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조금씩 잊혀지고 있는 톱스타 잭슨(브래들리 쿠퍼)이 가수의 재능을 가진 앨리(레이디 가가)를 발견한다. 작은 라이브바에서 그들은 서로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영화에서 이 순간은 짤막하고 강렬하게 그려진다. 잭슨과 앨리의 시선이 교차되는 리버스숏을 보면서, 관객은 영화가 평범한 클래식 멜로드라마의 한계를 뛰어넘게 될 것이라고 직감할 수 있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화려한 공간과 익숙한 샹송 <La Vie en Rose>의 등장만으로 이러한 교감은 선명해진다. <스타 이즈 본>은 1937년 만들어진 원작의 주인공 관계도를 그대로 사용하는 영화다. 시작부터 전개와 결말에 이르기까지, 첫 영화의 오리지널 스크립트는 구성 그대로 활용된다. 다만 인물을 배우 아닌 가수로 설정했기에, 1976년 만들어진 프랭크 피어슨 감독의 영화와 분위기는 더 비슷하다. 기본적으로 음악영화의 포맷을 잘 살려서 완성됐고, 남자주인공 잭슨의 시점을 이전보다 깊이 파고든다는 점에
진부할 수 있었던 할리우드의 러브 스토리 <스타 이즈 본>이 관객을 매혹하는 몇 가지 방식
-
<너는 여기에 없었다>(2017)와 관련된 흥미로운 반응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제목이 다소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그 의미에 관하여 각자의 해석을 즉각 내어놓는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것에 대해 의아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상 경력에 거는 우리의 통상적인 기대와 달리 이 영화의 서사는 아주 간결하고 한편으론 헐겁다. 소량의 정보만을 제공하고 있어 나머지는 관객의 상상력에 의존한다. 그런데도 불평하는 의견은 의외로 드물다. 비슷한 반응과 자연스러운 수긍은 아마 몇몇 이유에서 연유할 것이다.
몇 가지 정황만으로도 우리는 인물들의 전사를 직조해낼 수 있다. 조(호아킨 피닉스)에게 일어났던 외상적 사건들은 파편적으로 노출되지만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찰나에 삽입되는 유년 시절의 학대 현장과 전장에서의 죽음은 전체를 조망해볼 필요도 없이 관객의 시선을 파고든다. 생동하는 인물들을 응시하는 중에도 조의 머릿속에는 굳어버린 주
<너는 여기에 없었다> 호아킨 피닉스가 그곳에 있다
-
운이 좋았다. <암수살인>(2017)을 보는 내내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영화는 수없이 ‘만약에’를 되돌아보며 우직하게 제 갈 길만 가는 영화다. 그게 간혹 촌스러울 때도 있고 단단하고 기본에 충실한 연출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 서사의 향방을 결정하는 건 결국 운, 그러니까 우연이다. 당연히 서사적으로는 밋밋한 흐름이라고 해도 크게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건 이 영화가 사건이 아니라 인물을 따라가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밝혀지지 않은 사건 그 자체보다는 인물의 기억, 상상,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가능성을 재연한다고 해도 좋겠다.
송경수 형사가 가지 못했던 미래
형사 형민(김윤석)이 뒤늦게 사진 속에서 여성용 피임기구 루프를 발견한 건 집요한 수사와 끊임없는 의심이 얻은 결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뜬금없이 던져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암수살인>의 고지식한 내러티브는 퍼즐조각 같은 단서
<암수살인> 의도를 뛰어넘은 결과물
-
※<죄 많은 소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건축설계가 직업인 내가 연기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항상 주제넘다고 생각했다. 내가 영화에 관심이 있는 것은 ‘서사 구조’이다. 하지만 <죄 많은 소녀>(2017)에서 전여빈의 연기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연기가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전여빈이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만 생각했다. 영화를 본 후, 또렷하게 그녀의 연기가 기억에 남았다. <죄 많은 소녀>에서 다른 배우들은 다소 산만하게 보이고 일부는 전형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특히 교장선생님과 교사들이 나오는 장면들에서 보이는 전형성은 집중을 방해하기까지 한다. 전여빈만이 일관된 자기 세계를 갖고 가고 있다.
나는 전여빈의 훌륭한 연기가 배우 개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그녀가 일종의 터널 같은 형태의, ‘어떤 제한된 세계’를 통과해야 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에 기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면의
<죄 많은 소녀>의 구조가 특별한 이유
-
-
린 램지는 <케빈에 대하여>(2011)에서 소년의 얼굴에 살인마의 초상을 겹쳐놓는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조합이지만 그녀에게 삶이란 그런 것 같다.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생생히 박혀 있는 살풍경이야말로 삶의 민낯이 아닌가. 그 불협화음 앞에서 당신은 무얼 할 수 있느냐고 린 램지는 묻는다.
그녀의 신작 <너는 여기에 없었다>(2017)에는 다양한 ‘겹침’이 등장한다. 남자의 목소리 위로 소녀의 목소리가 겹쳐지고, 음악의 선율 위로 다른 선율이 겹쳐진다. 그러나 분별없이 겹쳐지는 그 풍경은 조화롭지 않다. 조(호아킨 피닉스)가 니나(예카테리나 삼소노프)를 구출하기 위하여 성매매가 벌어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던 장면을 생각해보자. 어두운 복도를 비추던 CCTV에 한 소녀가 홀연히 나타난다. 원피스를 입고 자박자박 걷는 소녀의 여린 실루엣은 이 지옥 같은 건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장면이 진정 공포스러운 이유는 복도와 소녀 사이
<너는 여기에 없었다>, 린 램지가 죽음을 영화에 끌어들이는 법
-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는 호주의 여성감독 안나 브로이스키가 2013년에 만든 다큐멘터리다.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소개된 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원제인 ‘Aim High in Creation!’은 김정일의 저서 <영화와 연출>의 단원 제목 ‘창작에서는 크게 노리는 것이 있어야 한다!’에서 따온 것이다. 도쿄에서 태어난 안나 브로이스키 감독은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주한 호주대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한국, 필리핀, 베트남, 미얀마, 이란 등에서 자랐으며, 동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깊다.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는 진귀한 영화다. 좀처럼 보기 힘든 북한 사회와 북한영화를 보여준다. 또한 북한의 체제선전을 따라가면서 그들의 우스꽝스러움을 폭로하는 ‘내재적 접근법’을 통한 비판이 담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구 사회에 악마처럼 알려져 있는 북한 사회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생각하게 해준다. 그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 북한을 먼저 만나본 안나가 남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교훈
-
소마이 신지 전작전에 대해 한줄의 지면도 할애하지 않은 잡지를 영화잡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난 9월 15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소마이 신지의 전작전이 막을 내렸다. 그동안 소마이의 영화를 소개하는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모든 영화가 상영되는 건 국내에서 처음 성사된 일이다. 주관적인 판단이라는 전제를 두고 말하자면, 이는 올 한해 국내 시네마테크나 영화제에서 마련된 모든 특별전과 회고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기획이다. 그러나 어느 매체에서도 이 상영의 의의를 거론하지 않았다.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답하기 쉬운 문제는 아니다. 소마이 신지의 전작을 상영하는 일은 지면에 실릴 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이건 영화주간지에서 다루기 어려운 주제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상영이 지시하는 의미와 효과를 비중 있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철저한 외면은 시네마테크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의 목록을 사건으로 취급하는 데 무관심한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을 테지
소마이 신지 전작전 이후 <러브 호텔>을 꺼내 보다
-
<몰리스 게임>의 리듬은 이상하게 둔하다. 영화의 단선적인 구조가 지나치게 뻣뻣해 에런 소킨의 결연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이런 구성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의 연출 데뷔작이라는 사실을 감안해봐도 인상이 크게 바뀌진 않는다. 질주해 나가는 서사엔 소킨의 인장이 여기저기 찍혀 있건만 전체 구조로 보자면 민첩하기보다는 강직해서 영화가 외려 평평해 보인다. 각종 업계의 생태와 시스템의 속성을 속사포 같은 대사로 탁월하게 묘사해내는 그의 재능은 몰리 블룸(제시카 채스테인)의 포커판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지만, 소킨은 질주하던 영화를 계속해서 불러세워 몰리의 윤리적인 면모를 웅변하듯 변론한다. 그러니 이상하다.
<몰리스 게임>의 일차적인 유희는 몰리가 전문가다운 솜씨로 포커판을 장악해가는 과정을 빠르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그건 연출작으로도 다시 한번 입증해내는 소킨의 기술전일 뿐, 스스로는 그것에 사활을 걸진 않는 것 같다. 카드가 도
<몰리스 게임>엔 왜 질탕한 놀이판이 깔려 있지 않은가
-
* <안시성>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된 글입니다.
언젠가부터 적지 않은 이들이 증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2009)부터였고 누군가는 <어벤져스> 시리즈의 중간 어디쯤부터였다. DC 코믹스의 최근작에 이르자 어지러움을 동반한 두통을 호소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막대한 비용과 노동이 투입된 컴퓨터그래픽(CG) 얘기다. 이제 거대하고 화려한 엉망진창(<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시가전 장면 같은 것)을 보고나면 어김없이 피로감이 찾아온다. 육안으로 봤을 때 실사와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왜. 마블 스튜디오의 경우 이같은 관객 피로감을 인지하고 민감하게 액션 디자인에 나서고 있기도 하다. 원인은 차차 밝혀야겠으나 CG를 포함한 시각특수효과(VFX)에 노출된 빈도만큼 피로가 누적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이같은 일군의 증상을 ‘만성 VFX 피로 증후군’이라 명명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 병원(病源)의 핵
<물괴> <안시성>, 한국영화 속 VFX 활용 사례
-
카운터스.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 일명 재특회와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던 일본의 반인종주의, 반소수자 혐오 시민운동의 이름이다. 카운터스는 저항 시위를 조직함으로써 혐오세력의 기세를 한풀 꺾고 혐오표현금지법 제정을 이뤄냈다. 최근 화제가 됐던 영화 <카운터스>(2017)는 그 투쟁 과정의 일부를 담은 작업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러나 조기 종영됐다. 개봉 직후 주인공 다카하시의 성폭력 가해 사실이 국내에 폭로되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고, 이에 배급사가 신속하게 대응한 것이다. 피해 사실을 확인하고 피해자와 소통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작품과 관련된 행사를 취소하고 조기 종영을 선택한 배급사의 대처는 모범적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앞으로 공동체 상영이나 VOD 배급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예측 앞에서는 머리가 복잡해진다. 작품을 둘러싸고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혹은 어떤 윤리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작품의 완전한 말소와 폐기가 우리가 선택할 수
‘<카운터스> 케이스’에 담긴 사회운동의 딜레마와 과제
-
누군가는 파운드 푸티지가 생명력이 다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최근 <곤지암>(2017)에 이르기까지 파운드 푸티지는 끝없이 생산되고 있다. 물론 저예산으로 만들기 쉽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파운드 푸티지가 불안과 공포를 창출하는 데 탁월하다는 이유도 무시할 수 없다. ‘푸티지’라는 말은 아직 편집되지 않은 영상을 의미하며, 파운드 푸티지는 이런 영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많은 영화에서 설정숏과 시점숏을, 롱숏과 미디엄, 클로즈업숏을 혼합해서 편집하는데, 이런 편집을 통해서 관객은 상황을 모두 파악했다고 느낀다. 그러나 시점숏으로만 진행되거나 CCTV로만 사건을 보여주는 경우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 화면의 사각지대가 생긴다. 많은 파운드 푸티지들이 보이지 않는 부분, 외화면을 활용하며 관객에게 공포의 실체를 정면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공포를 가중한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엇은 언제나 인간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하는 좋은 요소다.
그러나 파운드 푸티지가
<서치>가 모니터 안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법
-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37분만 견디면’ 극한의 재미를 느끼게 될 것이라고,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이하 <카메라>)의 관객은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리저리 튀는 가짜 피에 어색한 연기, 억지스러운 극진행은 초반 37분(이하 1부)을 차마 볼 수 없는 마구잡이 B급 좀비물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1부가 끝나는 순간, 마치 영화가 끝나듯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한달 전’이라는 자막과 함께 새로운 이야기(이하 2부)가 시작된다. 시답잖은 재연 프로그램이나 노래방 영상이나 제작하는 감독 타카유키(하마쓰 다카유키)는 어느 날 좀비 방송국 개국 작품으로 ‘원컷, 생방송’ 좀비물을 연출해줄 것을 요청받는다. 수없이 변주된 ‘영화 속 영화’ 구조가 더이상 낯설 리 없으니 2부가 1부 영상의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무렵, 영화는 ‘클라이맥스’(결국 3부)에서 ‘재미 폭탄’을 터뜨리기 위해 여기저기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영화의 경계가 어디까지냐고 묻는다
-
먼저, 짧게 김지운의 <인랑>에 대한 얘기로 글을 시작하려 한다. 나는 이 영화를 뒤늦게 IPTV로 봤는데 이 영화에 대한 기왕의 평점이 의아하게 여겨졌다. 김지운의 최고작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김지운의 지난 필모그래피를 전부 부정할 만큼 이 영화의 완성도가 처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김지운의 이전 영화 중에 흥행과는 무관하게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달콤한 인생>(2004)에서 이병헌이 연기하는 주인공 선우는 나르시시스트로서의 단독자이고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조직에 맞서 싸운다. 애니메이션이 원작인 <인랑> 역시 그런 점에서 김지운의 개인적 지향과 맞는 지점이 있을 터인데 주인공과 조직의 대결을, 납득할 만한 서사의 고정점이 없었던 <달콤한 인생>과 마찬가지로(이 영화에서 선우는 자신을 파괴하려고 한 조직의 보스에게 “내게 왜 그랬어요?”라고 묻는데 이는 관객이 서사에 갖는 의문과 동일하다), 실사영화 <인랑>은 애니메
김지운의 <인랑>의 나르시시즘, 윤종빈의 <공작>의 호연지기
-
이일하 감독의 <카운터스>와 박배일 감독의 <소성리>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다는 공통점만 제외하면 묶어 이야기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은 두편의 다큐멘터리다. 그리 이상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소재의 유사성이 서로 다른 작품을 무리 없이 묶는 일차적인 바탕이라 할 때, <카운터스>와 <소성리>가 다루는 소재는 혐한 발언을 하는 재특회(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와 이에 맞서는 카운터 조직,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로 별다른 교차점 없이 평행선을 이룬다. 공통점이라고 해야 어딘가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을 다룬 것인데, 그것은 다큐멘터리가 대부분 그러하므로 딱히 공통점이라고 말할 순 없다. 그런데 두 작품을 비슷한 시기 나란히 두고 보니 공통된 의문이 하나 생겼다. ‘오늘날의 액티비즘은 어디에 있는가’가 그것이다. 두 작품은 각자의 방식으로 오늘날의 액티비즘을 보여준다. 전작의 연장선에 있는 동시에 변화된 시도를 하
<카운터스>와 <소성리>에 오늘날의 액티비즘을 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