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빈 무대 위 네모 형태의 프레임 하나만 설치한 무대디자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이 무대에서 네모 프레임은 안과 밖 공간을 한정하는 역할을 한다. 연기자들은 관객에게 자신들이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네모 프레임 밖에서는 연기를 하지 않는다. 오직 프레임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연기는 시작된다.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극장 건축은 네모 프레임과 같은 의미를 이미 공간에 구현하고 있다. 무대가 관객의 공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설계되어 있다. 무대가 특별히 한정된 공간으로 계획되어 있다는 사실은, 관객이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한다.
상징의 자리를 차지한 기능
희곡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극장 무대에 구현해야 하는 연극은 다양한 표현방식을 사용한다. 진짜 나무 대신 나무라고 볼 수도 있는 막대기나, 건물 전체 대신 일부분이라든가, 꼭 현실 그대로 재현할 필요 없이 여러 가지 다양한 표현방식이 사용되고 있다. 이런 방법들 중 하나를 영화에서 보여준 것이 라스 본 트리에 감독의 <도그빌>(2003)일 것이다. 바닥에 그려진 평면이 현실적인 공간을 대체하고 있다. 영화는 연극과 다르게, 필름 상영이라는 방식 덕분에 시간의 유예를 갖고 있다. 연기하는 행위와 관람하는 행위가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존재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즉, 촬영을 극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연극무대가 현실을 재현할 때 사용하는 추상성 혹은 상징성을 필요로 하지 않게 만든다. 서구 도시의 잘 알려진 장소들은 대부분 권력(정치권력 혹은 종교권력)과 관계가 있다. 그것은 권력이 상징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의도를 갖고 기획된 이 공간들은 일정한 수준의 ‘연극적인 공간’의 성격을 갖게 된다. 공간에 드라마를 갖고 있다. 따라서 종교 건물에 들어갔을 때 갖게 되는 경건함이나 정치권력에 의해 기획된 대규모 광장에 서 있을 때 갖게 되는 압도되는 감정 같은 것들은, 우리가 어떤 의도된 프레임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현대건축은 어쩌면 건축에서 이러한 상징적 의도들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권력의 ‘상징’이 사라진 자리를 자본주의의 ‘기능’이 대체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가 소리 없이 사라진 자리에도 여전히 상징이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곳이 있는데, 그것은 정치의 영역이다. 정치인의 넥타이 색깔과 말 한마디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세계, 따라서 이 세계에서 정치인은 보여주는, 연기하는 삶을 살게 된다. 정치인과 성직자들은 일종의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남에게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그들이 어떤 프레임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프레임이 원하는 이야기에 따라 ‘연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특히,그들이 장기집권 독재자의 시대의 정치인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나는 <남산의 부장들>의 각 장면들에서 앞에 설명한 연극적인 공간의 느낌을 많이 받았다.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장면뿐만 아니라, 김규평 중앙정보부장(이병헌)이 탱크를 마주한 장면, 미국 청문회에서 박용각(곽도원)이 민주주의를 외치는 장면, 링컨 동상 앞 장면, 파리의 방돔광장 장면, 그리고 심지어 사람들을 비워낸 프랑스 시골 도시의 갈랫길에서조차 연극적인 공간의 느낌을 받았다.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장면이야 세트로 찍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더 받았을 것 같은데, 왜 나머지 공간들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가 궁금했다. 외국 로케이션을 갖고 있는 영화들에서 자주 보이는 경향이지만 영화에서 외국 장소들의 특징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곳들이라는 거다. 외국까지 가서 일상적인 공간을 찍을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므로 이해는 되는 선택이다. 그런데 <남산의 부장들>에서 각 장면들을 더 연극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주인공들의 행동이다. 그 이유가 나는, 그리스 희곡처럼 <남산의 부장들>의 주인공들은 어떤 기질 때문에 정해져버린 자신의 운명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남산의 부장들>의 감독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자신에게 운명지어진 삶을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무대는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18년 독재정권의 마지막 순간들이다.
안가, 방으로 이루어진 공간
조직에 있어본 사람이라면 조직이 굴러가는 원동력을 알 것이다. 그것은 인정욕구와 그에 따른 보상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조직이라는 프레임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연기를 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선한 역할이건 악역이건, ‘남산의 부장들’도 각자의 연기를 한다.
앞에 언급한 것처럼, 서구의 도시들이 일상 공간으로 이루어진 도시 구조 안에, 종교나 정치적으로 기획된 연극적 공간들이 산재해 있다면 그런 장치들이 부족한 서울에서 우민호 감독의 선택은 공간 대신 상황이다. 곽상천 경호실장(이희준)이 동원한 탱크 앞에 서 있는 김규평의 모습 같은 장면이다. 개연성에 대한 의문은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 장면은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연극적으로 보였다. 탱크 앞에 선 양복 입은 남자가 보여주는 장면이 상징적으로 느껴졌다는 의미다.
<남산의 부장들> 속 장소에서 특히 흥미로운 공간은 ‘안가’다. 박통(이성민)이 암살을 당하는 장소가 ‘집’을 연기하는 장소라는 것이 흥미롭다. ‘안바’를 만들지 않고 ‘안가’를 만든 것은 그 당시의 접대용 술집이 요정이었기 때문일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안가가 방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라는 특징 때문일 것이다. 집이 제공하는 많은 것 중에 ‘섹스’와 ‘밥’을 떼어내서 안가를 만들었다. 안가에서 박통과 김규평이 독대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박통과 김규평은 옛 시절을 회상하며 일본말로 짧게 대화를 한다. 나는 이 장면이 연극적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그 이유는, 말하는 사람이 어떤 프레임 안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일본말이 자기도 모르게 나와버렸다기보다는, 그 순간 박통과 김규평은 일상이 아닌 어떤 프레임 안으로 들어간다.
<남산의 부장들>은 공적공간에서 벌어지는 사적 감정에 관한 영화로 보인다. 아니,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연기하는 삶에 생겨난 균열에 관한 영화다. 나는 앞의 문장에서, 정치인이나 성직자는 연기를 한다고 썼다.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정치인이나 성직자뿐만 아니라 인간 모두는 어쩌면 ‘연기의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는 지하철, 체육관 창고 같은 장소를 흉내내어 성매매 공간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성매매를 하는 사람에게 네모 프레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지금 여기를 벗어나 다른 장소로 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게 연기는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