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적극적으로 영화를 본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이미 결정된 일정한 틀을 사후적으로 따르게 된다. 장면 a가 b를 설명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 명확할 때, 우리는 a를 순수하게 기억하기를 포기하고 b라는 의미만을 좇으며 그것으로 영화를 보았다고 믿는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장면의 의미를 흐릿하게 지워놓으면서, 매 장면을 그 자체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은희(박지후)가 두드리는 문은 끝내 열리지 않는다. 알고 보니 그것은 잘못 찾은 문이었다. 이 시퀀스는 은희가 문을 헷갈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해도 열리지 않는 문과 미칠 것 같은 발광 자체를 받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은희가 귀가하는 장면은, 앞선 상황이 전제된 이상 더는 평범한 것일 수 없다. 문을 잘못 찾은 상황은 특수하고 예외적일지 모르나, 그것은 어떤 것의 본질에 더 가깝다. 영화는 가장 예외적인 것이 가장 본질적인 세계를 그린다.
다시 문 앞에 서보자. 이번에는 문이 열리기까지 잠시 지체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늦은 밤 갑자기 찾아온 외삼촌(형영선)은 넋두리 같은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선다. 이때 외삼촌은 현관문을 열지 못해 잠시 당황한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 외삼촌이 처한 답답한 상황에 대한 은유일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그가 사라진 뒤에도 얼마간 현관 불빛이 켜진 순간을 카메라가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부재한 사이에도 남겨진 것이 주는 이상한 감정. 영화는 찰나의 지속을 통해 존재와 시간의 격차를 새겨둔다. 비슷한 장면은 후반부에도 등장한다. 은희는 영지(김새벽)가 보낸 소포 하나를 받는데, 소포가 도착했을 때 영지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이것은 이상한 느낌을 불러온다. 보낸 사람이 부재한 동안에도 보내는 중인 소포. 그렇다면 소포는 부재의 감각을 강화하는가, 혹은 누군가가 사라진 뒤에도 잠시 존재가 지속하는 림보의 시간이 있다고 믿게 하는가.
하나 더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는 동시간성의 의미에 관해서다. 은희가 엄마(이승연)를 애타게 부르는 장면은 두번 등장한다. 첫 번째 장면에서 엄마가 응답하지 않은 이유는 은희가 엉뚱한 집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장면에서 은희는 아파트 단지에서 홀로 있는 엄마를 발견하고는 큰소리로 외쳐 부른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엄마는 듣지 못하고 멍하니 무언가를 바라보다 사라진다. 그렇다면 이 순간 엄마는 은희와 동시간대에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영화는 동시간성이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고 해서 저절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며, 어쩌면 애초에 달성할 수 없는 어떤 것처럼 묘사한다.
영화가 감정을 담는 방식 역시 시간의 격차와 관련된다. 감정은 조금 늦게 혹은 엉뚱한 곳에서 발현된다. 은희와 함께 병원을 찾은 아빠(정인기)는 은희의 얼굴에 수술 후 상처가 남을 거라는 의사의 말을 들은 뒤, 병원 대기석 앉아 엉엉 울기 시작한다. 이는 딸의 수술이 걱정되어서 우는 울음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앞서 부부싸움 도중 엄마가 휘두른 전구에 맞아 팔이 피범벅이 되었던 순간을 환기하는 데가 있다. 사고 당일 무사히 살아남은 가족이 함께 밥을 먹으며 다행이라고 안도할 때, 오빠 대훈(손상연)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대훈의 울음은 누나가 죽지 않았다는 안도일까, 희생자에 대한 애도일까,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망막이 찢어지도록 은희를 때린 데 대한 뒤늦은 후회일까. 영화는 그 순간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을 설명하지 않고 내버려두면서 그 안에 누군가가 추측하거나 예측할 수 있는 좁은 문을 열어둔다.
영화가 위로를 기입하는 방식 역시 지극히 사려깊다. 그 사려깊음은 대부분 한문 학원 선생 영지에게서 나온다. 영지는 은희가 오빠에게 맞았다는 이야기를 처음에는 그저 가만히 들어준다. 후일 은희가 입원한 병원을 찾은 영지는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누구라도 너를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하고 일러준다. 은희와 다투고 한동안 수업에 나오지 않던 지숙(박서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영지는 전후 사정을 묻는 대신 뜬금없이 노래를 들려준다. 이들의 상황에 관련된 노래도 아니고, <잘린 손가락>이라는 제목의 노동가요다. 위로를 주는 건 가사가 아니라 톤이다. 노래에 담긴 서늘하고 무시무시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관조적이고 담담한 톤이 의외의 유머를 실어나르며 모든 것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의외성은 진실에 가닿는 방편이다.
끊어진 성수대교에서
모든 것은 사소하지만 분명한 관계를 지닌 채 움직인다. 외삼촌이 돌아가신 날, 남자친구 지완(정윤서)으로부터 연락이 끊기고, 지완의 빈자리에는 후배 유리(설혜인)가 파고든다. 어떤 것의 상실은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만, 영영 채워질 것 같지 않은 상실도 있다. 영지를 잃고 돌아온 날, 은희는 갑자기 외삼촌을 잃은 엄마의 안부를 묻는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경험은 자기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사람의 감정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엄마는 “그냥 이상해. 니 외삼촌이 이제 없다는 게”라고 답한다. 이 대답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당신은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을, 어떤 공간이 사라지고, 그 공간에 있었던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여전히 이상하게 바라볼 수 있냐고 묻는 것 같다. 은희가 등교하는 골목에는 철거민들이 플래카드를 걸어두고 시위하는 장소가 있다. 성수대교가 무너지던 날, 등교하던 은희는 철거민들의 공간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음을 목격한다. 당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 역시 너무도 이상한 일이다. 그 이상한 일은 여전히 이상한가. 무너진 성수대교는 우리가 사는 이곳이 이미 예외로 가득 차 있음을 선언하듯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후에도 지속된 재난의 목록을 여기에 덧붙일 수 있다.
영화가 하나의 예감으로 들끓고 있다고 느껴졌다면, 중심에서 벗어난 변두리 공간을 주요 공간으로 세우며 예외 속에 놓인 인물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수 있다. 한문 학원은 학교 옆 예외적인 공간이며, 배움은 오직 이곳에서 이뤄진다. 학교 내부에서도 수업시간, 교실이 아니라 외부의 시공간이 중요해진다. 지완과 거닐던 운동장, 유리와 헤어지던 수돗가 등 중요한 일이 이뤄진 것은 모두 변두리였다. 무너진 성수대교 이야기가 처음 새어나오는 공간 역시 교실 옆 복도다. 유리와 함께 간 노래방, 지숙과 놀던 트램펄린장, 지완과 머물던 아파트 벤치, 아파트 입구 등 영화는 주변 장소들을 그러모아 개인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들로 탈바꿈시킨다. 수희(박수연)가 남자친구와 숨어드는 장소이자 아버지가 춤연습을 하던 집 역시 이미 예외적인 것으로 들어찬 공간임은 물론이다.
은희와 수희, 수희의 남자친구는 새벽녘 차를 달려 성수대교로 향한다. 이들이 두눈으로 마주한, 끊어진 성수대교는 동시간대의 감각을 깨운다. 모든 것이 복구된 오늘, 무너진 성수대교를 보는 경험은 시간을 초월한 감각의 복원을 간구한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은희는 수학여행 날 들뜬 친구들과 함께 있지만, 어쩐지 이들과 섞이지 못하고 따로 있는 모양새다. 그 위로 영지가 은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가 흐른다. 그 순간 은희와 관객과 영지의 시선은 묘한 합일을 이룬다. 그것은 나의 손을 들여다보는 경험과 비슷하다. 종일 부모님 방앗간 일을 도운 은희가 퉁퉁 부르튼 손가락을 볼 때, 영지가 불러준 노래를 들으며 자신의 잘린 손가락을 바라보는 기분이 될 때, 영지가 없는 영지의 방에서 꼭 그녀가 그랬을 거라 상상하며 은희가 손바닥을 들여다볼 때, 그 순간 나와 연결되어 있지만 낯선 것을 보듯 영화를 보게 된다. 그것을 신기하고, 아름답게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