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홀로 해낸 거예요.” 라보나 역의 앨리슨 재니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 첫마디를 이렇게 뗐다. 처음에는 그 말이 ‘라보나다운’ 소감이라고 생각했지만, 곱씹을수록 토냐(마고 로비)에게 더 적절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냐가 보여준 뻔뻔하고 거들먹거리는 태도 때문이 아니라 비싼 의상비를 감당할 수 없자 스스로 피겨 드레스를 지어 입던 토냐의 ‘억척스러움’ 때문이다. 토냐를 나타내는 또 다른 말은 그녀가 버릇처럼 말하던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이다. 두 문장 속에 내포된 태도는 언뜻 모순돼 보이지만 토냐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양립 불가능한 것의 양립. 이것이 곧 토냐의 삶이다.
토냐 하딩을 일컬어 흔히 ‘은반 위의 악녀’라고 말한다. 토냐의 모든 피겨 경력이 ‘낸시 케리건 피습사건’이라는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 탓이다. 케리건 vs 토냐의 라이벌 구도에 따른 감정싸움은 영화의 중심 서사가 아닐뿐더러 완벽히 생략된다. 적어도 영화에서의 토냐는 악녀가 아니다.
<아이, 토냐> 스케이트는 그녀에게 초능력 같은 거라네
-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꿈과 환상의 나라’ 디즈니월드 근처 싸구려 모텔에 집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텔의 이름이 ‘매직캐슬’이라는 것을 발견하며 시작한 영화처럼 보인다. 영화는 계속해서 디즈니월드와 매직캐슬 모텔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대비되는 구조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현재와 다른 방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모텔에서 생활하는 젊은 미혼모 핼리(브리아 비나이트)와 그의 어린 딸 무니(브루클린 프린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집이 아니라 모텔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경제적으로 한계에 다다른 사람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매직캐슬이란 이름의 모텔에 살면서도, 정작 근처에 있는 디즈니월드에는 갈 수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서사의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부엌이 없는 방/집
플로리다의 맑은 날씨와 수영장이 설치된 매직캐슬 모텔의 쾌적한 환경(?)이 모텔에 사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플로리다 프로젝트> 속 비현실적인 ‘만화의 공간’ 디즈니피케이션, 그리고…
-
영화의 시작,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맨드)는 광고 회사의 창가에서 뒤집힌 채 버둥거리는 벌레가 되살아나도록 도와준다. 그런 그녀의 귀에 웰비(케일럽 랜드리 존슨)의 말이 날아와 꽂힌다. 광고 기간은 부활절 전까지입니다. 전남편 찰리(존 호킨스)는 빌보드를 세운들 죽은 안젤라(캐서린 뉴턴)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광고의 내용은 딸을 죽인 범인에 관한 것이건만, 어째서인지 영화는 자꾸 무언가의 ‘부활’을 언급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하나의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쓰리 빌보드>는 무엇의 부활을 기다리는가.
언어의 엄중함
대답에 닿기 위하여 먼저 영화를 회상해보자. 빌보드 앞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딕슨(샘 록웰)이다. 그는 “마오!” 같은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질문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쩔쩔맨다. 그는 늘 서툴고 어눌하게 말하지만 간혹 젠체하며 ‘환경보호법’ 혹은 ‘유색인종’ 같은 단어들을 언급한다. 이때 딕슨이 서툴게나마 어려운 용어를 구사하는 이유는
<쓰리 빌보드>, 밀드레드가 광고판에 쓴 것은 언어이다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목가적인 풍경을 헤집어 흩뜨리는 데 마틴 맥도나만큼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는 감독은 없었던 것 같다. <킬러들의 도시>(2008)에서 벨기에의 중세도시 브루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그는, 전작인 <세븐 싸이코 패스>(2012)에 이르러 사이코패스의 얼굴을 할리우드의 작가 세계와 겹쳐놓았다. 어쩌면 역설적인 이유 때문에 조용하고 틀에 박힌 배경을 선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번 영화 <쓰리 빌보드>에서도 아름다운 미주리주의 작은 마을은 완전히 파괴되고 헤집어진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통해 각인됐던 미국 중서부의 풍요로운 자연풍광은 이 작품을 거쳐 ‘끔찍한 사건으로 딸을 잃은 어머니의 복수극’이 펼쳐지는 배경이 된다.
드라마투르기를 따르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단 한번도 맥도나의 영화에서 주요 캐릭터들이 감정에 휩싸여 불타오르거나, 관객이 이입할 만큼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드러낸 적은 없었다.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연기
<쓰리 빌보드>의 마틴 맥도나 감독이 비극을 변주하는 방법
-
-
영화는 “퓨처랜드에 새 차가 들어왔대!”라는 한 아이의 외침으로 시작된다. 그 소식을 들은 아이들은 신나게 퓨처랜드(미래의 땅)로 뛰어간다. 그리고 퓨처랜드에서 아이들은 차에 침을 뱉으며 논다. 영화는 30분간 아이들이 해맑게, 오래된 방식으로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유년의 추억이 떠오른다.
유년 시절의 많은 부분은 환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니(브루클린 프린스)와 아이들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마약중독자들이 쓰는 버려진 콘도를 “수백년 전에 지어진 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있지도 않은 “댄스룸”을 발견하고, 마약중독자들이 버리고 간 약솜은 “유령 응가”가 된다. 아이들은 버려진 콘도에서 중세시대 궁전을 보는 것이다. 어른에게는 단지 유용성으로 측정되는 모든 것들에 아이들은 환상을 심고, 전설을 함축한 세계로 바꾸어놓는다. 이것이 아이들이 삭막한 모텔에서 계속 웃을 수 있는 이유다.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그것보다 훨씬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슬픔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
스티븐 스필버그의 신작 <더 포스트>는 망각되거나 무시되고 있는 영화적 호흡의 생생한 결과물이다. 화면을 잘게 나눠 심장 박동을 의도적으로 자극하거나 호흡이 달리는데도 과시적으로 화면을 길게 끌고 가는 허세가 없이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가운데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야 할 때 당연하다는 듯이 다음 화면으로 넘어간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경지의 이 화면 붙이기는 하나의 화면 속에서 배우들이 최적의 움직임과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호흡을 보장한다. <더 포스트>의 모든 장면들은 영화 현장에서 오래 버티며 통달한 사람들만이 해낼 수 있는 장인적 능숙함을 증명하는 예시들이다. 노련한 감독의 지휘 아래 화면 세팅에 필요한 최상의 기술이 동원되는 가운데 메릴 스트립과 톰 행크스를 비롯한 배우들의 능란한 연기가 펼쳐진다. 이 영화는 현장에서 오래 버티며 살아남은 사람들만이 해낼 수 있는 것들의 최상의 결합이다.
공간에서의 인물의 주도
스티븐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의 우아함에 대하여
-
맷 스파이서의 <언프리티 소셜 스타>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이 아직 영화를 보지도 않은 나에게 온 것은 아마 내가 <씨네21>에서 연락이 닿는 사람들 중 가장 중증의 SNS 중독자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영화를 보지도 않았던 내가 이를 덜컥 받아들였던 것도 내부인의 관점으로 몇 마디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SNS의 영토는 광대하고 지역마다 성격이 다르며 같은 지역의 거주민이라고 해도 행동방식이 다르다. 나는 페이스북(게임 계정 등록용)과 인스타그램(연예인 스토킹용)에 가입되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트위터 사용자이다. 인스타그램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언프리티 소셜 스타>의 이야기는 나에게 좀 남의 나라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우긴다면 그건 거짓말이 될 것이다.
SNS의 허약한 관계를 현실로 끌고왔을 때
현실 세계와 비교했을 때 SNS의 가장 큰 특징은 관계 맺기가 굉장
<언프리티 소셜 스타>는 SNS 세계를 너무 가볍게 본다
-
영화 <더 포스트>는 ‘물먹고 반까이(挽回)’하는 게 전부다. <뉴욕타임스>로부터 ‘물먹은’ <워싱턴포스트>가 ‘반까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부언하면, <뉴욕타임스>의 닐 시언의 특종에 ‘물먹은’ <워싱턴포스트> 전체가 전국담당 에디터 벤 백디키언의 인맥을 동원한 취재에 겨우 ‘반까이’하고 숨을 돌리는 영화다. 흠, 한 발짝만 더 들어가보겠습니다. (상대적으로)재정이 탄탄한 1급 정치신문 <뉴욕타임스>를 신뢰한 제보자가 7천페이지짜리 펜타곤페이퍼를 넘겼고, 석달 동안 보고서를 분석한 <뉴욕타임스>가 (예상대로) 흔들림 없이 특종 보도했으며, ‘물을 먹은’ <워싱턴포스트>가 법원의 보도중지명령 상황에서 국장과 언론 사주의 구속을 각오하고 투자자들의 투자 철회 등으로 닥칠 폐간 위기에도 굽힘 없이 ‘반까이’해 “기사의 수준이 수익을 결정한다”는 저널리즘을 위한 철학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영화
<더 포스트>의 1971년 <워싱턴포스트>의 보도, 2018년 한국의 기자는…
-
다소 지엽적인 질문 하나를 던져보고 싶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하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엘라이자(샐리 호킨스)는 왜 영화관에 가지 않을까. 크리처(더그 존스)를 찾기 위해서라는 예외적인 목적을 제외하고 엘라이자는 극장에 가지 않는다. 엘라이자가 영화를 즐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코너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자일스(리처드 젠킨스)의 집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영화를 보곤 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전작에서 텔레비전이 하나의 미장센처럼 활용된 바 있긴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단순한 미장센을 넘어 우주탐사, 소수자 차별 등과 함께 1960년대를 반영하는 지표 중 하나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엘라이자가 영화관에 가지 않는 상황 역시 시대를 대변하는 것일까. 텔레비전이 처음 등장할 당시, TV에 영화 관객을 빼앗기게 된 현실을 우려하는 시각이 팽배했으나, 델 토로가 굳이 지나간 논란을 끌어들여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 환상을 보존하는 방식에 관하여
-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는 다음과 같은 자막으로 시작한다. “1979년 6월, 작가 제임스 볼드윈은 복합적 작업에 착수한다. 살해당한 세 친구들을 통해 미국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메드가 에버스, 마틴 루서 킹, 맬컴 엑스. 30페이지밖에 쓰지 못한 이 글의 제목은 <리멤버 디스 하우스>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복합적 작업’(complex endeavor)이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에는 볼드윈이 남긴 미완의 글에 대한 라울 펙 감독 자신의 해석과 평가가 담겨 있는데, 그것은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라는 영화에도 잘 어울리는 말이다. 라울 펙은 볼드윈의 글에서 어떤 복합성을 감지했다.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는 그 풍부한 뉘앙스를 한편의 영화에 온전하게 담아내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 영화는 제임스 볼드윈의 문학적 에세이(또는 글쓰기를 위한 노트)를 충실하게 번역한(또는 완성한) ‘에세이 필름’이고, 한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는 제임스 볼드윈에 대한 단순한 전기영화가 아니다
-
이완민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 <누에치던 방>은 하나의 전제에서 시작하는 영화다. 주인공 미희(이상희)는 어느 날 지하철 안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고생(김새벽)을 따라 지하철에서 내리고 그녀를 쫓아서 성숙(홍승이)의 아파트까지 가게 된다. 미희는 성숙에게 무작정 고등학교 단짝친구라고 말한다. 그런데 성숙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녀를 받아준다. 이런 전제가 없다면 이 영화는 성립할 수 없다. 이제부터 영화는 그녀들의 만남을 통해 그녀들의 주변 사람들(미희와 헤어진 남자친구를 성숙이 만나고, 성숙과 함께 사는 익주를 미희가 만나게 되는)과 서로 엮이면서 잠실이란 공간을 중심으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나간다. 영화는 따뜻한 톤의 색채(과거)로 학교 운동장을 돌아 교문을 나가는 전세버스(유영의 영결식 차량)의 부감숏으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앞 장면과는 대조적으로 차가운 느낌의 색채(현재)로 2호선 지하철 안의 여고생(김새벽)의 모습으로 연결된다. 이처럼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서로
<누에치던 방>이 이중의 꿈 구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은
-
나는 실사영화 감독으로서의 연상호를 그리 미덥게 바라보지 않는다. <부산행>(2016) 때 한 차례 언급한 바 있는데 영리한 연출자 연상호를 얻은 대신 애니메이터 연상호는 딱 그만큼 희미해진 게 아닌가 싶었다.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될 때 흥미롭던 것들이 실사 영역에서는 전형적이고 편편한 형태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염력>을 보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정확히는 연상호 감독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영상으로 결과를 구현하는지 파악하는 데 3편의 애니메이션과 2편의 실사영화가 필요했던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상호는 작가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작가란 매번 이상적이고 통일된 형태의 결과물을 뽑아내는 존재가 아니다. 그건 잘 훈련된 기술자에 가깝다. 모름지기 작가라면 일종의 매개가 되어야 한다. 제 몸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육화된 반응으로 토해낼 필요가 있다. 때론 그 형태가 보는 이의 기대를 배반하기도 하고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구현하지 못하기도
<염력>이 트라우마를 소환하는 방식, 주변에 일으키는 물결에 관하여
-
2009년 용산 재개발 지역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무리한 진압 끝에 화재로 사망한 용산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감독 김일란·홍지유, 2011)은 불타는 망루 앞에서 끝난다. <두 개의 문>은 인터넷 실시간 방송, CCTV, 경찰 채증 영상과 무전녹음, 사진과 언론 보도, 경찰의 법정 진술 등 재판에 제출된 증거와 변호사, 활동가, VJ 등 진상규명을 도왔던 관계자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두 개의 문>의 카메라는 일종의 내비게이터로 관객을, 다종다양한 영상 정보를 스캐닝하며 당일의 사건과 재판을 재구성하고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를 스스로 찾고 해석하는 탐정이나 판사(혹은 편집하는 감독)의 위치에 둔다. 그러나 사건현장과 법정을 누비던 카메라와 관객은 ‘여기 사람이 있다’라고 부르짖는 불타는 망루 앞에서 더 들어가지 못하고 멈춰 선다. 카메라의 접근 불가능성은 ‘죽음의 스펙터클’이 될 수밖에 없는 이미지 정보의 한계와 농성 철거민의
<공동정범>, 투쟁과 트라우마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덧 80살을 넘긴 노장의 새 작품 <원더 휠>(2017)은 여태껏 접하던 우디 앨런식 영화라는 평가가 많았고 나 역시 이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익숙한 전개를 따라 마지막에 다다랐을 무렵, 나는 돌연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영화를 침범하고 들어왔음을 느꼈다. 당황함에 잠시 넋을 빼앗겼다 다시 후다닥 정신을 차렸으나 얄궂게도 영화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예쁜 관람차 하나를 보여주며 막을 내렸다. 그때 내가 영화관을 나오며 든 생각은 ‘당했다’는 것이었다. 다만 (영화 <올 더 머니>(2017)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했다는 것은 알겠는데 무엇에 당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해 할 수 없다 하여 그저 흘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이 글은 <원더 휠>이 내게 선사한 불가해한 순간을 붙잡기 위한 허튼 노력들의 흔적이다.
케이트 윈슬럿의 얼굴, 그에 집
욕망의 움직임과 그로 인한 균열을 놓치지 않는 우디 앨런의 시선 담긴 <원더 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