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동물사전> 영화표는 머글, 아니 노마지들의 마법사 세계 방문증이나 다름없다. 한데 정상적이라면 극장 밖을 나선 후에 발동되어야 마땅한 기억지우기 마법이 웬일인지 조금 더 일찍 시작됐다. 영화 말미 그린델왈드가 변신을 풀고 원래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이것이 영화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한 것이다. 콜린 파렐이 조니 뎁으로 변신하는 장면은 관객을 현실로 되돌리는 이 영화 최대의 ‘킥’이다. 특정 배우의 외견을 비하하는 의미가 아니다. 조니 뎁의 경우 콜린 파렐과의 너무 큰 간극과 현실 이미지가 겹쳐 몰입을 파괴하는 정도가 상당히 심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신비한 동물사전>에서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은 CG이고, 반대로 영화의 생기를 앗아가는 것은 실사 배우들이다. 내가 새삼 놀랐던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생생한 CG 캐릭터와 이질적인 실사 배우
CG의 권능에 대해 말하는 건 이제 입이 아플 정도다. 현실이 아닌 필름(=영화)을 모사하기 시작한 그래픽은 포토그래픽이 성취할 수 있는 대부분의 표현을 따라잡았다. 그래픽과 포토그래픽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지금, 역설적으로 둘을 구분 짓는 건 포토그래픽의 조악함 혹은 포토그래픽 캐릭터들과 내러티브의 헐거운 연결이다. 때로 이야기에 밀착하지 못한 배우들의 불균질한 표현은 몰입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작동한다. 이는 감독의 연출에 따른 의도된 모호함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신비한 동물사전>의 뉴트 스캐맨더는 에디 레드메인이 구축해온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있다. 특유의 머뭇거림과 몸을 보호하는 듯한 조심스런 몸놀림은 뉴트 스캐맨더의 것이라기보다는 에디 레드메인의 속성에 가깝다. <대니쉬 걸>(2015)이나 <사랑에 대한 모든 것>(2014)에서 익히 선보인 연기방식이 이번에도 재현된다. 만약 앞선 두편을 보지 못했다 해도 크게 상관없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뉴트 스캐맨더라는 가상의 캐릭터라기보다는 에디 레드메인이라는 명확한 육체의 흔적이다. 원래라면 이 두 가지가 분리되어선 안 되겠지만 <신비한 동물사전>에서는 배우와 캐릭터 사이 실낱처럼 얇은 어긋남을 부각시키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CG로 창조된 신비한 동물들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신비한 동물들이란 점은 두말할 것도 없다. 도리어 마법사들의 다툼이나 각종 사건은 이들 마법동물들의 존재를 설득력 있게 배치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오리너구리를 닮은 최고의 신스틸러 니플러나 스캐맨더의 옷깃에 거주 중인 보우트러클 피켓은 마법 세계의 내러티브 안에서 빚어진 존재들이다. 애초에 이야기 안에서 생명을 얻은 존재들인 만큼 세계와의 정합성에 한치의 어긋남이 없다. 반대로 말하자면 <신비한 동물사전>의 세계 자체가 이들의 생생함을 부각하기 위해 구성된 시공간이라 해도 좋다. 정해진 답에 명확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실사 배우들에 비해 이들은 정확히 필요한 반응과 몸짓을 보여준다. 말썽을 피우다가 걸린 니플러의 무표정, 잠시나마 자신을 팔아넘기려 했던 뉴트 스캐먼더에게 실망감을 표시하는 피켓의 삐진 몸짓은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한 감정을 지시한다. 그 순간 존재하지 않는 그래픽에 생명을 부여하는 활유의 마법이 깃든다.
반면 몇몇 실사 캐릭터들은 도리어 마법 세계에서 방황한다. 뉴트 스캐맨더의 소심한 움찔거림과 티나 골드스틴(캐서린 워터스턴)의 점프하는 감정들을 비단 이야기의 구멍 탓으로만 돌리기엔 무리가 있다. 이들 캐릭터의 심리가 충분히 설명될 공간을 허락받지 못한 건 분명하지만, 그보다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몸짓과 표정들이 문제다. 사실 오직 그 순간에 포착되는 배우의 연기는 실사영화의 핵심 요소 중 하나다. 배우들의 재현불가능한 모호함이 감독의 의도된 연출 영역에 있을 때 그것은 관객의 상상력을 매개로 해석의 중요한 단초가 된다. 사실(리얼리티가 아닌 리얼)을 포착하는 것은 영화의 특권이자 필름의 권능이기도 하다. 다만 정확하게 그려진 애니메이션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것은 자칫 어긋한 터치로 밀려날 가능성이 있다. 생생한 CG 캐릭터와 생생하지 않는 실사 배우들, 이 균열의 지점에서 다시 한번 고민에 빠진다. <신비한 동물사전>의 기반은 그래픽인가 포토그래픽인가.
보는 대로 상상하는 신기한 팝업북을 마주하며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해야 할 때 다양한 언어를 동원한다. 우정, 사랑, 희생 등 거대하고 두루뭉술한 감정을 묘사할 때 은유와 설명이 필요하다. 어쩌면 이야기란 길고 긴 은유의 한 방편인 셈이다. 하지만 이미지는 조금 다르다. 길고 긴 서사가 한장의 이미지로 대체될 수 있을 때 상상력은 더듬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제시된다. 이미지가 힘이 센 이유는 보는 대로 상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미지는 단지 그래픽 이미지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포토그래픽 이미지, 언어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이미지는 선점이 중요하다. 한번 뇌리에 자리잡은 이미지는 뿌리내린 나무처럼 형태를 달리 할 순 있어도 뿌리째 뽑혀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각색이 원작을 뛰어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책을 먼저 본 이들은 책을 통해 더듬어진 이미지가 머릿속에 구축되고, 영화를 먼저 본 이들이라면 영화화된 이미지가 머릿속에 각인된다. 이후 다르게 변용된 이미지를 아무리 주입해도 먼저 본 이미지의 강력함을 밀어내지 못한다. 권능의 차원이 아니라 무엇을 먼저 ‘보는’지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존재하도록 만들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포토그래픽과 그래픽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든 이미지를 원하는 만큼 창조해낼 수 있는 시대. 은유적인 차원에서의 활유가 아니라 물리적인 의미에서 활유가 가능해진 현실. 회화에 기반한 전통적인 애니메이션은 스스로 그림, 다시 말해 비현실을 선언하고 들어간다. 이를테면 그림이란 소설 속 문자나 언어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가상 세계의 구축 수단 중 하나다. 하지만 CG는 다르다. 그것은 포토그래픽의 사실감, 진실이라고 믿어지는 것들에 한없이 가까워지기 위해 이를 모사한다. ‘지금부터 영화를 본다’ 혹은 ‘마법 세계에 들어간다’는 약속이 없다면 우리가 눈앞에 펼쳐지는 화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능력이 있을까. 심지어 저쪽 세계에서는 그려진 것이 사실적이고 찍힌 것이 어색한데 말이다. 분명한 건 <신비한 동물사전>이 이야기책이라기보다는 팝업북에 가깝단 점이다. 이야기를 듣고 상상력으로 행간을 채우는 게 아니라 튀어나온 그림을 신기해하며 책장을 넘기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때 <신비한 동물사전>의 그래픽은 현란하지도 놀랍지도 않다는 사실이 우리를 다시금 놀라게(혹은 두렵게) 한다. 생각해보면 그건 <정글북>의 그래픽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말을 하는 <정글북>의 호랑이와 마법을 쓰는 <신비한 동물사전>의 오리너구리(를 닮은 니플러) 중 무엇이 더 신기한지 이제 잘 모르겠다. 포토그래픽은 그래픽을 뛰어넘었나, 포토그래픽은 그래픽을 대체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이제 무의미하다. 그와 같은 프레임은 그래픽과 포토그래픽이 각자의 영역에서 권능을 발휘하고 있을 때의 시점에서나 성립했다. 실사영화의 개념을 뒤흔들어 재영토화해야 할 지금에 와서는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조차 무력하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2>(2011) 중 해리 포터는 삶과 죽음의 중간 지점에서 만난 덤블도어 교수의 환상에게 묻는다. “이건 현실인가요, 아니면 제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가요.” 덤블도어 교수는 답한다. “당연히 네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지. 하지만 해리, 그렇다고 해서 현실이 아닌 걸까.” 어쩌면 나의 상상력은 나의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질문을 조금 달리해보자. 타인의 상상력이 구체화된 이미지는 나의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예전 같으면 단호히 없다고 답했을 것이다. 최초의 CG영화를 전면에 내세운 <트론>(1982)으로부터 34년이 흐른 지금, 다시 묻는다면 확답할 자신이 없다. “내 상상력은 이만큼 뛰어나지 않으니까”라며 마법 세계를 현실로 받아들인 제이콥(댄 포글러)에 감정 이입한 채 그저 보는 대로 상상하고 있는 나를 마주할 따름이다. 신기하고 안락한 이 여행을 이미 저항 없이 즐기고 있지만 한편으론 어디쯤 와 있나 가늠이 되질 않아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