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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 더 선샤인 인>(2017)은 여러모로 클레르 드니의 전작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작품이다. 일단 로맨틱 코미디를 연상케 하는 제목부터 그렇다. 구체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이고, 관습적인 도덕률보다는 선악의 모호한 경계를 선호하고, 언어를 통한 이성적 설명보다 육체 위에 드러난 직접적인 감각을 향유하도록 했던 그녀의 작품 세계에 느닷없는 ‘햇살’이라니.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인디와이어>의 데이비드 얼리치는 이 작품을 두고, 마치 클레르 드니가 낸시 마이어스(<인턴> <로맨틱 홀리데이> 연출자)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만든 영화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로맨틱 코미디의 통상적인 장르 규칙을 완전히 무시한 버전으로. 이 영화의 장르를 굳이 구분하자면 낸시 마이어스의 전공이라 할 수 있는 로맨스물이겠지만 클레르 드니의 필터를 거치면 로맨스의 달콤한 캐러멜 코팅은 산산조각이 난다. 날것 그대로의 연애 행각이 눈앞에 펼쳐진다. 엇갈린 욕망과 상대를 향한
<렛 더 선샤인 인>이 끌어안는 사랑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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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는 곧 퀴어영화로 호명되며, 영화의 모든 상황과 감정은 성소수자 특수성의 프레임 속에서 이해되곤 한다. 퀴어 정체성을 분명히 호명하는 것은 꼭 필요하며, 반대로 섣부른 보편화가 더 위험할 때도 있다. 문제는 그들과 우리의 분리를 의심하지 않으며, 이해의 방향은 늘 우리에게서 그들에게로 향한다는 데 있다. 세바스티안 렐리오 감독의 <판타스틱 우먼>(2017)은 트랜스젠더 여성의 삶을 다루고 있으나, 관객에게 타자에 대한 일방적인 이해나 공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화는 나와 타자의 경계를 훌쩍 넘어보도록 관객을 추동하는 에너지가 있는데, 이는 일단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두드러진다.
사라지기 위해 등장하는 남자
마리나(다니엘라 베가)는 자신의 존재성을 호소하지 않고 존재한다. 그녀가 자기 인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건 의상이다. 그녀는 옅은 화장에 단정한 원피스 혹은 운동화에 바지 차림으로 등장한다. 미디어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의 외모를 재
트랜스를 하나의 태도로 밀어붙인 <판타스틱 우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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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매리언(로리 멧커프)과 딸 크리스틴(시얼샤 로넌) 사이의 갈등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딸은 독립하길 원하고 엄마는 가족 모두가 함께하길 바란다. 그러나 <레이디 버드>(2017)에는 ‘모녀’라는 낯익은 단어가 채 담지 못하는 감정의 얼룩들이 존재한다. 엄마는 딸이 어서 성장하길 바라지만 운전도, 계란 프라이도 혼자서 하지 못하게 한다. 딸이 자기 몰래 뉴욕의 대학에 지원한 것에 화가 나서 말을 하지 않는 매리언의 모습은 절친에게 토라졌던 줄리(비니 펠드스타인)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자신의 흉을 볼까봐 편지를 전하지 못하는 모습은 크리스틴이 제나(오데야 러시)를 대하던 모습과도 얼마간 닮았다. 그러나 서운함, 배신감, 동경 중 그 어떤 것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완벽하게 설명하진 못할 것이다. 기하 수업에 들어가지 않는 줄리의 마음을 단순히 ‘질투’로 정의할 수 없듯, 딸을 대하는 매리언의 마음도 하나의 감정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엄마를 대하는 크리스틴의 태도도 이
<레이디 버드>를 두 여자의 관점에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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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식이 다를 뿐 브루노 뒤몽은 스탠리 큐브릭과 같은 부류의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며 인간에게 본질이 있다면 무엇인가를 생각했고, 영화에서 직접적인 해답을 찾으려 애썼다.
브루노 뒤몽이 바뀌고 있다. <까미유 끌로델>(2013) 이후 시작된 그의 변화는,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던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아르테TV>의 방영분만 비교해보면, 2014년 방영된 뒤몽의 <릴 퀸퀸>은 2013년 같은 채널에서 방송된 제인 캠피온의 <톱 오브 더 레이크>를 훨씬 상회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악센트가 제거된 억양, 서스펜스를 제외시킨 구성, 다중 플롯을 자제하고 다중의 인물을 내세우는 전략은 그가 여전히 로베르 브레송의 후예임을 증명해준다. 하지만 겉보기에 뒤몽은 완전하게 달라졌다. <릴 퀸퀸>이 그렇듯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은 허허실실하게 만드는 코미디영화다. 그럼에도 이전보다 더 적나라하게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 상승적 구도가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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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상업영화에서 ‘디지털적 실험’이란 말 자체가 어색한 지금, 디지털 촬영을 가장 혁명적으로 활용한 곳은 방송과 웹의 세상이다. 그곳 세상에서 기획, 방영되는 프로그램의 번성은 디지털 촬영장비의 발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역으로 방송과 웹 프로그램을 영화화하는 경우도 생겼다. 세간에 뜨겁게 거론 중인 <곤지암>이 한 예다. 해외에서 페이크 다큐멘터리 장르의 영화가 간혹 엄청난 수익을 올린 사례와 비교해, 한국에서 대중의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페이크 다큐로는 <곤지암>이 현재까지 거의 유일하다. 그렇다면 <곤지암>이 방송과 웹 프로그램의 디지털적 특성을 충실하게 재현한 작품인가? 혹은 디지털적인 정신과 태도가 제대로 구현된 작품인가? 내 대답은 ‘아니오’다. 지난해에 공개된 이두환의 <혼숨>(2016)이나 좀더 예전에 나온 비셔스 형제의 <그레이브 인카운터>(2011)가 차라리 위 질문에 더 어울
<곤지암>의 영리한 공간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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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무쌍하여 5분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영화를 보는 방법은 무엇일까? 모든 기호와 상징, 대사 하나하나에 꼼꼼히 주석을 달아가는, 그래서 본문 텍스트보다 주해의 텍스트가 훨씬 두꺼워지는 독해법이 그 하나. 미리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이전 작품들을 보고, 동명의 원작 소설을 읽고, 다섯권의 만화까지 보면서 철저히 대비하는 전투태세 모드도 여기에 속한다. 하나, 그러기엔 우리의 밤은 짧다(만화책은 절판이다). 다른 하나는 정신없이 쏟아지는 기호에 현혹되지 않고 그저 각 파편들의 장면과 사건, 진행 속도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방법. 그러다보면 어느새 익숙해진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관객이라면 둘 중 하나의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후자를 추천한다. 어쨌든 우리의 밤은 짧으니까).
앨리스를 위한 장진 주사
주인공, “검은 머리 아가씨”를 이상한 나라에 빨려들어간 앨리스로 여겨도 무방하리라.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 앞으로 마구 튀어나오는 인물들은 뜬금없다. 각자가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흥미로운 대립 이미지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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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창작자는 자신의 작품이 최종적으로 관객 혹은 독자에게 어떤 체험을 시켜주게 될지 상상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정확하게 과녁의 중앙을 맞히지는 못하더라도 매번 얼추 과녁 안에 집어넣으려면 그런 종류의 상상력이 큰 도움이 된다. 따라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레디 플레이어 원>이 다수의 열광적인 반응과 동시에 적지 않은 실망 역시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열광의 근거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적을 능력이 내게 없다. 반면 실망의 근거는 아마도 뻔한 내용 혹은 너무나 익숙한 구조일 것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에 불만을 표하는 이들이 그 이유를 설명할 때에 ‘뻔한 이야기’라는 단어를 피하는 것은 쉽지 않다. 훈련받은 감상자로서 나는 식상함에 관대하지만 동시에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다. 이미 세상에 여러 번 나왔던 무언가를 반복하려면 감독에게는 그만큼의 이유가 필요하다. 즉, 감독이 하려는 이야기가 스타일이나 소재, 구조를 반복
플레이어2로 살아온 사람들의 <레디 플레이어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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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미국을 뒤흔들어놓는 사건이 터진다. 한 괴한이 피겨스케이팅 올림픽 기대주 낸시 케리건의 무릎을 후려친 것이다. 라이벌이었던 토냐 하딩과 그의 파트너 제프 길롤리가 범인으로 지목된다. 토냐는 자신은 전혀 몰랐으며, 제프와 그의 친구 션이 꾸민 일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제프와 션은 징역형을 살고 토냐는 벌금형과 더불어 미국빙상연맹에서 영구제명당한다.
관찰의 시선에서 동일시의 대상으로
<아이, 토냐>는 가십을 소비하려는 미국 대중의 기이한 열정에 불을 붙였던 낸시 케리건 피습 사건을 스크린 위에 되살린다. 영화에 대한 비판은 즉각적이었다. 당시 케리건 피습을 취재했던 한 언론인은 영화는 일관되게 거짓을 말해온 토냐 하딩의 꿈을 실현해주고 그에게 면죄부를 주는 ‘판타지영화’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영화가 그의 말을 ‘진실’로 만들었거나 옹호하고 있다는 해석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아이, 토냐>는 무엇보다 ‘기억의 주관성’에 대한 작품이고,
<아이, 토냐> 속 ‘토냐 하딩’은 누구의 얼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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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첫 장면이 좋은 영화는 많았지만, 이 정도로 강렬했던 적은 없었다고. 90년대 초의 파리,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행동주의 단체 ‘액트업’에 새로 가입한 멤버들이 소개되며 영화 <120BPM>이 시작된다.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건조하고 소란스런 주간회의의 풍경을 거쳐서, 동성애에 대한 공권력의 시선과 거대 제약회사의 대응, 그리고 무관심 안에서 사라져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차례로 화면에 비친다. 이들을 에워싼 준엄한 공기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오늘날처럼 이미지를 대량 확산시킬 수 없는 과거의 세월에, 영화 속 세대들은 서로 만나서 대면해야 했다. 그들이 행동하며 보여주는 의사소통의 구조를 영화는 직접 소개하고 있다. 제목이 말하듯 평범한 사람들의 70bpm 맥박 수가 아닌, 하우스음악의 비트가 그들의 심장을 지배한다. 시한부 삶을 산다는 인식에 얽혀서 그들은 스스로를 더 긴박한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대화보다는 행동
<120BPM>의 운동하는 사랑은 절대적이며 운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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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해낸 거예요.” 라보나 역의 앨리슨 재니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 첫마디를 이렇게 뗐다. 처음에는 그 말이 ‘라보나다운’ 소감이라고 생각했지만, 곱씹을수록 토냐(마고 로비)에게 더 적절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냐가 보여준 뻔뻔하고 거들먹거리는 태도 때문이 아니라 비싼 의상비를 감당할 수 없자 스스로 피겨 드레스를 지어 입던 토냐의 ‘억척스러움’ 때문이다. 토냐를 나타내는 또 다른 말은 그녀가 버릇처럼 말하던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이다. 두 문장 속에 내포된 태도는 언뜻 모순돼 보이지만 토냐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양립 불가능한 것의 양립. 이것이 곧 토냐의 삶이다.
토냐 하딩을 일컬어 흔히 ‘은반 위의 악녀’라고 말한다. 토냐의 모든 피겨 경력이 ‘낸시 케리건 피습사건’이라는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 탓이다. 케리건 vs 토냐의 라이벌 구도에 따른 감정싸움은 영화의 중심 서사가 아닐뿐더러 완벽히 생략된다. 적어도 영화에서의 토냐는 악녀가 아니다.
<아이, 토냐> 스케이트는 그녀에게 초능력 같은 거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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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꿈과 환상의 나라’ 디즈니월드 근처 싸구려 모텔에 집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텔의 이름이 ‘매직캐슬’이라는 것을 발견하며 시작한 영화처럼 보인다. 영화는 계속해서 디즈니월드와 매직캐슬 모텔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대비되는 구조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현재와 다른 방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모텔에서 생활하는 젊은 미혼모 핼리(브리아 비나이트)와 그의 어린 딸 무니(브루클린 프린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집이 아니라 모텔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경제적으로 한계에 다다른 사람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매직캐슬이란 이름의 모텔에 살면서도, 정작 근처에 있는 디즈니월드에는 갈 수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서사의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부엌이 없는 방/집
플로리다의 맑은 날씨와 수영장이 설치된 매직캐슬 모텔의 쾌적한 환경(?)이 모텔에 사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플로리다 프로젝트> 속 비현실적인 ‘만화의 공간’ 디즈니피케이션,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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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맨드)는 광고 회사의 창가에서 뒤집힌 채 버둥거리는 벌레가 되살아나도록 도와준다. 그런 그녀의 귀에 웰비(케일럽 랜드리 존슨)의 말이 날아와 꽂힌다. 광고 기간은 부활절 전까지입니다. 전남편 찰리(존 호킨스)는 빌보드를 세운들 죽은 안젤라(캐서린 뉴턴)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광고의 내용은 딸을 죽인 범인에 관한 것이건만, 어째서인지 영화는 자꾸 무언가의 ‘부활’을 언급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하나의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쓰리 빌보드>는 무엇의 부활을 기다리는가.
언어의 엄중함
대답에 닿기 위하여 먼저 영화를 회상해보자. 빌보드 앞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딕슨(샘 록웰)이다. 그는 “마오!” 같은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질문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쩔쩔맨다. 그는 늘 서툴고 어눌하게 말하지만 간혹 젠체하며 ‘환경보호법’ 혹은 ‘유색인종’ 같은 단어들을 언급한다. 이때 딕슨이 서툴게나마 어려운 용어를 구사하는 이유는
<쓰리 빌보드>, 밀드레드가 광고판에 쓴 것은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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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목가적인 풍경을 헤집어 흩뜨리는 데 마틴 맥도나만큼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는 감독은 없었던 것 같다. <킬러들의 도시>(2008)에서 벨기에의 중세도시 브루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그는, 전작인 <세븐 싸이코 패스>(2012)에 이르러 사이코패스의 얼굴을 할리우드의 작가 세계와 겹쳐놓았다. 어쩌면 역설적인 이유 때문에 조용하고 틀에 박힌 배경을 선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번 영화 <쓰리 빌보드>에서도 아름다운 미주리주의 작은 마을은 완전히 파괴되고 헤집어진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통해 각인됐던 미국 중서부의 풍요로운 자연풍광은 이 작품을 거쳐 ‘끔찍한 사건으로 딸을 잃은 어머니의 복수극’이 펼쳐지는 배경이 된다.
드라마투르기를 따르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단 한번도 맥도나의 영화에서 주요 캐릭터들이 감정에 휩싸여 불타오르거나, 관객이 이입할 만큼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드러낸 적은 없었다.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연기
<쓰리 빌보드>의 마틴 맥도나 감독이 비극을 변주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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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퓨처랜드에 새 차가 들어왔대!”라는 한 아이의 외침으로 시작된다. 그 소식을 들은 아이들은 신나게 퓨처랜드(미래의 땅)로 뛰어간다. 그리고 퓨처랜드에서 아이들은 차에 침을 뱉으며 논다. 영화는 30분간 아이들이 해맑게, 오래된 방식으로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유년의 추억이 떠오른다.
유년 시절의 많은 부분은 환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니(브루클린 프린스)와 아이들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마약중독자들이 쓰는 버려진 콘도를 “수백년 전에 지어진 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있지도 않은 “댄스룸”을 발견하고, 마약중독자들이 버리고 간 약솜은 “유령 응가”가 된다. 아이들은 버려진 콘도에서 중세시대 궁전을 보는 것이다. 어른에게는 단지 유용성으로 측정되는 모든 것들에 아이들은 환상을 심고, 전설을 함축한 세계로 바꾸어놓는다. 이것이 아이들이 삭막한 모텔에서 계속 웃을 수 있는 이유다.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그것보다 훨씬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슬픔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