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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해보려 한다. 첫 번째, 왜 레드는 거미에 비유되는가? 두 번째, 도플갱어가 나오는 통로는 왜 놀이공원의 내부에 있는가? 세 번째, 레드의 끝없는 무용은 무엇을 표현하는가? 이 질문들에 따라서 <어스>를 보는 관점은 세개 혹은 그 이상으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왜 레드는 거미에 비유되는가
왜 레드는 거미에 비유되는가? 어린 애들레이드가 들어간 놀이공원 거울 방에서 거미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거울 방 내부에서는 거미 여인이 등장하는 신화가 흘러나온다. 거미 여인이 등장하는 이 신화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을 다룬 레슬리 마몬 실코의 장편소설 <의식>에도 등장한다. 거미 여인 치치나코가 대상을 상상함으로써 대상을 현존하게 만든다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신화다. 거미 여인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이며, 그렇기에 거미 여인은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상징이며, 거미에 비유되는 레드 또한 원주민에 대한 상징이라 볼 수 있
<어스>를 다시 보게 하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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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의 진짜 이름은 막금이다. 딸 셋에 또 딸, 금이들의 마지막이었다. 곧 죽으리라, 아랫목에 밀쳐둔 핏덩이는 언니들이 몰래 흘려준 밥물을 먹고 살아났다. 영화 <사바하>를 봤을 때, 생과 멸, 선과 악 등 여러 종교적 상징을 둘러싼 한국적 오컬트에 대한 매혹에 앞서, 단번에 이 일화가 떠올랐다. 이름 없는, 그러나 죽지 않은 여아 ‘그것’은 이것과 저것의 이분법에서 배제된 존재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것은 저것이 되고 저것은 이것이 되는 회로를 상기시킨다. 등록되지 못한 ‘그것’은 이미 죽은, 인식되지 않는 여아들을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강조컨대 여아 살해는 무던히 행해지는 가부장제 문화의 일부이다. 그러나 영화 <사바하>에서 대비되는 1899년과 1999년은 특별한 뜻을 함축한다. 1899년은 불사(不死)를 염원하는 남성이 태어난 해이다. 이때 식민의 전야 조선에 근대화의 상징으로 전차와 철도가 놓였다. 그리고 새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 ‘고
<사바하>, 식민지 남성성과 여아 살해로 읽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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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만들기를 환유하는 영화에 관한 영화. <국경의 왕>이 영화 만들기에 관한 자기 반영적 영화라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배우 김새벽을 제외하면 감독의 전작 <라오스>(2014) 출연진이 대부분 합류한 데다 감독을 포함한 대부분의 스탭이 배우를 겸한다. 주요 캐릭터는 영화를 만들었거나, 만들기 위해 일단은 무언가를 쓰거나 구상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쨌다는 말인가. 영화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이가 임정환 감독만은 아니며, 자기 반영성은 만드는 방식의 곤궁에서 비롯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때도 있다. 물론 곤궁이 필연적으로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종종 자기만족적 신세 한탄이 자기 반영성으로 둔갑하며, 이 둘을 분간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적어도 지금의 한국 독립영화를 논할 때 ‘영화에 관한 영화’라는 설명에는 부연이 필요하다.
<국경의 왕>에는 현실의 조건과 충돌하며 돌출되는 서사적 야심이 있다. 이것이 여타 독립영
<국경의 왕> 독립영화적인 서사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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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금속 표면을 연상시키는 냉혈한적 인상과 굳은 입매, 본심을 파악하기 어려운 깊고 푸른 눈. 페미니즘적 비주류 영화에 가까운 <더 와이프>를 비롯한 <파라다이스 로드>(1997), <앨버트 놉스>(2011)부터 상업영화 <101마리 달마시안>에서 조차 글렌 클로스는 대개 인간, 좁게는 여성의 범주를 넘어서는 비인간적 인격으로 등장해왔다. <더 와이프>는 글렌 클로스의 배우적 페르소나를 활용한 영화다. 세간에선 아무래도 영화가 그녀의 재능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것이 중평인 듯하다. 작품에서 그녀는 들끓는 정념을 표정으로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대작가의 아내이자 속내가 궁금한 여성 조안 역을 맡았다.
그림자 없는 조명이나 침실과 홀 등의 실내 공간은 마치 고전 스웨덴영화의 차분한 실내극을 연상시킨다. 실버와 민트를 중심으로 한 색조는 노작가와 그의 아내의 백발과 조응하며 부드러운 정조를 만들어낸다. 사실 <더 와이프>
<더 와이프>, 그녀를 응원만 할 수는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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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약점을 고백하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애석하게도 나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전설적’ 전작 <해피 아워>(2015)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래서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아사코>를 두고 <해피 아워>와 비교하며 온통 실망과 불만을 쏟아냈던 비평들에 어찌됐든 동의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번역본이 없는) <아사코>의 원작인 시바사키 도모카의 동명 소설을 읽지 못했다. 인터뷰 기사들을 통해 영화가 소설과 몇몇 지점- 예를 들어 동일본대지진 에피소드- 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정확하게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논할 수 없다. 달리 말해 나에게 <아사코>는 어떠한 참조점도 없이 도착한 온전한 영화이다.
감독의 이름마저 알지 못했더라면 나는 이 영화를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가 아닐까 의심했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의 최근작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 극장판>(2017)에 ‘침략자’로 등장한 배우
<아사코>, 성장한 것 같지만 결국은 제자리인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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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잭의 집>에 반대하는 유일한 방식은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절대로 영화를 보지 않는 것이다. 영화를 향한 어떠한 거부반응도 영화의 위력을 증명하는 일화로 사용될 뿐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무감함을 증언하는 쪽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영화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이상한 방식의 자기 파괴 행위가 될 공산이 크다. (대체 얼마만큼 자극이 있어야 반응하시겠습니까.) <살인마 잭의 집>을 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자명하다. 이 영화에는 잔인한 연쇄 살인방식의 재현이 있으며, 더 나쁘게는 그것을 예술 작품화 혹은 희화화시키는 잔혹함이 있다. 첫 번째 사건의 피해자 여성(우마 서먼)은 잭(맷 딜런)이 휘두른 자신의 잭(자동차 수리용 공구)에 맞아 얼굴이 으깨진 채 죽는데, 이러한 얼굴 형상이 피카소풍의 회화로 연결되는 지독한 농담 같은 시퀀스가 등장한다. 살인의 결과를 예술적으로 포장하는 것은 희생자에 대한 저열한 조롱만큼이나 불쾌하기 짝이 없다. 더군다나 그것
<살인마 잭의 집> 라스 폰 트리에는 판단 불가의 영화를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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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이하 <더 페이버릿>)가 시작되면 곧바로 눈길을 사로잡는 장면이 등장한다. 연설을 마친 앤 여왕(올리비아 콜먼)의 머리에서 시녀가 왕관을 내리자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왕이 이제야 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을 늘여 근육을 이완한다. 섬세하고 부드럽게 연속되는 동작 끝에 의아하게도 그녀의 얼굴엔 아이들이 토라졌을 때 나올 법한 뚱한 표정이 머문다. 짧은 숏 안에서 올리비아 콜먼은 군주로서의 자태와 신경증적이고 유치할 수 있는 속성을 드러내는 제스처를 이행해가며 앤 여왕의 캐릭터를 단번에 구현해낸다. 이 장면은 효용적일 뿐 아니라 단순하고 유연하다.
그래서 이상하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가 아닌가. 사회 시스템의 억압과 폭력, 인간의 추악함과 고독 등 인간사의 보편적인 어둠에 날 선 메시지를 관철하기 위해 현란한 작전을 펼쳐온 감독의 작품이 아니던가. 우화적이고 신화적인 요소를 끌어들이고, 상이한 앵글과 리듬을 지닌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철저히 설계되었으나 매혹되기는 어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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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를 흥미롭게 만드는 지점은 은유가 아니라 과장이다. <송곳니>(2009)의 억압적인 가족은 독재국가를 은유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제도 자체에 내재한 독재적 요소에 대한 지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 랍스터>(2015) 또한 판타지가 아니라 과장을 통해 드러난 규율 사회의 한 단면으로 볼 수도 있다. <송곳니>와 <더 랍스터>, <킬링 디어>(2017)는 모두 가족 혹은 사적 관계 내의 권력 혹은 규율을 포착하는데, 이 규율은 인물과 동화되어 인물들을 기계처럼 만든다.
조르조 아감벤은 미셸 푸코의 디스포지티프(장치)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오이코노미아’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오이코노미아는 원래 ‘가정의 관리 또는 경영’을 의미하지만, 아감벤은 이를 “인간의 행동, 몸짓, 사유를 유용하다고 간주된 방향으로 운용, 통치, 제어, 지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실천, 앎, 조치, 제도의 총체”라는 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주체성을 잃은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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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다뤄졌지만 두편의 영화를 잇는 하나의 이미지가 계속 머리에 남았다. <알리타: 배틀 엔젤>(이하 <알리타>)과 <드래곤 길들이기3>(이하 <드래곤3>)를 본 후 한동안 누군가의 눈을 이렇게 오랜 시간 바라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두 영화가 보여준 빼어난 기술적 성취나 그에 반해 상대적으로 아쉬운 서사는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되었으니 여기서 굳이 보태지 않겠다. 그보다 관심을 끈 것은 마치 일본 만화 캐릭터처럼 눈이 얼굴의 절반쯤 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 얼굴들이 생각보다 덜 어색하게 다가왔다는 점이다. <알리타> 예고편을 봤을 때 걱정됐던 기이함과 어색함이 정작 영화에서는 그다지 거북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어색하지 않아서 이상했다. 알리타(로사 살라자르)를 제외하곤 모두 정상적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알리타 홀로 과장되어 있음에도 같은 화면 속에서 위화감 없이 섞인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뒤늦
<알리타: 배틀 엔젤>과 <드래곤 길들이기3> 속 눈동자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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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의 표면에서 장애인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나 차별은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배제와 분리, 그로 인한 불평등은 얼마나 나아지고 있을까. 이 글은 작품 비평이라기보다 ‘영화 <증인>을 중심으로 본 한국 사회의 장애인 타자(他者)화 문제’라는 주제의 에세이에 가까울 것이라는 점을 우선 밝히고 시작하려 한다.
두개의 비슷한 풍경이 있다. 먼저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자폐 장애를 지닌 동생을 격리시설에서 데리고 나와 지역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경험을 담은 빼어난 작품이다)을 만든 장혜영 감독 자매의 이야기다. 지난해 9월 청와대에서 열린 발달장애인 초청 간담회에서였다. 고관대작들은 “우리 장애우들”, “우리 장애 친구들”이라는 시혜적 호칭으로 말을 꺼내며 그들이 들은 장애인의 어려운 점을 나열했다. 장 감독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를 분노 혹은 실망을 느꼈다”고 털어놨다(CBS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연
<증인>으로 보는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 혹은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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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직업>을 ‘정통 코미디’로 받아들인 모 평자의 반응을 보고 뭔가 말하고 싶었으나 그걸로 글 하나를 완성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의 시간이 흐를 동안, <뺑반>과 <기묘한 가족>을 마저 보았다. 설날 전후에 개봉하는 3편의 영화에서 공통으로 읽어낸 부분이 있어 글로 엮으면 괜찮겠다고 판단했다. 모른 척하고 영화의 흥행과 상관없는 글을 쓰자니 뭔가 이상했다. 그래서 어색하지만 하나의 글 안에 느슨하게 연결된 두 가지의 글을 써보기로 했다. 지금 와서 <극한직업>에 대한 호감이 급상승했다고 말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우선, 이 영화가 지닌 외적 의미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병헌이란 감독의 행보가 가져온 신선한 바람을 느껴야 했다. 그 바람을 맞으며 극도로 저조했던 2018년의 한국영화로 확장해서 읽어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 글이 전체의 전반부에 해당한다면, 후반부에 해당하는 글에서는 원래 의도한 바대로 <극한직업&
<극한직업>의 엄청난 흥행, <뺑반> <기묘한 가족>이 택한 다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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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가난한 남자와 상처받은 여자가 만나 서로를 보듬는다는 내용은 클리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클리셰와 클리셰 아닌 것의 구별은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에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비일상과 일상의 경계는 모호하고, 만남과 사랑 같은 것들이 하나의 사건을 구성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영화는 클리셰를 통해 사건으로서의 사랑이라는 클리셰에 저항하고 있다. 미카(이시바시 시즈카)의 말처럼 사람들은 연애를 배운 적이 없음에도 연애를 한다. 혹은 흉내낸다. 사람들은 영화에서 본 연애를 모방하고 감독은 그런 현실의 연애를 영화로 재현하고, 사람들은 또다시 그 재현을 재현한다. 클리셰의 거대한 순환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랑은 이미 오래전에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도시를 사랑하는 일
이 클리셰의 순환 속에서 사랑한다는 말조차 상투어로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안녕이라는 말의 의미를 묻지 않듯이,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 또한 물어서는 안 된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가 상투적인 사랑을 그리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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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몸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인 동시에 우리의 존재를 규정짓고 우리의 욕망을 만들고 욕망의 대상이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어쩌고저쩌고. 몸은 예술가들이 버릴 수 없는 소재다. 이들의 머리와 손을 거쳐 인간의 몸은 미화되고 추화되고 과장되고 단순화된다. 그리스 신화나 북구 신화, 인도 신화의 신들은 대부분 우리보다 나은 몸을 갖고 있다. 더 아름답고, 더 크고, 더 쓸모 있고 재미있는 몸. 이들이 상대하는 적수들 역시 우리 인간보다 더 재미있는 몸을 갖고 있다. 잘려나간 토막들이 멋대로 붙여지고 뒤틀리고 무시무시하고. 그리스 신화는 인간 몸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들의 난장판이다.
이들에 대한 상상력은 한계가 있다. 신화의 이야기를 상상한 예술가들은 오로지 그들의 피부만을, 그 피부를 통해 드러나는 근육의 모양만을 보았다. 그들은 그 밑의 내장과 기타 장기는 보지 못했고 될 수 있는 한 외면했다. 그리스 신들의 내장을 상상해보라. 분명 있기는
<알리타: 배틀 엔젤>, 안전한 현재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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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지만 이강현 감독의 <얼굴들>에서 매혹을 느낀 부분은 어떤 얼굴도 나타나지 않는 텅 빈 공간을 비추는 순간이다. 가령 현장학습으로 수원 화성에 온 학생들이 행궁 안을 돌아다니는 대목에서 카메라는 이들이 프레임 바깥으로 완전히 퇴장할 때까지 장면을 쫓는다. 이어지는 숏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아무도 없는 행궁의 정적이고 공허한 풍경이다. 서사적 기능이나 특정 인물의 시각으로 수용되지 않는 무인의 공간이 기습적으로 숏의 연속적 체계에 침입한다. 그러나 이런 풍경은 단순히 사람들이 사라지고 없는 사실만을 표현하지 않는다. 직전 장면에서 보았듯 그곳은 익명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언제든지 새로운 사람들의 출현으로 다시 채워질 공간이다. 프레임 내부는 그러므로 행위의 주체가 사라진 공간이면서 동시에 어느 방향으로든 새로운 대상이 틈입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이같은 비선형적 접속의 가능성이 무인의 풍경에 잠정적으로 내포돼 있다.
<얼굴들>에서 영화를 전개하는 방
<얼굴들>의 몽타주의 방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