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시성>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된 글입니다.
언젠가부터 적지 않은 이들이 증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2009)부터였고 누군가는 <어벤져스> 시리즈의 중간 어디쯤부터였다. DC 코믹스의 최근작에 이르자 어지러움을 동반한 두통을 호소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막대한 비용과 노동이 투입된 컴퓨터그래픽(CG) 얘기다. 이제 거대하고 화려한 엉망진창(<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시가전 장면 같은 것)을 보고나면 어김없이 피로감이 찾아온다. 육안으로 봤을 때 실사와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왜. 마블 스튜디오의 경우 이같은 관객 피로감을 인지하고 민감하게 액션 디자인에 나서고 있기도 하다. 원인은 차차 밝혀야겠으나 CG를 포함한 시각특수효과(VFX)에 노출된 빈도만큼 피로가 누적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이같은 일군의 증상을 ‘만성 VFX 피로 증후군’이라 명명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 병원(病源)의 핵심에 나는 ‘더하기’와 ‘속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한국영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충무로 제작진은 로케이션 헌팅에 전국을 누비고도 불필요한 전봇대 등등을 컴퓨터로 빼내느라 밤을 지새웠다. 컴퓨터로 배경을 합성하면 여지없이 표가 났던 때였다. 지금은 블루스크린을 쓰지 않는 한국 상업영화가 없다시피하고 봉합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블루스크린 작업은 곧 더하는 일이다. 레이어 대여섯장 정도를 겹치는 건 기본이다. 파랑 또는 녹색 막 위에 일렁이는 바다를 얹고, 일본 군함 수백척을 추가한 다음, 병사들을 더하고 또 더하면 최민식 배우는 명량해협의 전장으로 옮겨진다. 대형 세트장을 블루스크린으로 뒤덮은 뒤 포니 택시와 브리사, 제미니 몇대를 가져다놓고 십수명의 인원을 불러모아 촬영하면, 이제 송강호 배우를 80년 5월 금남로에 데려다놓는 것은 레이어의 몫이다. 배우도 ‘은막의 스타’가 아니라 ‘청막(靑幕)의 스타’로 불러야 할까. 현대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피사체를 촬영하는 행위인가 아니면 레이어를 얹는 작업인가. 예전의 세트와 현재의 디지털 배경을 바라보는 일을 같은 행위라고 말해도 될까.
못하던 걸 할 수 있게 되면 대개 더하기를 하고 싶어진다. 세트였다면 엄두도 못 낼 표현들이 디지털로 가능해지자 많은 감독들은 건물 한채라도 더 부수고 싶어졌다. 그런데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보자. 숱한 건물이 파괴되는 동안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화면에서 제거된다. 진짜(에 가깝게 재현)였다면 피와 살이 튀는 하드고어영화가 돼버릴 테니까. 스펙터클의 규모가 더해질수록, 그러니까 레이어가 여러 장일수록, 더하면 안 되는 레이어도 많아지는 모순이 생긴다. 관객은 은연중에 가짜를 지각하게 된다. 디지털 복제 시대 영화의 딜레마다.
<신과 함께> 시리즈를 보자. 거대하고 현란하며 엉망진창인 지옥이 여럿 펼쳐지지만 그 속에서 벌받는 망자들의 표정이나 근접숏은 제거돼 있다. 육안으로 나지 않는 ‘CG 티’가 마음속에서 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한국영화가 못하던 걸 할 수 있게 되고 많은 감독들이 더하기를 하고 싶어진 이 시점이, 적지 않은 관객이 ‘마이클 베이 피로감’을 호소한 이후라는 점이다. <신과 함께-인과 연>(2017)에서 느닷없이 공룡이 출현했을 때 내가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건 이물감 탓이 아니라 이 시차 때문이었다. 한국영화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할리우드의 뒤를 좇아 그들이 한 것을 1년 뒤 할 수 있게 되면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쾌재를 부를 것인가.
영화는 게임이 아니다
못하던 걸 할 수 있게 되자 어떤 영화는 더 빨라지고 싶어졌다. <물괴>(2017)를 보자. 현재 관객의 선택으로부터 급하게 멀어지고 있다. 나는 그 원인으로 이 영화의 속도를 지목하고 싶다. 뭔가 휙 지나갔는데 정확히 뭘 봤는지 모르겠는 어리둥절함은 화면의 광량(光量) 때문만이 아니다. 안시환 평론가는 지난 대담(<씨네21> 1172호) 때 <물괴>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에일리언이 리플리(시고니 위버)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는 장면 같은 긴장감을 요즘 영화의 시각효과에선 보기 어렵다”고 아쉬워했다. 마침 <물괴>에는 이를 차용한 장면이 있다. 괴수의 타액을 명이(이혜리)의 얼굴에 흩뿌리면서까지 시각적 충격을 꾀했다. <에이리언>(1979)이 만들어낸 팽팽함은 거기에 없다. 숏을 빠르게 이어붙이고 피사체를 따로 비춘 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느라 바쁜 탓이다. 관객의 심장을 단단히 붙든 다음 잡아당길 시간을 주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에이리언3>(1992)의 해당 숏은 자그마치 10초간 계속된다. 삭발한 리플리(시고니 위버)와 에일리언의 얼굴을 3인칭 시점의 측면 클로즈업으로 정확히 보여준다. 1~3초에 불과한 앞의 숏들과 해당 숏의 충돌에서 오는 리듬에 의해 우리의 가슴은 쿵쾅대는 것이다. 물괴의 발짓 한번에 고속으로 날아가 떨어지는 얼굴 없는 엑스트라들과, 카메라의 명료한 눈길을 받은 뒤 에일리언에 희생당하는 인격체의 차이는 아득하기만 하다. <물괴>가 물괴 캐릭터의 고유성을 놓친 연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출생의 비밀이 있는 물괴는 자신의 사연을 이미지로 호소할 시간도 없고 그럴 만한 표정도 없다. 허둥지둥 공격적으로 사람들을 날려버리다 주인공의 멋진 활약에 따라 정해진 최후를 맞을 뿐이다. 엑스트라든 괴수든 캐릭터가 정확히 부여되지 않으면 관객은 피곤하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안시성>(2018)이 이룬 성과는 뚜렷하다. 제작진에 따르면 <안시성>의 몹신을 그려낸 프로그램은 일종의 인공지능이어서, 수많은 디지털 병사들이 따로따로 학습하며 움직였다. 각자 주변 지형지물을 인지하면서 장애물을 피하거나 상대와 싸우는 등 움직임의 개별성을 스스로 얻는 식이라고 한다. 여기에다 디지털만으로는 승부를 볼 수 없다는 걸 아는 제작진은 ‘스카이워커’나 ‘로봇암’ 등 빠르고 정확한 실사 촬영장비를 도입해 배우들의 움직임을 잡아냈다. 그 결과 근경 실사와 원경 CG가 균형을 이뤘고 단역들의 표정이 상대적으로 살아났다. 양만춘(조인성)의 화살이 날아가는 폭발물에 가 꽂히기까지 거리와 시간을 충분히 두고 보여주는 기다림은, ‘우리도 CG로 이만큼 할 수 있다’며 부정확해진 화면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안시성>의 문제는 다른 지점에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가상의 게임 유저가 떠올랐다. 정밀한 전투영상 표현력에 만족한 그는 공성전에 돌입한다. 일반 사다리 → 운제(견고한 사다리차) → 공성탑 순으로 한 단계씩 강력해지는 상대편 아이템에 대응한다. 진짜(에 가까운 재현)였다면 적장이 운제나 공성탑을 놔두고 일반 사다리부터 사용할 이유가 없지만 이건 게임이다. 다음 레벨로 넘어가 끝판 왕을 물리치는데 풍성한 서사는 불필요하다. 여성 캐릭터는 적당히 사용하고 버린다. 신녀(정은채)의 피는 1인자 양만춘이 아닌 2인자인 사물(남주혁)의 손에 묻는다. 전형적인 수컷 조폭의 충성방식이다. 백하(김설현)는 결정적인 순간 감정에 휘둘려 판단력이 흐려지는 인물로 나온다. 공성전 영상을 실감나게 재현하려는 욕망과 게임 유저의 그것이 무관한 것이 아니라면, 이 글의 주제와 <안시성>의 빈약한 서사-여성 캐릭터를 사용하는 방식 또한 동떨어진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또 다른 평자의 ‘정확한’ 지적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