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 프로젝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이 영화가 60, 70년대 유행했던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전쟁물들과 비슷한 작품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상 최대의 작전>(1962)이나 <머나먼 다리>(1977)처럼 유명한 다국적 배우들이 잔뜩 등장해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실존 인물들을 연기하고 그 자잘한 장면들이 거대한 태피스트리처럼 하나의 역사화로 완성되는 그런 영화 말이다. 물론 완성된 영화를 보니 그런 영화들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도대체 난 왜 그런 영화를 상상했을까? 이런 영화들의 유통기한은 오래전에 지났다. <지상 최대의 작전>은 대히트작이었지만 <머나먼 다리>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1966)와 같은 흥행 실패작이 더 많았고 돈도 많이 들었다. 역사광이나 ‘밀덕’(밀리터리덕후)이 아니면 아주 관심 있게 볼 이야기 구성도 아니다.
무엇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2차 세계대전을 보는 방식을 바꾸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서 스필버그는 거대한 실제 역사 전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 무명의 병사들을 통해 관객이 전쟁을 직접 체험하게 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스필버그의 영화를 보고 <지상 최대의 작전>과 같은 올스타 대작영화로 돌아가면 이런 영화들이 솔직히 약간은 거짓말 같고 위선적으로 느껴진다. 직접 겪은 사람들에게 전쟁은 그렇게 화려한 퍼레이드가 아니기 때문이다.
<덩케르크> 역시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가 아니라 전쟁을 체험하게 하는 영화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스필버그의 노선을 따른다. 단지 <덩케르크>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보다 더 극단적으로 나아간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엔 목표가 분명한 임무가 있고 이에 따른 드라마가 있으며 그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선명한 캐릭터들이 있다. 하지만 <덩케르크>에는 캐릭터라고 할 만한 인물도 없고 이들에게 분명한 드라마도 주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캐릭터라기보다는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 참여한 특정 영국인 유형을 형상화한 것과 같은 존재다. 일종의 아바타라고 할 수도 있겠다. 관객이 뒤집어쓰고 직접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이들에게 고정된 틀을 넘어서는 구체적인 인간적 개성이 있었다면 관객은 오히려 더 몰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비겁함과 두려움의 전시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 <덩케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인셉션>이다. 영화는 세계의 시간선을 동시에 다루는데, 하나는 어떻게든 덩케르크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가려는 토미(핀 화이트헤드)라는 영국 병사의 일주일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요트를 직접 끌고 덩케르크 해안으로 가서 병사들을 구하려는 선주(마크 라일런스)의 하루이며, 마지막 하나는 철수작전에 투입된 스피트파이어 전투기 파일럿들의 한 시간이다. 각기 다른 속도로 흐르던 세개의 시간선은 모든 이야기가 수렴되는 마지막에야 만난다. 이 잔재주는 일종의 입체파 화가의 기법과 같아서 거대한 하나의 사건을 이루는 다양한 면을 시간선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게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다루는 시간의 길이에 따라 캐릭터가 품은 두려움과 비겁함의 비중이 다르다는 것이다. 가장 짧은 스피트파이어 파일럿(톰 하디)의 한 시간을 보면, 이 시간대의 주인공들은 오로지 능력 있고 용감하기만 하다. 가장 긴 토미의 일주일을 보면 토미를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겁에 질려 있고 역시 토미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비겁하다는 표현밖에 쓸 수 없는 온갖 짓을 저지른다. 그리고 중간에 있는 요트의 하루에서는 비겁함과 용감함이 공존한다. 물론 여기서 가장 비겁한 인물은 가장 긴 시간선에서 온 ‘떨고 있는 병사’다.
이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척 봐도 토미는 스피트파이어 전투기 파일럿인 파리어나 콜린스처럼 유능한 군인은 아니다. 분명 토미와 파일럿들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는 개인차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접근법은 비겁함과 용기가 한 사람의 정신속에 공존하는 여러 면 중 하나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가운데 시간선에서 온갖 민폐를 저지르는 ‘떨고 있는 병사’만 해도 아직 모든 것을 겪지 못한 첫 번째 시간선의 중간엔 제법 용감해 보이고 그 용기는 진짜였을 것이다. 그 시간선에서 용기가 비겁함으로 바뀌는 과정을 우리가 보지 못했을 뿐이다.
전쟁 이야기에서 비겁함은 중요한 테마다. 스티븐 크레인의 소설 <붉은 무공 훈장>만 봐도 가장 중요한 액션은 주인공의 도망이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주인공처럼 끊임없이 전쟁터로부터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병사가 주인공인 작품도 있다. 하지만 비겁함은 용기처럼 깊이 탐구되지는 않는다. 전쟁영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훌륭한 병사들이고 겁쟁이들은 주변부로 밀려난다. 사람들은 제너럴 패튼의 전기영화를 만들지, 그에게 따귀를 맞은 찰스 H. 컬의 전기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그 때문에 종종 비겁함이 전면에 드러날 때 그건 용기보다 더 튀고 더 괴물처럼 보인다. 나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티모시 업햄(제레미 데이비스) 캐릭터를 견뎌내지 못하는 관객을 놀려대는 버릇이 들었다. 사무실에서 가장 쓸모가 있었을 행정병이 산전수전 다 겪은 낯선 병사들과 함께 최전방에 끌려왔을 때 그 상황에서 무능해지고 비겁해지는 건 당연한 일일 텐데, 수많은 관객은 이 캐릭터가 촉발하는 수치심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해 자체를 포기한다. 비슷한 시기와 소재를 다룬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보다 인기 있는 이유 중 하나는 티모시에 대응하는 캐릭터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덩케르크>에서 이 비겁함을 전면으로 끌어낸다. 할리우드 전쟁영화의 주인공들 중 토미처럼 도망가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부상당한 병사를 이용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토미의 드라마는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비겁함과 두려움의 전시다. 웃기지도 않은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덩케르크 해변으로 돌아오는데,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보니 이건 거의 토미를 갖고 노는 사악한 신의 코미디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은 티모시 때와는 달리 토미를 이해한다. 다행히도 토미가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덩케르크 해안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겁에 질려 있고 무능하고 달아나려 한다. 그리고 <덩케르크>라는 영화는 도망가는 병사들에 감정이입하며 그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영화다.
더 긴 시간선에서의 그들
<덩케르크>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 중 어느 쪽이 더 ‘성숙한’ 영화인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두려움과 비겁함이라는 소재를 다룰 때, <덩케르크>는 관객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 때보다 더 성숙한 입장에서 주제를 볼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중심에 선 인물은 연합군을 구출하기 위해 프랑스로 가는 요트 주인 미스터 도슨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대사가 많은 인물이기도 한 그는 밀덕과 영국광들과 제2차 세계대전광들을 혹하게 할 만한 온갖 대사들로 무장하고 있지만, 이 드라마에서 그의 가장 큰 역할은 그의 작은 요트에 모인 비겁한 사람들과 용기있는 사람들을 연결하고 그들 모두를 이해하는 것이다. 용감함에 대한 예찬과 두려움에 대한 이해는 공존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공존해야만 하는 것이다.
영화 말미에 영국으로 돌아온 토미는 수치심으로 움츠러들었다가 이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들의 반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우린 영화가 끝난 뒤에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끝까지 겁쟁이로 남았을 수도 있고 전쟁영웅이 되었을 수도 있다. 우린 토미를 겨우 일주일밖에 보지 못했다. 더 긴 시간선에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