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티븐 스필버그의 신작 <더 포스트>는 망각되거나 무시되고 있는 영화적 호흡의 생생한 결과물이다. 화면을 잘게 나눠 심장 박동을 의도적으로 자극하거나 호흡이 달리는데도 과시적으로 화면을 길게 끌고 가는 허세가 없이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가운데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야 할 때 당연하다는 듯이 다음 화면으로 넘어간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경지의 이 화면 붙이기는 하나의 화면 속에서 배우들이 최적의 움직임과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호흡을 보장한다. <더 포스트>의 모든 장면들은 영화 현장에서 오래 버티며 통달한 사람들만이 해낼 수 있는 장인적 능숙함을 증명하는 예시들이다. 노련한 감독의 지휘 아래 화면 세팅에 필요한 최상의 기술이 동원되는 가운데 메릴 스트립과 톰 행크스를 비롯한 배우들의 능란한 연기가 펼쳐진다. 이 영화는 현장에서 오래 버티며 살아남은 사람들만이 해낼 수 있는 것들의 최상의 결합이다.
공간에서의 인물의 주도
스티븐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의 우아함에 대하여
-
맷 스파이서의 <언프리티 소셜 스타>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이 아직 영화를 보지도 않은 나에게 온 것은 아마 내가 <씨네21>에서 연락이 닿는 사람들 중 가장 중증의 SNS 중독자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영화를 보지도 않았던 내가 이를 덜컥 받아들였던 것도 내부인의 관점으로 몇 마디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SNS의 영토는 광대하고 지역마다 성격이 다르며 같은 지역의 거주민이라고 해도 행동방식이 다르다. 나는 페이스북(게임 계정 등록용)과 인스타그램(연예인 스토킹용)에 가입되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트위터 사용자이다. 인스타그램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언프리티 소셜 스타>의 이야기는 나에게 좀 남의 나라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우긴다면 그건 거짓말이 될 것이다.
SNS의 허약한 관계를 현실로 끌고왔을 때
현실 세계와 비교했을 때 SNS의 가장 큰 특징은 관계 맺기가 굉장
<언프리티 소셜 스타>는 SNS 세계를 너무 가볍게 본다
-
영화 <더 포스트>는 ‘물먹고 반까이(挽回)’하는 게 전부다. <뉴욕타임스>로부터 ‘물먹은’ <워싱턴포스트>가 ‘반까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부언하면, <뉴욕타임스>의 닐 시언의 특종에 ‘물먹은’ <워싱턴포스트> 전체가 전국담당 에디터 벤 백디키언의 인맥을 동원한 취재에 겨우 ‘반까이’하고 숨을 돌리는 영화다. 흠, 한 발짝만 더 들어가보겠습니다. (상대적으로)재정이 탄탄한 1급 정치신문 <뉴욕타임스>를 신뢰한 제보자가 7천페이지짜리 펜타곤페이퍼를 넘겼고, 석달 동안 보고서를 분석한 <뉴욕타임스>가 (예상대로) 흔들림 없이 특종 보도했으며, ‘물을 먹은’ <워싱턴포스트>가 법원의 보도중지명령 상황에서 국장과 언론 사주의 구속을 각오하고 투자자들의 투자 철회 등으로 닥칠 폐간 위기에도 굽힘 없이 ‘반까이’해 “기사의 수준이 수익을 결정한다”는 저널리즘을 위한 철학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영화
<더 포스트>의 1971년 <워싱턴포스트>의 보도, 2018년 한국의 기자는…
-
다소 지엽적인 질문 하나를 던져보고 싶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하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엘라이자(샐리 호킨스)는 왜 영화관에 가지 않을까. 크리처(더그 존스)를 찾기 위해서라는 예외적인 목적을 제외하고 엘라이자는 극장에 가지 않는다. 엘라이자가 영화를 즐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코너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자일스(리처드 젠킨스)의 집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영화를 보곤 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전작에서 텔레비전이 하나의 미장센처럼 활용된 바 있긴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단순한 미장센을 넘어 우주탐사, 소수자 차별 등과 함께 1960년대를 반영하는 지표 중 하나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엘라이자가 영화관에 가지 않는 상황 역시 시대를 대변하는 것일까. 텔레비전이 처음 등장할 당시, TV에 영화 관객을 빼앗기게 된 현실을 우려하는 시각이 팽배했으나, 델 토로가 굳이 지나간 논란을 끌어들여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 환상을 보존하는 방식에 관하여
-
-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는 다음과 같은 자막으로 시작한다. “1979년 6월, 작가 제임스 볼드윈은 복합적 작업에 착수한다. 살해당한 세 친구들을 통해 미국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메드가 에버스, 마틴 루서 킹, 맬컴 엑스. 30페이지밖에 쓰지 못한 이 글의 제목은 <리멤버 디스 하우스>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복합적 작업’(complex endeavor)이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에는 볼드윈이 남긴 미완의 글에 대한 라울 펙 감독 자신의 해석과 평가가 담겨 있는데, 그것은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라는 영화에도 잘 어울리는 말이다. 라울 펙은 볼드윈의 글에서 어떤 복합성을 감지했다.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는 그 풍부한 뉘앙스를 한편의 영화에 온전하게 담아내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 영화는 제임스 볼드윈의 문학적 에세이(또는 글쓰기를 위한 노트)를 충실하게 번역한(또는 완성한) ‘에세이 필름’이고, 한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는 제임스 볼드윈에 대한 단순한 전기영화가 아니다
-
이완민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 <누에치던 방>은 하나의 전제에서 시작하는 영화다. 주인공 미희(이상희)는 어느 날 지하철 안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고생(김새벽)을 따라 지하철에서 내리고 그녀를 쫓아서 성숙(홍승이)의 아파트까지 가게 된다. 미희는 성숙에게 무작정 고등학교 단짝친구라고 말한다. 그런데 성숙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녀를 받아준다. 이런 전제가 없다면 이 영화는 성립할 수 없다. 이제부터 영화는 그녀들의 만남을 통해 그녀들의 주변 사람들(미희와 헤어진 남자친구를 성숙이 만나고, 성숙과 함께 사는 익주를 미희가 만나게 되는)과 서로 엮이면서 잠실이란 공간을 중심으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나간다. 영화는 따뜻한 톤의 색채(과거)로 학교 운동장을 돌아 교문을 나가는 전세버스(유영의 영결식 차량)의 부감숏으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앞 장면과는 대조적으로 차가운 느낌의 색채(현재)로 2호선 지하철 안의 여고생(김새벽)의 모습으로 연결된다. 이처럼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서로
<누에치던 방>이 이중의 꿈 구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은
-
나는 실사영화 감독으로서의 연상호를 그리 미덥게 바라보지 않는다. <부산행>(2016) 때 한 차례 언급한 바 있는데 영리한 연출자 연상호를 얻은 대신 애니메이터 연상호는 딱 그만큼 희미해진 게 아닌가 싶었다.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될 때 흥미롭던 것들이 실사 영역에서는 전형적이고 편편한 형태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염력>을 보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정확히는 연상호 감독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영상으로 결과를 구현하는지 파악하는 데 3편의 애니메이션과 2편의 실사영화가 필요했던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상호는 작가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작가란 매번 이상적이고 통일된 형태의 결과물을 뽑아내는 존재가 아니다. 그건 잘 훈련된 기술자에 가깝다. 모름지기 작가라면 일종의 매개가 되어야 한다. 제 몸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육화된 반응으로 토해낼 필요가 있다. 때론 그 형태가 보는 이의 기대를 배반하기도 하고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구현하지 못하기도
<염력>이 트라우마를 소환하는 방식, 주변에 일으키는 물결에 관하여
-
2009년 용산 재개발 지역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무리한 진압 끝에 화재로 사망한 용산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감독 김일란·홍지유, 2011)은 불타는 망루 앞에서 끝난다. <두 개의 문>은 인터넷 실시간 방송, CCTV, 경찰 채증 영상과 무전녹음, 사진과 언론 보도, 경찰의 법정 진술 등 재판에 제출된 증거와 변호사, 활동가, VJ 등 진상규명을 도왔던 관계자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두 개의 문>의 카메라는 일종의 내비게이터로 관객을, 다종다양한 영상 정보를 스캐닝하며 당일의 사건과 재판을 재구성하고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를 스스로 찾고 해석하는 탐정이나 판사(혹은 편집하는 감독)의 위치에 둔다. 그러나 사건현장과 법정을 누비던 카메라와 관객은 ‘여기 사람이 있다’라고 부르짖는 불타는 망루 앞에서 더 들어가지 못하고 멈춰 선다. 카메라의 접근 불가능성은 ‘죽음의 스펙터클’이 될 수밖에 없는 이미지 정보의 한계와 농성 철거민의
<공동정범>, 투쟁과 트라우마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덧 80살을 넘긴 노장의 새 작품 <원더 휠>(2017)은 여태껏 접하던 우디 앨런식 영화라는 평가가 많았고 나 역시 이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익숙한 전개를 따라 마지막에 다다랐을 무렵, 나는 돌연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영화를 침범하고 들어왔음을 느꼈다. 당황함에 잠시 넋을 빼앗겼다 다시 후다닥 정신을 차렸으나 얄궂게도 영화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예쁜 관람차 하나를 보여주며 막을 내렸다. 그때 내가 영화관을 나오며 든 생각은 ‘당했다’는 것이었다. 다만 (영화 <올 더 머니>(2017)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했다는 것은 알겠는데 무엇에 당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해 할 수 없다 하여 그저 흘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이 글은 <원더 휠>이 내게 선사한 불가해한 순간을 붙잡기 위한 허튼 노력들의 흔적이다.
케이트 윈슬럿의 얼굴, 그에 집
욕망의 움직임과 그로 인한 균열을 놓치지 않는 우디 앨런의 시선 담긴 <원더 휠>
-
차라리 경찰의 진압 작전이 성공했더라면. 경찰이 며칠 만이라도 농성 상황을 지켜보고 협상을 시도했더라면. 최소한의 현장 정보를 확보한 뒤 작전을 짰더라면. 투입될 특공대원들에게 작전 지점을 그린 예상 도면이 쥐여졌더라면. 퇴로를 사전에 확보해놓았더라면. 당초 계획대로 크레인 2대를 동원해 효율적인 작전을 폈더라면. 경찰 수뇌부에 유증기로 인한 화재를 걱정한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었더라면.
가정은 없다. 2009년 1월 20일 경찰은 용산 철거민들이 망루 농성을 시작한 지 25시간 만에 진압 작전을 실시했다. 2006년 오산 세교지구만 해도 54일간의 농성 이후 진압이 시작됐다. 크레인이 1대만 도착했는데 작전은 강행됐다. 특공대원들에게 현장 상황을 브리핑할 시간은 없었다. 토끼몰이식 진압은 농성자들을 망루 내부 꼭대기층까지 몰아갔다. 그리고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화재. 망루 안에 몰려 있던 농성자 5명과 경찰 1명이 숨졌고 24명이 다쳤다.
상식을 저버린 야만의 날
가정을
규명된 진실만이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공동정범>은 말한다
-
끝내 울린다. <신과 함께-죄와 벌>(이하 <신과 함께>)을 보며 약간 분했다. 머리 한구석으로 영화의 헐거운 만듦새를 평하면서도 결국엔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를 마주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모종의 분리가 일어났다. 지금 이 눈물은 층층이 쌓아올린 서사적 카타르시스에 기인한 게 아니라 말초적인 반응에 가깝다. 그렇게 자조하며 눈물의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신과 함께>가 뿌리는 눈물은 확실히 자극적이다. 앞뒤 맥락 생략하고 딱 그 장면, 아들들의 사정을 다 알고 있었던 어머니의 희생과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둘째 아들 수홍의 오열만으로도 충분하다. 굳이 2시간을 다 볼 필요도 없다. 수홍 역의 김동욱, 어머니 역의 예수정 배우의 얼굴만으로도 만들어지는 눈물이다.
신파와 정신 승리 사이
<신과 함께>가 굳이 비평의 언어를 필요로 하진 않을 것이다. 감독의 의도는 명확하고 각 시퀀스는 기계적으로
<강철비> <신과 함께-죄와 벌> <1987>이 기댄 한국적 신파라는 환상
-
리처드 링클레이터와 제임스 베닝에 관한 다큐멘터리 <더블 플레이>에 인상적인 대화가 등장한다. 링클레이터가 자신의 고향에 세운 시네마테크로 제임스 베닝을 초청해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 무엇이 좋은 영화인가를 질문한다. 이에 제임스 베닝은 “나는 좋은 영화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사실 좋은 영화는 이미 너무 많다. 난 형식과 문법이 새로운 영화를 더 지지한다. 그런 영화들이야말로 영화 문화의 저변을 넓혀왔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제임스 베닝의 말에 동의한다. 사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영화적 이해이자 정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단언을 조금만 뒤집어보면 곧 쉽지 않은 곤경이 찾아온다. 어떤 영화에서 새로운 형식과 문법을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영화인가를 판단하는 일은 그다지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일 수 있는 또 다른 곤경의 순간. 지지하던 감독의 반갑지 않은 변화 혹은 선택을 마주할 때의 당혹스러움이다. 그동안 그
<다운사이징>에서 작아진 것은 주인공의 사이즈만은 아니다
-
※영화의 결말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한 남자는 부르주아 주부들로부터 사랑받으며 돈을 버는 제비족이 되고 싶었지만, 그가 함께 지내게 되는 사람은 사기를 치며 사는 홈리스다. 친구가 병에 걸리자 두 남자는 차가운 뉴욕을 떠나 따뜻한 플로리다로 떠나기로 한다.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 친구는 그의 품에서 죽고 남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았다. 뉴욕의 뒷골목을 전전하는 두 남자의 씁쓸한 이야기를 다뤄 X등급 영화로는 처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미드나잇 카우보이>(1969)는 몇해 지나지 않아 낭만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마틴 스코시즈의 <비열한 거리>(1973)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후 뉴욕의 제왕이 된 스코시즈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수많은 감독들이 명멸했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굿타임>으로 초대된 조시와 베니 사프디 형제가 요즘 스코시즈의 후계자로 뜨겁게 거론되는 중이다. <굿타임>이 스코시즈의 <특근&
<굿타임>, 어김없이 실패하는 ‘현실’과 그래도 모험을 하는 ‘영화적 순간’
-
<원더>는 간결한 제목에서부터 경이로움에 대한 휴머니즘영화임을 부드럽게 폭로하며 시작한다. 헬멧 쓴 장애아동이라는 소재에는 눈물, 감동, 공감의 투사라는 감정적 클리셰가 예견되어 있다. 영화는 뉴욕 중산층 백인으로 구성된 무공해적인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얼핏 보아도 판별이 가능한 도덕적 인물들은 곳곳에 포진해 있다. 관객이 감상주의 혹은 할리우드 당의를 입은 가족영화를 기대했다면 이는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월플라워> 스티븐 크보스키 감독의 선택
선천적 얼굴 기형을 지니고 태어난 소년 어기는 지적이고 호의적인 가족들과 함께 살아간다. 10살이 되기까지 총 27번의 수술을 받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다. 자신에게 온통 삶을 헌신한 엄마에게 홈스쿨링으로 교육을 받아왔지만 그에게도 드디어 사회로 나아가야 할 시기가 다가온다. 영화는 어기가 집 근처 초등학교 5학년으로 입학하게 되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안락하고 조
<원더>는 가족영화의 틀 안에서 감상적 클리셰를 넘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