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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글입니다.
영화의 역사에서 가족과 여성의 주제가 모던 시네마로 진입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례로 결혼이란 소재를 어떻게 영화화했는지 보자. 여성과 결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고전기 영화는 프랭크 카프라의 <우리들의 낙원>(1938)이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이 영화를 보면 남녀가 결혼하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을 비롯해 사회와 계층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순진한 무정부주의자 및 자유주의자가 우글거리는 집안과 냉혹한 자본주의자 집안 사이의 전투에서 살아남아야 여성은 자기 사랑을 결혼으로 확인받을 수 있다. 10여년 후 오즈 야스지로는 <만춘>(1949)을 연출한다. 여기서 결혼의 이슈는 홀아비와 외딸의 관계로 축소된다. <만춘>은 모던함을 지나 이상한 영화다. 결혼 이야기인데 결혼 상대가 제대로 보이지 않고 결혼식도 묘사되지 않는다. 서로의 처지를 아는 까닭에 결혼 앞에서 마음 졸이는 부녀의 모
[이용철의 영화비평] <엘르>와 <토니 에드만>이 말하려는 것의 ‘일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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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영화감독이 소수자를 제재로 삼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소재 착취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유혹을 번번이 뿌리치기 어려운 건 무감한 일상을 벗어나 있는 이들이 운명처럼 지니고 있는 긴장과 갈등이 영화적 상상력을 추동하기 때문일까. 그 유혹에 더 취약한 쪽은 데뷔하는 감독들인 듯 하다. 빠듯한 제작 여건으로 극적 긴장감을 담보해야 하고, 감독 개인의 세계관을 탈탈 털어 만들어온 단편과 달리 세상을 보는 성숙한 시선도 담아야 할 것 같은 ‘어른 되기’의 압박감도 느끼기 때문이다. 정치적, 사회적 소재를 발굴해야 한다는 공명의식은 미지의 타자로 시선을 돌리게 하고, 그들을 부지런히 취재하고 이해하려는 태도로 이어진다(나 역시 그렇다). 이러한 연유로 2000년대 초반부터 청년 빈곤과 외국인 노동자, LGBT(성적소수자들을 위한 모임) 등을 다룬 장·단편 독립영화가 끊임없이 만들어졌으니 독립영화에서만큼은 이들은 더이상 소수자가 아니다. 군상을 이룬 소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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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랑의 영화비평] 소수자 영화의 윤리와 <꿈의 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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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에게 원더우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다. 린다 카터 주연의 텔레비전 시리즈도 방송국을 옮긴 시즌2부터는 70년대로 건너뛰었고 이후 코믹북 시리즈도 윌리엄 몰턴 마스턴의 시절 이후 그 시대에서 점점 멀어졌지만 어린 시절 한번 각인된 이미지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아무리 <저스티스 리그> 시리즈가 현대를 배경으로 한다고 해도 <원더우먼> 영화는 무조건 40년대가 배경이어야 한다고 내가 아무도 안 들어주는 허공에 대고 혼자 외쳤던 것도 이해해주셔야 한다. 그만큼 TV시리즈 시즌1과 골든 에이지 코믹북 시절의 고풍스러우면서도 천진난만하고 낙천적인 분위기를 사랑했다.
그 뒤로 나는 꾸준히 가까운 미래에 만들어진다는 <원더우먼> 영화의 배경에 관심을 가졌다. 망해버린 에이드리언 팔리키 주연의 TV시리즈 파일럿에서는 무대가 현대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원더우먼> 시나리오를 영화사에서 사들
[듀나의 영화비평] <원더우먼>과 제1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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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감독의 작품이 주는 공통된 느낌이 있다. 영화가 끝나도 하나로 모아지거나 정리되지 않는 일종의 산만함이다. 혹여 ‘정리가 덜 된’, ‘완성도의 부족’이라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지만 나는 이것이 감독의 고유한 특징이라 여겨진다. 감독의 영화는 마치 물과 같아서 쥐려 해도 쥐어지지 않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린다. 감독의 영화를 이야기할라치면 오직 손바닥 위에 남은 물방울의 흔적이라든지 손바닥을 스치고 지나간 찰나의 감각만으로 사유를 전개해야 한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고려인의 노래가 담긴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이하 <고려 아리랑>)는 그런 의미에서 감독의 전작보다 더 많은 것을 관객에게 쥐여주는 듯 보인다. 영화를 관통하는 무수한 노래는 들리는 것을 보았다고 착각하는 일종의 착시효과를 일으킨다. 그러고 보면 감독의 전작에서도 노래만은 이야기가 산파하는 와중에도 또렷이 각인되곤 했다. <경>(2009)에서 뮤지션 손지연의 ‘실화
[김소희의 영화비평] 음악다큐멘터리로서 <고려 아리랑 : 천산의 디바>가 지닌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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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은 그것이 경찰이든 조폭이든 간에, ‘믿음’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나쁜 놈들, 또는 불한당이라 부른다. ‘필요’는 바람난 애인 같아서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면에서 “사람을 믿어선 안 된다. 상황을 믿어야지”라고 말하는 재호(설경구)의 말은 진리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불한당>은 끊임없이 상황을 뒤집으며 ‘배신의 서사’를 펼쳐 간다. 하지만 <불한당>을 배신의 서사라 칭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플롯의 구조 때문만은 아니다. <불한당>은 인물이 인물을 배신하는 것 이상으로, 인물이 자신의 감정을 배신하는 과정이 흥미로운 영화다. 격렬한 몸짓 뒤에 숨어 있는 아련한 감정, 그것이 바로 <불한당>의 정서다.
배신의 화법
<불한당>은 대략 3년의 시간차를 두고 교도소 안과
[안시환의 영화비평] 동성애적 코드로 장르의 상투성을 넘어선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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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벽과 창에 균열이 생기며 무너지기 시작한 건물, 그곳에서 도피하는 두 주인공의 모습이 보이며 영화 <세일즈맨>(2016)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서 밀러의 희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제목을 따왔지만, 주인공 부부는 세일즈맨보다 특별한 직업인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에마드(샤하브 호세이니)와 라나(타라네흐 알리두스티)는 현재 밀러 원작의 공연을 준비 중이다.
건축물 붕괴에서 시작된 이들 부부의 위기는 이후 정신적 영역으로 옮아간다. 그 결과, 주인공들은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기에 이른다. 영화의 첫 부분과 마지막 장면을 비교해보면 붕괴 위험이 있는 아파트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 주인공 부부가 아니라 사건의 범인인 늙은 가장인 것은 아이러니하다. 범인은 모두가 우려하던 물리적 파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행한 악행의 심리적 압박 탓으로 죽음을 맞는다. 이처럼 제목이 생략한 ‘죽음’이란 명제는 가시적 영역에서
[이지현의 영화비평] 정교한 구조가 돋보이는 <세일즈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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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 아웃>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0여년 전, 절친인 선배 감독과 함께 미국 아이오와에 2~3주간 머문 적이 있었다. 강의 등 일 때문에 간 것이어서, 자동차로 불과 2시간 거리인 대도시 시카고도 못 가본 채 여행 기간 내내 꼬박 백인 중심의 중소도시에 머물게 된 것. 그러던 어느 주말, 우리는 초청 대학의 주선으로 미국 전통 스포츠 경기인 ‘로데오’를 참관하게 됐다. 10여명의 기수가 성조기를 흔들며 종마에 올라탄 상태로 미국 국가를 부르는 개막 행사의 생경함은 그렇다치고, 우리를 진실로 경악하게 만든 건 국가 제창 뒤에 이어진 흑인 광대의 기묘한 서커스 때문이었다. 우스꽝스럽게 분칠을 하고 나온 흑인 피에로는 잠깐의 슬랩스틱 개그를 선보이더니 이내 큰 드럼통에 몸을 꾸깃꾸깃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한가롭게 서 있던 백마 한 마리가 그 드럼통을 발로 차며 굴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흑인 피에로는 드럼통을 빠져나왔다 다시 들어가는 것을 반복했고
[임필성의 영화비평] 배타적 공포 다룬 새로운 호러 스릴러 <겟 아웃>의 아쉬운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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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 부드러움과 나직함. 죄책감과 수치심. 목소리에는 많은 것들이 전달된다. <목소리의 형태>(聲の形)의 제목에서 목소리를 뜻하는 말은 일본어 약자체 声이 아니라 한문 정자체 聲으로 표기되었다. 사물의 개념을 표기하는 문자인 한자는 형태와 의미를 소리와 아울러 전하는 표의문자다. 형태, 의미가 소리와 어우러진다는 것. 가령 신카이 마코토가 <언어의 정원>(2013)에서 ‘언어’를 뜻하는 일상어 고토바(言葉) 대신 일본 고유의 시인 와카(和歌)를 의미하기도 하는 단어 고토노하(言の葉)를 선택했을 때, 언어는 문득 한잎, 두잎 떨어지는 이파리처럼 혹은 한구, 두구 읊조리는 시나 노래처럼 다가온다.
<목소리의 형태> 역시 그러하다. 목소리(聲)라는 말에는 울림으로 전달되는 소리(声), 소리가 전달되는 귀(耳) 그리고 소리 전달의 매개가 되는 손(又)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글자만으로도 소리가 전달되는 흐름이 이미지처럼 펼쳐진다. 이는 원작 만화가인
[송효정의 영화비평] 말이 아닌 것으로 전하는 진심 <목소리의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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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말에 노쇠한 허블 망원경의 뒤를 잇는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이 발사된다. 이 망원경엔 여러 기능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근적외선 영역에서 외계 행성의 대기를 관측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관측 영역에 지구의 것과 비슷한 생명체를 품은 행성이 있다면 관측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리들리 스콧의 신작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일어난 일, 그러니까 머나먼 개척 행성에 가려던 초광속 우주선이 중간에 갑자기 인간이 살 수 있는 행성을 발견해 방향을 트는 일은 없을 것이란 뜻이다. 만약에 A 태양계에 식민 우주선을 보낼 정도로 인류의 과학이 발달했다면 제임스 웹 망원경을 넘어서는 관측기구가 오래전에 만들어졌을 것이고, 지구를 중심으로 하고 지구와 A 태양계 사이의 거리를 반지름으로 하는 구 안에 있는 태양계의 행성들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확보한 상태일 것이다. 인간이 숨쉴 수 있는 행성이라면 놓쳤을 리가 없다. 그 행성 근처를 지나치다가 ‘
[듀나의 영화비평] <에이리언: 커버넌트>에 노출된 장르적 단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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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일 감독은 현대사회의 시스템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병폐에 대해 비판하고 줄곧 그것에 질문을 던져온 작가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머리를 깎던 아이가 엄마에게 낮에는 왜 별님이 없냐고 묻자 엄마는 별님이 있긴 있는데 해님이 너무 밝아서 안 보이는 것이며 안 보인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라고 답한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옴니버스영화 <시선 너머>(2011) 중 신동일 감독이 연출한 중편 <진실을 위하여>의 제목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신동일 감독은 계속 엉뚱한 것을 보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고발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고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한 과정에서 신동일 감독의 영화가 택한 장치 중 하나는 경계다. 경계의 영역은 양쪽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지만 어느 곳이나 속해 있는 제3의 영역이자 사유의 영역이다. 진실에 대한 인식은 이러한 제3의 영역과 만난다. 신동일 감독의 모든 영화에는 경계에 있
[김태훈의 영화비평] 경계를 향한 신동일 감독의 꾸준한 질문 <컴, 투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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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장르에서 가장 재미있으면서도 난처한 문제는 장르가 다룰 수 있는 무대와 소재가 종종 우리가 아는 인간 세계의 영역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과학적 아이디어와 상상력에 약간의 뻥을 섞으면 SF는 정말 어디든 간다. 우주의 끝이건 시간의 종말이건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딱 하나. 어딜 가도 인간이 있어야 한다는 걸 제외하면. 독자와 관객은 아직 인간뿐인데, 이 인간이란 동물은 자기와 상관이 없는 이야기엔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우주 끝에도, 시간 끝에도 어떻게든 인간을 보내야 한다. 아니면 인간과 아주 비슷한 어떤 존재이거나.
1950년대까지만 해도 그 ‘인간’은 백인 남자를 의미했다. 이 장르의 글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이 모두 백인 남자라고 치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지만 모두들 이를 당연시했다. 당연히 우주 어디를 무대로 해도 이 세계는 백인 남자들이 재미있는 모험을 할 수 있는 놀이터가 됐다.
그 때문에 SF 세상은 이상
[듀나의 영화비평] SF 장르로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 시리즈가 지닌 보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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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시민>(2016)의 박인제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통제 불가능한 정치적 세계의 메커니즘 속에서 인물이 보여주는 ‘리액션의 연쇄’를 꼼꼼히 기록하는 일이다. <특별시민>이 나선형의 매끈한 극적 구조보다는 에피소드의 나열처럼 구성된 것도 이러한 이유다. 도심 한복판에 싱크홀이 발견되었을 때, 그리고 아내의 고가 미술품 구입이나 자동차 사고 등이 폭로되었을 때, 그리고 심혁수(곽도원)로부터 비롯된 일련의 정치적 음모와 압박이 가해져올 때마다 변종구(최민식)가 보여주는 리액션 하나하나가 모여 변종구의 종합적 형상이 완성된다.
흥미로운 것은 변종구의 선택/리액션이 인간으로서는 최악의 것에 가깝지만 ‘선거의 결과로 평가받는 정치인’으로서는 최상의 선택/리액션이라는 점이다. 이 단순 도식을 극단화하면 최상의 정치인은 최악의 인간이라는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겠다. 변종구의 리액션 하나하나가 모자이크되어 완성된 형상은 ‘괴물’의 모습이다. 변종구(와 한국 정치의 메커니즘
[안시환의 영화비평] <특별시민>에서 박인제 감독이 고수한 영화적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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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일반화를 허락한다면,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을 포괄할 하나의 감정은 ‘불편함’일 것이다. 정제된 ‘날것’이 주는 불편함이랄까. 실제로 일인칭 핸드헬드 카메라에 몸을 실은 그(들)의 영화는 관객을 꼼짝없이 잡아 앉혀 날것 같은 불편함에 고스란히 대면하도록 했다. 그러니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다르덴 형제의 ‘팬’들은 이 불편함을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일 테다(나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10번째 영화 <언노운 걸>(2016)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안온(安穩)하다. 불법 이민자 소녀의 죽음과 이를 방조한 사회를 다루었으니 소재 탓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놓고 언급하는 죄책감이나 책임감이라는 문제 역시 그리 편안한 지점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렇다면 이 낯설기만 한 안온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문 밖’이 아니라 ‘문 안’으로 들어온 카메라
먼저 이 세 장면을 떠올려보자. 소년 환자로부터 호출을 받은 제니(아
[우혜경의 영화비평] 죄책감을 섣불리 해소한 <언노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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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뉴욕의 어느 출판사, 원고를 고치는 편집자의 손이 보인다. 타자기가 쓴 기계적 글자들 사이로, 그는 색연필을 든 손으로 원고에 줄을 긋고 있다. 건물 밖으로는 비가 내린다. 그곳에서 비를 맞는 남자는 바로 소설가 토머스 울프(주드 로)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 이 첫 장면을 다시 떠올린다면, 처음의 젖은 공간이 미래의 풍경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과거의 행위를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기차는 날 삶 속으로 데려다줬다. 인생의 길은 늘 흐른다. 때론 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오기도 하고, 다시 흘러들어가기도 한다.” 토머스 울프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첫 장면에서 교차된 컷들과 겹친다. 영화에서 울프의 처녀작 <천사여, 고향을 보라>의 탄생은 그렇게 미묘하게 그려진다. 출판사 건물을 사이에 두고서 두 남자는 안과 밖에 따로 서 있고, 그들의 사이를 잇는 두꺼운 원고 다발이 등장하며 이야기는 둘로 갈린다. ‘오, 잊혀진 것들’이라 이름 붙은 원고
[이지현의 영화비평] <지니어스>가 상기시키는 순환의 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