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는 호주의 여성감독 안나 브로이스키가 2013년에 만든 다큐멘터리다.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소개된 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원제인 ‘Aim High in Creation!’은 김정일의 저서 <영화와 연출>의 단원 제목 ‘창작에서는 크게 노리는 것이 있어야 한다!’에서 따온 것이다. 도쿄에서 태어난 안나 브로이스키 감독은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주한 호주대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한국, 필리핀, 베트남, 미얀마, 이란 등에서 자랐으며, 동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깊다.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는 진귀한 영화다. 좀처럼 보기 힘든 북한 사회와 북한영화를 보여준다. 또한 북한의 체제선전을 따라가면서 그들의 우스꽝스러움을 폭로하는 ‘내재적 접근법’을 통한 비판이 담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구 사회에 악마처럼 알려져 있는 북한 사회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생각하게 해준다. 그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 북한을 먼저 만나본 안나가 남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교훈
-
소마이 신지 전작전에 대해 한줄의 지면도 할애하지 않은 잡지를 영화잡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난 9월 15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소마이 신지의 전작전이 막을 내렸다. 그동안 소마이의 영화를 소개하는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모든 영화가 상영되는 건 국내에서 처음 성사된 일이다. 주관적인 판단이라는 전제를 두고 말하자면, 이는 올 한해 국내 시네마테크나 영화제에서 마련된 모든 특별전과 회고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기획이다. 그러나 어느 매체에서도 이 상영의 의의를 거론하지 않았다.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답하기 쉬운 문제는 아니다. 소마이 신지의 전작을 상영하는 일은 지면에 실릴 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이건 영화주간지에서 다루기 어려운 주제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상영이 지시하는 의미와 효과를 비중 있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철저한 외면은 시네마테크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의 목록을 사건으로 취급하는 데 무관심한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을 테지
소마이 신지 전작전 이후 <러브 호텔>을 꺼내 보다
-
<몰리스 게임>의 리듬은 이상하게 둔하다. 영화의 단선적인 구조가 지나치게 뻣뻣해 에런 소킨의 결연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이런 구성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의 연출 데뷔작이라는 사실을 감안해봐도 인상이 크게 바뀌진 않는다. 질주해 나가는 서사엔 소킨의 인장이 여기저기 찍혀 있건만 전체 구조로 보자면 민첩하기보다는 강직해서 영화가 외려 평평해 보인다. 각종 업계의 생태와 시스템의 속성을 속사포 같은 대사로 탁월하게 묘사해내는 그의 재능은 몰리 블룸(제시카 채스테인)의 포커판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지만, 소킨은 질주하던 영화를 계속해서 불러세워 몰리의 윤리적인 면모를 웅변하듯 변론한다. 그러니 이상하다.
<몰리스 게임>의 일차적인 유희는 몰리가 전문가다운 솜씨로 포커판을 장악해가는 과정을 빠르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그건 연출작으로도 다시 한번 입증해내는 소킨의 기술전일 뿐, 스스로는 그것에 사활을 걸진 않는 것 같다. 카드가 도
<몰리스 게임>엔 왜 질탕한 놀이판이 깔려 있지 않은가
-
* <안시성>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된 글입니다.
언젠가부터 적지 않은 이들이 증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2009)부터였고 누군가는 <어벤져스> 시리즈의 중간 어디쯤부터였다. DC 코믹스의 최근작에 이르자 어지러움을 동반한 두통을 호소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막대한 비용과 노동이 투입된 컴퓨터그래픽(CG) 얘기다. 이제 거대하고 화려한 엉망진창(<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시가전 장면 같은 것)을 보고나면 어김없이 피로감이 찾아온다. 육안으로 봤을 때 실사와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왜. 마블 스튜디오의 경우 이같은 관객 피로감을 인지하고 민감하게 액션 디자인에 나서고 있기도 하다. 원인은 차차 밝혀야겠으나 CG를 포함한 시각특수효과(VFX)에 노출된 빈도만큼 피로가 누적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이같은 일군의 증상을 ‘만성 VFX 피로 증후군’이라 명명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 병원(病源)의 핵
<물괴> <안시성>, 한국영화 속 VFX 활용 사례
-
-
카운터스.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 일명 재특회와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던 일본의 반인종주의, 반소수자 혐오 시민운동의 이름이다. 카운터스는 저항 시위를 조직함으로써 혐오세력의 기세를 한풀 꺾고 혐오표현금지법 제정을 이뤄냈다. 최근 화제가 됐던 영화 <카운터스>(2017)는 그 투쟁 과정의 일부를 담은 작업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러나 조기 종영됐다. 개봉 직후 주인공 다카하시의 성폭력 가해 사실이 국내에 폭로되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고, 이에 배급사가 신속하게 대응한 것이다. 피해 사실을 확인하고 피해자와 소통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작품과 관련된 행사를 취소하고 조기 종영을 선택한 배급사의 대처는 모범적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앞으로 공동체 상영이나 VOD 배급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예측 앞에서는 머리가 복잡해진다. 작품을 둘러싸고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혹은 어떤 윤리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작품의 완전한 말소와 폐기가 우리가 선택할 수
‘<카운터스> 케이스’에 담긴 사회운동의 딜레마와 과제
-
누군가는 파운드 푸티지가 생명력이 다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최근 <곤지암>(2017)에 이르기까지 파운드 푸티지는 끝없이 생산되고 있다. 물론 저예산으로 만들기 쉽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파운드 푸티지가 불안과 공포를 창출하는 데 탁월하다는 이유도 무시할 수 없다. ‘푸티지’라는 말은 아직 편집되지 않은 영상을 의미하며, 파운드 푸티지는 이런 영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많은 영화에서 설정숏과 시점숏을, 롱숏과 미디엄, 클로즈업숏을 혼합해서 편집하는데, 이런 편집을 통해서 관객은 상황을 모두 파악했다고 느낀다. 그러나 시점숏으로만 진행되거나 CCTV로만 사건을 보여주는 경우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 화면의 사각지대가 생긴다. 많은 파운드 푸티지들이 보이지 않는 부분, 외화면을 활용하며 관객에게 공포의 실체를 정면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공포를 가중한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엇은 언제나 인간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하는 좋은 요소다.
그러나 파운드 푸티지가
<서치>가 모니터 안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법
-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37분만 견디면’ 극한의 재미를 느끼게 될 것이라고,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이하 <카메라>)의 관객은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리저리 튀는 가짜 피에 어색한 연기, 억지스러운 극진행은 초반 37분(이하 1부)을 차마 볼 수 없는 마구잡이 B급 좀비물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1부가 끝나는 순간, 마치 영화가 끝나듯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한달 전’이라는 자막과 함께 새로운 이야기(이하 2부)가 시작된다. 시답잖은 재연 프로그램이나 노래방 영상이나 제작하는 감독 타카유키(하마쓰 다카유키)는 어느 날 좀비 방송국 개국 작품으로 ‘원컷, 생방송’ 좀비물을 연출해줄 것을 요청받는다. 수없이 변주된 ‘영화 속 영화’ 구조가 더이상 낯설 리 없으니 2부가 1부 영상의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무렵, 영화는 ‘클라이맥스’(결국 3부)에서 ‘재미 폭탄’을 터뜨리기 위해 여기저기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영화의 경계가 어디까지냐고 묻는다
-
먼저, 짧게 김지운의 <인랑>에 대한 얘기로 글을 시작하려 한다. 나는 이 영화를 뒤늦게 IPTV로 봤는데 이 영화에 대한 기왕의 평점이 의아하게 여겨졌다. 김지운의 최고작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김지운의 지난 필모그래피를 전부 부정할 만큼 이 영화의 완성도가 처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김지운의 이전 영화 중에 흥행과는 무관하게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달콤한 인생>(2004)에서 이병헌이 연기하는 주인공 선우는 나르시시스트로서의 단독자이고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조직에 맞서 싸운다. 애니메이션이 원작인 <인랑> 역시 그런 점에서 김지운의 개인적 지향과 맞는 지점이 있을 터인데 주인공과 조직의 대결을, 납득할 만한 서사의 고정점이 없었던 <달콤한 인생>과 마찬가지로(이 영화에서 선우는 자신을 파괴하려고 한 조직의 보스에게 “내게 왜 그랬어요?”라고 묻는데 이는 관객이 서사에 갖는 의문과 동일하다), 실사영화 <인랑>은 애니메
김지운의 <인랑>의 나르시시즘, 윤종빈의 <공작>의 호연지기
-
이일하 감독의 <카운터스>와 박배일 감독의 <소성리>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다는 공통점만 제외하면 묶어 이야기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은 두편의 다큐멘터리다. 그리 이상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소재의 유사성이 서로 다른 작품을 무리 없이 묶는 일차적인 바탕이라 할 때, <카운터스>와 <소성리>가 다루는 소재는 혐한 발언을 하는 재특회(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와 이에 맞서는 카운터 조직,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로 별다른 교차점 없이 평행선을 이룬다. 공통점이라고 해야 어딘가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을 다룬 것인데, 그것은 다큐멘터리가 대부분 그러하므로 딱히 공통점이라고 말할 순 없다. 그런데 두 작품을 비슷한 시기 나란히 두고 보니 공통된 의문이 하나 생겼다. ‘오늘날의 액티비즘은 어디에 있는가’가 그것이다. 두 작품은 각자의 방식으로 오늘날의 액티비즘을 보여준다. 전작의 연장선에 있는 동시에 변화된 시도를 하
<카운터스>와 <소성리>에 오늘날의 액티비즘을 묻다
-
※ 두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이하 <크리피>)과 <태풍이 지나가면>이 함께 개봉했던 지난 2016년처럼, 2018년에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과 구로사와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가 함께 찾아왔다. 상반되는 영화적 지향점을 가졌지만, 두 감독은 모두 자신이 쌓아올린 영화적 세계에 안주하기보다는 그와 일정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려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더구나 그러한 변화가 자신이 발붙이고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은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당시 평론가 정지연은 <씨네21>에 기고한 비평(1070호, ‘재앙의 예언자/기록자 -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에서 “한국 주류영화의 중심축이 ‘지금 여기’ 한국사회를 외면하고 있는 것과 정반대로 일본의 작가주의 감독
<어느 가족>과 <산책하는 침략자> 감독들의 작품 세계에서의 위치
-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랑>의 도입부. 빨간 망토의 소녀는 폭탄이 든 가방을 테러리스트에게 전달한 다음 지하의 컴컴한 수로로 돌아온다. 그녀 앞엔 서너명의, 그녀보다 어린 아이들이 음료 팩을 빨아먹으며 서 있다. 얘들도 폭탄 가방을 들고 들락거렸을까. 소녀는 질문할 틈도 없이 하얀 음료 팩과 두 번째 폭탄 가방을 받아든다. 그리고 얼마 후, 특기대의 임중경(강동원)과 맞닥트린다. 그만 있었다면 소녀의 행동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사방에서 검은 옷의 짐승 같은 존재들이 압박하자 그녀는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한다. 중경은 잠을 못 이룬다. 소녀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인랑>에서 소녀들은 수난의 시대를 산다. 특기대는 앞서 잘못된 정보 아래 출동한 현장에서 10여명의 소녀를 쏘아 죽였다. 중경은 소녀들의 피가 자기 몸 위로 흐르는 기분을 느낀다. 소녀보다 몇살 더 많은 여주인공이라고 해서 하나도 나을 건 없다. 구미경(한예리)이 이윤희(한효주)를 마
오해받은 <인랑>을 옹호한다
-
<어느 가족>이 이룬 성취는 무수히 회자되고 있으며 대체로 수긍이 가는 바이지만, 나는 영화의 단 한 장면이 목에 걸려 이 작품에 온전한 찬사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 장면은 그냥 넘기기에는 끝내 미심쩍게 느껴지기에 영화의 여기저기를 경유한 뒤에 다시 한번 바라보고자 한다. 쇼타(조 가이리)가 마트에서 양파를 훔치고 달아나다가 다리 아래로 떨어지던 바로 그 장면 말이다. 우선은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부터 소개하며 글을 시작하여야 할 것 같다.
뛰어내린 것은 왜 하필 쇼타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에서 가족의 세계가 죽음을 품는 것은 흔한 일이나 <어느 가족>의 특별한 점은 죽음이 이 가족을 유지시키는 동력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하츠에 할머니(기키 기린)가 남편의 죽음과 변심의 대가로 받는 돈으로 살아가며, 그녀의 죽음은 다시 한번 (그녀가 남긴 돈으로써) 가족의 생존을 연장시킨다. 그 죽음에는 단순히 육신의 죽음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단절도 포함된
<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의 세계에서 어떤 죽음을 고민하다
-
어떤 면에서 <어느 가족>은 가족영화로 브랜드화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안전한 작품인 양 보인다. 무구한 아이들을 동원한 <아무도 모른다>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과 같은 영화가 왠지 불편했던 관객이라면 정서적 몰입을 활용한 공감의 인본주의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다큐멘터리와 텔레비전 작업에서 시작해 극영화로 영역을 넓혀온 고레에다 세계의 전력을 감안해도, 쇼타(조 가이리)의 입원을 계기로 영화의 질감이 홈드라마에서 다큐멘터리적 취조 장면으로 뒤바뀌는 장면을 전후해서 어떠한 이물감을 느꼈다. 이 정서를 되뇌며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가 진실을 구축하는 방식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누구인가?
<어느 가족>에 등장하는 하층민 가족은 잡다한 좀도둑질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을 예외로 하면 외견상 번듯한 가족과 다름없다. 일용직 노동자인 남편 오사무(릴리 프랭키),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아내 노부요
<어느 가족>, 서민적 홈드라마의 외견을 모방하는 동시에 담론의 드라마적 봉합을 거부하다
-
우리는 무엇을 위해 예술작품 앞에 서는가? 사람들은 왜 예술작품을 찾는가? 하이데거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고흐의 구두 그림을 빌려온다. 관객은 구두 그림 앞에서 구두뿐만 아니라 그 구두가 디뎠을 대지를 볼 수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타인의 구두를 무심하게 보고 지나치지만 구두가 예술작품으로서 응시를 요구할 때, 구두에 담긴 대지와 시간이 드러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앙드레 바쟁 또한 이 점을 지적한다. 바쟁에게 영화는 예술이 되기 위해서 루돌프 아른하임이 주창했던 것처럼 사물을 왜곡하는 카메라의 힘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사물을 그대로 담아내는 카메라의 힘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영화에 예술의 지위를 부여하기 꺼려한 바로 그 이유(카메라를 통한 대상의 기계적 복제)가 바쟁에게는 바로 영화를 예술로 만드는 요소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하고 있기
<한나>가 드러내는 예술의 역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