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에 본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이미지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별로 없다고 답할 것이다. 영화에서 숨 막히는 이미지를 만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설령 그런 이미지를 보더라도 ‘CG로 작업했겠지, 뭐’라고 짐작하고 넘어가는 게 고작이다. 반면 인상 깊었던 몇몇 뮤직비디오는 있다. 솔란지의 <하늘의 학>(솔란지와 앨런 퍼거슨이 공동 연출), 라디오헤드의 <데이드리밍>(폴 토머스 앤더슨 연출), 데이비드 보위의 <라자루스>(조한 렝크 연출), 비욘세가 앨범을 발표하면서 내놓은 중편영화 <레모네이드> 등이 보여준 창의력과 신선함, 용기, 사려 깊음은 잊을 수 없다. 특히 나를 놀라게 했던 뮤직비디오는 제이미 엑스엑스의 <가쉬>다. 로맹 가브라스가 연출한 이 뮤직비디오는 음악사이트 ‘피치포크’의 평대로 ‘대체 어떻게 만들었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가브라스는 경이로움이 평범한 사람들의 몸에서 발산되는 것임을 안다. 누구의 영화도 도달하지 못한 곳에서 가브라스는 미래의 중국을 바라보는 듯하다.
<라라랜드>의 초현실적 세계
그나마 위안을 준 영화는 <라라랜드>(2016)다. 자크 드미의 <로슈포르의 숙녀들>(1967)을 흉내낸 도입부는 드미의 경이로운 아이디어에 못 미치지만 날렵한 속도와 매끈한 움직임으로 젊은 감독의 패기를 드러낸다. 엔딩에서 다시 드미의 <쉘부르의 우산>(1964)을 노골적으로 끌고 온 데이미언 셔젤은 그 사이로 빈센트 미넬리를 붙여둔다. 비현실적으로 낭만적인 장면에선 <밴드 웨건>(1953)의 앵무새 춤사위 장면을 빌려왔다. 불현듯 세상과 동떨어져 세바스찬과 미아는 구애의 춤을 나누다 아이폰의 벨소리에 현실로 돌아온다. 놀라운 건, 씁쓸한 엔딩을 향한 클라이맥스에서 미넬리의 혁명적인 뮤지컬 <파리의 아메리카인>(1951)을 사용한 점이다. 몇년의 시간이 흘러 세바스찬과 미아가 재회하는 장면에서 셔젤은 미아가 아닌 세바스찬의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이제 유명한 스타가 되어버린 미아보다 여전히 평범하면서도 꿈을 간직한 그쪽으로 돌아서는 건 당연한 선택이다. 세바스찬이 이를 악물고 과거와 대면하고 있음을 알기에 셔젤은 뮤지컬 너머의 어떤 것과 접촉하기로 한다. 밀려오는 감정의 격류를 표현하기에 사실적이고 고전적인 뮤지컬은 힘이 부친다. <파리의 아메리카인>의 진 켈리처럼 라이언 고슬링이 초현실적인 무대 사이로 황홀하게 넘나드는 장면은 애니메이션 기법이 없다면 온전히 완성되기 힘들다. 움직이는 그림 속으로 실제 인물이 들어간 상황은 불가능한 것을 표현해내는 그래픽의 힘에서 얻은 결과다. 그 순간, 건반을 나지막이 두드리는 세바스찬은 객석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미아를 끄집어내 상상 속의 세계로 안내하고 춤을 추고 공중을 가른다. 그것은 그들이 나누었던 기억과 나누지 못했던 꿈이 뒤섞인, 그러나 돌아갈 수 없는 세계다. 소유한 몇분 동안에 남자는 어떤 슈퍼히어로도 하지 못할 일을 해낸다. <라라랜드>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그런 세계를 가능하게 한다.
정신나간 도시의 교향악 <마이펫의 이중생활>
뮤지컬은 가장 전복적인 성격의 장르다. 단, 여기서 전복성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장르는 종종 비현실적인 설정을 지닌다. 하물며 뮤지컬에 애니메이션이 더해졌다면 따로 말할 것도 없다. 내가 근래 유니버설이 배급한 애니메이션에 열광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이 말은, 다른 거대 스튜디오에서 배급한 애니메이션들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스템 속에 무비판적으로 머물게 하고 등을 두드리며 얄팍한 감동을 안겨주는 척하는 게 애니메이션이 맡은 역할의 전부라면 아쉽지 않은가. 그럴 거라면 굳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 2010년에 시작된 <슈퍼배드> 시리즈와 <미니언즈>의 폭발적인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일루미네이션 엔터테인먼트’는 2016년에 좀더 과감한 시도를 펼치기로 한다. 만약 <마이펫의 이중생활>(2016)을 그렇고 그런 애완동물 애니메이션으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마이펫의 이중생활>은 요즘 상업영화들이 얼마나 나약하고 안일한지 대놓고 풍자하는 작품이다. 대도시의 계급성을 소리 높여 비판하는 대신 망각의 거대한 모포 아래 숨겨두었던 도시의 골칫거리를 의식적으로 한통 안에 넣고 흔들어 폭발시키는 영화다. <마이펫의 이중생활>은 도시 한복판에 내던져진 애완동물들의 하루 동안의 모험에 관한 이야기다. 이 과정에서 중산층 시민들이 키우는 애완동물들이 버려진 애완동물들이 조직한 지하세계와 대면하고, 마침내 연합에 성공한 그들 세력은 최상류층에서 벌어지는 파티를 방문해 난장판을 만든다. 가히 뉴욕 오디세이라 부를 만한 이 작품은 우디 앨런의 영화보다 멀리 빌리 와일더의 도시 코미디에 더 가깝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부유하나 눈이 먼 개가 내숭덩어리 고양이에게 반한다. 늙다리 개가 애정을 표현하자 귀여운 고양이는 “난 고양이거든요”라고 답한다. 그녀의 말에 개는 “누군들 완벽하겠어”라고 받아친다. 바로 <뜨거운 것이 좋아>(1959)에서 여장한 남자주인공에게 술 취한 남자가 했던 말이다. 이런 정신나간 도시의 교향악이란 점이 내가 <마이펫의 이중생활>을 찬양하는 이유다.
아이러니를 인정하고 함께 웃도록 만드는 힘
일루미네이션이 애니메이션에 본격적으로 뮤지컬의 성격을 부여한 작품이 <씽>이다. 겉보기에는 전작들보다 평이하고 오디션의 열풍에 편승한 얕은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실사영화 못지않게 사실적인 톤을 유지한 배경과 애니메이션 캐릭터 특유의 성격을 유지한 인물의 조화, 그 이상의 것이 <씽>에는 있다. 아이큐가 한 자리이면서 엄마와 아빠를 잊지 못하는 물고기 같은 가증스러운 캐릭터 대신 <씽>은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을 전시한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쇼 비즈니스를 꿈꾸는 아들을 위해 30년 동안 세차 일을 하며 돈을 모은 끝에 극장을 사서 물려주는데, 이 영화의 결말이야말로 그것이 불가능한 설정임을 방증한다. 25명의 아이와 무심한 남편을 둔 돼지 엄마는 오디션 대비책으로 어지간한 공학 박사보다 뛰어난 기계 솜씨를 발휘한다. 도대체 그런 엄마가 현실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전설적인 여가수는 몽상가들에 감명을 받아 극장을 새로 짓도록 돕는다. 와인을 곁들인 점심 값이라면 모를까, 그런 허황된 곳에 돈을 지불하는 부르주아는 도시에 살지 않는다. 제일 수상한 건 고릴라 부자다. 아버지 고릴라는 은행을 털 때 제일 즐겁다. 많이 가진 자들의 부를 재분배라도 한다는 듯이 그는 즐겁게 일한다. 아들이 자기 일을 공유하기를 원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는 죄를 유전하고 싶은 아버지가 아니다. 그의 아들도 은행털이가 죄라서 아버지 일을 돕기 싫어하는 게 아니다. 그는 가수가 되고 싶을 뿐이다. 이런 인물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더 큰 박수를 보낼 수 있다. 가수로 무대에 오른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아버지는 감옥 벽을 쳐부수고 무대로 내달린다. 그 장면은 스릴이 아닌 감동을 위한 것이다.
인물들의 성격에 맞춰 음악을 사용하는 방식도 예사롭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크리스토퍼 크로스가 부른 <바람처럼 달려>를 2초 정도 삽입한 장면이다. 범죄를 저지른 후 멕시코로 도망치는 범죄자의 노래인데, 거구의 크로스 대신 이 노래를 부르는 인물은 극중 제일 작은 크기의 달팽이다. 느리디느린 달팽이가 바람처럼 달리겠다고 노래한다.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함께 웃어주도록 하는 게 애니메이션 <씽>의 힘이다. 뻔뻔하나 깜찍한 진실을 품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