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으스스한 소재를 다룬다. 바로 실종, 그것도 아이들의 실종이다. 아이들의 죽음도 슬프고 무섭지만 아이들의 실종은 그보다 더 오싹하다. 최소한 아이들의 죽음에는 끝이 있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실종사건은 사라진 사람들을 망령과 같은 흐릿한 존재로 고정시키고 그 상태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동안 사람들의 상상력, 해결되지 않은 미스터리에 대한 매혹과 공포는 부풀어 오른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의 이야기가 아직까지 기억되는 것도 그 때문이고, <행잉록에서의 소풍>이 그렇게 매력적인 영화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끝까지 해답을 주지 않고 미스터리의 향취를 최대한 뽑으려 했던 <행잉록에서의 소풍>과 달리 <가려진 시간>은 영화가 다루는 세 소년의 실종사건에 대해 친절한 답을 준다. 그 답은 환상적이지만 그만큼 산문적이기도 하다. 세 소년은 시간을 잡아먹는 요괴의 알을 깨트리고 정지된 시간 속에 갇혔다. 천식에 걸린 소년은 곧 죽었지만 나머지 두 소년은 10여년 동안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고 그중 한명만이 시간의 감옥에서 탈출한다.
이 이야기를 얼마나 믿어야 할까? 영화가 온전한 설명을 주기 때문에 업계 종사자로서 시비를 걸고 싶다. <행잉록에서의 소풍>에 시비를 거는 건 불가능하지만 <가려진 시간>에는 가능하다.
우선 시간이 정지되었다는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아이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 공기는 얼음처럼 굳어 있어 아이들은 숨을 쉴 수 없을 것이며, 정보가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해서 아이들 주변에 일종의 장 비슷한 것이 생겼다고 쳐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핸디캡은 여전히 남는다.
이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었다고 쳐야 영화에서 보여주는 정지된 시간 속 회상 장면 비슷한 것이 가능한데, 그래도 이상하기 짝이 없다. 생각해보라. 아이들은 섬에 산다. 제법 큰 곳 같지만 그래도 섬은 섬이다. 그 안에서 아이들은 어른이 될 때까지 섬을 약탈하며 살아왔다. 요리가 불가능했을 테니 식당의 조리된 음식들은 모두 먹어치웠을 것이고 가게의 포장식품들도 엄청나게 없어졌을 것이다. 화장실 문제도 심각했을 텐데, 이 영화의 설명에 따르면 몸에서 나온 것들은 즉시 시간 속에 갇히는 모양이니까. 그렇다면 이들이 정지된 시간 속에서 빠져나왔을 때 섬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갑자기 식당과 가게의 음식과 물건들이 사라졌을 것이고, 사방에 엄청난 양의 배설물들이 떨어졌을 것이며, 아이들이 그동안 마을을 돌아다니며 만든 공기 통로가 무시무시한 바람과 소닉붐(초음속 비행기가 내는 큰 소음)을 일으켰을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영화의 배경인 화노도 사람들은 섬에 무언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영화가 계획한 이후 스토리 전개에 방해가 된다. 정지된 시간의 감옥에서 혼자 살아 돌아온 소년 성민의 말을 믿는 유일한 사람이 주인공 수린(신은수)이라는 게 이 영화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판타지나 SF를 만드는 사람들은 종종 설정에서 융통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하드 SF영화로 칭송받는 <마션>도 초반엔 화성의 모래 폭풍이 우주선을 뒤집어엎을 정도로 강할 리가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은근슬쩍 무시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가려진 시간>의 판타지에서 이러한 무시가 ‘은근슬쩍’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구멍이 너무 크다. 일단 설정을 만들면 가능한 한 구멍을 줄여야 한다.
당연히 신뢰의 문제가 제기된다. 영화가 종종 인상적인 비주얼을 통해 보여주는 이 이야기는 자신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효제가 연기하는 어린이였다고 주장하지만 지금은 강동원이 연기하는 성인 남자의 회상이다. 수린은 그 말을 믿는다. 강동원의 캐스팅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 그럴싸한 믿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설명에 커다란 구멍이 있는 게 분명히 보이는데도 그 말을 다 믿어야 할까? 영화가 그런 융통성을 관객에게 요구할 수 있을까? 다른 설명은 없을까? 이 모든 이야기가 거짓말이라는 설명이 더 그럴싸하지 않을까? 아무도 어른 성민의 지문을 확인하지 못했다. 강동원의 캐릭터가 정신나간 아동성애자 살인마일 가능성은 분명히 남아 있다. 그외 다른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강동원 캐릭터가 정말 어른이 된 성민인가가 아니라, 왜 수린이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느냐가 된다. 강동원 캐릭터의 주장이 더 그럴싸하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수린의 내면이 먼저여야 한다.
몇 가지 선례가 떠오른다. 하나는 세르주 부르기뇽의 <시벨의 일요일>이고 다른 하나는 하이메 데 아르미냔의 <둥지>이다. 두편 모두 성인 남자와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누는 어린 여자아이의 이야기다. <시벨의 일요일>의 남자주인공은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돌아온 기억상실증 환자이고, <둥지>의 남자주인공은 아버지 또래인 교양 있는 홀아비다. 주변 사람들은 그들이 미성년 여자아이와 맺고 있는 관계를 의심하고, 두 영화 모두 비극으로 치닫는다.
이 영화들은 <가려진 시간>과 같은 한계를 공유한다. 두 사람이 얼마나 순수하고 플라토닉하고 특별한 관계인지 보여주고 그 관점을 관객에게 강요한다. 그 결과 (특히 <시벨의 일요일>에서는) 소녀를 걱정하고 보호하려는 주변의 상식적인 어른들이 눈치 없는 악당 위치에 놓인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 속에서 소녀들의 입장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아는가? 두 영화의 주인공 시벨과 고이타는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끝까지 그들의 내면에 도달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두 영화의 시점은 모두 주인공 남자에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순수한 사랑을 미성년자 여자아이들과 나누는 남자들은 어느 순간부터 역사가 훨씬 긴 클리셰의 영역에서 습관화된 권리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려진 시간>은 조금 달라 보인다. 영화는 수린의 회상으로 문을 열고 수린의 고민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수린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끌어간다. 중간에 성민의 회상이 큰 덩어리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수린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두 영화와 가장 큰 차이는, 성민이 어른이 되는 온전한 사회화를 거치지 못했지만 몸은 커버린 반어린이처럼 행동하며 알리바이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동원의 캐릭터는 끝까지 수린에게 우정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린의 이야기는 여전히 벽에 막혀 있다. 영화는 수린의 관점을 보여준다고 하지만 그 관점은 영화가 제시한 판타지의 논리에 끌려 다니고, 도입부의 약속과 달리 수린은 자신의 경험과 생각에 바탕을 둔 자기만의 해석을 내릴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 결과 우리가 도달한 것이 충분히 위험할 수도 있는 고정된 판타지라면 우리는 이 습관을 의심해봐야 한다.
앞에서 비슷한 영화 두편을 예로 들었는데, 보다 성공적인 예가 하나 더 있다. <둥지>의 주연배우들이 이전에 출연했던 빅토르 에리세의 <벌집의 정령>이다. <프랑켄슈타인>을 보고 매료된 어린 소녀 아나(아나 토렌트)는 벌판을 누비다 창고에 숨어 있는 병사를 만난다. 아나는 그 병사를 돕는다. 우리는 병사의 사연은 모르지만 아나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며, 아나의 우주 속으로 들어간다. <가려진 시간>은 수린에게 그 같은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건 끝까지 온전한 믿음을 줄 수 없는 깨진 논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