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1118호에 실린 송경원 기자의 <군함도>와 <택시운전사>에 대한 평을 잘 읽었다. 그는 <군함도>를 옹호한 내 평론을 “움직임이라는 미학적 견지에서 감독의 의도를 읽으려 한다는 게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미지의 설계와 구현이 주는 쾌감이 평면적인 서사를 시각적 웅장함으로 극복하는 굉장한 전시효과의 영화’라는 내 평의 결론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군함도>의 전시효과가 있다면 그건 민족주의나 역사의 환기라는 주제적인 측면이 아니라 순수하게 시각적 쾌감과 전시, 그러니까 상업영화의 구경거리로서의 완성도를 기반으로 한다”고 지적했다.
이 글은 거기에 대한 반론이 아니다. 송경원 기자는 <군함도>와 <택시운전사>를 묶어 글을 쓰면서 <군함도>에 관한 나의 평을 부분적으로 비판했는데, 이미 흥행에 성공한 <택시운전사>에 관한 평을 쓰려다 그가 내린 결론에서 뭔가 생각할 거리를 찾아냈기 때문에 첨언하면서 글을 시작하려 한다.
상업영화는 솔직하기 어렵다
송경원 기자는 <군함도>와 <택시운전사>를 두고 거창하게 역사 재현의 윤리에 관한 지적 논의가 일어나는 게 불필요하며 위선적이라고 느낀 듯하다. <군함도>와 <택시운전사> 모두 오락영화이며 목적도 수행방식도 이에 부합하는데 역사를 소재로 했다는 원죄 때문에 스스로 역사를 고증하고 제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놓였다고 두편의 영화를 모두 비판한다. 송경원 기자의 논리는, 역사의 재현은 불가능하다, 감독의 시점에 따른 재현만 가능하다, 그나마 그런 재현도 감독의 비전에 의해 정돈조차 되지 못하고 상업영화 논리에 따라 각종 기계적 나열을 반복하는 순간 재현의 자격도 박탈당한다, 이게 비극의 역사를 상업화한 영화들이 겪는 진정한 비극이다, 로 이어지며 <군함도>와 <택시운전사>가 한계와 위치를 인정하고 좀더 솔직했어야 한다고 쓴다.
내가 보기에 송경원 기자의 논리와 결론은 근본주의자의 입장과 수용자 논리를 겹쳐놓아서 좀 이상하다. 영화가 어떤 입장을 갖고 있건 간에 평자나 관객이 어떤 층위에서 영화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는 별개 문제다. 오히려 수용자들의 해석 층위에 좀더 섬세한 결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평자는 경청할 만한 의견을 보태서 내놓아야 한다고 본다. 상업영화로서의 솔직한 입장이라는 것도 애매하긴 마찬가지인데 상업영화는 솔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이런저런 서사적, 시각적 쾌락을 제공하겠습니다, 라고 들이대는 상업영화는 없으며 대체로 일반적인 상업영화라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한 목적 외에도 어떤 격을 갖춤으로써 예술적 형식과 윤리를 드러내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업영화는 근본적으로 관객의 입장을 어떤 방향으로 유도하고 그걸 위해 감정이입을 수단화하기 때문에 프로파간다이며 이걸 위해 동원되는 조형적 장치에 대해 미적 심미안을 갖다댄다고 해서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군함도>에 대한 내 평론의 취지는 그랬다. 그게 상업영화라고 해도 미학적 견지를 들이대지 않으면 그저 재미있다, 재미없다는 얘기밖에는 할 게 없을 것이다. 나는 <군함도>가 시각적 정보를 통해 전달되는 영화적 방식으로 민중의 고난의 역사를 재현하되 부분적으로는 승리의 서사를 창작하는 과정을 주석을 붙여 설명한 것이다.
나아가 송경원 기자는 이 영화들이 역사를 소재로 했을지라도, 이 영화들이 솔직하게 ‘오락영화이니 재미있게 즐겨주세요’라고 하지 않았다는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역사적 재현의 윤리에 관해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냉소적 반응을 그의 글에 담고있는데 그렇기 때문에라도 이 영화들에 대한 수용자들의 과잉된 역사적 논평에 대해 뭔가 평자로서 입장을 내놓아야 한다. <군함도>에 대한 내 입장은 이미 평론을 통해 밝혔으므로 이제부터 <택시운전사>에 대한 견해를 밝혀야겠다. <택시운전사>는 <군함도>와 달리 압도적인 절찬을 받았으며 <군함도>가 받은 악의적 역사 왜곡에 관한 비판도 가볍게 피해갔다. 이를테면 <군함도>의 대탈출 장면이 비난을 받은 것과 달리 이 영화에서의 택시 추격전 클라이맥스는 허구가 분명한데도 아무런 저항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건 역사에 대한 허구의 창작이더라도 관객의 동조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조의 이유가 무엇인지 추측해보는 것은 이후의 광주를 다룬 상업영화를 기대하더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소시민의 부채감과 희생자에 대한 애도
<택시운전사>가 선의로 만들어진 상업영화로서 굉장한 프로파간다 효과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영화는 광주항쟁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죄의식을 부드러운 방식으로 위로한다. 광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고교생이었던 나는 언론 발표만을 믿고 ‘광주항쟁’을 ‘광주사태’로 받아들였으며 친척이 광주에 살던 옆자리의 동급생이 광주항쟁의 진실을 전해줬을 때 그 친구를 경멸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북한군이 쳐들어오면 학도병으로 참전하겠다고 굳게 다짐할 정도로 세뇌당한 애국자였던 나는 집안 어른들의 생각을 따라 전두환이 집권하는 게 뭐 어때서 데모를 하나라는 반동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학생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광주항쟁에 관한 책과 영상을 보며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이후 성년기 내내 갖게 된 죄책감은 사회가 민주화된 이후에도 해소되지 않았다.
당장 먹고살기 바빠 정치적 각성의 기회가 없었던 이 영화의 주인공 김만섭(송강호) 캐릭터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직간접으로 체험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 사건을 전혀 몰랐던 더 젊은 세대의 관객에게도 효과적인 감정이입을 가능케 하는 매개자다. 사우디에서 돈을 벌었으나 아내를 잃고 아내의 병을 수발하느라 재산이라곤 개인택시 한대만 남은 중년의 남자로서 어린 딸 하나를 부양하며 열심히 사는 김만섭은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택시 손님으로 태워 광주에 내려가기 전까지는 광주에서 무슨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보도통제가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보통 시민들과 같은 처지에 있던 그는 군인들의 차단막을 용케 통과해 광주 시내로 들어가면서 서서히 변하는데, 감독 장훈은 그걸 정치적 각성의 과정으로 그려내는 대신 광주 시민들과의 정서적 일체감을 이루는 상황을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그 촉매가 되는 것은 밥이다. 김만섭이 위르겐 힌츠페터와 우연찮게 통역으로 동승하게 된 광주 현지 대학생 구재식(류준열)을 태우고 광주의 축제 같은 시위행렬 복판에 도착했을 때 처음 받게 된 것은 이름 모를 젊은 여성이 준 주먹밥이었다. 시위대가 군인들과 대치하고 그걸 근처 건물 옥상에서 힌츠페터 일행이 취재하고 있을 때 김만섭은 주먹밥을 우걱우걱 씹으며 역시 음식은 전라도 음식이 맛있다고 말한다. 나중에 어린 딸을 걱정하며 광주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김만섭이 먼저 광주를 빠져나왔을 때 만섭이 순천의 어느 허름한 식당에서 받아든 국수와 주먹밥은 만섭이 체험했던 광주에서 느낀 사람들의 인간적 체온을 새삼 환기시킨다. 김만섭이 그걸 먹으면서 울음을 주체하지 못할 때, 이 장면은 이 영화가 겨냥할 수 있는 감정이입의 최대치를 이룬다.
이 장면은 김만섭이 헤어나오지 못했고 헤어날 수 없는 먹고사는 것의 존엄함의 가치를 개인에서 집단으로 확장시키는데, 이때까지 김만섭의 행동동기로 유일했던 홀아비 가장으로서의 부양 책임감을 이웃들과의 연대 속에서 도모하는 책임감으로 격상시키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 연대적인 의미의 밥의 가치는 한시적인 상태로 소멸할 수밖에 없는데 김만섭은 딸을 안전하게 키워야 하는 가장의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힌츠페터가 한국을 떠나며 연락처를 물었을 때 거짓으로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영웅적인 행위를 했으나 일시적으로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김만섭의 처지를 보충해주는 것은 그의 곁에 위치한 다른 사람들의 자기희생적인 행위다. 김만섭이 폭압적인 군인들의 시위 진압 이유를 물었을 때 자신도 모른다고 했던, 대학가요제에 참가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왔다는 구재식이나 김만섭처럼 처자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만섭과 힌츠페터가 광주를 탈출할 수 있게끔 택시를 몰고 보안사 요원들을 막는 택시기사 황태술과 그의 동료들은 죽음에 이르는 희생을 보여준다. 김만섭을 도와줬던 광주 시민들의 죽음은 힌츠페터와의 재회를 차단하고 남은 인생을 살았던 김만섭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일정한 부채감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이 영화의 서사 논리대로라면 그의 일시적인 영웅적인 행위는 재식과 황태술을 비롯한 광주 시민들의 자발적인 희생에 따른 죽음이 없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다. 이 장치를 통해 영화를 보는 우리는 김만섭의 부채감과 당시의 광주 시민들의 희생에 대한 애도를 동시에 공유하게 된다.
선악의 이분법이 강조된 서사
이것으로 된 것일까. 이 영화의 흥행지표와 SNS에서의 압도적인 호평들은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남아 있다고 본다. 주인공 일행이 스쳐 지나가는 광주 시내의 벽보나 깃발 등을 통해 잠깐씩 보이기는 하지만 <택시운전사>가 화면 속에서 끝내 전두환을 불러내지 않은 것은, 분노보다는 자기위로에 주력한 이 영화의 영리하고 소심한 전략일 것이다. 이 영화는 다른 도시의 대학생들이 무기력하게 침묵하고 있을 때 전두환의 집권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광주의 대학생들이 유일하게 봉기했고 군대의 과잉진압에 항의하며 시민들이 동참한 광주항쟁의 경과 진단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 상황의 인과가 그려지지 않고 절대 악의 근원이 적시되지 않은 가운데 무자비한 군대와 그에 대항하는 무구한 시민들의 대립이 묘사되며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는 상황 앞에서 절망하고 슬퍼하고 서로 돕고 위로하고 있다.
불쌍한 우리 편과 사악한 공권력의 이분법을 강조하는 서사는 재난을 다루는 대다수 한국영화들의 상투형인데, 역사를 다룬 이 영화에서도 비슷한 공식으로 되풀이된다. 이제까진 주로 권력의 사악하고 무능한 하수인으로 경찰이 등장했지만 이 영화에서는 군대가 나온다는 것이 다른데, 특히 도청 앞에서 죽어 있거나 다친 사람들을 주변의 시민들이 구해내려 움직일 때 그들을 군인들이 저격하는 장면이 주는 공포는 직시하는 것이 힘들 만큼 고통스럽지만, 이 장면에서도 강조되는 것은 저항하고 맞서 싸우는 시민들의 이미지가 아니라 (당시에 관한 증언들 가운데는 군인들이 조준하고 있는데도 젊은이들이 반복적으로 거리에 나와 태극기를 감고 구호를 외치다가 쓰러졌다는 것도 있다) 희생을 감수하며 서로 돕는 순수한 피해자들의 연대의 이미지다.
이건 아무 책잡힐 것 없는 강조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너무 소심한 접근법이기도 하다. 우리 편은 저들의 만행에 이토록 순결하게 희생당했다는 이미지를 전시하면서 그걸 보고 가슴 아파하며 동참하지 못했던 우리의 죄책감을 재확인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안전한데, 이 영화는 그 이상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은 관객 각자에게 일임한다. 누구나 허술함을 지적하지만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김만섭과 힌츠페터의 광주 탈출을 위해 무명의 택시운전사들이 벌이는 희생의 제의 장면을 떠올려보자. 유해진이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택시 기사 황태술은 죽기 직전에 택시의 열린 창문으로 김만섭에게 (관객을 향해) ‘우리는 염려 말고 무사히 빠져나가 광주의 진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이것은 이 영화가 관객에게 직설적으로 전해주는 메시지인데, 이 영화를 보고 광주의 비극에 대해 더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유튜브를 찾아보세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내게는 들렸다.
<택시운전사>에서 차마 발화되지 못했던 악의 근원은, 겉만 근사하지 허둥대며 매번 임무에 실패하는 이 영화 속 보안사 요원들과는 달리 여전히 기세등등하며 적지 않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1980년의 광주 시민들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유일하게 절대적 악의 권력에 맞섰다. 그 힘의 뿌리를 확인하는 대신, 이 영화는 그들을 고립무원의 상태로 끝까지 내버려뒀던 우리의 무능과 죄책감을 위로한다. 송강호라는 걸출한 배우가 있음으로 해서 소심했던 이 영화의 허물을 덮을 수는 있겠으나 우리는 아직 위로받을 수 있는 입장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