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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죽여주는 여자>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길에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이하 ‘판도라’)는 ‘막달레나 공동체’와 ‘용감한 여성연구소’의 제안으로 시작된 용산 성매매집결지 여성들의 사진 모임이자 이들의 작업을 일컫는 타이틀이다. 나는 그들을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봄날의박씨 펴냄, 2016)라는 책을 통해 알았는데, 이 책에는 살면서 카메라를 든 경험이 없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용산 성매매집결지를 수천장의 사진으로 기록한 작업의 의의가 실려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소영(윤여정)은 ‘판도라’ 여성들과는 달리 카메라 앞에 서 있지만, 이들은 성매매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상태로 보이는’ 구조에서 삶을 이어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례로 ‘판도라’ 팀이 해외에서 전시 초청을 받았을 때, 피츠버그대학의 한 한국인 학자는 이 전시가 “‘한국인 사창가 사진전’으로 보일 것
[양경언의 영화비평] <죽여주는 여자>, 난감한 삶의 형식 앞에 카메라가 놓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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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률 감독의 모든 영화들을 지배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죽음’이었다. 그의 영화에는 모든 인간이라면 숙명적으로 맞이해야 할 육체적 죽음이 있었고, 이주민(민족 혹은 노동자)들에게 가해진 돌연하고도 부조리한 죽음들이 있었다. 죽음에 대한 그의 묘사가 달라진 건 아마도 감독의 한국 생활 이후일 것이다. 특히 <풍경>(2013)과 <경주>(2014)에서부터 <필름시대사랑>(2015)을 거쳐 이번 영화 <춘몽>까지, 한국에서 제작된 이 영화들 속 죽음들은 육체의 물리적 소멸이나 서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이고 시적인 방식으로 사유되고 묘사되는 죽음들이다. 그에게 영화란 꿈의 언어와 흡사한 것이고, 동시에 그것은 죽음을 사유하는 언어이다.
죽음과 영화
<경주>에서 시작해보자. <춘몽>과 흡사 거울처럼 마주보고 있는 이 작품에서 서사의 작인은 ‘죽음’이었다. 선배의 돌연한 죽음으로 경주를 방문한 한 남자의 이틀을 기록하고
[정지연의 영화비평] 영화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실험하고 보여주는 장률의 <춘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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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과 북한은 이데올로기로 나뉘어졌다. 남북문제를 영화화할때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을 하는 이유다. 직접 메가폰을 쥐진 않았지만 김기덕은 이미 몇번에 걸쳐 남한과 북한에 관한 영화-<풍산개>(2011), <붉은가족>(2012)- 를 제작해왔다. 만약 직접 연출한 <야생동물 보호구역>(1997), <해안선>(2002)까지 한 소재로 본다면 김기덕 영화의 남북에 대한 고민은 더 긴 역사를 지닌다.
당연한 일임에도 동시대의 대중영화 감독들이 대부분 도외시하는 남북의 문제에 김기덕은 왜 그렇게 천착하는 것일까? 그가 직접 쓴 노트를 읽어보면 남북은 그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다. 그는 영화의 제목처럼 단순한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 <풍산개>에서 주인공 풍산(윤계상)이 휴전선을 넘는 방식처럼 말이다. 긴장대 하나로 그는 귀신같이 분계선 위를 난다. <붉은가족>에서는 남파 간첩들로 이뤄진 가족이 등장한다. 나란히 이웃한 남쪽
[이용철의 영화비평] 남북분단이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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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백>을 외부인으로서는 가장 먼저 본 사람일 것이다. 후반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아 최승호 감독이 직접 내레이션을 하는 가운데 1차 편집본을 뉴스타파 사무실에서 봤다. 최승호 감독뿐만 아니라 정재홍 작가를 비롯한 스탭들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내 반응을 기다렸다. <자백>을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하고 싶었던 그들은 몇몇 영화계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했으나 한국의 영화제에서는 틀기 어려울 것이니 해외 영화제에서 먼저 상영한 후 국내 개봉을 꾀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좀 우습게 들리겠지만 올해 초 상황은 그랬다. 전주국제영화제의 수석 프로그래머 자격으로 <자백>을 먼저 본 입장에서 나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사가 끝난 후 나는 간단히 말했다. “재미있는데요. 전주에서 상영하시죠.” 최승호 감독의 입이 벌어졌다. “아, 그렇습니까? 하하하.”
실제로 이 다큐멘터리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감독이 주인공이
[김영진의 영화비평] 다큐멘터리를 넘어 거대한 감동까지 끌어내는 <자백>의 영화적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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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를 본 후 머리 한구석에서 ‘또 한편의 한국영화, 남자영화’ 정도로 분류했던 것 같다. 준수한 만듦새와 몇몇 빼어난 장면들이 잔상처럼 남았고, 그뿐이었다. 크게 비평의 언어를 필요로 하는 영화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첫인상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건 <아수라> 이후 영화를 둘러싸고 갈라진 반응들 때문이다.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렇지 않은 영화가 없겠지만 <아수라>는 유달리 강하게 나뉠 수밖에 없는 종류의 영화다. 조금 과격하게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감독의 취향을 극적으로 밀어붙였고 감독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방식을 취해서 완성됐다. 감독의 개성, 일관된 인장들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만큼 누군가에는 피로와 불편으로, 누군가에게는 쾌감으로 다가오는 게 당연한 일이다.
저평가된 수작인가, 또 하나의 실패인가
다만 애초에 나는 이것이 단순히 취향의 문제일 것이라 섣불리 예단해버렸는데, 이후 영화에 대한 아쉬움
[송경원의 영화비평] <아수라>와 <밀정>, 조각난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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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 히치콕은 프랑수아 트뤼포와의 대화에서 <싸이코>가 완벽한 영화는 아니라고 했다. 주제는 불쾌하고, 인물은 특징도 없이 왜소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그럼에도 히치콕은 이 영화에 만족감을 느낀다고 했다. 관객에게 조바심을 느끼게 하고, 공포에 떨게 했으며, 비명을 지르게 했다는 점에서 <싸이코>(1960)가 관객에게 ‘정서적 영향’을 주었으며, 이 점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것이 순수영화(pure film)의 힘이라고 덧붙였다. 이소현 감독의 <할머니의 먼 집>을 보면서 불현듯 위의 대화가 떠오른 이유는 단순하게도 이 영화를 보고 취한 나의 행동 때문이었다. 극장을 나와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참으로 오랜만의 통화였다. 그리고 확언컨대 이 영화를 본 손녀, 손자의 수만큼 세상의 할머니들은 잠시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누군가를 떠올린다는 것, 잠시 용기를 내 전화번호를 누른다는 것, 궁금치도 않았던 안부를 새삼 묻는다는 것,
[이미랑의 영화비평] <할머니의 먼 집>이 관객에게 정서적 영향을 끼치는 방식과 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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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수라>가 김성수 감독의 회심의 역작이라 생각한다. 어린애스러운 남자들의 진면목을 탈탈 털어 보여줬다는 점에서 유아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남자들의 어린애스러움을 어린애스러움 그대로 보여준 것은 대단한 용기다. 그리고 현재의 한국영화계 상황에서 스타 배우들을 데리고 이런 영화를 만들어낸 감독과 제작자의 솔직함과 결기에 탄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을 경계 끝까지 밀어붙인 배짱
<아수라>는 어떤 면에서는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면에서는 그 기시감을 통째로 부정하는 영화이다. 사람들은 이 영화가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체 되풀이하거나 의기양양 자랑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이를테면 평소 남자들의 작태가 스크린에 비장하게 펼쳐지는 것을 싫어하는 듀나 평론가는 이 영화에 질리도록 표현된 마초주의의 이면에 심드렁하게 반응한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실린 칼럼니스트 허경의 글은 아예 이 영화가 남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을 대충대충 아저
[김영진의 영화비평] <아수라>가 표현한 깊은 단념의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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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그니피센트 7>(2016)은 서부극의 고전 <황야의 7인>(1960)의 리메이크이지만 ‘7인의 총잡이가 마을 주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팀을 이루고 악한으로부터 마을을 구한다’는 기본적인 플롯 외에는 상당 부분 다른 면모를 보인다. 이 영화는 <7인의 사무라이>(1954)와 <황야의 7인>이 마련한 서사의 밑그림을 따라가고 총과 말, 박차 등 서부극의 컨벤션을 충실히 재현하지만 그 나머지는 지극히 현대적인 각색과 번안화로 채워진다. 현대 액션 활극에 서부극의 기운을 불어넣었던 <더 이퀄라이저>(2014)와는 상반된 장르에의 접근법. 흑인 총잡이 샘 치섬(덴젤 워싱턴)을 중심으로 한 7인의 멤버 구성은 백인만이 아니라 아시아계, 히스패닉, 아메리카 원주민까지 아우르는 다층적인 인종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으며 시공간적 배경은 멕시코의 시골 마을에서 남북전쟁 이후 골드 러시(Gold Rush)가 한창인 마을 로즈크릭으로 변경되었다.
[조재휘의 영화비평] <매그니피센트 7>, 리메이크로 함축한 서부극의 역사와 정치적 공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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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해보자. 당신은 지금 150여명의 승객을 태우고 이륙한 항공기의 기장이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사고로 동력을 잃는 바람에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비상착륙을 해야 한다. 관제탑에서는 회항을 권유하지만, 40년 비행 경력의 당신은 ‘직관’을 발휘해 비상착수를 시도하고 기적적으로 승객 모두를 살리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당신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155명을 살린 ‘영웅’이 되었다. 그날 밤, 당신은 악몽에 시달린다.
설리가 느낀 두려움의 본질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이하 <설리>)은 이 질문에 대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대답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악몽은 보는 이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꿈속에서 설리(톰 행크스)는 (실제와는 다르게) 회항을 시도한다. 하지만 충분한 고도를 확보하지 못한 비행기는 건물을 들이받고 폭파된다. 이 악몽은 약 15분 후, 인터뷰를 기다리던 설리가 뉴욕의 빌딩 숲에서 보게 되는, 건물로 돌진하는 비행기의 추락 환영으로 다시
[우혜경의 영화비평] <설리:허드슨강의 기적>, ‘영웅주의 논쟁’에 대한 이스트우드의 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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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말로의 해안가에 위치한 샤토브리앙의 무덤을 바라보며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진지한 자문이다. <다가오는 것들>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의 바탕에는 이 질문이 자리한다. 영화 속 딸의 언급처럼 바닷가의 묘지란 밀물이 밀려오면 잠길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장소지만, 누군가는 그곳을 택했다. 동일한 교육을 받은 사람, 일상을 공유하는 가족, 가까운 사람들조차 상대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니 세상 누군가가 완전히 남의 입장을 이해할지는 미지수다. 미아 한센-러브 감독은 이러한 주제에 크게 두 가지의 입장에서 다가간다. 먼저, 일상적 삶을 공유하는 가족 구성원들이 영화 전반부의 관찰 대상이 된다. 언뜻 평화롭게 보이는 나탈리의 식구들은 어느 순간 한 가지 어긋남으로 인해 완전히 분리된다. 남편조차 자신의 애인이 가져올 파장을 모두 예상하진 못한 듯 보인다. 이어서 두 번째의 관찰 대상은 사제 관계이다. 나
[이지현의 영화비평] 순리의 지혜 <다가오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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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을 본 관객이 리메이크 영화를 관람한다면 그 시선은 두 스크린을 동시에 향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시선이 눈앞의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리메이크 영화를 향한다면 또 하나의 시선은 기억 속 원작 영화를 불러낸 가상의 스크린으로 향한다. <벤허>가 원작의 축약과 반복을 지향한다면, <매그니피센트 7>은 원작에 대한 해석을 감행한다. 물론 원작을 대하는 이러한 차이가 리메이크 작품의 성패를 결정짓는 절대 요인은 아니지만, 이 두 작품에 한해서는 그 차이가 작품의 질적 성패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미리 밝히자면 내 입장은 <벤허>는 참담한 실패이고, <매그니피센트 7>은 <황야의 7인>에 못지않은 재미를 주는 작품이라는 쪽이다.
<벤허>, 거두절미의 서사와 사라진 아우라
티무어 베크맘베토프의 리메이크 이전에도 <벤허>는 세번이나 제작되었지만, 우리가 <벤허>라 부르는 작품은 오로지 윌리엄 와일러의
[안시환의 영화비평] <벤허>와 <매그니피센트 7>의 서로 다른 리메이크 방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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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의 신작이자 야심작이었던 <고산자, 대동여지도>(이하 <고산자>)는 흥행에 크게 실패했다. 내 기억으로는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이래 이만한 흥행 실패는 그의 경력에 없었다. 민중의 편에 선 지도장이의 이야기를 사람들이 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획 실패이고, 흥행사로서 강우석의 신뢰가 사라졌다는 징조이며, 예능 프로그램의 스타가 아닌 영화배우로서 차승원이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고산자>는 강우석에게나 차승원에게나 필생의 역작이었다는 점에서 엄청난 재앙인 것이다.
<공공의 적> 이래 대다수 그의 작품을 일관되게 지지해왔던 평자로서 나는 <고산자>가 재미있었다. 경직된 플롯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봤을 때도 상당한 감동이 있었다. 왜 그런가를 생각해보니 이 영화가 김정호(차승원)의 삶에 관해 새로운 앎을 주는 걸 아예 포기하고 복종적일 만큼 겸손하게 그의 삶을 최소한으로 재현하
[김영진의 영화비평] <고산자, 대동여지도>와 <밀정> 추석 연휴 한국영화 두편에 대한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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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 다큐 PD나 시사프로그램 담당 기자들이 가장 쉽게 여기는 일 중 하나는, 북유럽에 가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이렇다. 북유럽에 가보니 저렇더라. 바야흐로 우리도 저렇게 바꿔야 할 때다.’ 이러면 원고가 완성되니 얼마나 쉬운가. 취재도 쉽다. “당신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세요” 해서 촬영하고 “자랑해주세요” 해서 인터뷰를 따면 된다. 북유럽 취재에서 어려운 일은 살인적인 물가를 견디고 돌아와 처리하는 출장비 정산 뿐이라는 말을 할 정도다. 핀란드든 덴마크든 혹은 방글라데시든 쿠바든 그곳에 가서 시민들의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를 취재해 보여주기는 쉽다. 취재 아이템을 선정하는 기획회의에서 문제 제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So What? 그래서 어쩌자고?” 마이클 무어는 이번 신작에서 “(어느 나라나 문제가 있겠지만) 내 임무는 잡초가 아닌 꽃을 따는 것”이라고 했는데, 꽃이야 얼마든 찾을 수 있지만 관건은 그 꽃을 어떻게 심고 가꾸느냐에 있다. 다른 토양에서 자라던
[송형국의 영화비평] ‘여성성’에서 해결 방법 찾은 <다음 침공은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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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에서 시작해 <터널> <덕혜옹주> <인천상륙작전> 순으로 이어진 나의 올해 여름 한국 블록버스터 관람은 극심한 메슥거림을 느끼는 것으로 끝났다. 극장가에서 자취를 감춰가던 <인천상륙작전>을 마지막회에 관람했는데 화면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과 비례해 속이 계속 울렁거렸다. 생각해보니 <덕혜옹주>를 볼 때도, <터널>을 볼 때도 그랬다. 스크린에선 격정적인 상황이 펼쳐지는데 나 스스로는 납득이 가지 않으면서 불편함을 호소하는 신체적 반응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영민한 창작자는 그 시대에 과잉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표현하지 않는다. 표현한다 해도 소용없기 때문이다. 올여름 한국 블록버스터들은 이미 과잉으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소란스럽게 부연하는 것으로 내겐 보였다. 중요하니까 봐주고 감동해주세요, 라고 호객하는 제스처들이 요란한 가운데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없는 기
[김영진의 영화비평] <터널> <인천상륙작전> <덕혜옹주>에서 감지되는 불길한 전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