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영화에 관한 분석이나 비평이 아니다. 영화 주변을 둘러싼 말에 관한 단상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순간들을 스크린에 재현한 <군함도>와 <택시운전사>를 보며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영화를 보고 난 뒤 일련의 논란과 반응을 보며 심란해졌다. ‘역사를 재현했다’는 명제는 생각 이상으로 관객에게 큰 의미로 받아들여진 모양새다. 반면 역사 논쟁이 커질수록 정작 영화에 집중하는 말들은 지워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에 대한 분석과 비평에 더 보탤 말은 없지만 이를 둘러싼 논쟁들의 초점에 몇 가지 덧붙일 지점이 있을 것 같아 뒤늦게 글을 쓴다.
조금 먼 길을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두 영화를 논하는 데 영화와 역사, 재현의 문제를 분리해놓고 시작할 순 없을 것이다. 영화란 기본적으로 사실을 욕망하는 매체다. 이야기의 덩어리-화(話)이기에 사실의 조각인 실(實)을 어떻게든 획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첨단 기술을 이용해 사실적인 감각을 확보하는 영화가 있고,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강조하는 영화도 있다. 역사영화도 이와 비슷하지만 좀더 엄격한 평가가 뒤따른다. 역사는 수많은 실화들의 겹치고 엮인 총합인 만큼 역사의 재현에는 다양한 시선과 욕망, 기대와 우려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게다가 논란은 역사적 거리에 비례하기 마련인데 <명량>(2014)처럼 충분히 지난 사안과 달리 일제강점기, 광주민주화운동 등은 현재진행형의 역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단순히 지나간 역사의 재현이나 환기의 차원을 넘어 생존자의 증언과 연루자의 기억, 이해관계가 얽혀 각자의 입장이 충돌하는 복잡한 사안인 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군함도> <택시운전사>는 역사를 재현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현재를 반영한 영화처럼 보인다. 사실 모든 역사 재현은 현재의 재현이다. 현재의 시점, 필요, 욕망이 반영되는 허구라고 해도 좋겠다. 역사영화가 잊힌 역사를 환기시켜 역사를 현재화하는 기능이 있다고 하면 <군함도>와 <택시운전사>는 그보다는 현재 역사를 바라보는 관람자들의 위치를 환기시킨다. 이 영화들에 대한 내 입장은 이중적이다. 상업영화로서 전시된 이미지들을 즐기는 내가 있고, 역사를 재현한 방식에 대해 불쾌함을 느끼는 내가 있다. 어쩌면 관객으로서 나의 이러한 분열적인 태도는 두편의 영화 내부에도 녹아 있는 것 같다. 두 영화는 스스로의 모순을 눈치채지 못했거나 애써 무마하려는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다. 그것이 두 영화를 즐기되 근본적으로 불신하는 이유다.
응시의 쾌감과 영화적 거리
나는 영화가 역사를 재현하고자 하는 거의 모든 시도에 반대한다. 과거를 재현한다는 건 근본적으로 이미지의 선택과 배제를 전제한다. 특정인(감독)의 시선을 기준으로 역사를 다시 쓴다고 해도 좋겠다. 시선이란 주체의 해석이며 1차원적인 접근이다. 그 어떤 시선일지라도 진실의 단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역사 역시 진실이 아니라 사관의 시선이 개입된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때문에 역사에 접근할 때 이를 보완하기 위해 수많은 기록에 근거하고 수많은 사관들의 다양한 시선을 비교하며 입체적인 결과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여기에 영화라는 매체가 섞여 들어갈 때 위험한 물건이 되기 십상이다. 이미지는 강력한 형태로 결정된 결과물이다. 특정 대상이 하나의 이미지로 지정될 때 그것이 진실의 이미지로 대체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제 대상이 없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2013)을 관람한 자가 링컨 대통령을 상상할 때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목소리와 표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는가. 링컨 대통령의 실제 영상이 남아 있지 않는 지금 재현된 이미지는 손쉽게 그 자리를 대신한다. 물론 영화는 영화일 뿐, 관객이 역사와 영화를 착각할만큼 어리석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일정 부분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이미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쉽게 착란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는 시선과 응시의 문제다. 시선이 주체(창작자)의 발현이라면 응시는 이미지의 소비와 관련된 행위다. 응시는 이미지에 대한 탐닉이며 기본적으로 포르노그래피의 속성을 지닌다. 창작자가 자극과 폭력의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제한하여 사용한다 할지라도 관객은 이를 엄밀히 구분하기 어렵다. 심지어 어떤 영화는 폭력 이미지를 상징적 질서의 결과로 사용한다. 가령 억울한 일을 당한 인물이 가해자를 향한 복수를 수행할 때 이는 종종 질서를 바로잡는 정당행위로 오용될 수 있다. 폭력이 포르노그래피에 머물 때는 문제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이 당위의 영역으로 넘어올 때 발생한다. 악에 대한 통쾌한 응징이 가져다주는 쾌감이 대표적인 사례다. 가령 <베테랑>(2015)의 엔딩에서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를 시원하게 응징할 때 인스턴트 정의구현이라는 통쾌함을 선사한다. 물론 이런 간편한 정의구현은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영화는 응시의 쾌감을 통해 종종 현실과 영화의 벽을 손쉽게 지우려 한다. 다시 말해 영화가 현실인 척하거나 현실을 대체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이런 영화들은 경계해야 한다. 영화가 부분적으로 허락한 폭력이 현실 속 정당한 행위로 착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다.
두 번째는 사실과 이야기 사이의 거리다. 모든 기록, 심지어 재현된 영상까지도 객관과 주관이 섞인 결과물이다. 사실을 이야기로 옮길 때 필연적으로 화자의 시점이 반영된다. 아무리 건조한 표현일지라도 주관과 감상이 완전히 제거될 순 없다. 다만 절제하고 삭이는 과정에서 객관과 주관, 감상과 목격 사이의 거리를 확보할 수는 있다. 그 거리야말로 창작자의 의도이며 사실을 대하는 태도다. 관객은 그 거리를 해석함으로써 사실을 둘러싼 정황을 입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실체의 형태를 더듬는 과정이라고 해도 좋겠다. 영화에서 윤리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다름 아니라 이 거리를 얼마나 확보하려고 하는지에 관한 고민일 것이다. 관객과 영화의 거리, 감상자와 목격자의 거리, 이야기와 사실의 거리를 어떻게든 제시하고자 하는 영화들은 관객 각자가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 이를 통해 결정된 이미지는 견고한 결과를 해체시킬 수 있는 균열을 제공하는 것이다. 동시에 영화는 태생적으로 관객과의 거리를 좁혀 제로로 만들고자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감각적인 체험을 목적으로 하는 신기한 구경거리, 다시 말해 오락이다. 오락으로서의 영화는 관객과 영화 사이의 거리를 완전히 지우고자 한다. CG, 3D 등 각종 영화의 기술들이 이를 수행하기 위한 도구다. 어떤 측면에서 영화의 역사는 거리를 지우려는 기술과 거리를 확보하려는 창작자의 의지 사이 치열한 충돌들이 남긴 흔적이다. 관객으로서 내가 겪는 자아분열도 이 지점에 있다.
천함 이외의 어떤 태도도 없다
나는 기술의 최전선에서 거리를 효과적으로 지우고 쾌감을 선사하는 영화들을 기꺼이 즐긴다. 대중오락으로서의 영화의 속성을 외면할 이유가 없고 이를 개인적 취향으로 받아들인 이들을 비난할 근거도 없다. 동시에 어떻게든 거리를 확보하여 관객의 지적인 태도를 이끌어내는 영화들을 존경한다. 두 가지 길은 서로 별개의 방향이며 기본적으로 충돌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에 한해선 문제가 달라진다. 사실과 이야기, 즉 실+화(實話)는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한없이 엷어지고 투명해지는 영역에 있다. 현실에 아직 관계자들이 남아 있고 각자의 기억과 이야기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영화라는 결정된 해석, 심지어 강력한 이미지는 누군가에겐 폭력적인 방식으로 느껴질 여지가 충분하다. 나는 적어도 역사를 재현한 영화에 한해서 영화와 현실, 영화와 관객 사이의 거리를 삭제하는 모든 영화에 반대한다. <군함도>의 스펙터클한 폭력의 전시, <택시운전사>의 불필요한 후반부 카체이싱 장면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 역사의 재현에 관한 논쟁은 사실상 이미 결론이 나 있다. 이에 대해 자크 리베트의 비평 ‘천함에 대하여’를 반박할 논거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 역사적 비극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며 아무리 조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관음과 포르노그래피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것은 수위의 문제가 아니라 영화 매체의 타고난 속성이다. 이에 관해선 <사울의 아들>(2015)처럼 전통적 재현 방식을 벗어난 연출도 마찬가지다. 제한된 시선과 극대화된 사운드를 통해 관객이 상황을 상상하도록 만드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영화와 관객의 거리를 지우는 또 다른 우회로에 불과하다.
현재 <군함도>와 <택시운전사>를 둘러싼 논쟁의 문제는 두 가지 다른 층위,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상업영화와 역사의 재현이라는 태도를 분리하지 못한 데서 출발한다. ‘역사는 재현될 수 없음’을 전제로 한다면 <군함도>와 <택시운전사>에 대해 논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현재 영화에 대한 분석과 판단이 지워지고, 영화 바깥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에 대한 논쟁으로 무한히 확장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통로가 막혔으니 엉뚱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두 영화를 비판하는 시선뿐 아니라 옹호하고자 하는 쪽에서도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수평과 수직운동에서 오는 ‘움직임의 어트렉션’을 제시한 김영진 평론가의 해석(<씨네21> 1117호 <군함도> 비평기획 ‘수평에서 수직으로 운동과 활력’) 은 흥미로운 접근이지만 구태여 움직임이라는 미학적 견지에서 감독의 의도를 읽으려 한다는 게 문제다. 부분적인 오류는 미뤄두고서라도 “이미지의 설계와 구현이 주는 쾌감이 평면적인 서사를 시각적 웅장함으로 극복하는 굉장한 전시효과의 영화”라는 결론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군함도>의 전시효과가 있다면 그건 민족주의나 역사의 환기라는 주제적인 측면이 아니라 순수하게 시각적 쾌감과 전시, 그러니까 상업영화의 구경거리로서의 완성도를 기반으로 한다. 차라리 같은 호 인터뷰에서 “후지게 하진 말자는 생각은 있다”는 류승완 감독의 고백이 좀더 솔직해 보인다. 미학적인 관점에서 논했을 때 <군함도>와 <택시운전사> 모두 (자크 리베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함 이외의 어떤 태도도 묻어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오락으로서의 시각적 쾌감과 현재진행형으로서의 역사의 상처와 통찰을 분리하지 못한 데서 온다. 말하자면 기술적으로 잘 만들고, 잘 보여주고, 사실적으로 재현할수록 주제적으로는 불편해진다. 류승완과 장훈 감독이 상업영화에서 꾸준히 선보여왔던 작법과 현재진행형의 역사는 애초에 붙일 수 없는 다른 층위의 접근법이다. 현재 이 영화들에 대한 옹호나 비난은 이 두 가지 층위를 분리하지 못한 데서 오는 소모적인 논쟁처럼 보인다.
언젠가부터 영화의 윤리라는 말이 애매하게 떠돌고 있는데 그건 영화가 도덕적인 순수성을 견지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감독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건강한 현실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애초에 올바름과 건강함이라는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는 것이야말로 영화를 비롯한 예술매체의 기능 중 하나다). 영화의 윤리에 관해선 차라리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영화가 그 자체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영화 자신(감독=화자)은 이를 인지하고 있는가. 혹여 관객의 해석에 맡긴다는 변명 아래 다른 논점으로 이를 바꿔치기하려는 건 아닌가. 다시 말해, 영화(혹은 감독)는 스스로에게 솔직한가.
사실과 허구의 혼재에서 오는 분열
이 지점에서 나는 <군함도>와 <택시운전사> 둘 다 민낯을 가리고 있다고 느꼈다. 애초에 역사를 상업영화의 재현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순간 이 영화들은 분열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솔직해야 한다. 역사적 비극의 재현은 불편하다. 불편해야 한다. 현실과 재현, 메울 수 없는 격차의 마찰이 피로와 불편함을 야기한다. 하지만 <군함도>와 <택시운전사>는 불편함 그 자체를 고스란히 장면으로 치환한다. 불편함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장면을 근사하게 찍어 보여주는 것이다. 스펙터클의 전시와 감각적인 쾌감이야말로 오락영화로서 이 영화들이 추구하는 이상적 가치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군함도>는 재미있는 영화다. 역사적 비극과 재미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걸 알지만 실제로 이 영화의 전개나 드라마, 재현방식은 관객이 재미를 느끼도록 짜여있다. 특히 <군함도>의 오프닝 시퀀스부터 각 인물들이 군함도에 입도하는 초반부는 근사하기까지 하다. 흑백으로 찍은 소년들의 탈출 장면, 절박하고 참혹한 이미지와 밝고 화사한 <군함행진곡의 멜로디는 충돌을 통해 아이러니한 정서를 자아낸다. 상황을 입체적으로 그려나가는 방식이란 이런 것이다. 이윽고 임금지불방식, 군함도의 생활 수칙 등을 설명하는 내레이션과 함께 징용노동자들이 군함도의 지옥다리에서부터 가장 밑바닥 채굴장까지 차례로 하강하는 이미지는 감히 단언하건대 이 영화의 백미다. <군함도>는 군함도라는 공간에 관한 영화이며 일련의 이미지들은 이를 인상적으로 표현해낸다. 역사 재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는 별개로 나는 이 부분을 언급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잘 구성했다고 칭찬할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에야 영화 전반의 시선이나 재현의 태도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군함도>의 패착은 공간의 묘사가 표면적으로 유효했던 것에 반해 인물의 표현, 드라마, 무엇보다 액션의 방식이 상업영화의 전형을 고스란히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군함도라는 지옥 한복판에 던져진 인물의 내면을 응시하기엔 시간이 모자란다. 대신 영화가 집중하는 대상은 감독이 늘 잘해왔고, 하고 싶어 하는 액션이다. 다만 부분적인 액션의 전시만 있을 뿐 액션-혹은 운동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감독은 이를 탈출극으로 설명했지만 실상 인물들은 대탈주를 멈추고 긴 시간 전투를 수행하는 데 몰두한다. 이 전투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기엔 너무 스타일리시하다. 박무영(송중기)에 의해 불타고 참수당하는 야마다 부소장(김중희)은 대리만족의 통쾌함 대신 의아함을 남긴다. 무엇을 위해 저렇게까지 보여주나. 여기엔 정작 군함도에 갇혔던 당시 생존자들의 심정이 거세되어 있다. 배고픔, 힘겨운 노동환경에서의 혹사, 어떻게든 벗어나고픈 절박함 같은 감정은 재현되지 않는다. 혹은 당시 생존자가 겪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 시점의 우리를 위한 전시적 쾌감이 들어찬다. 무엇을 위한 전투인가. 당연히 멋지고 근사한 이미지를 전시하기 위한 전투다. 영화에 대한 불쾌감,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불만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동시에 이 영화의 성취도 여기에 있다. 이 장면들에 굳이 움직임과 활기 따위의 미사여구를 붙일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오락영화로서의 완성도와 감독의 재현방식에 대한 판단은 분리되어야 한다. <군함도>는 일련의 오락영화에서 익히 보아왔던 스펙터클한 전투들을 충실히, 꽤 칭찬받을 만한 완성도로 재현한다. 거기서 쾌감을 느끼는 건 죄가 아니다. 칭찬이든 비판이든 굳이 두 가지를 뒤섞어 논점을 흐릴 필요는 없다.
<택시운전사>의 전형적인 신파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정확히 재단된, 그래서 심심하고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신파다. 하지만 적어도 이 눈물은 과녁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다. 시위 장면이나 총에 맞아 쓰러지는 몇몇 표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겠지만 관객을 설득하는 드라마의 완성도 면에서는 충실히 제 몫을 다하고 있다. 물론 두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렇다고 수준 이하의 완성도라고 매도하는 것은 도리어 정확한 문제인식을 흐리는 일이다. 내가 진정 걱정하는 건 개별 영화의 완성도가 아니다. 목적과 방식, 허구와 재현, 영화와 현실이 구분 없이 뒤섞여 들어가는 순간들, 또는 그럴 수 있다는 오해다. <군함도>와 <택시운전사>를 둘러싼 일련의 논쟁에서 그런 징후들이 감지된다. 제작 단위의 문제점은 너무도 명확하니 둘째치고 이를 관람하고 해석하는 관객 사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영화는 현실에 대해 무기력하다. 영화가 현실에 참여한다면 오직 이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태도를 빌려서 가능하다. 역설적이지만 그렇기에 영화는 역사에 대해서는 강력한 지위를 점한다. 기억과 증언으로 파편화된 역사, 결정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역사는 종종 다른 의견들을 동일한 가치인 양 착각하도록 만든다. 이때 영화를 통해 확정된 이미지들은 실체라고 해도 좋을 힘을 얻는다. 우리가 영화를 대할 때 사실과 허구를 분리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이유다. 종종 스스로도 이를 착각하는 영화도 있는데, <군함도>와 <택시운전사>가 그렇다. 두 영화는 오락영화다. 목적도 수행방식도 이에 부합한다. 그러나 역사를 소재로 했다는 원죄로 인해 스스로 역사를 고증하고 제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놓였다. 그리하여 형식, 메시지, 드라마, 태도 모든 지점에서 분열한다. 다시 말하지만 역사의 재현이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보는 건 감독의 시점에 의한 재현이다. 그나마 온전히 감독의 비전에 의해 정돈조차 되지 못하고 상업영화의 논리에 따라 각종 기계적 나열을 반복하는 순간 재현의 자격도 박탈당한다. 이것이야말로 비극의 역사를 상업화한 영화들이 겪는 진정한 비극이다. 부분적으로 빼어난 완성도를 보일지언정 형식을 통해 의도를 통일시키지 못한다면 역사를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은 덮어두는 편이 낫다. 그럼에도 역사를 현재화시키는 영화가 필요하다고 믿는다면, 그런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면 그 의도와 존재 이유를 투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나는 <군함도>와 <택시운전사>가 한계와 위치를 인정하고 차라리 오락영화로서 좀더 솔직하길 바랐다. 이 영화로 인해 촉발되는 영화와 관객 사이의 문답 또한 거기서부터 다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