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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야 감독의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은 재개발을 앞둔 둔촌주공아파트의 모습을 담은 영화다. ‘재개발’을 소재로 삼은 다큐멘터리가 그렇듯, 이 영화 역시 ‘재개발 다큐멘터리’로 분류되며 그러한 맥락 속에서 이야기된다. 문제는 ‘재개발 다큐멘터리’라는 분류가 아니라 그 분류가 영화에 관한 모종의 규정으로 작용하는 상황이다. ‘재개발 다큐멘터리’라는 범주로 포괄되는 이상, 장소만 달라졌을 뿐 모든 영화가 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환각이 작동한다. 이 영화가 재개발 다큐멘터리에 관한 보통의 인식과 얼마나 먼가를 짚으며 이야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관객은 <집의 시간들>을 보는 동안 재개발을 인식할 수밖에 없지만, 엄밀히 말해 영화 속에서 재개발은 재현되지 않는다. 굴착기 소리도, 건물 잔해의 흉측함과 가련함도, 사람들의 저항 혹은 들뜸과 회한도 여기에는 없다. 재개발은 하나의 전제이자 결과일 뿐이다. 이것은 내레이션과 자막을 통해 발화되거나 기록
<집의 시간들> 투쟁과 파괴가 아닌, 어떤 헤어짐에 관한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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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의 그해 여름>(2017)은 카를라 시몬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엄마를 잃은 6살 소녀가 친척집에 맡겨진 뒤 낯선 환경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는다. 천재적인 아역 라이아 아르티가스의 연기와 감독의 사려 깊은 연출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바르셀로나에서 살던 프리다(라이아 아르티가스)는 외삼촌 부부를 따라 시골로 내려간다. 어른의 눈으로 보았을 때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외삼촌 부부가 프리다를 냉대하는 것도 아니고, 사촌동생 아나(파울라 로블레스)는 프리다를 좋아한다. 하지만 영화는 프리다가 느끼는 불안, 질투, 회피, 영악함, 투정, 눈치보기, 거짓말, 죄의식, 반항, 그리움, 애정결핍, 서운함, 우울, 두려움, 안도감 등을 담아낸다.
흔히 엄마를 잃은 아이가 친척집에 맡겨지는 서사를 다룰 때 가장 쉬운 접근이 차별이나 학대를 당하는 이야기다. 아이는 ‘이노센트’한 존재로, 죽은 엄마와의 관계는 이상적으로 그려진다. 즉 행복하게 살던 순진한 아이가
섬세하게 가족이 되는 과정을 살피는 <프리다의 그해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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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지 리치 아시안>(2018)을 같이 본 동행은 “싱가포르 사람들도 과연 영화 속 사람들처럼 ‘교포화장’을 할까?”라고 물었다. 나 역시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은 실제 싱가포르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가까울까? 영화가 그리는 1% 중 1% 사람들의 패션과 메이크업은 일반적인 싱가포르 사람들과 얼마나 다를까? 분명 이 영화의 싱가포르는 할리우드화된 버전 같긴 한데, 인터넷 검색 몇분 만으로 답을 알았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아마 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렇듯 한국인의 틀에서 싱가포르를, 아시아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한국은 어떻게 봐도 무언가의 보편적인 표준이 될 수 있는 나라는 아니다. 다들 자주 까먹지만.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국내 흥행 성적과 관심도는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다. 이는 예상되었던 일이다. 백인들이 주인공인 할리우드영화는 어딜 가도 대부분 비슷하게 감상된다. 주인공이 흑인이라도 크게 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아시아인만이 감지할 수 있는 어떤 재미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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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맨>의 제작자 스티븐 스필버그의 세계는 이성으로 가득 차 있다. 스필버그가 미지를 만날 때조차, 그 미지는 이성적이며, (수학적 방식으로) 대화가 가능한 존재들이다(<미지와의 조우>(1977)). 이성과 합리는 상식으로 이어지고, 상식은 도덕으로, 휴머니즘으로 이어진다. 스필버그의 영화에는 합리적인 판단의 주체가 등장하고, 이 인물은 비극과 조금은 거리를 두고 있다. 즉 스필버그는 말할 수 없는 희생자의 눈이 아니라, 희생자를 보듬는 휴머니스트의 눈으로 본 비극을 말한다(<쉰들러 리스트>(1993)). 그러나 상식은 언제나 다수의 상식이며, 도덕은 언제나 일반적인 도덕이다. 그가 도덕을 말할 때 그의 ‘보편’에서는 항상 무엇인가가 배제되고 있으며, 어떤 ‘도덕’을 보편적인 도덕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는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래서 그의 휴머니즘에 국가주의가 어른거리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이언 일병 구하기>(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퍼스트맨>을 통해 삶을 담아내는 방식, 혹은 그가 해석한 삶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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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백>의 장섭(이희준) 캐릭터에 관한 세간의 평가는 엇갈린다. 여성주인공의 위치를 위협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도움을 주는 남성 캐릭터라고 호평하는가 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문제를 해결하는 장섭이 여성의 연대라는 주제의식을 해친다는 불만도 있다. 나는 캐릭터의 적절성 여부를 판단하는 데는 관심 없다. 다만 극중 장섭의 역할을 두고 논란이 불거졌다는 사실만이 나의 관심이다. 사건의 개입에 용이한 형사 장섭의 역할은 두드러진다. 반면 백상아(한지민)와 김지은(김시아)의 행위는 ‘약자의 연대’라는 주제 차원에서만 사후적으로 풀이된다. 경찰서에서, 터미널에서, 공사 중인 공터에서 장섭은 위기에 처한 백상아를 돕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도 <미쓰백>이 상아와 지은의 이야기로 남는다면, 그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언하면 <미쓰백>은 드러나는 액션으로서의 서사보다 꾹꾹 눌러진 감정의 서사가 더 중요한 영화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은 미묘하게 그려지기에
<미쓰백>이 캐릭터를 재현하는 방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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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조금씩 잊혀지고 있는 톱스타 잭슨(브래들리 쿠퍼)이 가수의 재능을 가진 앨리(레이디 가가)를 발견한다. 작은 라이브바에서 그들은 서로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영화에서 이 순간은 짤막하고 강렬하게 그려진다. 잭슨과 앨리의 시선이 교차되는 리버스숏을 보면서, 관객은 영화가 평범한 클래식 멜로드라마의 한계를 뛰어넘게 될 것이라고 직감할 수 있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화려한 공간과 익숙한 샹송 <La Vie en Rose>의 등장만으로 이러한 교감은 선명해진다. <스타 이즈 본>은 1937년 만들어진 원작의 주인공 관계도를 그대로 사용하는 영화다. 시작부터 전개와 결말에 이르기까지, 첫 영화의 오리지널 스크립트는 구성 그대로 활용된다. 다만 인물을 배우 아닌 가수로 설정했기에, 1976년 만들어진 프랭크 피어슨 감독의 영화와 분위기는 더 비슷하다. 기본적으로 음악영화의 포맷을 잘 살려서 완성됐고, 남자주인공 잭슨의 시점을 이전보다 깊이 파고든다는 점에
진부할 수 있었던 할리우드의 러브 스토리 <스타 이즈 본>이 관객을 매혹하는 몇 가지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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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여기에 없었다>(2017)와 관련된 흥미로운 반응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제목이 다소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그 의미에 관하여 각자의 해석을 즉각 내어놓는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것에 대해 의아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상 경력에 거는 우리의 통상적인 기대와 달리 이 영화의 서사는 아주 간결하고 한편으론 헐겁다. 소량의 정보만을 제공하고 있어 나머지는 관객의 상상력에 의존한다. 그런데도 불평하는 의견은 의외로 드물다. 비슷한 반응과 자연스러운 수긍은 아마 몇몇 이유에서 연유할 것이다.
몇 가지 정황만으로도 우리는 인물들의 전사를 직조해낼 수 있다. 조(호아킨 피닉스)에게 일어났던 외상적 사건들은 파편적으로 노출되지만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찰나에 삽입되는 유년 시절의 학대 현장과 전장에서의 죽음은 전체를 조망해볼 필요도 없이 관객의 시선을 파고든다. 생동하는 인물들을 응시하는 중에도 조의 머릿속에는 굳어버린 주
<너는 여기에 없었다> 호아킨 피닉스가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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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았다. <암수살인>(2017)을 보는 내내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영화는 수없이 ‘만약에’를 되돌아보며 우직하게 제 갈 길만 가는 영화다. 그게 간혹 촌스러울 때도 있고 단단하고 기본에 충실한 연출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 서사의 향방을 결정하는 건 결국 운, 그러니까 우연이다. 당연히 서사적으로는 밋밋한 흐름이라고 해도 크게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건 이 영화가 사건이 아니라 인물을 따라가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밝혀지지 않은 사건 그 자체보다는 인물의 기억, 상상,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가능성을 재연한다고 해도 좋겠다.
송경수 형사가 가지 못했던 미래
형사 형민(김윤석)이 뒤늦게 사진 속에서 여성용 피임기구 루프를 발견한 건 집요한 수사와 끊임없는 의심이 얻은 결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뜬금없이 던져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암수살인>의 고지식한 내러티브는 퍼즐조각 같은 단서
<암수살인> 의도를 뛰어넘은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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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많은 소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건축설계가 직업인 내가 연기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항상 주제넘다고 생각했다. 내가 영화에 관심이 있는 것은 ‘서사 구조’이다. 하지만 <죄 많은 소녀>(2017)에서 전여빈의 연기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연기가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전여빈이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만 생각했다. 영화를 본 후, 또렷하게 그녀의 연기가 기억에 남았다. <죄 많은 소녀>에서 다른 배우들은 다소 산만하게 보이고 일부는 전형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특히 교장선생님과 교사들이 나오는 장면들에서 보이는 전형성은 집중을 방해하기까지 한다. 전여빈만이 일관된 자기 세계를 갖고 가고 있다.
나는 전여빈의 훌륭한 연기가 배우 개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그녀가 일종의 터널 같은 형태의, ‘어떤 제한된 세계’를 통과해야 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에 기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면의
<죄 많은 소녀>의 구조가 특별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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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램지는 <케빈에 대하여>(2011)에서 소년의 얼굴에 살인마의 초상을 겹쳐놓는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조합이지만 그녀에게 삶이란 그런 것 같다.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생생히 박혀 있는 살풍경이야말로 삶의 민낯이 아닌가. 그 불협화음 앞에서 당신은 무얼 할 수 있느냐고 린 램지는 묻는다.
그녀의 신작 <너는 여기에 없었다>(2017)에는 다양한 ‘겹침’이 등장한다. 남자의 목소리 위로 소녀의 목소리가 겹쳐지고, 음악의 선율 위로 다른 선율이 겹쳐진다. 그러나 분별없이 겹쳐지는 그 풍경은 조화롭지 않다. 조(호아킨 피닉스)가 니나(예카테리나 삼소노프)를 구출하기 위하여 성매매가 벌어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던 장면을 생각해보자. 어두운 복도를 비추던 CCTV에 한 소녀가 홀연히 나타난다. 원피스를 입고 자박자박 걷는 소녀의 여린 실루엣은 이 지옥 같은 건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장면이 진정 공포스러운 이유는 복도와 소녀 사이
<너는 여기에 없었다>, 린 램지가 죽음을 영화에 끌어들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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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는 호주의 여성감독 안나 브로이스키가 2013년에 만든 다큐멘터리다.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소개된 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원제인 ‘Aim High in Creation!’은 김정일의 저서 <영화와 연출>의 단원 제목 ‘창작에서는 크게 노리는 것이 있어야 한다!’에서 따온 것이다. 도쿄에서 태어난 안나 브로이스키 감독은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주한 호주대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한국, 필리핀, 베트남, 미얀마, 이란 등에서 자랐으며, 동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깊다.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는 진귀한 영화다. 좀처럼 보기 힘든 북한 사회와 북한영화를 보여준다. 또한 북한의 체제선전을 따라가면서 그들의 우스꽝스러움을 폭로하는 ‘내재적 접근법’을 통한 비판이 담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구 사회에 악마처럼 알려져 있는 북한 사회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생각하게 해준다. 그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 북한을 먼저 만나본 안나가 남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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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마이 신지 전작전에 대해 한줄의 지면도 할애하지 않은 잡지를 영화잡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난 9월 15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소마이 신지의 전작전이 막을 내렸다. 그동안 소마이의 영화를 소개하는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모든 영화가 상영되는 건 국내에서 처음 성사된 일이다. 주관적인 판단이라는 전제를 두고 말하자면, 이는 올 한해 국내 시네마테크나 영화제에서 마련된 모든 특별전과 회고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기획이다. 그러나 어느 매체에서도 이 상영의 의의를 거론하지 않았다.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답하기 쉬운 문제는 아니다. 소마이 신지의 전작을 상영하는 일은 지면에 실릴 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이건 영화주간지에서 다루기 어려운 주제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상영이 지시하는 의미와 효과를 비중 있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철저한 외면은 시네마테크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의 목록을 사건으로 취급하는 데 무관심한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을 테지
소마이 신지 전작전 이후 <러브 호텔>을 꺼내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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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스 게임>의 리듬은 이상하게 둔하다. 영화의 단선적인 구조가 지나치게 뻣뻣해 에런 소킨의 결연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이런 구성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의 연출 데뷔작이라는 사실을 감안해봐도 인상이 크게 바뀌진 않는다. 질주해 나가는 서사엔 소킨의 인장이 여기저기 찍혀 있건만 전체 구조로 보자면 민첩하기보다는 강직해서 영화가 외려 평평해 보인다. 각종 업계의 생태와 시스템의 속성을 속사포 같은 대사로 탁월하게 묘사해내는 그의 재능은 몰리 블룸(제시카 채스테인)의 포커판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지만, 소킨은 질주하던 영화를 계속해서 불러세워 몰리의 윤리적인 면모를 웅변하듯 변론한다. 그러니 이상하다.
<몰리스 게임>의 일차적인 유희는 몰리가 전문가다운 솜씨로 포커판을 장악해가는 과정을 빠르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그건 연출작으로도 다시 한번 입증해내는 소킨의 기술전일 뿐, 스스로는 그것에 사활을 걸진 않는 것 같다. 카드가 도
<몰리스 게임>엔 왜 질탕한 놀이판이 깔려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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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시성>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된 글입니다.
언젠가부터 적지 않은 이들이 증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2009)부터였고 누군가는 <어벤져스> 시리즈의 중간 어디쯤부터였다. DC 코믹스의 최근작에 이르자 어지러움을 동반한 두통을 호소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막대한 비용과 노동이 투입된 컴퓨터그래픽(CG) 얘기다. 이제 거대하고 화려한 엉망진창(<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시가전 장면 같은 것)을 보고나면 어김없이 피로감이 찾아온다. 육안으로 봤을 때 실사와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왜. 마블 스튜디오의 경우 이같은 관객 피로감을 인지하고 민감하게 액션 디자인에 나서고 있기도 하다. 원인은 차차 밝혀야겠으나 CG를 포함한 시각특수효과(VFX)에 노출된 빈도만큼 피로가 누적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이같은 일군의 증상을 ‘만성 VFX 피로 증후군’이라 명명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 병원(病源)의 핵
<물괴> <안시성>, 한국영화 속 VFX 활용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