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서사는 늘 빈약했다. <메멘토>(2000)는 결말에 도달한 뒤 거꾸로 돌려보면 매우 단선적인 이야기였고 <배트맨 비긴즈>(2005)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길을 따랐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어받아 투쟁을 지속하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는 <배트맨 비긴즈>로 회귀한 반복에 불과하다.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인과로 거대한 미로를 구축했던 <인셉션>(2010)을 선형적으로 재배치한 뒤 조망하면 단선적으로 움직이는 황량한 인물들을 마주할 수 있다. 부녀간의 애틋함을 우주적 규모로 풀어낸 <인터스텔라>(2014)는 또 어떤가. 놀란의 캐릭터들은 관객을 고민에 빠트리지 않는다. 대개 단순하지만 강력한 동기를 지닌 채 목적을 수행하는 데 열중한다. <덩케르크>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사건에 극적인 드라마는 없다. 덩케르크 해변에 남겨진 앳된 군인들이 도버해협을 건너 집으로 돌아간다. 그게 전부다. 귀향을 방해하는 장벽이 있지만 사건이라기보다는 사고에 가깝다. 말하자면 <덩케르크>는 100분가량 지속되는 전쟁 속 시간에 대한 묘사다. 캐릭터와 사건, 인물들의 충돌을 서사의 축으로 삼은 여타 전쟁영화와 달리 <덩케르크>는 이야기에 한정해서 볼 때 빈곤하고 빈약하다. <덩케르크>를 보고 나온 뒤 누군가에게 어떤 영화인지 말로 옮긴다고 생각해보라. 탈출한다는 행위, 시간이 중첩되고 교차한다는 플롯, 실감난다는 감상 이외에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까. 뭔가 대단한 걸 목격한 것 같긴 한데 설명하긴 난감하다. 그래서, 빈약한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역설적이지만 설명하기 난감한, 혹은 설명할 것이 없는 그 지점이 <덩케르크>를 놀란의 최고작, 집대성, 정점의 반열에 올린다. 다소 추상적이지만 위대한 영화들은 대개 비슷한 미덕을 지니고 있다. 설명할 수 없고, 설명되지 않지만 존재하는 어떤 감각. 오직 움직임과 충돌로 표현되는 비언어적인 영역의 물리적 정보들. 서사로 통합되지 않고 문학이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의 표현들. 바로 무성영화가 지녔던 조형적인 아름다움이다. <덩케르크>는 무성영화의 유산들을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할리우드 총아가 집대성한 작품이다.
21세기의 무성영화
놀란처럼 결론에서부터 반대로 되짚어보자. 그는 왜 빈약한 이야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가. 이야기를 비운다는 건 그 자리에 대신할 무언가를 채우겠다는 말이다. 영화라는 물리적 시간의 한계를 지닌 틀 안에서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다. 하나가 더해지면 하나가 삭제된다. 하나가 삭제되면 하나를 더할 여유를 확보한다. 놀란의 플롯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결과를 먼저 제시하고 원인을 찾아나간다. 서사 전체를 인과관계의 역전으로 배치한 <메멘토>가 여기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도드라지는 건 퍼즐의 연쇄다. 하나의 퍼즐이 끝나고 도출된 결과는 다음 퍼즐을 시작하기 위한 입구가 된다. <다크 나이트>(2008)가 여기에 해당한다. 모든 상황과 우연마저 통제하는 전지적 ‘조커’의 시점으로 보기 전까지, <다크 나이트>의 서사는 조커가 구상한 치밀한 게임의 연쇄로 쌓아올린 미로에 가깝다. 한편 서로 다른 시간을 인과의 사슬로 중첩시킨 <인셉션>은 두 가지 방식을 동시에 활용한다. 결과를 제시하고 원인들을 다른 시간축에 흩뜨려두면 관객은 이를 시간순, 인과순으로 재배치하며 플롯의 게임에 빠져든다. 이야기를 선형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내러티브의 관성을 역이용한 것이다.
대개 플롯이란 이야기라는 덩어리를 효과적으로 실어나르기 위한 유용한 도구다. 하지만 놀란은 반대로 이야기를 조직해나가는 과정과 방식에 집중하는 감독이다. 그릇의 내용물보다 그릇의 형태에 집중하는 것, 결과로서의 내러티브보다 구축 과정에 쾌감을 느낀다고 해도 좋겠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놀란이 단순하고 빈약한 이야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플롯의 퍼즐을 구축하고 즐기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방대한 이야기는 도리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심도 있는 이야기와 복잡한 플롯. 양립은 어렵다. 제한된 물리적 시간 안에 무엇을 목표로 할 것인가에 따라 선택해야 한다. 놀란의 선택은 당연히 후자였다. 그게 안 되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나 <인터스텔라>처럼 물리적인 제한 시간을 늘려버렸지만 물론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동안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과대평가된 엔터테이너라고 생각해왔다. 흥미롭지만 알맹이가 없다고 느꼈고, 부분적으로 뛰어난 성취도 기술에 대한 도취가 아닐까 의심했다. 엔터테이너로서 놀란은 플롯의 게임이라는 형식을 유용한 도구로 삼아왔다. 재미있는 건 형식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표출한 것은 소위 말하는 작가주의 감독을 구분 짓는 기준 중 하나라는 점이다. 감독을 기술자가 아닌 작가로 격상시키고 싶어 하는 쪽에서는 영화연출만이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통해 영화의 고유성을 구분하려 한다. 놀란이 추구하는 플롯의 게임은 내용물보다 형식을 우선한다는 점에서 작가적 자의식의 발현이라 해도 무방해 보인다. 스스로 여러 번 밝혔듯 그는 엔터테인먼트 감독이지만 재미에 대한 기준은 매우 협소하고 엄격한 취향을 드러낸다. 필름의 질감과 아날로그 특수효과, 실제 촬영 등에 집착하는 놀란의 태도는 시네마를 향한 욕망이라 봐도 무방하다. 덩케르크 해변에 선 사람들이 CG인지 실제 인형인지 대다수 관객이 구분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는 실제의 질감을 그려진 것이 따라잡을 수 없다고 믿는 것 같다. 안타깝게도 그마저 마케팅의 수단 중 하나로 포장되어왔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순수주의자다.
놀란은 두 가지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하나는 <메멘토>부터 시작된 플롯의 게임이다. 이는 시간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는 놀란의 도전이었다. 또 하나는 <다크 나이트>부터 시작된 물리적인 규모의 팽창이다. IMAX는 그저 높은 해상도의 화면을 구현하는 기술이 아니라 영화라는 질료, 시각정보에 대한 놀란의 태도에 가깝다. 스크린에서만 구현 가능한 움직임을 구현하는 것과 압도적인 정보량으로 관객을 덮치는 것. 가장 복잡한 방식과 가장 단순한 도구. 두 지팡이를 짚고 놀란이 기어이 오르고자 하는 정상은 어디일까. <덩케르크>는 양쪽 방향을 두루 거쳐본 놀란이 자신의 경험과 자신감으로 구현한, 21세기의 무성영화다. 거대한 캔버스를 얻은 그는 이미지의 도상과 순수한 움직임에 집중한다. 무성영화가 사라진 지 100여년이 흐른 지금, 시장과 자본의 총애를 받은 자가 영화라는 순수 체험을 부활시키려 하는 것이다.
대사가 있으니 엄밀히 말해 무성은 아니다. 하지만 <덩케르크>에는 무성영화 시대의 움직임과 같은 마술이 배어 있다. 완벽히 구현하거나 상영시간 내내 채워내진 못할지라도 그 지점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영화가 시작되면 덩케르크 해변에 모여든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대한 자막이 뜬다. ‘그들은 덩케르크 해변에 고립됐고’라는 문구 다음에 갈증으로 물을 찾는 영국군의 모습을 보여주고 ‘구조되어 조국으로 돌아가는 기적만을 바라고 있다’는 문구 뒤에 총소리와 함께 한명씩 쓰러져가는 군인들의 뒷모습을 따라잡는다. 이 장면은 대사 없이 내레이션 자막으로 상황을 제시하던 무성영화 시대의 문법을 연상시킨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군인 무리가 한명씩 쓰러지는 장면을 굳이 컷을 나누지 않고 한 화면에 담아내는 영화가 내레이션 자막을 굳이 나눠 삽입의 형식으로 배치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무성영화 시대의 형식을 흉내낸 것 같지만 이는 좀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덩케르크>가 추구하는 것이 무성영화의 향수인지, 아니면 목소리가 영화를 침범하기 이전 오직 움직임과 반응의 연쇄만으로 형성되었던 무성영화의 비언어적 속성인지 말이다.
숏과 역숏, 리액션의 플롯
<덩케르크>는 잔교에서 일주일, 배 위에서 하루, 하늘에서 한 시간을 명시하면서 시작한다. 서로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을 교차편집하면서 진행될 것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인셉션>이 과거에서 현재로 흘러가는 동일한 시간축 위에 시간의 속도만을 다르게 중첩해놓았다면, <덩케르크>는 시간의 선후도 종종 뒤바꾼다. 중첩의 <인셉션> 플롯과 역전의 <메멘토> 플롯이 합쳐진 형태다. 시간을 뒤섞기도 하고 다른 시간축을 중첩시키기도 하는 플롯은 매우 정교하고 복잡하여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다. 설사 능숙하게 영화를 뒤따르던 관객이라도 문스톤호가 지뢰구축함과 좌초된 어선에서 흘러나온 군인들을 구하는 장면을 중심으로 세개의 각기 다른 시간이 몇 차례 반복되는 지점에 이르면 헷갈릴 만하다. 기뢰제거함을 구하려는 스피트파이어의 파일럿 파리어 시점으로 제시되다가 문스톤호에 구출된 동료 파일럿의 시점으로 다시 한번 재현되기도 하고, 잔교에서 일주일을 보내다가 어선을 타고 탈출 중이던 영국군 토미의 시점으로 같은 상황이 또 한번 반복된다. 결과를 보여주고 과정을 다시 반복하는 역순의 방식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과거, 현재, 다시 과거 등으로 시간 흐름과 관계없이 수시로 오간다. 무엇을 기준으로 잡아야 할지 종잡기 힘들다. 무릇 교차편집은 하나의 장면을 기준으로 다른 시공간을 삽입하여 충돌시킨다. <덩케르크>는 영화 전체를 세가지 다른 시공간으로 교차편집해놓았다. 이때 기준이 되는 시간축을 찾으려 하는 게 당연한 반응이다. 함정은 여기에 있다.
이 영화에서 플롯은 사실상 서사를 구축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하나의 선형적 서사 위에 구태여 재배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몰라도 전장의 생생함을 감각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이유는 명료하다. <덩케르크>의 기준점은 시간이나 서사,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변에서 얼마나 기다리고 탈출과 실패를 반복했건, 배 위에서 얼마나 덩케르크 해변을 향해 달려갔건, 스피트파이어가 얼마나 오래 비행을 했건 상관이 없다. 영화 속 모든 상황과 시간은 철저히 ‘현재’에 맺혀 있다. 실시간이라고 해도 좋겠다. 세 가지의 다른 시간축을 하나로 묶는 건 다름 아닌 이미지의 형태, 그리고 운동이다. 이 영화는 숏과 역숏, 액션과 리액션의 영화라고 불러 마땅하다. 모든 숏은 현재의 상황, 이를테면 고립된 상황과 죽음의 공포, 탈출을 향한 움직임 등 현재의 시공간으로 재현한다. 토미와 깁슨은 정원이 차버린 배에 탑승하기 위해 부상병을 들것에 싣고 잔교로 향한다. 이어지는 장면은 영국인 조지가 출항을 앞둔 문스톤호에 짐을 싣는 장면이다. 이 두 시공간은 배에 타기 위해 움직이는 인물들의 행위라는 서사로 묶인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이다. 동일한 행위, 유사한 이미지, 도상에 의한 연결은 관객의 인식을 하나로 정리하는 교차편집의 기본이다. 인과가 아니라 같은 행동으로 병렬, 반복되는 셈이니 이해하기도 쉽다.
진정 흥미로운 건 영화 전체가 이러한 행위나 의미의 일치를 반드시 따르진 않는다는 점이다. 숏 바이 숏으로 쪼개보면 <덩케르크>는 현재의 행위에 대한 반응으로 다음 숏을 배치시킨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오는 인물을 찍었으면 다음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는 인물을 찍는다. 동일한 시공간 하에서는 당연한 문법이다. 가령 인물을 찍을 때 왼쪽에 배치된 인물을 한번 찍었으면 오른쪽에 배치된 인물을 한번 찍어야 ‘두 사람이 마주 본다’는 시공간이 통합된다. 하지만 <덩케르크>는 동일한 시공간이나 인물의 행위, 서사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움직임과 이에 대한 반응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시공간의 숏들을 붙여나간다. 조종석에 앉은 파리어를 왼쪽 하단에 위치시켰다면 다음 장면에서 파리어가 탄 비행기의 외곽 시점은 오른쪽 하단에 위치시키는 식이다. 또는 잔교에서 출항하는 배가 왼쪽 하단에서 오른쪽으로 향해서 전진한다면, 이어지는 장면에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는 도슨의 문스톤호를 보여준다. 거의 모든 숏이 현재의 움직임에 대한 역숏, 그러니까 대화하는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건 차라리 대화의 연결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가령 왼쪽으로 향하던 문스톤호가 스피트파이어의 시공간을 거친 후 이어지는 장면을 보자. 처음으로 구축함을 스쳐지나가는 문스톤호의 뱃머리는 어느새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다. 명백한 방향의 충돌임에도 화면이 튀지 않는다. 스피트파이어의 시점을 거쳐왔기 때문이다. 문스톤호라는 시공간의 연속으로 볼 땐 위반이지만, 문스톤-스피트파이어-문스톤의 숏/역숏 관계로 볼 땐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처럼 <덩케르크>의 모든 이음매는 순수한 움직임과 이에 대한 반응을 기준으로 한다. 초기 무성영화의 편집이 시도한 마술적 결합이 연상되는 이유다.
<덩케르크>의 시공간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건 물론 한스 짐머의 사운드다. 테마와 멜로디를 제거한 음향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한 소리들은 반복과 변주를 통해 상황과 감정을 직관적으로 지시한다. 빨라졌다가 상승하고 느려졌다가 다시 옥죄는 사운드의 응집력이 이 파편화된 시공간을 하나의 체험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사운드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은 역시 액션/리액션으로 연쇄된 이미지들이 형성하는 리듬이다. <덩케르크>의 화면들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현재 보여주는 화면’에 대응하는 반응을 다음 화면에 배치한다. 왼쪽을 향한 움직임이 있었으면 오른쪽을 향한 움직임이 배치된다. 이는 단지 방향에 그치지 않고 이미지의 형태와 크기까지 이어진다. 좌초된 어선에 물이 차오르는 장면 다음에는 추락한 스피트파이어 파일럿 콜린스가 조종석에 갇힌 유사 장면을 배치한다. 하지만 그냥 같은 상황을 기계적으로 병치시키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사이에 탁 트인 전경을 한번 배치함으로써 리듬감을 만들어나간다. 각 장면들은 서로의 움직임, 크기, 형태를 통해 마주 보며 대화를 한다. 약간 과장을 더하면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1925)중 오데사 계단에서의 핵심적인 몽타주를 100분에 걸쳐 확장한 것만 같다. <전함 포템킨>이 충돌로 고양된 감정을 이끌어낸다면 <덩케르크>는 하나의 교향곡 같은 숏/역숏의 리듬과 응축을 통해 현재를 지속시킨다.
놀란은 시네마의 다크 나이트가 될 수 있을까
영화적 현재에 놓인 관객은 전장에서 느낄 감정, 긴장감, 절박함, 답답함의 100분 속에 속박된다. 그렇게 관객은 스크린을 통해 전장을 체험한다. 이 영화에 서사가 있다면 단 하나, 그런 부정의 감정들로 가득 찬 전장 한가운데 내던져진 평범한 사람들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용기, 선의, 공공의 선 등등)들이다. 다만 오히려 그와 같은 서사가 두드러질 때, 그러니까 영화의 후반으로 갈수록 <덩케르크>의 현장감은 생기를 잃는다. 가령 후반부 기차에 탄 토미가 집에 가고 싶다며 지쳐 쓰러진 다음, 잔교에서 한 병사가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두 장면의 움직임은 잔다/일어난다의 몽타주다. 하지만 여기에 굳이 서사적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할 때 <덩케르크>는 숱한 토키영화가 그래왔듯 서사를 얻고 무성영화적인 풍성함을 잃는다. 이 장면은 그저 잠들고 일어나는 도상적인 연결로 충분하다. 잠들고 일어나는 두 병사는 이름을 지닌 특정 인물, 그러니까 주인공이 아니고 상징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덩케르크>의 서사는 해석하거나 이야기를 덧붙일수록 빈약해진다. 대신 서사가 거의 제거된 순간, 숏의 크기-시점-움직임의 방향들이 형성한 리듬이 부각되며 원초적인 쾌감을 안긴다. 이것이야말로 <그래비티>(2013)나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의 관능적인 카메라와는 또 다른, 놀란의 편집 마술이다. 그렇다. 이건 마술적 체험이다. 언어와 서사가 침투해오기 이전 숏과 숏 사이에 음악처럼 존재했던, 지극히 영화적인 어떤 율동이다. 놀란은 침묵, 우연, 흔들림 속에서 우연히 포착되는 비서사적 잉여를 기다리는 대신 고전적이고 순수한 움직임을 현재 동원 가능한 기술과 물량의 한계 속에서 쟁취한다.
만약 이것이 놀란의 궁극적인 목표였다면 <메멘토>마저 달라 보인다. 플롯의 역발상이라고 생각했던 <메멘토>의 역전된 서사는 어쩌면 뤼미에르 형제의 <무너지는 벽>에서 착안한 것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영사기의 실수로 거꾸로 돌려진 필름이 시간마저 거꾸로 돌리며 움직임의 흔적들을 환기시켰던 것처럼 놀란은 플롯이라는 장치를 통해 영화의 순수성을 복원하려 했던 건 아닐까. 아마도 과잉해석일 것이다. 하지만 플롯의 마술사가 IMAX를 만난 후 지금의 단계에 이른 걸 감안하면 전혀 엉뚱한 상상은 아닐 것 같다. IMAX는 화질과 규모의 총량으로 시네마, 아니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도달할 수 있는 압도적 실감의 끄트머리에 서 있다. 다만 산업적인 이유로 완벽한 실현은 불가능하다. 놀란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몇몇 소수를 제외하고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놀란의 온전한 비전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굳이 스크린의 크기, 필름의 질감을 빌려 초기영화가 품었던 마술적 체험을 구현하려 한다. 아니, 집착한다. <덩케르크>에 이르러 놀란은 ‘IMAX라는 규모’와 ‘리액션의 플롯’의 교차점에서 ‘영화라는 체험’을 창조했다. 이것은 실화-감독-영화(혹은 세계와 작가)라는 관계에 대한 놀란의 화답이다. 아마도 놀란에게 영화적 감각과 실감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리라. 다시 말해 세상의 일부가 스크린이 되었다. 어쩌면 이 영화는 놀란의 경험이 반영된 거대한 실험에 가깝다. 이제 크리스토퍼 놀란은 자본의 정점에서 시네마의 향방을 탐색하는 구도자처럼 보인다. 그는 "(IMAX와 기술이라는) 신세계가 (시네마라는) 구세계를 구하고 해방시킬 것"이라는 믿음 하에 할리우드의 최전선에서 영화의 영토를 재구축하는 중이다. 그리하여, 시네마를 구할 다크나이트가 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배트맨의 슈퍼파워는 돈이다. 아이언맨과 달리 배트맨은 그걸 구태여 자랑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