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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담>의 초반부는 흔한 88만원 세대 젊은이의 일상을 소묘한다. 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윤주(이상희)는 졸업작품 전시를 위해 고물상에서 작품 재료로 쓸 폐품을 고른다. 그는 방 두개짜리 집에서 또래 여자 친구에게 월세를 내며 세들어 산다. 그 여자 친구는 남자와의 섹스를 좋아하는데 윤주에게 왜 연애를 안하느냐고 성화다. 작업실에서 고단하게 일을 하며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남들 일할 때 아버지는 뭘 했나 모른다고 불평하는 대학원 친구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짓는 이 여자주인공 윤주는 딱히 매력을 느낄 겨를이 없을 만큼 평범하다.
학교 강의실, 좁은 월셋집, 고물상, 작업실, 편의점 등으로 구획 지어진 윤주의 주된 공간에서 비일상적인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다. 유일하게 극적이랄 수 있는 사건이 있다면 그건 연애다. 제목 그대로 이 영화는 윤주의 연애담을 그리는데 묘사 방식이 종래의 다른 영화들과 많이 다르다. 그건 이 영화가 여자들의 사랑을 다룬 영화
[김영진의 영화비평] 연애의 과정과 젊은이들의 삶을 특별한 방식으로 묘사하는 <연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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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열여덟 번째 영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하 <당자당>)은 출구를 향한 욕망을 자극한다. 서울 연남동 일대의 한정된 공간을 오가며 진행되는 이 영화의 플롯은 미정형 상태의 혼돈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당자당>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가로막는 요인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투쟁을 묘사한다. 미성숙하고 우유부단한 주인공 영수(김주혁)는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강박증을 가진 홍상수의 남자들이 자기 몰입적인 강박에 빠지는 꼴을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당자당>에서 홍상수의 이야기를 형성해온 우연한 만남과 기이한 재조합, 여로형(形) 플롯 그리고 복습되는 장면들은 내러티브의 계열 위에서 진동한다. 스토리는 어떤 과장이나 수사도 없는 정직한 문장처럼 담백하지만 플롯은 다소 복잡하다. 홍상수는 많은 모순과 부조화에 대해 확실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서사의 주요 단위들은 신중하게 조직되었고 정연하게 조각나 있다. 홍상수는 행위의
[장병원의 영화비평] 홍상수 감독의 신작을 내러티브와 구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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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턴은 서부라는 공간에 대한 영화다. 그런데 주요 배경인 텍사스주는 남부에 더 가깝고, 몬태나주는 북부라 부르는 게 맞다. 정작 서쪽 끝의 로스앤젤레스는 웨스턴의 공간으로 불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서부는 상징적인 이름인 셈인데 동부의 반대편 정도로 파악하면 되겠다. 동부를 도시적인 공간, 즉 인간이 만든 규칙과 건물과 시스템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본다면 서부는 어떤 개념이 지배하는 공간일까? 자연이 지배하는 공간 정도가 어울릴 성싶다. 그렇다면 자연적인 공간이란 또 무슨 말일까?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읽다 도시를 언급한 문장을 접했다. 그녀는 “집 밖에서 주로 생활하다 잠시 집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도시는 삶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날씨가 기분에 영향을 줄지언정 생사 결정의 원인이 될 수 없는 공간이다”라고 썼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는 공간, 그곳이 바로 서부다. 땅의 순수함을 믿었던 사람들이 서부로 이동했고, 그 땅에 붙어살았던 인간에 의미를 부여해 서부의 신화가 완성되었다.
[이용철의 영화비평] 무법자가 사라진 웨스턴 <로스트 인 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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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홍상수는 리얼리즘의 감각으로 본질을 이야기한다. 늘 그랬듯 남자주인공은 우유부단하고, 그 때문에 여러 사건들이 생긴다. 술에 취할 때만큼은 용감해지는 인물들의 성향도 여전하다. 영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을 지배하는 것은 술, 사랑, 충동적 행동들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술 취한 주인공이 쟁취하는 대상은 이전과는 다르다. 주인공 영수(김주혁)는 눈앞에 앉은 여성을 갈구하지 않은 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눈앞에 없단 사실’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이 점에 주목해 영화를 살피려 한다. 절망과 깨달음이 현실을 바꿀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이 작품은 진지하게 파고든다. 나아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만일 현재의 상태를 그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사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고. 이 질문은 “영화가 현실의 예술인가?”라는 시네마의 본질적 의문과도 연결된다. 물론 그 대답은 유동적이다. 철학자 클레망 로세의 이야기처럼 영화의 사실성은 어느 누구도 붙잡을 수 없고,
[이지현의 영화비평]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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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땀 흘려 일한 만큼만 받는 사람들, 혹은 그마저도 못 받는 대다수 사람들에겐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게 금융자본주의다. 톰이 100만원을 벌어 은행에 넣고 제임스가 은행에서 100만원을 빌리면, 톰과 제임스는 총 200만원을 쓸 수 있다. 번 돈은 100만원뿐인데 쓰는 돈은 2배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국내에 도는 돈이 1천조원이 넘는다. 죄다 빚이다. 사람들에게 빚이 많을수록 은행은 돈을 번다. 17세기 영국 금 세공업자들이 탄생시킨 은행업은 대출을 많이 내줄수록 많은 이자를 받아낼 수 있었고 그러면 더 많이 대출해줄 수 있으므로 갖가지 대출상품을 만들어왔다. 처음엔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돈을 꿔줬는데, 대출에 맛들인 은행업자들은 담보만 있으면 돈을 내주기 시작했다. 생산되는 가치와 별개로 유통되는 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은행이 얼마나 대출을 해주고 싶어 안달인가 하면, 실제로는 아직 사지도 않은 집을 담보로 돈을
[송형국의 영화비평] 각자도생의 공기를 건조하게 담아낸 <로스트 인 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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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엄마는 한 계절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난 동네 노인들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유독 그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 건 죽음에 관한 것이고 장소가 병원이었기 때문이다. 수면내시경이 끝나고 가수면 상태에서 깬 엄마는 갑자기 그런 노인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에는 내게 그런 걸 소설로 써보라고 했다. 그 이야기에서 죽음의 과정이 어떠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러니까 병사(病死)였던가, 사고사였던가, 투병의 기간이 길었던가, 혹은 비참했던가- 그 이야기를 전하던 엄마의 태도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기억한다. 엄마는 그들의 죽음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죽음 직전까지 그들이 어떤 일상을 보냈는가를 주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이런 모습에 대해 기억할 수 있었다. 어느 노인의 산책은 도시의 경계선에 이르기까지 종일 이어지기도 했다는 것. 그 노인에게는 엄마가 여러 번 강조했듯이 번듯한 집이 있었지만 돈이 필요한 자식을 위해 처분하고 세들어
[김금희의 영화비평] <죽여주는 여자>의 마지막 장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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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죽여주는 여자>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길에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이하 ‘판도라’)는 ‘막달레나 공동체’와 ‘용감한 여성연구소’의 제안으로 시작된 용산 성매매집결지 여성들의 사진 모임이자 이들의 작업을 일컫는 타이틀이다. 나는 그들을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봄날의박씨 펴냄, 2016)라는 책을 통해 알았는데, 이 책에는 살면서 카메라를 든 경험이 없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용산 성매매집결지를 수천장의 사진으로 기록한 작업의 의의가 실려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소영(윤여정)은 ‘판도라’ 여성들과는 달리 카메라 앞에 서 있지만, 이들은 성매매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상태로 보이는’ 구조에서 삶을 이어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례로 ‘판도라’ 팀이 해외에서 전시 초청을 받았을 때, 피츠버그대학의 한 한국인 학자는 이 전시가 “‘한국인 사창가 사진전’으로 보일 것
[양경언의 영화비평] <죽여주는 여자>, 난감한 삶의 형식 앞에 카메라가 놓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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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률 감독의 모든 영화들을 지배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죽음’이었다. 그의 영화에는 모든 인간이라면 숙명적으로 맞이해야 할 육체적 죽음이 있었고, 이주민(민족 혹은 노동자)들에게 가해진 돌연하고도 부조리한 죽음들이 있었다. 죽음에 대한 그의 묘사가 달라진 건 아마도 감독의 한국 생활 이후일 것이다. 특히 <풍경>(2013)과 <경주>(2014)에서부터 <필름시대사랑>(2015)을 거쳐 이번 영화 <춘몽>까지, 한국에서 제작된 이 영화들 속 죽음들은 육체의 물리적 소멸이나 서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이고 시적인 방식으로 사유되고 묘사되는 죽음들이다. 그에게 영화란 꿈의 언어와 흡사한 것이고, 동시에 그것은 죽음을 사유하는 언어이다.
죽음과 영화
<경주>에서 시작해보자. <춘몽>과 흡사 거울처럼 마주보고 있는 이 작품에서 서사의 작인은 ‘죽음’이었다. 선배의 돌연한 죽음으로 경주를 방문한 한 남자의 이틀을 기록하고
[정지연의 영화비평] 영화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실험하고 보여주는 장률의 <춘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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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과 북한은 이데올로기로 나뉘어졌다. 남북문제를 영화화할때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을 하는 이유다. 직접 메가폰을 쥐진 않았지만 김기덕은 이미 몇번에 걸쳐 남한과 북한에 관한 영화-<풍산개>(2011), <붉은가족>(2012)- 를 제작해왔다. 만약 직접 연출한 <야생동물 보호구역>(1997), <해안선>(2002)까지 한 소재로 본다면 김기덕 영화의 남북에 대한 고민은 더 긴 역사를 지닌다.
당연한 일임에도 동시대의 대중영화 감독들이 대부분 도외시하는 남북의 문제에 김기덕은 왜 그렇게 천착하는 것일까? 그가 직접 쓴 노트를 읽어보면 남북은 그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다. 그는 영화의 제목처럼 단순한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 <풍산개>에서 주인공 풍산(윤계상)이 휴전선을 넘는 방식처럼 말이다. 긴장대 하나로 그는 귀신같이 분계선 위를 난다. <붉은가족>에서는 남파 간첩들로 이뤄진 가족이 등장한다. 나란히 이웃한 남쪽
[이용철의 영화비평] 남북분단이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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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백>을 외부인으로서는 가장 먼저 본 사람일 것이다. 후반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아 최승호 감독이 직접 내레이션을 하는 가운데 1차 편집본을 뉴스타파 사무실에서 봤다. 최승호 감독뿐만 아니라 정재홍 작가를 비롯한 스탭들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내 반응을 기다렸다. <자백>을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하고 싶었던 그들은 몇몇 영화계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했으나 한국의 영화제에서는 틀기 어려울 것이니 해외 영화제에서 먼저 상영한 후 국내 개봉을 꾀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좀 우습게 들리겠지만 올해 초 상황은 그랬다. 전주국제영화제의 수석 프로그래머 자격으로 <자백>을 먼저 본 입장에서 나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사가 끝난 후 나는 간단히 말했다. “재미있는데요. 전주에서 상영하시죠.” 최승호 감독의 입이 벌어졌다. “아, 그렇습니까? 하하하.”
실제로 이 다큐멘터리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감독이 주인공이
[김영진의 영화비평] 다큐멘터리를 넘어 거대한 감동까지 끌어내는 <자백>의 영화적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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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를 본 후 머리 한구석에서 ‘또 한편의 한국영화, 남자영화’ 정도로 분류했던 것 같다. 준수한 만듦새와 몇몇 빼어난 장면들이 잔상처럼 남았고, 그뿐이었다. 크게 비평의 언어를 필요로 하는 영화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첫인상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건 <아수라> 이후 영화를 둘러싸고 갈라진 반응들 때문이다.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렇지 않은 영화가 없겠지만 <아수라>는 유달리 강하게 나뉠 수밖에 없는 종류의 영화다. 조금 과격하게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감독의 취향을 극적으로 밀어붙였고 감독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방식을 취해서 완성됐다. 감독의 개성, 일관된 인장들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만큼 누군가에는 피로와 불편으로, 누군가에게는 쾌감으로 다가오는 게 당연한 일이다.
저평가된 수작인가, 또 하나의 실패인가
다만 애초에 나는 이것이 단순히 취향의 문제일 것이라 섣불리 예단해버렸는데, 이후 영화에 대한 아쉬움
[송경원의 영화비평] <아수라>와 <밀정>, 조각난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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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 히치콕은 프랑수아 트뤼포와의 대화에서 <싸이코>가 완벽한 영화는 아니라고 했다. 주제는 불쾌하고, 인물은 특징도 없이 왜소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그럼에도 히치콕은 이 영화에 만족감을 느낀다고 했다. 관객에게 조바심을 느끼게 하고, 공포에 떨게 했으며, 비명을 지르게 했다는 점에서 <싸이코>(1960)가 관객에게 ‘정서적 영향’을 주었으며, 이 점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것이 순수영화(pure film)의 힘이라고 덧붙였다. 이소현 감독의 <할머니의 먼 집>을 보면서 불현듯 위의 대화가 떠오른 이유는 단순하게도 이 영화를 보고 취한 나의 행동 때문이었다. 극장을 나와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참으로 오랜만의 통화였다. 그리고 확언컨대 이 영화를 본 손녀, 손자의 수만큼 세상의 할머니들은 잠시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누군가를 떠올린다는 것, 잠시 용기를 내 전화번호를 누른다는 것, 궁금치도 않았던 안부를 새삼 묻는다는 것,
[이미랑의 영화비평] <할머니의 먼 집>이 관객에게 정서적 영향을 끼치는 방식과 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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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수라>가 김성수 감독의 회심의 역작이라 생각한다. 어린애스러운 남자들의 진면목을 탈탈 털어 보여줬다는 점에서 유아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남자들의 어린애스러움을 어린애스러움 그대로 보여준 것은 대단한 용기다. 그리고 현재의 한국영화계 상황에서 스타 배우들을 데리고 이런 영화를 만들어낸 감독과 제작자의 솔직함과 결기에 탄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을 경계 끝까지 밀어붙인 배짱
<아수라>는 어떤 면에서는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면에서는 그 기시감을 통째로 부정하는 영화이다. 사람들은 이 영화가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체 되풀이하거나 의기양양 자랑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이를테면 평소 남자들의 작태가 스크린에 비장하게 펼쳐지는 것을 싫어하는 듀나 평론가는 이 영화에 질리도록 표현된 마초주의의 이면에 심드렁하게 반응한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실린 칼럼니스트 허경의 글은 아예 이 영화가 남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을 대충대충 아저
[김영진의 영화비평] <아수라>가 표현한 깊은 단념의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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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그니피센트 7>(2016)은 서부극의 고전 <황야의 7인>(1960)의 리메이크이지만 ‘7인의 총잡이가 마을 주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팀을 이루고 악한으로부터 마을을 구한다’는 기본적인 플롯 외에는 상당 부분 다른 면모를 보인다. 이 영화는 <7인의 사무라이>(1954)와 <황야의 7인>이 마련한 서사의 밑그림을 따라가고 총과 말, 박차 등 서부극의 컨벤션을 충실히 재현하지만 그 나머지는 지극히 현대적인 각색과 번안화로 채워진다. 현대 액션 활극에 서부극의 기운을 불어넣었던 <더 이퀄라이저>(2014)와는 상반된 장르에의 접근법. 흑인 총잡이 샘 치섬(덴젤 워싱턴)을 중심으로 한 7인의 멤버 구성은 백인만이 아니라 아시아계, 히스패닉, 아메리카 원주민까지 아우르는 다층적인 인종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으며 시공간적 배경은 멕시코의 시골 마을에서 남북전쟁 이후 골드 러시(Gold Rush)가 한창인 마을 로즈크릭으로 변경되었다.
[조재휘의 영화비평] <매그니피센트 7>, 리메이크로 함축한 서부극의 역사와 정치적 공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