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꽃>은 박석영 감독의 세 번째 독립 장편영화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들꽃>(2014), <스틸 플라워>(2015), <재꽃>(2016)으로 이어지는 ‘꽃 3부작’의 맺음작이기도 하다. 3부작으로 불리긴 해도 세 작품의 형식과 서사는 명확히 구별되기에 개별 작품을 비평해도 그 결은 풍부할 테지만, 필자는 세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여러 제재 중, 박석영의 인물들이 동일하게 반복하는 특정 행위에 집중하려 한다.
박석영의 인물들은 왜 이토록 싸울까. 그것도 언어도, 정서도, 논리도 아닌 오로지 육체로. 세 작품을 관통하는 이 육체적 싸움은 무엇일까. 논리적 비평을 말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느낀 바는 이렇다. 박석영의 영화에서 보이는 육체적 싸움은 서사 안에 녹아들어 자연스럽게 표출된다기보다 길가 돌부리처럼 유난히 뭉툭하게 튀어나와 있는 것 같다. 급작스러우며 거슬거슬하다.
첫 번째 작품인 <들꽃>부터 보자. 감독 본인이 밝힌, 가출 청소년들에게 도의적 책임감을 느끼면서 시작되었다는 동기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인물들의 싸움은, 싸움이 아니라 과잉된 폭력의 전시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싸움’이라 함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이기려고 다투는 것’일진대 <들꽃>에서의 싸움은 한쪽이 무력하여 다툴 여지가 별로 없다. 그나마 쌍방간의 육체적 싸움을 감당하는 인물들은 하담과 수향, 은수이다. 세 소녀는 자신에게 행해지는 물리적 폭력에 저항하면서 쌍방간의 격투로 상황을 전환시킬 줄 아는 능동성을 가졌다. 이렇게 가출 청소년을 영화적 제재로 착취하지 않으려 애쓴 감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들꽃>은 세 소녀가 아니라 두 소년, 태성과 바울에게만은 일방적 폭력을 감내하게 만들어, 동의할 수 없는 폭력의 패착을 드러낸다. 태성은 보스인 삼촌에게 여자아이들을 놓쳤다는 이유로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맞는다. 태성과 삼촌이 속한 세계가 주먹의 우열로 유지되는 조폭 세계라면 이들에게 언어는 폭력 그 자체다. 그것이 그들의 언어일 수 있고, 그 언어를 듣고 이해해야 하는 하수자인 태성은 잘못한 것에 대해 꾸중을 듣듯 얻어맞아야 한다. 태성과 삼촌간의 폭력의 명분을 찾을 수 있다면 그나마 이 정도다. 결정적으로 태성의 얼굴은 영화 내내 얻어맞아 엉망인데, 좋아하는 수향을 지키고자 하는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기능을 부여받은 훈장으로 새겨진 것 같아 저의가 의뭉스럽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울이라는 인물에게 있다. 바울은 장애와 더불어 간질까지 앓는 인물로 묘사되고, 응급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이런 메모를 몸에 지니고 다닌다. “청각장애우입니다. 이름은 이바울입니다. 전기기사 자격증이 있습니다. 착합니다.” 나는 저 마지막 문장, ‘착합니다’가 한 인물의 사지를 묶어놓고 마는 부자유의 가학이라고 느꼈는데, 이런 장면 때문이다. 영화의 후반부, 은수는 수향이 가져간 돈을 충당하기 위해 바울을 데리고 핸드폰 가게를 털다가 주인에게 걸린다. 은수는 도망가고 바울만 주인에게 잡힌다. 주인은 다짜고짜 바울의 뺨을 때리며 이름을 묻는다. 바울은 청각장애우이기 때문에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 주인은 바울이 이름을 말할 때까지 계속 때린다. 뺨이 붓고 눈물이 차오르는 바울은 어설픈 발음으로 제 이름을 말하려고 애쓰는데, 바울이 장애우인지 모르는 주인은 “장난해?”라며 또 때리고, 바울은 더욱 크고 또렷하게 자신의 이름을 발음하려 애쓴다. 그럴수록 주인이 바울의 뺨을 때리는 강도가 커진다. 타인의 폭력에 일절 반항하지 못하는 바울을 보고 있는 일은 괴롭다기보다 민망하다. 바울은 제 목에 걸린 ‘착합니다’라는 주문에 충실하다 하더라도, 그 주문에 동의할 수 없는 관객은 이 일방적인 폭력을 무슨 이유로 끝까지 지켜봐야 하는가. 이 숏이 바울의 클로즈업 반응숏인 것, 그것도 롱테이크인 것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장면 때문에 이 영화의 진정성이 의심받아도 별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들꽃>에서 인물의 싸움이 폭력에 가깝게 읽혔던 이유다. 그리고 감히 짐작건대, 이 작품을 통해 박석영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근원적 고민을 새삼 하지 않았을까.
‘과잉된 폭력의 전시’에서 시네마의 동력으로
<스틸 플라워>에서 하담은 트렁크를 끌고 부산 시내를 헤매고 폐가에서 먹고 자며 일자리를 구하러 돌아다닌다. 하지만 주소도 전화번호도 없는 하담을 받아주는 데는 드물다. 이런 생활에서 하담이 매달리는 것은 탭댄스다. 우연히 접한 탭댄스의 구둣발 소리와 발을 구르는 움직임은 하담에게 생의 활기를 불어넣는다. 영화의 말미, 주막에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고 그 돈으로 탭댄스 구두도 사게 되면서, 하담은 자신의 노동을 착취하는 사람들과 싸우지 않을 것 같은 희망을 품는다. 이제껏 싸움으로만 자신의 육체를 혹사했다면 탭댄스라는 자기표현의 움직임에 육체를 온전히 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더 처절한 싸움이 영화의 끝자락에 버티고 있다. 횟집 주인의 아내는 하담이 일하고 있는 주막에 들이닥친다. 남편과의 불륜을 오해한 여자는 하담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폭언을 퍼부으며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한다. 하담은 자신을 주막 밖으로 끌어내려는 여자에게 끝까지 대항해 온몸을 버둥거려보지만, 여자의 완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끌려나온다. 4분이 넘는 롱테이크로 촬영된 이 격투 장면의 에너지는 어마어마하다. 관객이 심리적 위축을 넘어 피부가 얼얼하게 아릴 정도로 묘사가 세다. 하지만 이 장면을 봐도 폭력을 목도했다는 인상이 들지 않는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항해 격투를 치렀지만 끝내 졌다는 인상이다. 하담의 생존 본능으로 이뤄진 육체적 싸움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재꽃>에서의 싸움을 살펴보자. <재꽃>에서 하담은 무엇보다 마음의 크기가 자라서, 예전의 자신처럼 트렁크를 끌고 시골로 들어온 해별의 보호자 역할을 한다. 앞서 두 작품의 하담과 달리 <재꽃>의 하담은 싸우지 않는다. 시골이라는 공간의 지배소에서 오는 정서의 원형이 이전 하담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담은 시골 풍경 속을 뛰어다니고 일정 정도의 노동을 할 뿐이다. 하지만 하담이 행하지 않는 육체적 싸움은 다른 인물에게 전가되어 있다. 하담은 해별을 위해 친부를 조작하는 사건을 일으키고, 이 사건과 돈으로 이해관계가 얽힌 어른들은 뒤엉켜 싸운다. 이 장면은 명호와 철기 간의 때리고 막는 격투, 그리고 그것을 악을 쓰며 말리는 삼순과 진경까지 네 사람의 지난한 육체적 싸움으로 꽤 길게 묘사된다. 보고 있노라면 진이 다 빠진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장면은 하담이 관찰자로 빠져 있어 <스틸 플라워>에서의 육체적 싸움과 달리 서사적 공명은 남기지 않는다. 서사와는 다소 떨어져 저 혼자 용광로 같은 화력을 뿜어내다 서서히 사그라드는 모양새다.
<재꽃>의 이 장면을 보고서야 나는 앞서 두 작품에 보였던 육체적 싸움의 정체들을 한데 꿸 수 있었다. 육체적 싸움의 반복과 그 이상한 도드라짐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얻었다. 그 단초란, 박석영 감독이 영화라는 매체를 믿는 방식, 그 믿음으로 밀어붙이는 영화 만들기의 태도에 대한 짐작이다. 박석영 감독은 훌륭한 이야기꾼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영화만이 가진 오롯한 힘을 믿는 감독이다. 서사에만 천착하고 마는 게으른 습관에 끊임없이 날을 세우고 견제하는 감독이다. 퓨어 시네마의 원동력을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애쓰는 감독이다. 박석영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서 보고 싶은 것은 서사의 동력으로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다. 잘 재단된 서사가 인물의 등을 떠밀어서 움직이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인물 스스로가 가지게 된 깜냥, 그것만으로 움직이고 춤추고 싸우기를 원한다. 언어도 논리도 삭제하고 한줌의 정서만을 가진 육체의 동력으로 말이다. 매끄럽게 정제된 영화들이 주지 못한 감각이다. 달달하진 않아서 쉽게 삼켜지진 않지만 오래도록 입안에, 아니 온몸에 남는 감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