도는 느낌을 주게 되고 세월호의 비극을 의식하며 이야기를 구상했다는 감독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작의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비극을 배우의 육체에 기대어 소비적인 페티시즘으로 낭비하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이미지의 생존력이 살아 있는 영화를 기대하며
이제 좀 다른 차원에서 개인적으로 아쉬움을 줬던 한편의 영화를 더 언급해보려 한다. 이언희 감독의 <미씽: 사라진 여자>는 주제의식과 접근방법 모두 선의를 갖고 있고 매우 꼼꼼하게 재현된 화면 역시 수준급 연출력을 증명하지만 이상하게도 영화가 끝난 후 뭔가 해소되지 않은 감정을 준다. 나는 이게 일정하게 스릴러 장르 문법을 따르며 몇개의 맥거핀을 던진 후 살짝 방향을 비틀어 서사에 윤곽을 주는 이 영화의 전개 방식 때문이 아니라 인물 클로즈업과 사운드에 대한 약간 지나친 의존에 원인이 있다고 본다. 이 영화는 보모와 아기가 함께 실종되었다고 믿었다가 보모가 아기를 납치했다는 걸 알게 된 주인공 이지선(엄지원)이 결국 중국인이었던 보모가 왜 아기를 납치했는지 그 전모를 알고 공감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이분해서 나눌 수 없는, 두 여자주인공의 위치는 서사의 전개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데 주인공 이지선과 보모 김연(공효진)은 서로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 아기를 잃어버린 이지선의 행방을 따라 반쯤 정신을 잃고 경찰과 별개로 탐문에 나서는 이지선은 숱한 위협에 노출돼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그를 대하는 주변의 시선은 어느 쪽에서도 우호적이지 않다. 직장 상사, 경찰, 이혼한 전남편, 시어머니, 브로커, 심지어 보이스 피싱 전화 너머의 미지의 남자에 이르기까지 이지선이 접하는 인물들은 그를 위협하거나 불신하거나 적대시 한다. 영화는 부분적으로 그가 느끼는 고립감과 두려움을 효과적으로 재현하는데 이를테면 그가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 골목을 심야에 탐문한다거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거리 복판에서 미친 여자 취급을 당하며 아기를 찾기 위해 달리거나, 보모가 살던 시골집을 탐문하며 낯선 집의 대문을 들어설 때와 같은 장면에서 화면들은 그의 실제 존재와는 별개로 무능력하고 약간 이상하고 무모하고 믿을 수 없고 연약한 여자로 정의되는 상황들을 시각적으로 잘 재현한다. 불가피하게 영화는 이지선의 내면을 관객에게 이입시키기 위해 허다한 근접 화면을 사용하는데 이는 영화의 중· 후반 이후 과거 회상 장면으로 사연의 전모가 밝혀지는 보모 김연을 보여줄 때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주력해서 사용하는 또 하나의 장치는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보모 김연의 목소리다. 김연은 한국말을 잘 쓰지 못하지만 아기를 달래기 위해 중국어 자장가를 부르는데 그 어조 덕분에 아기들이 그의 목소리에 잘 반응한다. 김연이 자장가를 부르는 몇개의 장면 외에 김연의 과거를 보여주는 몇몇 장면에서 김연이 통곡을 할 때 그의 울음소리가 화면에 계속 이어지면 현재 장면에서의 이지선이 마치 그 목소리를 듣는 듯 연결되는 장면들이 영화에는 꽤 나온다. 김연의 자장가 소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김연이 물속에 뛰어들어 스스로 죽음을 택할 때 한국어로 바뀌어 화면에 깔린다. 이것을 누가 부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소리는 영화 내내 주조음으로 깔려 있던 것이고 그것이 일종의 배음 효과를 가졌더라면 이 마지막 장면에서 한국어로 들리는 자장가 소리는 오케스트라의 연주 화음 못지않게 관객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두 엄마, 이지선과 김연이 아직 살아 있는 아기 다연의 목숨을 놓고 대립할 때 번갈아 오가는 그들의 클로즈업을 통해 배음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인상을 관객에게 주고 싶었다면 그전에 매 장면에 수시로 끼어드는 클로즈업들은 좀더 자제됐어야 했다고 본다.
나는 뛰어난 감독들은 무성영화와 경쟁한다고 믿는 구식 평론가일지도 모르지만, 21세기의 영화 역시 근본적으로는 무성영화적 속성을 지녀야 한다고, 그래야 이미지의 생존력이 보장된다고 생각한다. 최근 한국영화들은 너무 많은 근접 이미지, 너무 많은 사운드로 화면의 전체 긴장을 해하며 결과적으로 영화의 강력한 표현 도구인 근접 이미지를 무의미하게 낭비하고 있다. 이것이 당장에는 스타 이미지의 소비를 통한 흥행 제고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머지않은 기간에 이미지의 상투형이라는 동굴에 갇혀 흥행 제고에도 감점 요인이 될지 모른다. 무엇보다 낭비되지 않는 이미지, 정확한 순서에 정확한 크기로 배치되는 이미지, 전체의 아우라를 잘 보존해서 현실적 환기력을 꾀하려는 이미지, 그런 창조의 결과물들을 한국영화에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