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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의 서사는 늘 빈약했다. <메멘토>(2000)는 결말에 도달한 뒤 거꾸로 돌려보면 매우 단선적인 이야기였고 <배트맨 비긴즈>(2005)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길을 따랐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어받아 투쟁을 지속하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는 <배트맨 비긴즈>로 회귀한 반복에 불과하다.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인과로 거대한 미로를 구축했던 <인셉션>(2010)을 선형적으로 재배치한 뒤 조망하면 단선적으로 움직이는 황량한 인물들을 마주할 수 있다. 부녀간의 애틋함을 우주적 규모로 풀어낸 <인터스텔라>(2014)는 또 어떤가. 놀란의 캐릭터들은 관객을 고민에 빠트리지 않는다. 대개 단순하지만 강력한 동기를 지닌 채 목적을 수행하는 데 열중한다. <덩케르크>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사건에 극적인 드라마는 없다. 덩케르크 해변에 남겨진 앳된 군인들이 도
크리스토퍼 놀란은 <덩케르크>의 형식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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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 프로젝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이 영화가 60, 70년대 유행했던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전쟁물들과 비슷한 작품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상 최대의 작전>(1962)이나 <머나먼 다리>(1977)처럼 유명한 다국적 배우들이 잔뜩 등장해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실존 인물들을 연기하고 그 자잘한 장면들이 거대한 태피스트리처럼 하나의 역사화로 완성되는 그런 영화 말이다. 물론 완성된 영화를 보니 그런 영화들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도대체 난 왜 그런 영화를 상상했을까? 이런 영화들의 유통기한은 오래전에 지났다. <지상 최대의 작전>은 대히트작이었지만 <머나먼 다리>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1966)와 같은 흥행 실패작이 더 많았고 돈도 많이 들었다. 역사광이나 ‘밀덕’(밀리터리덕후)이 아니면 아주 관심 있게 볼 이야기 구성도 아니다.
무엇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2차 세계대전
비겁함이라는 테마를 전면에 드러낸 전쟁영화 <덩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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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2017)의 시작 장면은 영화 전체를 압도하는 힘이 있다.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 한 여인이 붓을 짚는다. 조심스레 물감을 입히는 손길, 붓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선명한 색, 그림으로 녹아드는 색색의 선들. 그녀의 느린 몸짓은 아픈 몸 때문이건만 이 순간에는 어쩐지 경건한 정조가 흐른다. 천천히 선을 긋는 우아한 움직임. 이 장면을 본 순간, 우리는 <내 사랑>의 전부를 본 것이다.
반복되는 모드의 붓질과 걸음
전기영화인 <내 사랑>은 주인공 모드(샐리 호킨스)의 삶을 차분히 더듬는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은밀히 반복되는 어떤 움직임이 느껴진다. 영화의 초반, 모드는 이모의 집에 머물며 가족과 함께 살던 옛집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장면이 전환되어 모드는 재즈 클럽에 있다. 이곳에서 그녀는 즐거워 보인다. 다음 장면에서 모드는 다시 이모의 집에 있다. 여기까지. 이 짧은 진행에는 많은 집이 등장하는데, 이상하게도 그 집들을 잇는 ‘길’의
반복과 독립으로 보는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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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전 일본과 조선을 발칵 뒤집어놓은 두 남녀가 다시 2017년 여름의 한국을 달구고 있다. 영화 <박열>은 암울한 식민지 시대의 청년 박열과 천황제 제국의 민중인 가네코 후미코가, 단지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6천여명을 학살하고서도 변명할 거리만 찾는 일본 지배권력에게 죽음의 항변을 쏟아부어 150만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20년 전부터 고민해왔다는 이준익 감독에게 역시 20년 전부터 박열과 흑도회·흑우회 동지 등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에 관한 논문을 써온 연구자로서 감사의 박수를 우선 보내고 싶다.
물론 지나친 ‘영화적 상상력’이 ‘역사적 진실’을 왜곡할 수 있다고 경계하는 역사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영화에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또 한국의 연구성과보다 일본의 가네코 후미코 연구자(야마다 쇼지)에게 더 의지하지 않았나 하는 시기심이 발동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 서두에서 이 영화는 ‘철저한 고증에 거친 실화’이며 등장인물 역시 실존 인물이라고 감독이
<박열>, 영화적 상상력과 역사적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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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도 이 장면에서 시작해야 할 것만 같다. 늦은 밤, 창숙(김새벽)이 닭볶음탕집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창숙은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바로 전 장면에서 봉완(권해효)의 부인(조윤희)에게 어이없게 폭행을 당한 아름(김민희)이 봉완과 함께 닭을 먹으며 술을 마시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 창숙은 정말 아름과 봉완을 보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 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건 영화를 끝까지 다 본 관객뿐이다. 창숙이 창문 너머 가게 안을 바라보는 이 짧은 순간, 사실 우리는 그녀가 본 걸 확신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숏 전까지 창숙은 (봉완의) 플래시백, 그러니까 과거 (기억) 속에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먼저 플래시백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홍상수 영화에서(교과서적 의미에서의) 플래시백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가 이야기 속에서 빈번하게 뒤섞여 오가지만, 그는 플래시백을 사용해 시간을 선형적으로 ‘정리’하는 것에
지나치게 노골적인, 그래서 당혹스러운 홍상수의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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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꽃>은 박석영 감독의 세 번째 독립 장편영화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들꽃>(2014), <스틸 플라워>(2015), <재꽃>(2016)으로 이어지는 ‘꽃 3부작’의 맺음작이기도 하다. 3부작으로 불리긴 해도 세 작품의 형식과 서사는 명확히 구별되기에 개별 작품을 비평해도 그 결은 풍부할 테지만, 필자는 세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여러 제재 중, 박석영의 인물들이 동일하게 반복하는 특정 행위에 집중하려 한다.
박석영의 인물들은 왜 이토록 싸울까. 그것도 언어도, 정서도, 논리도 아닌 오로지 육체로. 세 작품을 관통하는 이 육체적 싸움은 무엇일까. 논리적 비평을 말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느낀 바는 이렇다. 박석영의 영화에서 보이는 육체적 싸움은 서사 안에 녹아들어 자연스럽게 표출된다기보다 길가 돌부리처럼 유난히 뭉툭하게 튀어나와 있는 것 같다. 급작스러우며 거슬거슬하다.
첫 번째 작품인 <들꽃>부터 보자. 감독 본인
<재꽃>, ‘꽃 3부작’을 관통하는 육체적 싸움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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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활동하는 하드코어 펑크 밴드 이야기 <노후 대책 없다>를 논하기 전에 짚어야 할 사건이 있다. SNS를 통해 불거진 감독 및 출연진의 성추행 의혹이다. 이 사건은 ‘○○○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과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 사건이 발발한 페이스북 플랫폼의 특성상 피해자가 자신의 실명을 드러냈고, 영화 제목을 명시함으로써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지만 표면적으로는 가해자를 익명으로 게재한 점이다. 가해자의 사과와 대응이 필연적으로 요구됐던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과 달리, 피해자가 감독과 출연진에게 자신과 합의하지 않은 입장문이나 사과문은 게재하지 말 것을 요청하면서 사건과 관련된 발언은 잠잠해진 상태다. 피해자는 자신이 글을 쓴 목적은 특정 개인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가부장적 문화에서 펑크신 역시 가부장적임을 폭로하기 위한 글이었다고 밝혔다. 이같은 의도가 사실이라면 이 사건은 진술의 사실 관계가 중요한 피해자-가해자 사건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펑크신에 관한 문제제
<노후 대책 없다>, 논란이 불러온 우연한 고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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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렉스 데 라 이글레시아는 1991년에 단편영화 <칵테일 살인마>를 만든 뒤 <액션 무탕트>(1993)의 각본을 들고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찾았다. 각본에 흥미를 느낀 알모도바르는 장편으로 확장하라고 조언했고 ‘엘 데세오’사를 세워 제작을 지원했다. 성공을 거둔 데 라 이글레시아는 <야수의 날>(1995)의 각본을 써 다시 알모도바르에게 갔다. 알모도바르는 ‘악마’가 등장한다는 이유를 들어 지원을 거절했다. 한때 나란히 악동으로 취급받았으나 두 사람이 근본적으로 다른 취향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1990년대 스페인은 거칠게 말해 1990년대 한국과 유사하다. 스페인 역사학자들은 스페인이 1990년대를 지나면서 프랑코 독재정권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고 평가한다. 스페인의 20세기 중반을 지배했던 프랑코 정권은 1970년대 중반에 막을 내렸지만, 수십년에 걸친 암흑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10여년이 더 필요했던 거다
공동체의 파괴를 그리는 <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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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대선에서 경북 성주지역 후보자별 득표율이 몇몇 이들에게 초유의 관심사였다. 성주지역이 박근혜 정부 당시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인 사드 배치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보수정당의 표밭이던 성주지역의 투표 결과에도 변화가 있을 거라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자업자득이라 조롱하던 네티즌은 내심 보수정권에 배반당한 성주가 이번에는 투표를 통해 보수정권에 보복하리라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여전히 보수당 후보자가 과반이 넘는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하자 성주군민에 대한 인터넷 여론의 조롱은 거세졌다. 물론 전에 비해 보수당의 득표율이 줄어들기는 했으나 보수정당에 대한 지지가 굳건하다는 데에 많은 이들이 의아함과 분노 혹은 체념의 감정을 표했다.
대부분이 이미 알고 있을 성주군민에 관한 네티즌의 반응을 여기서 반복한 이유는 <파란나비효과>가 성주군민을 향한 이같은 비난에 응답하는 다큐멘터리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왜 사드 배치 결정 이후에도 보수당 1위라는 선거 결과가 변함
<파란나비효과>, 여론의 시선에 맞선 성주 주민들 혹은 다큐멘터리의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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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왔다. 에로티시즘과 폭력 사이에서 거부할 수 없는 매혹과 공포를 조율하던 감독, 폴 버호벤의 귀환이다. <원초적 본능>(1992)에서 가면 뒤로 숨어야 했던 팜므파탈의 강력한 유혹과 범죄는 이 영화 <엘르>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다. 집 안으로 침입해온 괴한이 쓰고 있는 가면은 그저 장르적 수사에 불과하다. 폴 버호벤이 <엘르>에서 선보이는 마스케라드 게임. 이 영화에서 진짜 가면은 ‘얼어붙은 심장’을 연기하는 이자벨 위페르(극중 미셸 역)의 얼굴 그 자체다. 그녀에게선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읽을 수 없으며, 진심과 기만의 경계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끔찍한 사건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이며, 자신의 쾌락을 위해선 그 어떤 능욕도 마다않는 저돌적이고 직선적인 폭력의 주체이기도 하다.
목격자의 시선에서 행위의 주체로
<엘르>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몇개의 압도적인 장면을 기억해야 한다.
[정지연의 영화비평] <엘르>가 보여주는 폭력과 에로티시즘의 우아한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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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글입니다.
영화의 역사에서 가족과 여성의 주제가 모던 시네마로 진입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례로 결혼이란 소재를 어떻게 영화화했는지 보자. 여성과 결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고전기 영화는 프랭크 카프라의 <우리들의 낙원>(1938)이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이 영화를 보면 남녀가 결혼하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을 비롯해 사회와 계층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순진한 무정부주의자 및 자유주의자가 우글거리는 집안과 냉혹한 자본주의자 집안 사이의 전투에서 살아남아야 여성은 자기 사랑을 결혼으로 확인받을 수 있다. 10여년 후 오즈 야스지로는 <만춘>(1949)을 연출한다. 여기서 결혼의 이슈는 홀아비와 외딸의 관계로 축소된다. <만춘>은 모던함을 지나 이상한 영화다. 결혼 이야기인데 결혼 상대가 제대로 보이지 않고 결혼식도 묘사되지 않는다. 서로의 처지를 아는 까닭에 결혼 앞에서 마음 졸이는 부녀의 모
[이용철의 영화비평] <엘르>와 <토니 에드만>이 말하려는 것의 ‘일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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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영화감독이 소수자를 제재로 삼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소재 착취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유혹을 번번이 뿌리치기 어려운 건 무감한 일상을 벗어나 있는 이들이 운명처럼 지니고 있는 긴장과 갈등이 영화적 상상력을 추동하기 때문일까. 그 유혹에 더 취약한 쪽은 데뷔하는 감독들인 듯 하다. 빠듯한 제작 여건으로 극적 긴장감을 담보해야 하고, 감독 개인의 세계관을 탈탈 털어 만들어온 단편과 달리 세상을 보는 성숙한 시선도 담아야 할 것 같은 ‘어른 되기’의 압박감도 느끼기 때문이다. 정치적, 사회적 소재를 발굴해야 한다는 공명의식은 미지의 타자로 시선을 돌리게 하고, 그들을 부지런히 취재하고 이해하려는 태도로 이어진다(나 역시 그렇다). 이러한 연유로 2000년대 초반부터 청년 빈곤과 외국인 노동자, LGBT(성적소수자들을 위한 모임) 등을 다룬 장·단편 독립영화가 끊임없이 만들어졌으니 독립영화에서만큼은 이들은 더이상 소수자가 아니다. 군상을 이룬 소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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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랑의 영화비평] 소수자 영화의 윤리와 <꿈의 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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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에게 원더우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다. 린다 카터 주연의 텔레비전 시리즈도 방송국을 옮긴 시즌2부터는 70년대로 건너뛰었고 이후 코믹북 시리즈도 윌리엄 몰턴 마스턴의 시절 이후 그 시대에서 점점 멀어졌지만 어린 시절 한번 각인된 이미지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아무리 <저스티스 리그> 시리즈가 현대를 배경으로 한다고 해도 <원더우먼> 영화는 무조건 40년대가 배경이어야 한다고 내가 아무도 안 들어주는 허공에 대고 혼자 외쳤던 것도 이해해주셔야 한다. 그만큼 TV시리즈 시즌1과 골든 에이지 코믹북 시절의 고풍스러우면서도 천진난만하고 낙천적인 분위기를 사랑했다.
그 뒤로 나는 꾸준히 가까운 미래에 만들어진다는 <원더우먼> 영화의 배경에 관심을 가졌다. 망해버린 에이드리언 팔리키 주연의 TV시리즈 파일럿에서는 무대가 현대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원더우먼> 시나리오를 영화사에서 사들
[듀나의 영화비평] <원더우먼>과 제1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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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감독의 작품이 주는 공통된 느낌이 있다. 영화가 끝나도 하나로 모아지거나 정리되지 않는 일종의 산만함이다. 혹여 ‘정리가 덜 된’, ‘완성도의 부족’이라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지만 나는 이것이 감독의 고유한 특징이라 여겨진다. 감독의 영화는 마치 물과 같아서 쥐려 해도 쥐어지지 않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린다. 감독의 영화를 이야기할라치면 오직 손바닥 위에 남은 물방울의 흔적이라든지 손바닥을 스치고 지나간 찰나의 감각만으로 사유를 전개해야 한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고려인의 노래가 담긴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이하 <고려 아리랑>)는 그런 의미에서 감독의 전작보다 더 많은 것을 관객에게 쥐여주는 듯 보인다. 영화를 관통하는 무수한 노래는 들리는 것을 보았다고 착각하는 일종의 착시효과를 일으킨다. 그러고 보면 감독의 전작에서도 노래만은 이야기가 산파하는 와중에도 또렷이 각인되곤 했다. <경>(2009)에서 뮤지션 손지연의 ‘실화
[김소희의 영화비평] 음악다큐멘터리로서 <고려 아리랑 : 천산의 디바>가 지닌 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