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는 곧 퀴어영화로 호명되며, 영화의 모든 상황과 감정은 성소수자 특수성의 프레임 속에서 이해되곤 한다. 퀴어 정체성을 분명히 호명하는 것은 꼭 필요하며, 반대로 섣부른 보편화가 더 위험할 때도 있다. 문제는 그들과 우리의 분리를 의심하지 않으며, 이해의 방향은 늘 우리에게서 그들에게로 향한다는 데 있다. 세바스티안 렐리오 감독의 <판타스틱 우먼>(2017)은 트랜스젠더 여성의 삶을 다루고 있으나, 관객에게 타자에 대한 일방적인 이해나 공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화는 나와 타자의 경계를 훌쩍 넘어보도록 관객을 추동하는 에너지가 있는데, 이는 일단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두드러진다.
사라지기 위해 등장하는 남자
마리나(다니엘라 베가)는 자신의 존재성을 호소하지 않고 존재한다. 그녀가 자기 인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건 의상이다. 그녀는 옅은 화장에 단정한 원피스 혹은 운동화에 바지 차림으로 등장한다. 미디어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의 외모를 재현할 때의 클리셰를 떠올려본다면 마리나의 의상은 ‘진짜’ 여성의 평상복에 가깝다. 트랜스젠더 묘사에서 드러나는 과도한 의상은 자신이 여성임을 세상에 분명히 선언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인 동시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성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감추는 데 쓰인다. 마리나가 짙은 화장에 화려한 의상을 걸치며 등장하는 장면에서조차 그 의미는 선언이나 불안이 아닌, 일종의 유희로서 드러난다. 마리나가 여성성을 강조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그녀의 정체를 혼란스러워하는 반면, 관객은 마리나가 여성이라는 인식을 공고히 하게 된다. 왜냐하면 여성성을 강조할 필요가 없는 존재는 스스로가 여성임을 의심하지 않는 자, 즉 여성이기 때문이다.
마리나가 신체검사라는 명목으로 조사관과 형사가 보는 앞에서 신체를 노출했을 때, 관객인 내가 마리나를 완전히 여성으로 느끼고 있음을 자각했다. 영화가 구태여 노골화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으나, 관객에게로 전해지는 수치심은 본질적이고도 즉각적인 동질감에서 비롯된다. 그녀가 조사관의 요구에 눈치를 보면서 천천히 옷을 벗을 때, 그녀의 자발적인 복종은 굴욕감을 더욱 강화한다. 형사 아드리아나는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는 조사관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한 뒤, 하반신이 노출된 마리나의 신체를 뚫어지게 응시한다. 여기에서 남성-여성이라는 젠더 위계는 완전히 무너진다. 재현된 젠더가 생물학적 성의 완강함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이 아드리아나의 불쾌한 응시하에 놓인 마리나의 신체를 통해 목격된다.
마리나의 연인인 오를란도(프란시스코 리예스)는 아드리아나와 정반대의 지점에서 젠더 인식 전환에 기여한다. 짧은 등장 뒤 죽음을 맞는 오를란도는 냉정히 말해 사라지기 위해 등장한다. 마리나가 겪는 고통과 이에 관한 극복이라는 영화의 주된 서사를 위해 오를란도는 죽어야 했다. 한편 캐릭터의 서사적 기능만을 고려할 때, 할리우드 고전영화에서 오를란도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예를 들어 <싸이코> <현기증> 등 히치콕의 영화에서 서사의 추동점을 남긴 채 사라진 이는 여성이다. 형사 아드리아나가 마초성을 수행했다면, 오를란도는 장르적 도구로서의 여성 캐릭터성을 전복적으로 수행하는 측면이 있다.
이미지 구현 측면에서 오를란도는 앞서 언급한 서사적 목적성을 넘어 과잉된 측면이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화면 아래쪽에 오를란도의 누운 옆모습이 보인다. 이때 조명이 오를란도와 그 주변의 색을 완전히 장악하며, 붉은빛에서 푸른빛으로 전환된다. 인물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 장면은 정체를 숨기는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다소 과장되게 독해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음 숏에서 사우나 출입문쪽 계단의 분리된 거울 속 조각난 오를란도의 얼굴은 그를 분열적이고 미스터리한 인물로 인식시킨다. 이러한 분열상은 무수한 분열을 겪었을 마리나를 표현할 때 더 적합한 이미지처럼 보인다. 그와 동시에 성소수자를 논할 때 주로 쓰이는 분열성이라는 단어를 되돌아보게 한다. 분열성은 성소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외부의 시선에 따라 재단되는 것도 비단 그들만이 겪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인식을 확장하면 오를란도와 마리나가 운명을 공유한 한 인물처럼 여겨지는 측면이 있다. 영화는 마리나의 생일과 오를란도의 사망을 의도적으로 연결하면서, 엇갈린 것이자 상호보완적이기도 한 두 사람의 운명을 인식하게 만든다. 두 사람을 잇는 탯줄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마리나는 응급실에서 쫓겨나면서도 창문을 통해 보이는 오를란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그녀의 집요한 응시는 눈을 떼지 않는 한 그는 살아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오를란도는 죽은 뒤에도 마리나의 시선 안에서 등장하며 두 사람이 시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을 강화한다.
접촉과 투과가 아닌, 시선과 이미지는 마리나의 존재성을 설명하는 데도 중요한 키워드이다. 마리나의 신체검사 방식은 마치 본을 뜨듯 그녀의 신체의 표면 곳곳을 카메라로 찍어 보존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이는 그녀의 존재방식이 이미지임을 드러내려는 것 같다. 오를란도 아들과 그 일당은 그녀의 얼굴만을 집요하게 공격한다. 이는 얼굴이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기관임을 강조한다. 얼굴의 의미는 마리나가 침대에 기댄 채 사타구니 사이에 놓인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장면을 통해 드러난다. 이 장면은 그녀의 자각을 드러낸다기보다는 관객에게 선언하듯 찍혔는데, 그녀의 정체를 물으며 은밀히 그녀의 다리 사이를 가늠해보는 이들에게 그녀는 자기 얼굴이 곧 성기라고 말한다.
그것은 남성성과 여성성 모두를 부인하는 것이자, 모두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는 마리나가 오를란도가 흘린 열쇠를 따라 사우나를 방문한 장면에서 분명해진다. 그녀가 여성 탈의실에서 남성 탈의실로 옮겨가는 동안 그녀의 정체성은 공간의 성격과 반대로 불안하게 요동친다. 불안은 곧 그녀가 어떤 무리 속에 완전히 정체되기는 힘들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자, 한편으로는 그것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도 있다고 말한다. 사우나를 홀가분하게 나선 그녀는 두개의 성별로 구획된 공간을 지나쳐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다. 혹은 오를란도의 시선 속에서 처음 우리에게 당도했던 마리나가 비로소 온전한 시선을 가진 인물로 태어났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시선과 이미지가 드러내는 마리나의 존재
중요한 것은 서사 안팎을 넘나들며 관객에게 말을 걸어온 마리나의 존재감과 이를 위해 영화가 마련한 공간들이다. 마리나는 천장에 놓인 카메라로 점프하거나, 바람이 몰아치는 거리에서 퍼포먼스를 하거나, 막간 노래를 부르며 서사의 층위를 넓히는 동시에 관객과 대화한다.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 모든 요소들은 트랜스에 의해 추동되며, 트랜스를 추동한다. 영화는 실제와 환상, 가요와 오페라, 뮤지컬과 극 등 다양한 층위들로 트랜스하며 인물의 기운과 영화적인 동조점을 찾아간다. 영화가 트랜스젠더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트랜스가 주는 그 모든 가능성을 영화적으로 사유하려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