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사회의 표면에서 장애인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나 차별은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배제와 분리, 그로 인한 불평등은 얼마나 나아지고 있을까. 이 글은 작품 비평이라기보다 ‘영화 <증인>을 중심으로 본 한국 사회의 장애인 타자(他者)화 문제’라는 주제의 에세이에 가까울 것이라는 점을 우선 밝히고 시작하려 한다.
두개의 비슷한 풍경이 있다. 먼저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자폐 장애를 지닌 동생을 격리시설에서 데리고 나와 지역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경험을 담은 빼어난 작품이다)을 만든 장혜영 감독 자매의 이야기다. 지난해 9월 청와대에서 열린 발달장애인 초청 간담회에서였다. 고관대작들은 “우리 장애우들”, “우리 장애 친구들”이라는 시혜적 호칭으로 말을 꺼내며 그들이 들은 장애인의 어려운 점을 나열했다. 장 감독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를 분노 혹은 실망을 느꼈다”고 털어놨다(CBS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연
<증인>으로 보는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 혹은 인식
-
<극한직업>을 ‘정통 코미디’로 받아들인 모 평자의 반응을 보고 뭔가 말하고 싶었으나 그걸로 글 하나를 완성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의 시간이 흐를 동안, <뺑반>과 <기묘한 가족>을 마저 보았다. 설날 전후에 개봉하는 3편의 영화에서 공통으로 읽어낸 부분이 있어 글로 엮으면 괜찮겠다고 판단했다. 모른 척하고 영화의 흥행과 상관없는 글을 쓰자니 뭔가 이상했다. 그래서 어색하지만 하나의 글 안에 느슨하게 연결된 두 가지의 글을 써보기로 했다. 지금 와서 <극한직업>에 대한 호감이 급상승했다고 말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우선, 이 영화가 지닌 외적 의미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병헌이란 감독의 행보가 가져온 신선한 바람을 느껴야 했다. 그 바람을 맞으며 극도로 저조했던 2018년의 한국영화로 확장해서 읽어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 글이 전체의 전반부에 해당한다면, 후반부에 해당하는 글에서는 원래 의도한 바대로 <극한직업&
<극한직업>의 엄청난 흥행, <뺑반> <기묘한 가족>이 택한 다른 길
-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가난한 남자와 상처받은 여자가 만나 서로를 보듬는다는 내용은 클리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클리셰와 클리셰 아닌 것의 구별은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에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비일상과 일상의 경계는 모호하고, 만남과 사랑 같은 것들이 하나의 사건을 구성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영화는 클리셰를 통해 사건으로서의 사랑이라는 클리셰에 저항하고 있다. 미카(이시바시 시즈카)의 말처럼 사람들은 연애를 배운 적이 없음에도 연애를 한다. 혹은 흉내낸다. 사람들은 영화에서 본 연애를 모방하고 감독은 그런 현실의 연애를 영화로 재현하고, 사람들은 또다시 그 재현을 재현한다. 클리셰의 거대한 순환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랑은 이미 오래전에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도시를 사랑하는 일
이 클리셰의 순환 속에서 사랑한다는 말조차 상투어로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안녕이라는 말의 의미를 묻지 않듯이,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 또한 물어서는 안 된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가 상투적인 사랑을 그리는 방법
-
우리의 몸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인 동시에 우리의 존재를 규정짓고 우리의 욕망을 만들고 욕망의 대상이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어쩌고저쩌고. 몸은 예술가들이 버릴 수 없는 소재다. 이들의 머리와 손을 거쳐 인간의 몸은 미화되고 추화되고 과장되고 단순화된다. 그리스 신화나 북구 신화, 인도 신화의 신들은 대부분 우리보다 나은 몸을 갖고 있다. 더 아름답고, 더 크고, 더 쓸모 있고 재미있는 몸. 이들이 상대하는 적수들 역시 우리 인간보다 더 재미있는 몸을 갖고 있다. 잘려나간 토막들이 멋대로 붙여지고 뒤틀리고 무시무시하고. 그리스 신화는 인간 몸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들의 난장판이다.
이들에 대한 상상력은 한계가 있다. 신화의 이야기를 상상한 예술가들은 오로지 그들의 피부만을, 그 피부를 통해 드러나는 근육의 모양만을 보았다. 그들은 그 밑의 내장과 기타 장기는 보지 못했고 될 수 있는 한 외면했다. 그리스 신들의 내장을 상상해보라. 분명 있기는
<알리타: 배틀 엔젤>, 안전한 현재의 욕망
-
-
역설적이지만 이강현 감독의 <얼굴들>에서 매혹을 느낀 부분은 어떤 얼굴도 나타나지 않는 텅 빈 공간을 비추는 순간이다. 가령 현장학습으로 수원 화성에 온 학생들이 행궁 안을 돌아다니는 대목에서 카메라는 이들이 프레임 바깥으로 완전히 퇴장할 때까지 장면을 쫓는다. 이어지는 숏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아무도 없는 행궁의 정적이고 공허한 풍경이다. 서사적 기능이나 특정 인물의 시각으로 수용되지 않는 무인의 공간이 기습적으로 숏의 연속적 체계에 침입한다. 그러나 이런 풍경은 단순히 사람들이 사라지고 없는 사실만을 표현하지 않는다. 직전 장면에서 보았듯 그곳은 익명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언제든지 새로운 사람들의 출현으로 다시 채워질 공간이다. 프레임 내부는 그러므로 행위의 주체가 사라진 공간이면서 동시에 어느 방향으로든 새로운 대상이 틈입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이같은 비선형적 접속의 가능성이 무인의 풍경에 잠정적으로 내포돼 있다.
<얼굴들>에서 영화를 전개하는 방
<얼굴들>의 몽타주의 방법론
-
영화 <가버나움>의 매 장면은 ‘도대체 이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관객에게 끊임없이 반성을 요구한다. 혼돈의 도가니 ‘가버나움’으로 환유된 베이루트 길거리에 내던져진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과 그를 둘러싼 삶의 풍경은 영화를 보는 행위를 하는 것 마저 죄스럽게 만든다. 이 영화에 대한 호평은 특히 자신의 존재를 배역에 완전히 녹여낸 소년 자인에게 쏟아졌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힘은 신파적 스토리나 네오리얼리즘을 연상케 하는 형식보다 자인의 얼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다른 요소를 말하기에 앞서 그의 스타성과 존재를 증명하는 눈빛(김소희)을, 관객을 당황하게 만드는 카리스마(김혜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이 글의 쓰게 된 가장 큰 동력 역시 자인의 얼굴이다. 하지만 스타성이나 카리스마에 매료된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연기는 보통 배우들의 명연기가 주는 울림과 차원이 다르다. 많
<가버나움>, 베이루트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한계
-
어떻게 하면 빈곤의 이미지에서 동정을 구하지 않고 사람들을 찌를 수 있을까. 빈민을 다룬 최근 영화들을 보면 각국 영화 제작자들이 같은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불쌍한 이미지가 넘쳐서 사람들이 더는 그에 자극받지 않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빈민을 보고 싶어 하지 않기에 다른 전략을 쓰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빈민을 다룬 영화를 볼 때,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다른 보기 방식을 적용한다. 현실을 잊는 대신, 현실에서 나의 위치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가 영화를 본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담기기 때문이며, 극영화인 이상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진 않을 거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즉, 현실에 대한 예감과 극화에 대한 신뢰가 동시에 작동한다. 영화 제작자가 고민하는 부분도 이것이다. 주인공에 대한 타자화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가버나움>이 취한 전략은 두 가지다. 소년의 말, 소년의 자세다. 이 영화는 자인 알 라피아가
<가버나움> 나는 고발한다. 고로 존재한다
-
※ 영화의 결말에 관한 중요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년 만에 완성한 빅 픽처? 창작자들의 호기 어린 발언을 믿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언브레이커블>(2000), 그리고 앞서 나온 <식스 센스>(1999)를 다시 보면서 M. 나이트 샤말란이 시작부터 하나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브레이커블>의 주인공은 데이비드(브루스 윌리스)인데, 영화는 이상하게도 엘리야(새뮤얼 L. 잭슨)가 태어난 순간으로 시작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마도 쉼터 같은 곳에 머물렀던 듯하며, 흑인 아기의 문제를 보살피러 온 의사도 흑인이다. 그는 세상 낮은 곳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비극적인 운명을 부여받았다. 부여받았다는 표현은 다소 이상하게 들리겠으나, 그가 (예언자의 이름에 어울리게) 이후 풀어나갈 사명을 생각하면 그 표현이 맞는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세상에 나와 평생 그 몸으로 살아야 하는 그는 무엇을 해야
M. 나이트 샤말란은 <글래스>에서 니체를 말하는가
-
재난에 예고란 없다. 그것은 대개 길이를 가진 시간이라기보다 단번의 찰나다. 정의감 넘치는 과학자의 경고 따위는 현실에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우주전쟁>(2005)은 이 같은 재난의 속성을 침략자에 빗댄 적확한 활유(活喩)였다. 밑도 끝도 없이 닥쳐와 누군가의 세계를 순식간에 소멸시키고 사라지는 것이 재난의 실체다.
그런데 어떤 찰나는, 인간의 부적절한 대응과 만나 영원으로 늘어나는 경우가 있다. 침몰하는 배 안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지만 당연하고도 마땅한 조치들이 이뤄지지 않을 때 그렇다. 구조대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다른 종류의 감정으로 바뀌어가는 시간, 혹은 뭍에서 발을 구르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해 무력해지는 가족들의 시간… 원작이 된 책 <어 타임 투 다이>(A time to die)의 제목이 말하고 있듯, <쿠르스크>는 무고한 인간이 마주친 찰나와 영원의 상대성에 대한 기록이다.
러시아 전략 핵잠수함 쿠르스크호는 2000
실제했던 재난을 관통해 <쿠르스크>가 도달한 지점
-
<그린 북>은 제목 ‘그린 북’(흑인 여행자를 위한 가이드북)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이 영화가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를 다룰 것이란 걸 충분히 예상하게 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연출은 <덤 앤 더머>(1994)를 비롯해서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1998)와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2001) 등 특유의 코미디영화 연출로 잘 알려진 피터 패럴리 감독이다. 그동안 감독이 연출한 영화의 주제와 스타일을 고려하면 이번 영화 <그린 북>은 그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주제의 작품이다. 하지만 막상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인물의 상반된 성격(바른생활의 교양과 우아함을 갖춘 완벽한 천재 피아니스트/원칙보다 반칙이 우선인 주먹만 믿고 살아온 다혈질 운전기사)을 비교해보면 우리가 익히 보아온 전형적인 인물 설정으로 대략적인 이야기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린 북>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백인 운전기사 토니
인물 설정은 전형적인 <그린 북>, 낯섦은 어디에서 오는가
-
“아직 미완성이야.” 빅토르(유태오)는 마이크(로만 발릭)가 자신의 음악을 칭찬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어떤 방점도 없이 툭 던진 이 말이 유독 귀에 박히는 건 그가 빅토르 최이기 때문이며, 빅토르 최는 우리에게 처음부터 완성형이자 완료형으로 너무 늦게 도착한 가수이기 때문이다. 한국에 빅토르 최가 알려진 건 그가 죽고 몇해가 지난 뒤였다. 한 방송 다큐멘터리에서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이어지는 러시아의 추모 열기를 조명하면서 빅토르 최 붐이 일었다. 우리에게 빅토르 최는 요절한 천재 가수이자 영웅의 이미지로 박제되었다. 전파를 타고 들려오던 밴드 키노의 라이브 공연 장면은 선명하지 않은 음질과 의미를 알 수 없는 가사에도 나의 뇌리에 박혔다. 오래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가 당시 부른 노래 제목은 <여름이 끝났다>였다. <레토>는 끝나버린 여름을 다시 출발점에 불러 세운다. ‘여름이 끝났다’고 노래한 빅토르 최 이전에 ‘여름’을 노래한 또 다른 뮤지션 마이크를
<레토>, 미완의 노래를 완성한 것은…
-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프라이빗 라이프>는 지난해 10월 5일 공개된 타마라 젠킨스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다. 불임으로 고통받는 레이첼 비글러(캐서린 한), 리처드 그라임스(폴 지아마티) 부부는 전형적인 뉴욕 예술가 사회의 일원으로 “나이 마흔이 훌쩍 넘도록 여전히 임대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한” 경제적 불안 때문에 결정적으로 우디 앨런의 세계와 분리된다. 어쨌거나 영화는 아슬아슬하나마 끝까지 품위를 유지하려는 지식인의 태도로 불임 치료와 입양 절차를 동시에 전개해나간다. 그런데 뉴요커를 그린 많은 영화가 대사 중심의 서사적 디테일에 주력한 것과 달리, <프라이빗 라이프>는 영화적 장치와 리듬감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숏의 크기, 몽타주의 반복 등을 통해 <프라이빗 라이프>가 체득하게 만드는 삶의 지속태가 흥미로웠다.
인스타그램 사이즈와 풀숏
<프라이빗 라이프>는 두개의 상반된 이미지를 오프닝 시퀀스로 나열한다. 가장 먼
<프라이빗 라이프>가 사생활의 클리셰를 마주하는 법
-
지난 2015년, 마이클 베이가 ‘워 룸’이라는 별명을 가진 라이팅룸을 운영한다는 풍문이 할리우드에 떠돌았다. 유능한 시나리오작가들을 고용해 한자리에 모아놓고 <트랜스포머> 프랜차이즈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건 피치 못한 선택인 듯 보였다. 2014년 개봉한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4편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에 쏟아진 혹평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지난 2007년 첫 <트랜스포머> 영화가 로봇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의 신기원을 열어젖힌 이래 이 프랜차이즈는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명분 없는 액션 장면과 개성이 부족한 로봇 캐릭터, 지나치게 헐거운 플롯은 <트랜스포머> 프랜차이즈의 단점으로 누누이 지적돼왔지만 4편에 이르도록 해법을 찾지 못하고 지지부진했으니 그간 꾹 참고 영화를 본 관객의 인내심이 바닥날 법도 했다. 마이클 베이로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기였다. 아니
<트랜스포머> 시리즈 안에서 <범블비>의 성취
-
기분 같아서는 <아쿠아맨>보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이야기를 하고 싶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지난 10년 동안 나온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영화 중 최고작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 수없이 쏟아져 나온, 같은 유니버스에 갇힌 비슷비슷하고 둔중한 코믹북을 각색한 할리우드영화들이 지금까지 어떤 즐거움을 놓치고 있었는지 발랄하고 경쾌하게 정곡을 찌르며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분이 그렇다고 해서 고객의 요청을 멋대로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큰 그림에 무심한, 유니버스 속 성공작들
제임스 완의 <아쿠아맨>은 DCEU에 속해 있다. 이는 ‘The DC Extended Universe’의 약자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DC 확장 유니버스라고 번역한다. 매스컴에서는 DCEU가 MCU, 그러니까 ‘Marvel Cinematic Universe’의 라이벌이라고 생각한다. 두 진영의 팬들에게 할리우드는 이 두 세력이 싸움을 벌이는
DC 확장 유니버스에 힘 실은 <아쿠아맨>, 하지만 유니버스 존속보다 더 신경 써야 할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