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두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이하 <크리피>)과 <태풍이 지나가면>이 함께 개봉했던 지난 2016년처럼, 2018년에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과 구로사와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가 함께 찾아왔다. 상반되는 영화적 지향점을 가졌지만, 두 감독은 모두 자신이 쌓아올린 영화적 세계에 안주하기보다는 그와 일정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려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더구나 그러한 변화가 자신이 발붙이고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은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당시 평론가 정지연은 <씨네21>에 기고한 비평(1070호, ‘재앙의 예언자/기록자 -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에서 “한국 주류영화의 중심축이 ‘지금 여기’ 한국사회를 외면하고 있는 것과 정반대로 일본의 작가주의 감독
<어느 가족>과 <산책하는 침략자> 감독들의 작품 세계에서의 위치
-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랑>의 도입부. 빨간 망토의 소녀는 폭탄이 든 가방을 테러리스트에게 전달한 다음 지하의 컴컴한 수로로 돌아온다. 그녀 앞엔 서너명의, 그녀보다 어린 아이들이 음료 팩을 빨아먹으며 서 있다. 얘들도 폭탄 가방을 들고 들락거렸을까. 소녀는 질문할 틈도 없이 하얀 음료 팩과 두 번째 폭탄 가방을 받아든다. 그리고 얼마 후, 특기대의 임중경(강동원)과 맞닥트린다. 그만 있었다면 소녀의 행동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사방에서 검은 옷의 짐승 같은 존재들이 압박하자 그녀는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한다. 중경은 잠을 못 이룬다. 소녀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인랑>에서 소녀들은 수난의 시대를 산다. 특기대는 앞서 잘못된 정보 아래 출동한 현장에서 10여명의 소녀를 쏘아 죽였다. 중경은 소녀들의 피가 자기 몸 위로 흐르는 기분을 느낀다. 소녀보다 몇살 더 많은 여주인공이라고 해서 하나도 나을 건 없다. 구미경(한예리)이 이윤희(한효주)를 마
오해받은 <인랑>을 옹호한다
-
<어느 가족>이 이룬 성취는 무수히 회자되고 있으며 대체로 수긍이 가는 바이지만, 나는 영화의 단 한 장면이 목에 걸려 이 작품에 온전한 찬사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 장면은 그냥 넘기기에는 끝내 미심쩍게 느껴지기에 영화의 여기저기를 경유한 뒤에 다시 한번 바라보고자 한다. 쇼타(조 가이리)가 마트에서 양파를 훔치고 달아나다가 다리 아래로 떨어지던 바로 그 장면 말이다. 우선은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부터 소개하며 글을 시작하여야 할 것 같다.
뛰어내린 것은 왜 하필 쇼타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에서 가족의 세계가 죽음을 품는 것은 흔한 일이나 <어느 가족>의 특별한 점은 죽음이 이 가족을 유지시키는 동력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하츠에 할머니(기키 기린)가 남편의 죽음과 변심의 대가로 받는 돈으로 살아가며, 그녀의 죽음은 다시 한번 (그녀가 남긴 돈으로써) 가족의 생존을 연장시킨다. 그 죽음에는 단순히 육신의 죽음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단절도 포함된
<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의 세계에서 어떤 죽음을 고민하다
-
어떤 면에서 <어느 가족>은 가족영화로 브랜드화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안전한 작품인 양 보인다. 무구한 아이들을 동원한 <아무도 모른다>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과 같은 영화가 왠지 불편했던 관객이라면 정서적 몰입을 활용한 공감의 인본주의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다큐멘터리와 텔레비전 작업에서 시작해 극영화로 영역을 넓혀온 고레에다 세계의 전력을 감안해도, 쇼타(조 가이리)의 입원을 계기로 영화의 질감이 홈드라마에서 다큐멘터리적 취조 장면으로 뒤바뀌는 장면을 전후해서 어떠한 이물감을 느꼈다. 이 정서를 되뇌며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가 진실을 구축하는 방식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누구인가?
<어느 가족>에 등장하는 하층민 가족은 잡다한 좀도둑질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을 예외로 하면 외견상 번듯한 가족과 다름없다. 일용직 노동자인 남편 오사무(릴리 프랭키),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아내 노부요
<어느 가족>, 서민적 홈드라마의 외견을 모방하는 동시에 담론의 드라마적 봉합을 거부하다
-
-
우리는 무엇을 위해 예술작품 앞에 서는가? 사람들은 왜 예술작품을 찾는가? 하이데거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고흐의 구두 그림을 빌려온다. 관객은 구두 그림 앞에서 구두뿐만 아니라 그 구두가 디뎠을 대지를 볼 수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타인의 구두를 무심하게 보고 지나치지만 구두가 예술작품으로서 응시를 요구할 때, 구두에 담긴 대지와 시간이 드러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앙드레 바쟁 또한 이 점을 지적한다. 바쟁에게 영화는 예술이 되기 위해서 루돌프 아른하임이 주창했던 것처럼 사물을 왜곡하는 카메라의 힘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사물을 그대로 담아내는 카메라의 힘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영화에 예술의 지위를 부여하기 꺼려한 바로 그 이유(카메라를 통한 대상의 기계적 복제)가 바쟁에게는 바로 영화를 예술로 만드는 요소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하고 있기
<한나>가 드러내는 예술의 역량
-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이하 <폴아웃>)을 표현할 때 제일 많이 보이는 언어는 ‘액션’이다. <폴아웃>이 과연 최고의 액션을 보여준 작품인가.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우선 최고의 액션을 정의하고 비교 및 계측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가능한가. 한편으로 액션을 잘 수행한 것이 좋은 액션인가, 반대로 단절된 몸동작 연기에 효과음, CG, 편집 등의 작업을 잘 입혀놓은 게 좋은 액션인가, 에 대한 대답도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를 것이다. 결국 액션에 대한 평가는 내 영역 밖이란 결론에 ‘쉽게’ 도달했다. 대신, 영화가 액션을 보여주는 방식을 먼저 살펴본 다음,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액션의 중심인 톰 크루즈가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읽어보기로 했다.
액션 하면 떠오르는 첫 작품이 D. W. 그리피스의 <동쪽 저 멀리>(1920)다. 클라이맥스에서 여자가 얼음판 위에 쓰러져 둥둥 떠내려가는 중이다. 릴리언 기시가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 액션 시퀀스의 특별함에 대해
-
2009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송곳니>는 지적이며 독설적인 야심가의 작품이었다. 세상의 지배질서와 권력의 메커니즘, 그리고 그것에 길들여지고 순응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흡사 ‘황금족쇄’에 묶여 있는 무지한 자들의 블랙코미디로 그려낸 것이다. 영화에서 자본가이자 가부장으로 군림하는 한 남자는 아내와 아이들을 담장 높은 저택에 감금하고 훈육하며 살아간다. 저택 내부의 삶은 얼핏 안전하고 풍족해 보이지만, 그 유폐된 삶 이면은 왜곡된 성욕과 폭력, 지배와 복종으로 굴절되어 있다. 남자는 이제 곧 성인의 문턱으로 진입하려는 아이들에게, 담장 밖 세계는 야수와 괴물, 위험과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세뇌한다. 이 허술하고 터무니없는 거짓 논리는 아이들에겐 그 자체로 진리이자 세계가 된다.
<송곳니>에서 묘사되었던 이 왜곡된 세계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이후 선보였던 모든 영화적 세계의 요약이다. 비논리와 궤변, 금기
<킬링 디어>, 감정이 통제된 세계에서는 이미지가 지배한다
-
화면이 열리자마자 펄떡거리는 심장이 시야를 육박해 들어온다. 혀를 날름대는 외계생명체와 같은 위협적 이미지로부터 카메라가 느린 템포로 트랙 백하면 수술 부위를 봉합하는 외과의사의 분주한 손길이 겹친다. 슈베르트의 <마태 수난곡>을 배음으로 깐 이 불문곡직(不問曲直)의 오프닝은 앞으로 맞닥뜨릴 상황과 정서를 다음과 같이 예고하고 있다. “이것은 유혈이 낭자한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이고, 심장의 박동과 멈춤(생명과 죽음)이라는 테마를 순환할 것이며, 서사는 작은 범위에서 큰 곳으로 옮아갈 것이다.” 예고는 현실이 된다. 에우리피데스의 고대 비극을 재작업한 것으로 알려진 <킬링 디어>는 주류영화의 미학과 정치학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신화에 대한 개작과 급진적인 재현 전략을 활용한다. 다다이스트의 호러 쇼라고 할 만한 이 우화를 통해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희생자를 격앙시켜 죄를 촉발한 측과 그에 희생된 측을 구별할 수 없도록 만드는 살육의 순환을 그린다.
<
<킬링 디어>, 란티모스의 영화적 어휘와 비유법
-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새 영화 <킬링 디어>는 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는 그리스 비극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한다. 감독은 “거대한 딜레마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의 본능을 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나는 신의 시대가 아닌 현재에서, 자신의 자식을 죽이는 선택을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갖고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본 후 우선 떠오른 생각은 <킬링 디어>가 복수 서사의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피에타>(2012)에 대해 쓴 글에 따르면(<씨네21> 874호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그녀는 복수를 했는데 그는 구원을 얻었네”), 복수 서사의 성공은 계량화할 수 없는 ‘고통의 등가교환’의 문제를 창조적으로 돌파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2010)가 범인을 끊임없이 풀어
<킬링 디어>, 병을 알 수 없게 만드는 병원의 미로
-
<앤트맨과 와스프>는 여성 슈퍼히어로가 주인공인 첫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MCU)영화이다. 블랙 위도우나 스칼렛 위치와 같은 캐릭터들이 어벤저스 멤버로 등장하긴 했지만 그들은 단 한번도 자기 영화를 가진 적이 없었다. <에이전트 카터>와 <제시카 존스>는 텔레비전 시리즈다. 마블에서는 첫 흑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블랙팬서>에서 그랬듯, 2019년에 나오는 <캡틴 마블> 영화를 첫 여자주인공을 내세운 기념비적인 MCU 영화로 홍보하려고 하는데, <앤트맨과 와스프>가 그 김을 살짝 빼버렸다.
그렇다면 그 기념비적인 영화의 타이틀은 <앤트맨과 와스프>로 넘어가는가? 아니, 그 어느 것도 기념비적이지 않다. 생각해보라. 21세기도 거의 5분의 1이 지나가는 지금 초능력을 가진 여자주인공이 나오는 영화가 어떤 의미에서건 기념비적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이런
공식을 벗어나 현실적 디테일을 획득한 <앤트맨과 와스프>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크레더블2>는 시대의 욕망을 잘 포장하고 상품화할 줄 아는 영리한 영화다. 생각해보면 픽사의 거의 모든 영화들이 그랬다. <토이 스토리>(1995)는 키덜트들의 향수를 공략했고 <니모를 찾아서>(2003)는 반려동물과 환경 문제를 연계시킨다. 2004년 <인크레더블>은 중산층 붕괴, 실직과 생계의 피로 등 당대 미국의 침체된 분위기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얼핏 세상을 뒤집는 역발상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 픽사의 상상력은 항상 속도조절을 해왔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는 온건한 권유 정도랄까. 물론 서 있는 시점이 바뀌면 풍경도 바뀐다. 다만 사실 그건 거울에 상이 거꾸로 비친 것일 뿐 픽사의 세계관과 구도는 언제나 익숙함을 전제로 해왔다. <인크레더블2>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위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해 캐릭터를 세팅하고 남녀의 위치를 전환시키지만 내막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훨씬 보수적이
<인크레더블2>, 픽사의 온건한 속도 조절
-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을 잠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버려야 할 것과 가져가야 할 것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로 숨도 쉬지 않고 안내 멘트가 쏟아졌다. 보험 판촉이었다. 보통 때 같으면 일하는 중이라고 둘러대거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종료 버튼을 누르곤 했다. 그런데 왠지 이번에는 정당하게 거절할 이유가 생긴 것 같아 바쁘게 쏟아지는 안내원의 멘트를 비집고 말했다. “안 되겠네요. 제가 외국으로 아예 나가게 됐어요.” 순간 영영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통신판매원의 말이 딱 멈췄다. 잠시 뒤 그녀는 말했다. “고객님 정말 잘되셨네요. 좋으시겠어요.” 이상한 반응이었다. “제가 어디로 왜 가는지도 모르시잖아요.” 하지만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어디든 여기보다 좋지 않겠어요.” 이상했지만 낯설지 않은 반응이었다. 외국에 나가는 것이 결정된 이후 나를 둘러싼 많은 여자들이 그렇게 말했다.
<오! 루시>의 세츠코(데라지마 시노부)에게서 나
<오 루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꾸는 이에게
-
<변산>은 얼핏 지금의 청년세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금의 기성세대가 청년세대를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는지를 드러내는 작품에 가깝다. 영화 초반부 학수(박정민)가 <쇼미더머니> 오디션에 참가하는 일련의 상황과 그의 서울살이를 보여주는 몇몇 장면을 제외한다면, <변산>은 학수가 고향으로 내려가 자신의 어두운 과거 속에 가장 빛나는 순간이 있음을 깨닫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자신을 가두고 짓누르는 쓰라린 기억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하라고, 맞서 싸우라고, 그렇게 이겨내라고, 그럴 때 가장 빛나던 순간이 현재에 되살아날 수 있다고 말하는 영화가 바로 <변산>이다. 그것이 학수의 아버지(장항선)가 아들에게 뺨을 내어준 이유다. 하지만 <변산>에는 또 다른 아버지가 숨어 있는 것 아닐까? 무너뜨려야 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결국 그 품에 안기고 마는 아버지. 그것이 <변산>을 청년세대의 영
<변산>이 기성세대의 영화에 머문 이유
-
<브이아이피>(2017)가 여혐 내용 때문에 집중적인 공격을 받을 거라고는, 박훈정 감독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몰랐던 것 같다. 박훈정은 <악마를 보았다>(2010)와 <신세계>(2012)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서커스를 다시 한번 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같은 서커스를 보는 관객의 태도가 바뀐 것이다. 서커스가 더 좋아졌다면 커버가 되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전 서커스가 재점검받아야 할 판이었다. 이 상황을 어쩔 것인가. 어떤 사람에겐 기회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손쉽게 주어진다. 박훈정은 <브이아이피>가 개봉되기 전에 이미 ‘한국판 <공각기동대>’라고 홍보했던 차기작 <마녀>를 준비 중이었다. 여혐으로 악평을 받았던 영화 다음에 차기작으로 여성 원톱의 ‘걸크러시’ 액션물을 내밀면 얼마나 그럴싸한 한방이 될 것인가. 하지만 여기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박훈정의 핸디캡이었는데
<마녀>, 박훈정 감독의 여성 캐릭터는 극복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