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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론으로 접근한다면, 클로드 샤브롤의 <마담 보바리>(1991)가 빈센트 미넬리의 <마담 보바리>(1949)의 리메이크가 아니듯, 소피아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2017)은 돈 시겔의 <매혹당한 사람들>(1971)의 리메이크가 아니다. 두 <마담 보바리> 영화가 나오기 전에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원작이 있는 것처럼 두편의 <매혹당한 사람들> 이전엔 원작인 토머스 컬리넌의 동명 원작 소설이 있다. 그러니까 같은 소설을 각색한 두편의 독립된 영화인 셈이다.
하지만 일반론은 둔탁한 도구이며 세상이란 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기억되기 위해 굳이 영화들이 필요하지 않은 플로베르의 소설과 달리 토머스 컬리넌의 작품은 지금까지 돈 시겔 영화의 원작으로만 기억되어왔다. 이 소설이 앞으로 지금까지 나온 두 영화로부터 독립된 작품으로 기억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무엇보다 소피아 코폴라가 이 소설을 읽은 것은 돈 시겔의
소피아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 사악한 양념을 뿌린 우아한 코미디 오브 매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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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의 영화라고 하지만, <장산범>이 끝난 뒤에 또렷이 남는 것은 거대한 암흑을 품은 듯 보이는 구멍이다. 구멍은 소리로 주의를 끈 뒤 사람들을 현혹하고 어떤 것은 삼켰다가 도로 내뱉고, 다른 것은 삼킨 뒤 돌려주지 않는다. 구멍은 메워지거나 허물어지길 반복하며, 또 다른 사물로 변주된다. 온갖 소리를 삼키는 공백을 어떤 의미로 채우는 대신, 일단 영화에서 구멍이 재현되는 방식을 통해 <장산범>이라는 하나의 여정을 감당해보려 한다.
공백이 불러온 또 다른 공백
구멍의 탄생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한밤 중에 차를 몰고 외딴곳으로 향하는 한쌍의 남녀가 등장한다. 남자는 음주운전을 하던 중 사고로 개를 죽인다. 남자가 죽은 개를 트렁크에 싣는데, 그 안에는 온몸이 포박된 여성이 있다. 다시 차를 몰아 어느 폐건물에 당도한 이들은 삽으로 벽을 헐어 커다란 구멍을 낸 뒤 방금 숨이 끊어진 여자와 죽은 개를 구멍 속에 넣어 봉한다. 떠나는 두 사
<장산범>이 재현한 공백의 이미지를 따라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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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아이피>의 촬영과 그 결과물에 대해 긴말 더할 생각은 없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 영화는 욕망이 필요를 압도한 전형이다. 인물의 악마성을 소개하는 단계에서 카메라는 신의주와 서울의 강간·고문·살해 피해 여성의 나신을 각각 납득할 수 없는 수직 부감으로 내려다본다. 카메라의 시선은 등장인물의 그것이 아닌, 인물의 정수리 위에서 줄곧 전지적 권능을 유지한다. 부감과 클로즈업이 수차례 반복된다. 희생자를 촬영한 증거 사진의 노출 역시 빈번하고 또렷하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이 살해되는 장면에서도 의도적 고문과 신체 훼손이 이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원칙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제작진의 취향은 악역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한 소용을 넘어 영화적 윤리를 지키지 못한다. 세상에는 하드고어 무비도 있고 포르노도 있으며 모든 건 관객의 선택이라고 눙쳐도 될까. 8월 28일 기준 이 영화의 전국 스크린 수는 886개로 현재 상영작 중 가장 많다.
언어에 담긴 젠더 인식
<브이아이피
<브이아이피>와 한국영화 속 ‘식구’끼리의 수컷어 사용 경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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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를 비평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다큐멘터리는 처음부터 완전한 자기 비평을 내놓고 있다. 존 케이지 이후 음악을 하는 컨템퍼러리 밴드에 걸맞은 과감한 노이즈 사운드를 배경으로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할 때마다 뜨던 경고 문구를 연상시키는 촌스러운 활자체의 붉은 글씨가 화면을 뒤덮는다. ‘본 영화는 전체적으로 볼륨이 균일하지 못함, 당신의 불편함을 통해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은유하려는 영화적 시도.’ 앞으로 펼쳐질 영화와 음악의 조악한 실수를 예고하며 ‘즉흥성과 오리지널리티’로 퉁친다. 혹시 내가 저런 문구를 구사한 적은 없을까 등골이 오싹해지는 저 비평은 밴드 밤섬해적단의 앨범을 인용한 자기 조롱인 동시에 자신의 영화에 관한 후일의 비평을 미리 조롱하고 있지는 않은가. 감독은 단순한 인용이든 의도적인 삽입이든, 자막은 꿈보다 해몽 격의 비평을 자기화하는 동시에 그것을 열렬히 파괴한다. 여기에 덧붙는 모든 해석은 일종의 사족이 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
입으로 가열차게 싸우는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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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중력을 극복할 수 있을까? <박쥐>(2009)의 전작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에 나왔던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중력은 생물과 무생물을 막론하고 삼라만상의 존재가 결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불가항력적인 섭리다. 인간은 아니지만, 뱀파이어는 중력을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수 있으나 다시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수는 없다. 상승과 하강 사이에 놓인 명백한 차이를 통해 <박쥐> 속 뱀파이어는 ‘하강’만 할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태주(김옥빈)가 “뭐긴, 인간 잡아먹는 짐승이지”라고 말하며 상현(송강호)과 함께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는 장면은, 은유적으로 인간에서 뱀파이어가 된, 그들의 지위 하락을 보여준다.
<박쥐>는 다른 걸작들이 그렇듯 시대보다, 관객보다 한 발짝 앞서 어떤 지점에 당도한 영화다. ‘복수 3부작’ 시리즈 이후 박찬욱은 그간 천착해온 ‘복수’ 대신 ‘사랑’을 소재로
<박쥐> 확장판이 품은 거대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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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의 내일>(2016)은 어느 날 우연히 폭행을 당한 딸 엘리자(마리아 빅토리아 드라구스)를 무사히 영국에 유학 보내려는 아버지 로메오(아드리안 티티에니)의 분투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불행이 ‘침입’하는 순간과 아버지가 이를 ‘방어’하는 순간이 혼재한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뒤 내게는 유독 강렬한 인상 하나가 남았다. 그것은 이 영화의 침입의 순간이 품은 미혹에 대한 것이다. 그 순간은 실로 뭐라 형언하기 힘든 강렬한 미혹을 품고 있다. 이 글은 그 미혹의 실체를 더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날아든 돌이 창문을 깨고, 차 앞으로 무언가가 뛰어들며, 범인인 것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영화에서 침입의 순간들은 잠깐 등장했다가 곧 증발한다. 나머지를 채우는 것은 로메오의 방어의 시간이다. 여기에는 끊임없는 결탁과 부정한 공모의 건조한 연쇄가 자리한다. 그는 간혹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핏기 없는 얼굴로 묵묵히 임무를 수행한다. 그런데 사실
<엘리자의 내일>의 리얼리즘은 무엇을 잃어버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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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종의 전쟁>(이하 <종의 전쟁>)의 시저(앤디 서키스, 웨타 디지털)는 생포한 인간 군인을 풀어주며 대령(우디 해럴슨)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인간 사회와 유인원이 공존할 수 있다는 메시지.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메시지는 인간 군인이 아니라 관객을 향해 기능한다. 시저의 메시지는 한밤중에 유인원을 공격해 시저 가족을 말살한 대령의 행동과 대비되고, 그럼으로써 시저가 대령에 비해 도덕적 우위에 설 수 있도록 한다. 비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의 사멸을 지켜봐야 하는 아이러니는 그렇게 완성된다. 인간이라는 종의 사멸을 막기 위해 극단적 선택을 했던 대령이 진정으로 걱정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상황 아니었을까? 인간이 언어와 지성을 상실한다는 설정은, 인간과 유인원간의 지배와 피지배, 우성과 열성의 자리가 뒤바뀌는 ‘상대적 퇴화’에 대한 알레고리이지 않았을까? 달리 말해 대령은 지구 최후의 종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은 것이다. 다소 비약일
<혹성탈출: 종의 전쟁>이 보여주는 디지털 이미지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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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프란츠>는 모든 예상을 깨는 영화이다. 프랑수아 오종이 찍은 ‘전쟁영화’ 혹은 그의 첫 ‘흑백영화’에 대한 기대감은 시작과 함께 서서히 무너지고, 기존의 영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섹슈얼리티나 파격의 코드들도 죄다 엇갈린다. 하지만 예상보다 더 신선한 경험을 준다. 관객은 여주인공의 시점을 통해 ‘전후의 사랑’과 관련된 사건을 차례로 겪는데, 이상하게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아픈 마음’만이 와닿는다. 비슷한 상황을 그린 여타 영화들과는 다른 현실감이다. 원작으로 알려진 <내가 죽인 남자>(1932)와도 다르다. 상영 내내 그 이유에 관해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클로즈업되는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을 보며 작은 힌트를 얻었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자살에 대한 우화’를 담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죽음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시신 없는 무덤에 정중히 목례하듯, 거짓에 거짓이 입혀져 전체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그리고 그 허구의 구성을
<프란츠>에서 마네의 <자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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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1118호에 실린 송경원 기자의 <군함도>와 <택시운전사>에 대한 평을 잘 읽었다. 그는 <군함도>를 옹호한 내 평론을 “움직임이라는 미학적 견지에서 감독의 의도를 읽으려 한다는 게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미지의 설계와 구현이 주는 쾌감이 평면적인 서사를 시각적 웅장함으로 극복하는 굉장한 전시효과의 영화’라는 내 평의 결론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군함도>의 전시효과가 있다면 그건 민족주의나 역사의 환기라는 주제적인 측면이 아니라 순수하게 시각적 쾌감과 전시, 그러니까 상업영화의 구경거리로서의 완성도를 기반으로 한다”고 지적했다.
이 글은 거기에 대한 반론이 아니다. 송경원 기자는 <군함도>와 <택시운전사>를 묶어 글을 쓰면서 <군함도>에 관한 나의 평을 부분적으로 비판했는데, 이미 흥행에 성공한 <택시운전사>에 관한 평을 쓰려다 그가 내린 결론에서 뭔가 생각할 거
<택시운전사>의 역사적 허구가 동조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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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고 있는 8월 9일 현재 인터넷에 집계된 <군함도>의 관객수는 아직 700만명에 이르지 못했다. 언론에 공개된 <군함도>의 손익분기점이 800만명이라 하니 이 영화가 흑자를 기록하기는 무척 힘겨워 보인다. 나는 스크린 독점 문제 때문에 이 영화를 보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한 집단적 의사 표시는 <군함도>의 류승완 감독도 찬성하고 있는 스크린 독점 규제법을 마련하는 데 힘을 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서 여전히 공감하기 힘든 것은 영화 그 자체에 대한 논란이다. <군함도>가 친일영화라든지 ‘국뽕’영화라는 다소 황당한 주장은 차치하더라도 이 영화가 일제강점기의 징용자들이 겪었던 현실을 외면한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지적에 나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모든 문학과 영화들은, 실은 대부분 판타지다. 기록으로 남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과 허구를 보태 하나의 이야기를
음악과 영상미로 역사적 본질을 살리고자 애쓴 <군함도>의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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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영화에 관한 분석이나 비평이 아니다. 영화 주변을 둘러싼 말에 관한 단상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순간들을 스크린에 재현한 <군함도>와 <택시운전사>를 보며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영화를 보고 난 뒤 일련의 논란과 반응을 보며 심란해졌다. ‘역사를 재현했다’는 명제는 생각 이상으로 관객에게 큰 의미로 받아들여진 모양새다. 반면 역사 논쟁이 커질수록 정작 영화에 집중하는 말들은 지워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에 대한 분석과 비평에 더 보탤 말은 없지만 이를 둘러싼 논쟁들의 초점에 몇 가지 덧붙일 지점이 있을 것 같아 뒤늦게 글을 쓴다.
조금 먼 길을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두 영화를 논하는 데 영화와 역사, 재현의 문제를 분리해놓고 시작할 순 없을 것이다. 영화란 기본적으로 사실을 욕망하는 매체다. 이야기의 덩어리-화(話)이기에 사실의 조각인 실(實)을 어떻게든 획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첨단 기술을 이용해 사
<군함도>와 <택시운전사>, 역사를 재현하는 영화들의 한계와 우려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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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맥베스>는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고증에 바탕을 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현대적인 색채를 띤다고 여겨진다. 이 영화가 몰입의 서사 대신 교묘한 분열의 서사를 차용하고 있다는 것이 영화에서 묻어나는 현대적인 색채와 어느 정도 연관되는 것 같다. 캐서린(플로렌스 퓨)의 결혼식 장면이 담긴 첫 번째 시퀀스에서 캐서린의 뒤쪽 측면에 위치한 카메라는 관객이 안전한 위치에서 베일 속의 캐서린을 관찰하도록 유도한다. 그런데 얌전히 찬송가를 부르던 캐서린이 노래를 멈추고는 시퀀스 내내 카메라에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옆에 선 남편을 이상한 눈빛으로 곁눈질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시선과 행동에 이런저런 해석을 붙이거나 원인을 추측할 수는 있겠으나 이러한 분석이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중요한 건 원인을 알 수 없는 그녀의 행동이 안전한 관찰자로서의 관객의 위치를 흩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객은 그녀가 보여준 시선의 의미를 끝끝내 알
캐서린의 존재감이 바꿔놓은 억압의 풍경 <레이디 맥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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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의 서사는 늘 빈약했다. <메멘토>(2000)는 결말에 도달한 뒤 거꾸로 돌려보면 매우 단선적인 이야기였고 <배트맨 비긴즈>(2005)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길을 따랐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어받아 투쟁을 지속하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는 <배트맨 비긴즈>로 회귀한 반복에 불과하다.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인과로 거대한 미로를 구축했던 <인셉션>(2010)을 선형적으로 재배치한 뒤 조망하면 단선적으로 움직이는 황량한 인물들을 마주할 수 있다. 부녀간의 애틋함을 우주적 규모로 풀어낸 <인터스텔라>(2014)는 또 어떤가. 놀란의 캐릭터들은 관객을 고민에 빠트리지 않는다. 대개 단순하지만 강력한 동기를 지닌 채 목적을 수행하는 데 열중한다. <덩케르크>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사건에 극적인 드라마는 없다. 덩케르크 해변에 남겨진 앳된 군인들이 도
크리스토퍼 놀란은 <덩케르크>의 형식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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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 프로젝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이 영화가 60, 70년대 유행했던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전쟁물들과 비슷한 작품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상 최대의 작전>(1962)이나 <머나먼 다리>(1977)처럼 유명한 다국적 배우들이 잔뜩 등장해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실존 인물들을 연기하고 그 자잘한 장면들이 거대한 태피스트리처럼 하나의 역사화로 완성되는 그런 영화 말이다. 물론 완성된 영화를 보니 그런 영화들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도대체 난 왜 그런 영화를 상상했을까? 이런 영화들의 유통기한은 오래전에 지났다. <지상 최대의 작전>은 대히트작이었지만 <머나먼 다리>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1966)와 같은 흥행 실패작이 더 많았고 돈도 많이 들었다. 역사광이나 ‘밀덕’(밀리터리덕후)이 아니면 아주 관심 있게 볼 이야기 구성도 아니다.
무엇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2차 세계대전
비겁함이라는 테마를 전면에 드러낸 전쟁영화 <덩케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