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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노골적인, 그래서 당혹스러운 홍상수의 <그 후>

그날 이후 남은 것들

어떻게 해도 이 장면에서 시작해야 할 것만 같다. 늦은 밤, 창숙(김새벽)이 닭볶음탕집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창숙은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바로 전 장면에서 봉완(권해효)의 부인(조윤희)에게 어이없게 폭행을 당한 아름(김민희)이 봉완과 함께 닭을 먹으며 술을 마시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 창숙은 정말 아름과 봉완을 보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 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건 영화를 끝까지 다 본 관객뿐이다. 창숙이 창문 너머 가게 안을 바라보는 이 짧은 순간, 사실 우리는 그녀가 본 걸 확신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숏 전까지 창숙은 (봉완의) 플래시백, 그러니까 과거 (기억) 속에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먼저 플래시백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홍상수 영화에서(교과서적 의미에서의) 플래시백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가 이야기 속에서 빈번하게 뒤섞여 오가지만, 그는 플래시백을 사용해 시간을 선형적으로 ‘정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꿈이나 환상을 끌어들여 시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틀어진 시간들을 어긋나게 중첩시켜 (관객이) 본 것과(등장인물들이) 기억한 것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였다. 과거는 흩어진 편지처럼 조각나 있거나(<자유의 언덕>), 서로 다른 인물들 사이를 오가며 전혀 다르게 구성되기도 하고(<하하하>), 관객의 기억 속에만 있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현재인 양 새롭게 반복되기도 한다(<다른 나라에서>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등장인물 위에 켜켜이 쌓인 과거의 시간들은 영화의 플래시백이 아니라 ‘관객의 플래시백’이 되어 표면만 남아 있는 서사에 ‘차이와 반복’을 만들어내 깊이를 품어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후>의 플래시백은 홍상수 영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그래서 무척이나 당혹스럽다.

이토록 배타적인 시간

새벽 출근길을 의심하는 아내를 뒤로하고 봉완이 집을 나선다. 하지만 익숙한 아파트 골목을 돌며 봉완이 마주치는 건 창숙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향하는 술에 취한 자신의 모습이다.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다른 옷을 입고 있는 봉완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 장면이 봉완이 떠올린 창숙과의 과거 기억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출근길에 만나는 익숙한 풍경들(아파트 운동기구, 지하철)을 매개로 창숙에 대한 봉완의 플래시백이 세번 반복된다. 마치 관객을 훈련이라도 시키려는 듯 영화는 초반부터 창숙이 봉완의 기억 속에 (플래시백 형태로) 존재하는 ‘과거의 그 사람’이라는 사실을 반복해 상기시켜준다. 그렇다면 이제 궁금해지는 건 ‘현재의 창숙’은 어디에 있는가일 것이다. 창숙을 떠올리며 봉완이 향한 곳은 자신의 출판사이다. 하지만 그곳엔 (창숙이 아니라) ‘오늘’ 첫 출근한 아름이 먼저 도착해 있다. 아름이 자신을 소개하고 가족의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동안 봉완은 맞은편에 앉아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언니 생각에 울컥한 아름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화장실 문을 열고 창숙이 나타난다. 하지만 창숙에게 다가가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말하는 봉완을 바라보는 우리는 영화 시작과 동시에 받았던 훈련 덕분에 이 장면이 그가 (아름이 없는 틈을 타) 떠올린 창숙과의 기억이라는 사실을 자동반사적으로 알게 된다. 짜장면을 먹으며 아름과 믿음과 실체에 대한 긴 토론을 벌인 후 담배를 피우러 나온 봉완은 (또 한번 아름이 없는 곳에서) 같은 중국집에서 술주정을 부리며 대성통곡을 하던 창숙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이제 드디어 창숙이 닭볶음탕집에 도착한다. 창숙을 불러낼 (봉완의) 실마리는 없었지만, 우리는 창숙이 ‘과거’의 존재라고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영화는 마치 그런 창숙을 보지 못했다는 듯 다시 식당으로 들어가 아름과 봉완의 ‘하나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잠시 후 일을 그만두겠다던 아름을 설득해 내일 아침에 일찍 만나자는 약속을 얻어낸 봉완이 (아름을 두고) 화장실로 향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창숙이 서 있다. 영화 초반, 지하주차장 플래시백 장면처럼 봉완은 창숙을 포옹하며 (새삼스럽게) 사랑을 속삭인다. 문제는 뒤이어 나온 아름과 창숙이 대면하는 순간에 발생한다. 말하자면 현재(아름)의 자리를 ‘다시’ 차지하기 위해 창문 너머 엿보던 창숙이 과거를 찢고 등장한 것이다.

이제 아름과 창숙은 ‘현재’의 자리를 두고 다투기 시작한다. 하루 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 무슨 정리할 사연이 있냐며 자신의 우위를 주장하는 창숙과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며 창숙을 뻔뻔하다고 몰아붙이는 아름이 충돌하고 그 사이에서 난감해진 봉완은 마치 자신의 세계에 균열이라도 일어난 듯 울음을 터뜨린다. ‘사장 부인’의 자리에 봉완의 처와 창숙이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창숙이 (과거로부터) 돌아오는 순간, 아름은 봉완의 세계(강출판사)에서 쫓겨나고 만다. 이렇게 배타적인 시간이 홍상수 영화에 등장한 적이 있었던가.

현재와 과거의 시제 변화의 의미를 묻는 인터뷰에서 홍상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어난 시점은 과거지만 그게 지금에 영향을 끼치고, ‘소화되지 않았고’, 계속 기억되는 것이라면 현재 시점의 인물의 의식과 감정에 그 과거와 지금의 행위들이 같은 실체적 힘으로 존재합니다. 그걸 그대로 표현한 겁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과거의 ‘소화되지 않은 실체적인 힘’이 현재와 대면해 현재를 밀어내고 시간을 평평하게 만들어버리는 일은 이전 영화에선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많은 이들이 즐기고, 또 지적해왔던 것처럼 그의 영화 속 시간은 과거와 현재가 신비한 방식으로 공존해왔다. 어긋난 시간의 틈새에서 관객은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고, 그 의미의 풍요로움이 곧 홍상수 영화의 가장 큰 힘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는 ‘공존’ 대신 ‘대면’과 ‘충돌’을 선택하면서 그 힘이 세를 잃어버린 듯 보인다.

아직 한 가지 더 남아 있다. 창숙과의 다툼 끝에 자리를 내준 아름은 몇권의 책을 싸들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기다렸다는 듯 ‘은혜로운’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모든 게 하나님 품 안에 있으니 하나님 뜻대로 되라’고 기도한다. 허상일지 모르는 실체를 찾느라 믿음을 포기하는 것은 게으르고 비겁한 일이라 믿는 아름은 초월적 존재에 자신을 맡긴다. 그러니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등장한 검은 옷의 남자처럼 <그 후>에서 아름의 머리 위로 내리던 눈도 그녀를 살게 할 것이다. 그녀의 바람대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다시’ 행동이 반복되다

하지만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아름은 강출판사를 다시 찾는다. 얼떨결에 ‘그 날’(the day)을 고스란히 반복하지만 봉완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을 밀어냈던 창숙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목소리만 존재하는 새로운 누군가가 들어와 있다. 창숙을 현재로 불러들였던 것처럼 봉완이 (플래시백으로) 아름을 불러들인 걸까? 실제로 아름에 대한 봉완의 플래시백은 딱 한번 등장한다. 창숙과 말다툼 끝에 아름이 사무실을 떠나간 다음, 봉완은 그날 낮, 첫 출근을 한 아름이 책상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며 손이 참 예쁘다, 라고 칭찬했던 일을 떠올린다. 하지만 사실 봉완이 떠올린 것은 단지 왜 아름이 뜬금없이 회사 책을 잔뜩 싸들고 떠나갔는지, 그 이유였을 것이다(“여기 있는 책들은 우리 책이니 마음대로 가져가요.”). 그러니 나쓰메 소세키의 책, <그 후>(소설의 영어 제목은 ‘and then’이지만 이 영화의 제목은 ‘the day after’이다) 를 건네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아름이 그 책을 받지 않았다면, 이 에필로그는 성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날(the day)이 지나간(after) 다음, 아름은 다시 한번 출판사를 떠난다. 굳게 닫힌 출판사의 문을 아름은 다시는 열지 않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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