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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바르다란 영화를 무척 사랑했다. 어느 순간부터 바르다와 바르다의 영화를 분리해내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의 내밀한 마음은 둘 중 누구를 향하는지도 모른 채 그들을 향해 내달리곤 했다. 짐작건대 누군가는 나와 꼭 같은 마음으로 바르다의 영화를 껴안았을 것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2008)이 유언장이 아니었음에 안도하고, 비주얼 아티스트로도 활동하며 끝없이 예술적 영토를 확장해나가는 바르다의 재능과 열정에 경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끝내 불안감을 감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이 마지막 인사가 아니기를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아녜스 바르다 특별전이 열리고 있을 때 그녀의 마지막 소식이 들려왔다. 이기적이게도 나는 그날 그 극장에 있지 않았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파고들 기억 하나가 새겨지지 않았으니 정말 다행일 수밖에 없었다. 늦게 소식을 접했다면 <방랑자>(1985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속 세트에서 생토뱅 쉬르메르까지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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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주의에 대한 거부와 반발심.’ 영화의 제작진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엄숙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영화 <김군>의 중요한 제작 목적이었던 것 같다(<씨네21> 1206호 기획 기사).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도 넘은 왜곡’에 대한 반발이 아닌, 엄숙주의에 대한 반발이라니. 이러한 발언은 광주 시민의 편에 선 영화 속 입장과도 언뜻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발언과 영화에 관한 반응을 두루 살피다보면 이같이 강조해야 했던 이유를 수긍하게 된다. ‘지만원의 주장에 맞선 광주 시민들의 대응’은 <김군>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문제는 이러한 논의가 다시 좌우 프레임 속에 짜맞춰진다는 점이다. 프레임을 벗어나 광주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나의 이미지에서 출발해 장르적인 형식으로 광주를 보여준 <김군>의 시도에 우리는 더 주목해야 한다.
이미지와 실제의 격차
엄숙주의에 대한 강조는 좌우로 대변되는 익숙한 프레임에서
매혹의 대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김군>이 가진 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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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는 아일랜드의 사회복지 문제를 다룬 영화다. 아일랜드 출신의 소설가이자 시나리오작가인 로디 도일(<커미트먼트>(1991))의 시나리오를 같은 아일랜드 출신의 패디 브레스내치(<아이 웬트 다운>(1997), <비바>(2015)) 감독이 연출했다. 더블린에 사는 로지 가족은 집주인이 집을 팔겠다고 통보하면서 7년간 살았던 임대주택에서 쫓겨난다. 주인공 로지(사라 그린)와 그의 남편 존(모 던퍼드) 그리고 네명의 자녀들은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리고 홈리스가 된다. 더블린시가 마련한 대책은 호텔 명단을 주고 그들이 방을 구하면 시에서 숙박비를 지급하는 것이다. 로지의 가족과 같은 처지의 가족들이 많아지면서 호텔 방을 구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영화는 로지가 조그마한 자동차에 의지해 자녀들을 학교에 등하교를 시키면서 하룻밤이라도 잘 곳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로지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로지>가 절망을 보여주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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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은 문득, 시작한다. 바튼(제레미 레너)의 가족이 전원의 집 주변에서 한가한 오후를 보낸다. 잠시 후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 장면의 정체는 뭔가. 이어 크레딧이 나오고 현재로 돌아오는데 전편의 엔딩에서 대충 몇주가 지난 시점이다. 그렇다면 첫 장면은 불과 몇주 전의 것이다. 관객으로 치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이하 <인피니티 워>)를 본 게 꼭 1년 전이니 당시의 장면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첫 장면은 플래시백인가? 정확히 말하면 ‘아니다’. 바튼은 <인피티니 워>에 나오지 않았다. 즉, <엔드게임>의 첫 장면은 ‘새로운 장면’이다. 굳이 표현하면 ‘과거의 미래형’인 셈이다. 헛소리처럼 들리겠으나, 어쨌든 영화예술에서만 가능한, 우리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기술이다. &l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기록된 사실, 역사가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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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리스>의 내용은 단순하다. 사랑하지 않는 부부, 그 사이에 한 아이가 있다. 자신이 부모에게 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이는 그다음 날 종적을 감춘다. 남편과 아내는 아이를 찾기 위해 애쓰지만 아이는 결국 찾지 못한다. 영화의 중요한 지점은 존재가 아니라 부재에 있다. 문제는 이 부재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존재일 뿐이기에 부재는 존재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 즉, 부재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할 자리를 보여주는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영화평론가 김소희는 “부재의 시간은 부모가 수색구조 단체와 함께 숲과 폐건물, 병원을 옮겨 다니며 알로샤(마트베이 노비코프)를 찾는 장면으로 채워진다”고 말한다 (<씨네21> 1204호 <러브리스> 영화비평). 부재가 현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찾아 공간을 떠도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리바이어던>(2014)의 빈 공간은 부재를 찾아 떠도는 주체의 자리에 관객을
<러브리스>가 비극적인 세계와 단절된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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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의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걸어가는 한 남자의 얼굴에 미묘한 결기가 서려 있다. 미동 없는 느린 걸음으로 그는 카자흐스탄의 익숙한 거리를 걷는다. 그런 남자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최선을 다해 카메라가 그를 쫓는다. 영화의 서막을 여는 느릿한 파노라마 화면의 막바지 즈음, 관객은 이 지긋한 노년기 남성이 ‘황해도 몽금포 부근에서 출생한 촬영감독 김종훈’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자이며, 그렇기에 더이상 울지 않는 인물이다. 오직 한장의 사진이 그런 그의 마음을 드러내 보인다. 동료들과 대사관 회의를 가던 도중에 찍은 오래된 기념사진 한장이 그 마음속 징표가 된다.
외상적 디아스포라의 가장 아이러니한 순간들
다큐멘터리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은 김소영 감독의 ‘망명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으로, 한국 사회가 낳을 수 있는 외상적 디아스포라의 가장 아이러니한 순간을 뒤쫓는 영화다. 1956년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이 시간을 봉인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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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유머 하나. 미연방수사국(FBI)과 미 중앙정보부(CIA) 그리고 소련의 국가안보위원회(KGB)가 숲에서 토끼를 잡아오라는 미션을 받았다. FBI는 숲에 들어가 수색을 시작하고 24시간 뒤에 토끼가 도망쳤다는 결론을 내렸다. CIA는 숲을 수색한 지 4시간 만에 토끼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KGB는 숲에 들어간 지 20분 뒤 피투성이가 된 곰 한 마리를 끌고 나왔다. 그리고 곰이 소리쳤다. “제가 토끼입니다! 제 부모님도 모두 토끼였습니다!”
이 유머를 듣고 웃으려면 우리는 피투성이가 된 곰에게 감정이입을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피투성이 곰과 거리를 둬야 한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은 “희극을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하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거리두기는 단지 웃음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영화는 수동적이며 압도적이어서 선동에 쓰이기 좋은 매체였고, 이런 영화적 속성에 영화 스스로 저항하는 하나의 방식이 거리
<스탈린이 죽었다!>의 웃음을 위해 거리를 둔 결과 생겨난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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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컨저링> 시리즈가 시작되기 이전에도 워런 부부는 호러 팬들에게 유명 인사였다. 소위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귀신영화나 텔레비전물이 나올 때면 그 사건을 맡은 워런 부부의 이름이 어딘가에 박혀 있거나 극중 캐릭터가 이들을 모델로 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워런 부부는 20세기 호러물에 지울 수 없는 하나의 틀을 만들었다. 악령에게 시달리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구원해주는 초자연현상 전문가. 이들이 없었어도 이 틀은 존재했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아는 세계에서는 워런 부부를 통할 수밖에 없었다. 요새 사람들은 이들의 이름을 <컨저링> 유니버스 영화를 통해 안다. 나에겐 이게 굉장히 이상해 보인다. 초자연현상을 다룬 호러영화를 만드는 것이 금지된 중국이나 베트남에 사는 게 아니라면, 워런 부부의 사건 파일에 실린 사건들에 영감을 받아 귀신 나오는 호러 영화를 만드는 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워런 부부가 맡은 사건을 영화화하면서 이들의 캐릭터를 실
<요로나의 저주>를 계기로 <컨저링> 유니버스의 한계를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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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즈뱌긴체프 감독은 늘 건조한 풍광을 보여주는 숏으로 영화의 문을 연다. <리턴>(2003)의 동요하는 바다의 겉과 속, <리바이어던>(2014)의 파도 치는 해변은 단지 거대한 풍광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영화 속 사건과 관련된 결정적인 장소다. <리턴>의 바다는 추락사한 아버지의 주검이 침잠하던 곳이며, <리바이어던>의 바다는 어머니 릴랴가 몸을 던진 곳이다. <러브리스>(2017)의 오프닝은 눈 덮인 겨울 숲을 보여주는 몇개의 숏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 장소가 전작처럼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결정적인 장소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종된 알로샤(마트베이 노비코프)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비밀스러운 장소라는 점에서 숲은 중요하다.
알로샤의 하교 시간에 맞춰 카메라는 마중 나온 것처럼 교문 밖에서 그를 기다린다. 알로샤가 유일한 친구와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오프닝에서 등장했던 숲이 자리한다. 알
<러브리스>에서 카메라는 왜 아이를 놓쳐버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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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석 배우의 감독 데뷔작 <미성년>을 보았다. 처음 이 영화를 볼 때,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장면은 영주(염정아)의 맨발이었다. 그녀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녀가 맨발일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감독은 그녀의 맨발을 딸 주리(김혜준)에게 도시락을 건네고 돌아가는 뒷모습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영화의 배경이 된 계절은 겨울이었다. 딸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당당하게 걸아가는 그녀의 맨발을 본 순간, 신동석 감독의 <살아남은 아이>(2017)에서 미숙(김여진)이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난 후 걸어가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남편 대원(김윤석)의 불륜을 알게 된 영주의 상황과 아들이 친구의 괴롭힘으로 익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숙의 상황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이 두 여성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두 영화는 이들의 감정을 표정이나 대화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뒷모습을 통해 보여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이는 두 감독
<미성년>에서 김윤석 감독이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는 방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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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겟 아웃>에 대한 이전 글(<씨네21> 1118호 ‘윤웅원의 영화와 건축’, “공포영화 <겟 아웃>을 보고 건축 프로젝트 ‘힐시티’가 떠오르다”)에서 조던 필의 영화가 건축적으로 보인다고 썼다. 그의 영화가 구조의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하면서 끝을 맺었는데, <어스>를 보고 나서, 이 생각에 대해 좀더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스>가 <겟 아웃>에 비해 덜 좋은 이유를 이 과정을 통해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건축가가 자주 사용하는 설계 방법 중 하나는 다이어그램으로 건물을 개념화하는 것이다. 가끔 냅킨이나 영수증 위에 그린 스케치가 건축가의 영감을 보여주는 표식으로 사용될 때가 있는데,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건축은 단순화된 구조의 형태, 즉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줄거리를 글로 요약한 시놉시스와 건축의 다이어그램의 차이는 다이어
미국인이 아닌 관객의 눈에 비친 <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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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스>는 예사롭지 않은 자막으로 영화의 문을 연다. “다음 이야기는 실화다. 혹은 실화에 가까운 이야기다. 딕 체니는 역사상 가장 비밀스러운 지도자였으므로. 하지만 우리도 좆나게 최선을 다했다,” 모종의 결기와 유머감각이 어우러진 표현에 피식 웃다가 문득 궁금해진다. 대체 얼마나 최선을 다했기에 애덤 매케이는 영화 대문에다 비속어까지 새겨가며 자신의 노력에 대해 강조한 것일까. 실화에 가까운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어떤 엄격한 과정을 거쳤을까. 머릿속은 호기심과 의심으로 살짝 어지러워지지만, 불신하던 마음은 이내 슬며시 빠져나간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자신만만해 보이던 고백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로 자연스레 다가온다. 아니, 이보다 더 열심히 만들 수는 없었을 것 같다.
관객이 영화에 연루되다
<바이스>는 정공법을 구사하고 재치를 발휘한다. 장르영화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매케이의 전작들을 따라온 관객이라면 당연히 짐작하겠지만, 이 영화의 묘
<바이스>, 고요히 폭정이 시작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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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영적’인 영화를 좋아하고 이에 대한 글을 썼지만, 절대 이에 대한 영화를 만들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제 몫이 아니죠. 저는 절대 ‘브레송이라는 위험한 얼음판’에서 아슬아슬한 모험을 하지 않을 겁니다.” 1972년, 오즈 야스지로, 로베르 브레송, 칼 드레이어 영화의 ‘초월적 스타일’에 대한 책(<Transcendental Style in Film: Ozu, Bresson, Dreyer>)을 발표한 비평가 폴 슈레이더는 당시 감독으로서 ‘영적’인 영화를 만들어볼 생각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개혁파 교회 목사였던 아버지를 비롯해 신실한 믿음을 가진 가족들 속에서 신학을 공부한 폴 슈레이더는 어느 순간 이 ‘영적’인 세계를 버리고,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UCLA로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성한’ 과거와 ‘세속적’인 현재는 절대 만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소매치기>(1959)
<퍼스트 리폼드> 공존 불가능한 두 세계의 사이에 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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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코는 왜 떠나는 걸까.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를 보면서 가장 궁금한 지점이다. 아사코는 료헤이와 함께 오사카로 떠나기 직전에 마련된 송별회 자리에 놀랍게도 옛 연인인 바쿠가 찾아오자 그의 손을 잡고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는 짧은 동행을 마친 뒤 료헤이에게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지만,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 일탈적인 궤적이 왜 필요했을까. 영화는 그녀의 심리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는 똑같은 외모를 가진 두 남자 사이에서 결정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혼란의 상태일까. 아니면 마치 의례를 치르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제자리에서 벗어난 뒤 다시 되돌아오는 의지의 실현일까.
이런 아사코의 행동이 웨스턴의 정서와 유사하다고 느낀다. 웨스턴의 남성들은 이따금 안정적으로 보이는 가족 공동체를 떠나거나 집을 불태운다. 그들의 선택은 필연적인데, 더 이상 그 자리에 스스로가 거주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집을 잃어버린 자들의 여정이 시작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가 영화가 없는 곳에서 영화를 탄생시키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