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적이면서도 시적인 공포감을 일으키는 질식할 듯한 누아르” (<롤링스톤스> 피터 트래버스)라는 상찬에서부터, “우아한 외견에도 불구하고 정서적 수준에선 상처받은 10대답다”(<빌리지 보이스> 빌지 에비리, <뉴욕타임스> 매놀라 다아기스)는 분열적 의견까지 작품에 대한 평이 갈린다. 2016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을 시작으로 각종 영화제에서 감독상, 각본상을 수상하고 있는 톰 포드의 두 번째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에 대한 언급이다. 심리적 누아르로 출발하지만 현대적 웨스턴으로 질감을 달리하는 영화의 장르적 외견은 일견 매혹적이다.
감독의 전작 <싱글맨>에 비하자면 영화의 미적 스케일과 작가로서의 장악력이 한층 넓어지고 깊어졌다. 오프닝을 제외하고는 영화의 정서와 톤이 금욕적일 만큼 엄밀히 절제되고 있다. 영화는 공간적으로는 화려한 LA와 흙먼지 자욱한 텍사스를, 시간적으로는 현재와 과거를, 내러티브적으로는 사실과 허구 사이를 오간다. 이렇게 의미의 서로 다른 층을 중첩시키는 방식을 통해 영화가 궁극적으로 어떠한 진실에 도달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의 언저리에서 <녹터널 애니멀스>를 되새겨본다.
부르주아의 침실에서 현대적 비극 읽기
영화가 시작되면 거대한 살덩어리들이 벌이는 초현실적인 쇼가 펼쳐진다. 병적으로 비만인 늙은 여성의 나체는 미국 치어리더의 아이콘과 기묘하게 결합돼 있다. 이입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희열 바깥에는 세련되고 차가운 부르주아들의 무심한 삶이 있다. 퍼포먼스 아트 전시회의 오프닝이기도 한 이 장면은 이 영화가 어떠한 기괴함과 심리적 분열에 관한 것임을 암시한다. 곳곳에 배치된 현대미술 작품들, 교양 있고 패셔너블한 속물 예술가집단, 아찔하게 잘생기고 섹시한 남편, 금속과 유리로 지어진 럭셔리한 대저택. 지나치게 세련되고 투명하며 냉랭하게 정련된 부르주아적 삶을 유지하는 와중에 어느새 수잔(에이미 애덤스)은 예술에 대한 흥취를 상실해버렸다.
수잔은 예술가들과의 파티에서 오프닝에 등장한 작품을 완벽한 정크 컬처라고 말한다. 정크가 예술이 되는 전도성이야말로 세계 모순의 본질이라는 진단이다. 팔리고 마케팅되며 곧 폐기될 것들을 잔뜩 만들어왔던 패션계에 대한 톰 포드의 회고와도 같은 언급이다. 상류층의 삶을 전시하는 영화 초반부를 지나 텍사스가 빈번히 소환될수록 영화는 좀더 멋스러워진다. 영화는 사치스런 LA가 아니라 황량한 텍사스 황야에 작품의 족적을 강하게 남긴다. 스타일리시한 재주꾼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미국의 존 포드가 되겠다는 톰 포드의 야심이 읽히는 지점이다.
현대미술 갤러리 관장 수잔은 예술에 대한 권태감을 느끼는 동시에 부르주아적 위선으로 유지한 결혼 생활의 파탄을 예감하지만 차마 이를 인정하기 어렵다. 그러던 와중에 20년 전 헤어진 전남편 에드워드가 보낸 미출간 소설을 받게 된다. 제목은 <녹터널 애니멀스>, 야행성이던 자신을 지칭했던 말이다. 묘한 심리적 저항감으로 묵혀두다 잠이 오지 않는 날, 소설을 펼쳐 읽기 시작한다.
수잔이 읽는 소설 속 남자주인공 토니의 이야기는 유약한 남성에게 닥친 비극을 보여준다. 텍사스 여행 중 휴대폰도 터지지 않고 사람도 드문 심야의 고속도로에서 가족은 난폭운전자 레이 무리를 만난다. 불편한 시비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지만 악운이 겹치는 와중에 납치당한 아내와 딸은 다음날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텍사스 경찰관 바비와 함께 사건을 추적해가는 가운데 토니는 온갖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의 비극적 결함은 ‘나약함’에 놓여 있다.
이렇게 전개되는 소설에 몰입하던 수잔은 불가피하게 과거의 자신과 에드워드를 떠올린다. 에드워드가 소설 속에 늘 자기 이야기를 투영하기도 했거니와 소심한 주인공 토니가 과거의 에드워드와 닮았기 때문이다(소설 속 토니와 전남편 에드워드는 제이크 질렌홀이 1인2역을 맡았다). 20년 전 수잔은 텍사스 출신 소설가 지망생 에드워드를 뉴욕에서 만나 낭만적 사랑에 빠졌고 결국 결혼에 이르렀다. 냉소주의자 수잔은 화가의 꿈을 포기했지만 로맨티스트 에드워드는 소설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의 결혼 생활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여자는 남편의 예술가적 재능을 신뢰하지 못했다. 확실한 미래를 붙잡고 싶었던 여자는 남자와 헤어지기로 한다. 마침 미남에다 수완이 좋은 새 연인도 생겼다. 수잔이 선택한 오랜 사랑의 마무리는 잔혹했다.
적녹보색 잔상의 효과
오스틴 라이트의 소설 <토니와 수잔>을 각색한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는 이와 같이 현재-소설-과거를 주축으로 한 3개의 서사 가닥으로 복잡하게 맞물려 있다. 거의 대부분의 영화 전개는 야행성 동물 수잔의 불면증에 최적화된 행위, 즉 독서를 통해 지속된다. 독서는 간헐적 중단과 지속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독서의 과정은 결말의 파국을 불길하게 예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개를 목도할 수밖에 없는 수난의 과정이다. 무한히 유예될 수 없는 고통이야말로 에드워드가 소설을 통해 수잔에게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복수의 메시지다.
우선 소설 속 주인공 토니는 극렬한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동반하는 일련의 수난을 경험한다. 이러한 수난은 과거 에드워드가 경험했던 사랑의 파탄에 대한 심리적 형상화로 보인다(아내와 자식을 잃고 고통 속에 홀로 내던져진다). 영화의 분명한 모티브인 수난과 복수는 현대미술 작품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가령 데이미언 허스트의 <성 세바스찬, 절묘한 고통>은 검은 황소의 신체에 화살이 꽂힌 작품으로 그리스도의 책형을 외설적으로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수잔의 갤러리에 있는 과감한 타이포그래피 작품에는 피 흐르듯 물감이 뚝뚝 떨어지는 복수(revenge)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액자 이야기 내에서도 본격적인 복수의 서사가 서서히 작동된다. 소설 속 토니는 형사 바비와 함께 레이를 사적으로 응징하려 술집에 찾아간다. 술집 바깥 네온 간판의 색이 붉은색과 녹색으로 점멸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 격렬한 복수의 장면을 읽기에 앞서 수잔은 작은 새가 유리창에 부딪쳐 죽은 장면을 목도한다. 이는 과거 에드워드와 헤어지기 위해 수잔이 감행한 잔혹한 결단을 상기시키는 장치다.
스타일 면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붉은색에서 시작해 그 보색인 녹색의 잔상에서 끝나는 영화다. 오프닝 퍼포먼스 아트의 배경, 갤러리 사무실의 벽지나 소파의 패브릭, 범죄가 일어나는 트레일러의 커튼은 이 붉은 이미지를 반복해서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그리고 결말에서 수잔은 때깔 고운 녹색 드레스를 입고 에드워드를 기다린다. 영화가 부여하는 형식적 균형감각을 생각해본다면, 이 적녹보색의 효과는 극도로 현대적 공간인 LA나 뉴욕과 같은 대도시와 척박한 황야에 불길한 트레일러만이 존재하는 텍사스 공간의 대조에서도 드러난다. 인공적 문명의 잔상에는 야생의 무심함이 남겨진다. 적녹보색의 연쇄적 효과에 의해 육식성 야행성 동물과도 같던 냉소주의자 수잔의 마지막 모습에서 부재의 인물 에드워드의 잔상이 강렬하게 떠오른다. 영화의 진정한 승자는 결코 등장한 적이 없었던 에드워드인 셈이다.
이 잔상의 인상을 곱씹어본다. <녹터널 애니멀스>는 낯선 공간에서 일어나는 외설적 범죄를 다룬다는 점에서 데이비드 린치의<블루 벨벳>에, 복수와 관련된 심리 스릴러라는 점에서 데이비드 핀처의 <나를 찾아줘>에 비견되기도 했다. 불온한 초자연적 에너지가 부재하다는 점에서는 린치보다 핀처의 작품에 더 가까워 보인다. 여주인공을 살펴보면 준거가 보다 분명하다(남주인공들 모두 성공하지 못한 소설가라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녹터널 애니멀스>의 수잔과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는 강인하고 이지적인 상류층 여성으로 주인공 남성을 계층, 학력 수준,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 등 여러 면에서 압도한다. 그녀들은 누아르나 하드보일드의 팜므파탈과 질적으로 다르다. 도덕적으로 모호한 여성이 비정한 남성을 성적으로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주장이 강한 냉소적 여성이 남성을 이지적으로 압도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수잔과 에이미 모두 보수적인 공화당 지지층 부르주아 가정에서 자라나 일탈적인 청춘을 보내지만 결과적으로는 속물적 냉소주의자인 본성을 차차 되찾게 된다. 문제는 지독한 리얼리스트이기 때문에 아티스트가 될 수 없는 이러한 유형의 여성이 지닌 강인함이 섬세하고도 로맨틱한 예술가 기질의 남성의 자존감을 자극하는 경우다. 상식적 수준에서 소설 속 토니는 현실의 에드워드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서사의 심층적 층위에서, 상처받은 에드워드는 소설 속 레이의 입장과 중첩된다. 레이는 자신의 남성으로서의 자존감을 건드린 토니의 아내와 딸을 잔혹하게 강간하고 구타한 뒤 살해했다. 그렇다면 소설 속 토니는 소설에 이입하여 주인공의 수난을 고통스러워하며 과거를 상기하는 수잔의 입장과 겹칠 수 있겠다.
여전히 모호한 정체성 속에 남겨진 에드워드
앞서 상처받은 10대의 감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영화에 대한 혹평은 이러한 미숙한 방식의 복수극에 내장된 여성(특히 육체성이 강조된) 혐오의 미묘한 징후에 대한 평가일 것이다. 다시 오프닝을 복기해보자면 여성의 나체는 일반적인 비율을 넘어 확대된 채 전시됐다. 압도적이며 역겹고 혐오스럽다. 그 감각은 늘어진 가슴과 쭈글쭈글한 음부에서 더 강렬하게 드러난다. 영화 중반에 기묘하고 관능적인 도미니크 앵그르의 누드화를 모방한 현대미술 작품에도 엉덩이만 왜곡되게 확대되어 있어서 여성 신체에 대한 불쾌감을 강조한다. 영화는 작가 에드워드가 소설 창작을 통해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에드워드가 마련한 독서의 장치를 통해 수잔이 화려한 외양 속에 감춰진 자신의 외설적이고 기괴한 본성을 조우하게 되는 폭로의 과정으로 전개된다. 영화 스타일에 비해 감성의 폭이 매우 좁고 유아적이라는 점이 꽤나 불균형적이다. 강한 여성에 대한 시선이 육체의 기괴성, 특히 음부, 가슴, 엉덩이 등 생식기적 고착에 사로잡혔다는 점도 불편하다.
이렇듯 우아한 영화의 외견을 거두어내면 영화는 낭만적 사랑을 선사한 남자에게 낙태와 불륜으로 응대한 여성에 대한 복수 이야기로 환원된다. 이는 영화 속 소설을 통해 전개되는데, 어떠한 폭력적 외설성을 뚫고 예상 불가능한 지평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조히즘적 자기 학대를 감내하면서까지 상대방을 정서적으로 고문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적이다. 독서를 통해 수잔은 변화하지만 영화에 등장한 적 없는 에드워드는 모호한 정체성 속에 여전히 숨은 채 20년간 변화하지 않은 듯하다. <녹터널 애니멀스>의 액자 속 이야기는 에드워드가 자기 고백적 창작을 통해 구성한 진실의 구축이었다기보다 복수를 위해 의도된 눈속임의 시나리오에 가깝다. 중첩된 의미의 층들을 벗겨가다 보니 유치한 기만술이 앙상하게 남겨져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를 궁극적으로 옹호할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