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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첫 문단에서부터 <침묵>의 스포일러로 가득합니다.
<침묵>(2017)에서 가장 민감한 장면에서부터 이 글을 시작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어쩌면 <침묵>은 진실에 관한 영화라기보다는 인물의 진심을 관객에게 설득하는 영화다. 그것이 죽은 유나(이하늬)가 ‘괜찮아’라고 말하는 임태산(최민식)의 판타지가 정지우 감독에게 필요했던 이유다. 장영엽 기자가 인터뷰에서 지적했듯이(<씨네21> 1128호 정지우 감독 인터뷰), 이 장면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다시 한번 유린한다고 느껴질 수 있는 ‘윤리적 불편함’이 내재해 있는 게 사실이다. 만약 이 장면에 불편함을 느꼈다면, 정지우의, 또는 임태산의 진심을 전달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아슬아슬한 장면에 설득당한 관객임을 고백해야겠다. 이 글은 내가 설득당한 임태산과 정지우의 진심에 대한 것이다.
침묵을 설득하는 최민식의 마술
결론부터 말하자면, <
<침묵>에서 사실의 조작이 진심을 증명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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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지만 <잇 컴스 앳 나잇>(2017)이라는 제목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원제인 ‘It Comes at Night’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기본적인 단어들로만 이루어진 명쾌하고 으스스하고 우아한 제목이다. 무엇보다 이 제목은 아무런 장애 없이 한국어로 말끔하게 번역될 수 있다. 그런데 수입사에서는 이 간단한 작업을 하지 않고 <잇 컴스 앳 나잇>이라는 괴상한 제목을 붙여버린다. 쉬운 단어라고 해서 한글 표기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 ‘comes’는 쉬운 단어지만 ‘컴스’라고 쓰면 어색할 뿐이다. 물론 기억하기도 어렵다. 수많은 잠재 관객이 이 영화의 제목을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도대체 못 볼 수 없는 문제인데 어떻게 이 제목으로 극장 개봉까지 온 것일까. 모를 일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잇 컴스 앳 나잇>이라니 이 영화는 십중팔구 호러이거나 스릴러다. 제목만 본다면 호러
호러의 규격을 배반한 <잇 컴스 앳 나잇>이 공포를 야기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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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알메레이다 감독의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조던 해리슨의 원작 <마조리 프라임>(Marjorie Prime)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치매로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마조리(로이스 스미스)는 남편의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복원된 인공지능 월터(존 햄)와 그녀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의 기억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감독은 연극처럼 한정된 공간인 거실에서 주로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로 영화를 구성했다. 이 영화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세우스의 배’를 떠올리게 한다.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아테네 사람을 구한 영웅이다. 그는 배를 타고 아테네로 돌아갔고 아테네 사람들은 테세우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몇 백년간 그 배를 보존했다. 세월이 흘러 배는 조금씩 훼손되고 사람들은 배를 구성하는 나무판자를 하나씩 새것으로 교체하면서 배를 유지했다. 그렇게 몇 백년이 지난 후 원래의 나무판자가 다 새 나무판자로 교체되었다면 이 배는 테세우스의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의 인공지능은 왜 거짓말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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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다루는 영화는 자칫 주제 면에서 진부해지기 쉽지만, 그렇다고 그 스펙트럼이 좁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 퍼펙트 데이>(2016)는 그런 면에서 꽤나 독특한 면모를 지닌 영화다. 보스니아 전쟁이 끝날 시점을 배경으로, 평화협정이 체결되던 어느 24시간 동안에 한 인도주의 단체에서 일어난 사건을 영화는 좇는다. 실제로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감독은 1995년 당시에 발칸반도에서 일어났던 전쟁의 사정을 베타캠으로 직접 촬영한 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원작은 ‘국경없는 의사회’ 출신의 작가 파울라 파리아스의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감독은 전쟁 중에 관찰했던 기억을 다수 떠올리며 이를 영화화했다. 처음에 나는 이 작품이 20세기 후반의 가장 커다란 비극 중 하나를 지나치게 가볍게 바라보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부분들을 회피하고 넘어가는 데다, 결말 부분의 실마리가 지나치게 단순했기 때문이다. 비견컨대 로버트 알트먼의 <야전병원 매쉬>(1
<어 퍼펙트 데이>가 구태에서 벗어나 생명을 그리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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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그 시작과 함께 병자호란의 역사적 맥락에 관한 묘사를 최소화한 채 ‘오로지 살고자 하는’ 왕과 신하의 얼굴을 관객에게 들이민다. 한마디로, 거두절미의 서사.
속수무책의 무의미함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남한산성이라는 낯선 세상에 툭 하니 던져진 왕과 신하를 마주해야 한다. 최명길(이병헌)과 김상헌(김윤석), 그리고 이시백(박희순)을 제외한 왕과 신하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심지어 자신들이 어떤 세상에 던져졌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발 딛고 서 있는 세상과 그 세상에 대한 인식간의 괴리. 그러니 그들의 말이 허공을 맴돌 수밖에 없다. 겉도는 말이 넘쳐날 때 세상은 무의미해진다. 한마디로 남한산성은 ‘세상이 무의미해진 공간’이다.
<남한산성>은 이 무의미한 세상의 결과를 민초들의 고통과 이유 없는 죽음으로 표현한다. 병자호란에서 가장 큰 전투였던 ‘북문전투’는 이 무의미함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황동혁 감독이 북문전투를
<남한산성>이 원작에서 취한 것, 혹은 배제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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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화 <대장 부리바>(1962)를 보다가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의 전형성을 재인식했다. 크리스틴 카우프만은 하나의 대상으로 토니 커티스의 시선에 먼저 포착되고, 크리스틴 카우프만은 뒤늦게 그의 시선을 알아챈다. 남성이 발견하고 여성이 발견되는 관계의 익숙함은 그 순서를 뒤바꾸어 보기만 해도 분명히 드러난다. 존 버거가 <이미지>에서 남성은 보고, 여성은 보이는 자신을 본다고 통찰력 있게 지적한 대로 재현물에서 여성은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 보이는 존재로 등장하고는 했다. 자신이 시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도 이를 모르는 척 연기해야 했던 배우 크리스틴 카우프만의 심리는 어떤 것이었을까. 늘 카메라의 시선을 인식해야 하는 배우의 상황과 다를 바 없기에 도리어 쉬웠을까. 로라 멀비의 논의를 참고해 서술하면 연기를 하는 순간 카우프만은 카메라의 시선과 서사상 다른 배우의 시선, 그리고 관객의 시선이라는 상상적 시선까지 어림잡아도 삼중의 시선 아래 놓
배우의 얼굴에 비친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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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처음 악인의 이미지로 각인되는 순간은 진궁과의 일화에서다. 조조는 동탁 암살에 실패한 뒤 진궁과 함께 지인인 여백사의 집으로 도망치는데, 조조는 여백사의 가족들이 자신을 살해하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그들을 몰살한다. 조조는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닫지만, 그 후 집으로 돌아오는 여백사까지 살해한다. 진궁이 놀라며 불의를 꾸짖자 조조는 “내가 천하 사람들을 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버리게 하진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조조가 목격자가 될 수 있는 여백사까지 모두 살해했다면, 이 일화를 진술할 수 있는 증인은 진궁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진궁은 죽을 때까지 조조와 대립하는 인물이기에, 진궁의 진술은 신빙성이 낮다. 독자들도 이 일화의 신빙성을 의심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머릿속에 각인된 살인자의 이미지는 강력해서 그 후 조조의 행위에 대한 평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미지가 가진 기만적인 힘이다.
<남한산성&g
허무주의와 신화적 장치로 점철된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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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마요.” 이야기의 끝에서 소년은 매우 간단하지만 감히 꺼낼 수 없었던 사실, 오랫동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진심을 엄마에게 전한다. 솔직히 나는 그때 소년이 엄마에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편안하게 가세요”라고 할 줄 알았다. 아니면 “사랑해요”라고 했다고 해도 별 위화감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떠나지 말라니. 방금 전 소년은 몬스터에게 숨겨왔던 진심을 고백하며 스스로 네 번째 이야기가 되지 않았던가. 소년은 마지막 순간에 가서 다시 마음을 고쳐먹은 걸까.
이야기는 언제나 경계에서 시작된다
<몬스터 콜>은 몬스터가 소년에게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 후 소년에게서 네 번째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구조를 취한다. 소년의 악몽, 땅이 꺼지고 세계가 무너지는 풍경으로 문을 여는 영화는 소년 스스로 악몽의 뒷이야기를 마무리하게끔 안내한 뒤 문을 닫는다. 소년은 아픈 엄마와의 생활에 지쳐 “이제 그만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자백한다. 소년의
이야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몬스터 콜>의 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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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위안부 피해자 강일출 할머니(89)는 자상하면서 당당했다. 영화 <귀향>(2015)의 모델인 강 할머니를 뵌 건 몇해 전 일본 대학생들의 나눔의 집 방문을 취재하면서였다(경기 광주의 나눔의 집에는 현재 열분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머물고 있다). 일본인 학생들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를 직접 듣고 나누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할머니들의 말씀에 귀기울였다. 강 할머니는 일본 젊은이들과 친절하게 마주하고 단호하게 할 말을 했다. 16살에 일본군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그는 장티푸스에 걸려 부대 밖에서 불에 태워지려던 와중에 조선 독립군의 도움으로 구출됐다. 기억을 꺼낼 때마다 상상조차 허락지 않을 고통이 떠오를 터였다. 일본에서 온 미래 세대와 대화하는 동안 할머니의 얼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 표정이 무너지면서 얼굴에 경련이 일고 말을 잇지 못하게 된 건, 먼저 세상을 등진 동료 할머니들에 대해 말할 때였다. 서로 의지하던 할머니들이 사죄 한
<아이 캔 스피크> 혐오의 시대에 도착한 연대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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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여행자>(1975)는 사막으로 간 한 남자의 이야기다. 취재를 위해 사막으로 간 로크(잭 니콜슨)는 심장마비로 죽은 타인의 신분을 도용해 타인으로 살아가기를 꿈꾼다. 신분 도용이라는 소재는 <리플리>(1999)와 같지만, 리플리(맷 데이먼)와 로크의 목적은 반대된다. 리플리의 신분 도용이 타인의 자본 또는 계급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라면, 로크의 신분 도용은 자신을 버리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리플리는 상류사회에 모습을 드러내려 노력하지만, 로크는 자신을 찾는 이들을 피해 끝없이 도망쳐 다닌다. 그리고 <잃어버린 도시 Z>는 말하자면 리플리에서 시작해 로크로 끝을 맺는 이야기다.
퍼시 포셋(찰리 허냄)이 처음 볼리비아 원정을 떠나게 된 이유는 대부분의 여정이 그러하듯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당시에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훈장을 얻어 불명예스러운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겠노라고 다짐하며 집을 떠난다. 그의
<잃어버린 도시 Z>와 실존이 죽음을 욕망한다는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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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드 리버>는 현재진행형의 내러티브 구조를 취하고 있다. 영화 속 장면들은 모두 현재 발생하고 있는 상황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단 한신만은 예외다. FBI 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은 윈드 리버 산맥의 설원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나탈리의 사건을 수사하다 그녀가 사귀었던 남자친구 맷(그 또한 설원에서 시체로 발견됐다)이 일했던 공사장의 경비원들이 묵는 숙소를 찾는다. 이곳에서 제인이 지휘하는 경찰들과 공사장 경비원들 사이에 주거침입 논란으로 서로 총을 겨누는 한 차례의 기싸움이 벌어진다. 이 상황을 제압하고 제인은 맷이 묵었던 컨테이너 숙소의 문을 두드린다. 다음 숏은 어두운 실내에서 세면대 앞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희미하게 보여준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남자는 문쪽으로 걸어가서 문을 연다. 당연히 문 앞에 제인이 서 있을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는 어긋난다.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는 나탈리다. 이어지는 신은 3일 전 그녀가 죽기 전에 겪은 상황들을 마치 현재
<윈드 리버> 고립을 벗어나려는 시도, 그리고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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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만 무려 4편의 스티븐 킹 원작 소설이 미국에서 영상화됐다. 6월에 방영한 드라마 <더 미스트>를 시작으로, 8월에는 영화 <다크타워: 희망의 탑>이 개봉했고 또 다른 드라마 <미스터 메르세데스> 역시 비슷한 시기에 방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 영화 <그것>의 개봉 소식이 들려왔다. 원작에 대한 팬덤이 강한 데다, 이미 두 차례나 영상화된 작품이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여러 선입견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나는, 원작자가 안드레스 무시에티 감독의 이번 작품에 만족감을 표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영화를 접했다. 스티븐 킹이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1980) 각색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그 작품을 싫어한 나머지 심지어 동명의 TV시리즈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아니, 어쩌면 잭 니콜슨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배트맨>(1989)에서 보여주었던 미친 광대의 이미지가 ‘그것’의 외양과 겹쳐졌다.
비극이나 파괴가 아닌 성장의 공포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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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을 오래 들여다보면 혼돈이 어느덧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2016)은 니체가 말했던 이 혼돈의 응시에 놓인 주체가 실존의 위기에 맞서는 과정을 따른다. 이 작품은 원작 소설과 다른 층위의 해석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김영하의 원작 <살인자의 기억법>은 1인칭 주인공, 그것도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인 알츠하이머 환자의 글쓰기에 의존하여 진행된다. 독자는 문자를 통해 이미지와 심상을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다. 그런데 영화는 주인공 캐릭터를 눈앞에 보여주어야 하는 한편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진술을 토대로 서사적 의혹을 만들어가야하는 고충을 떠안는다. 원신연 감독은 영화적 재현을 고려하여 인물과 서사의 설정을 재구성하였고 소설과 다른 의미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각색 과정에 꽤나 공을 들였다.
공동체의 윤리에서 주체의 위기로
근래 식민지 시대부터 1980년대까지 근현대사를 소재로 한, 현실주의에 긴박된 시대물들이 흥행하고 있다. 전
폭력의 역사를 경유하는 <살인자의 기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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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정 감독의 <브이아이피>(2017)는 흥행에 실패했다. 그리고 최근 여성 혐오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영화였다. 나는 개봉된 지 좀 지나서 관객이 별로 없어 한산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드디어 풍문으로만 들었던 장면이 초반에 나왔다. 사이코 살인마이자 북한 고위 간부 자제인 김광일(이종석)과 그 일당이 한 소녀를 납치해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이다. 긴장했지만 예상만큼 길게 반복적으로 강조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관객이 이런 장면을 보고난 후 앞으로 비슷한 묘사에 대해 더 덤덤해진다거나 쇼크에 대한 면역력이 늘어난다고 추정하기도 힘들다. 이 장면은 사이코패스인 김광일의 악행을 적시하기 위해 보여줄 만큼만 보여줬으며 이 장면 이후로 김광일과 그 일당이 저지르는 강간 살인 묘사도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후 장면들에서 잔인한 묘사는 감독이 의식적으로 자제한다는 느낌을 준다.
전략적으로 이런 방식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윌리엄 프리드킨의 <광란자>
결정적인 국면에서는 연출이 클리셰에 의존했던 <브이아이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