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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은 그것이 경찰이든 조폭이든 간에, ‘믿음’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나쁜 놈들, 또는 불한당이라 부른다. ‘필요’는 바람난 애인 같아서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면에서 “사람을 믿어선 안 된다. 상황을 믿어야지”라고 말하는 재호(설경구)의 말은 진리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불한당>은 끊임없이 상황을 뒤집으며 ‘배신의 서사’를 펼쳐 간다. 하지만 <불한당>을 배신의 서사라 칭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플롯의 구조 때문만은 아니다. <불한당>은 인물이 인물을 배신하는 것 이상으로, 인물이 자신의 감정을 배신하는 과정이 흥미로운 영화다. 격렬한 몸짓 뒤에 숨어 있는 아련한 감정, 그것이 바로 <불한당>의 정서다.
배신의 화법
<불한당>은 대략 3년의 시간차를 두고 교도소 안과
[안시환의 영화비평] 동성애적 코드로 장르의 상투성을 넘어선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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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벽과 창에 균열이 생기며 무너지기 시작한 건물, 그곳에서 도피하는 두 주인공의 모습이 보이며 영화 <세일즈맨>(2016)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서 밀러의 희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제목을 따왔지만, 주인공 부부는 세일즈맨보다 특별한 직업인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에마드(샤하브 호세이니)와 라나(타라네흐 알리두스티)는 현재 밀러 원작의 공연을 준비 중이다.
건축물 붕괴에서 시작된 이들 부부의 위기는 이후 정신적 영역으로 옮아간다. 그 결과, 주인공들은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기에 이른다. 영화의 첫 부분과 마지막 장면을 비교해보면 붕괴 위험이 있는 아파트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 주인공 부부가 아니라 사건의 범인인 늙은 가장인 것은 아이러니하다. 범인은 모두가 우려하던 물리적 파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행한 악행의 심리적 압박 탓으로 죽음을 맞는다. 이처럼 제목이 생략한 ‘죽음’이란 명제는 가시적 영역에서
[이지현의 영화비평] 정교한 구조가 돋보이는 <세일즈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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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 아웃>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0여년 전, 절친인 선배 감독과 함께 미국 아이오와에 2~3주간 머문 적이 있었다. 강의 등 일 때문에 간 것이어서, 자동차로 불과 2시간 거리인 대도시 시카고도 못 가본 채 여행 기간 내내 꼬박 백인 중심의 중소도시에 머물게 된 것. 그러던 어느 주말, 우리는 초청 대학의 주선으로 미국 전통 스포츠 경기인 ‘로데오’를 참관하게 됐다. 10여명의 기수가 성조기를 흔들며 종마에 올라탄 상태로 미국 국가를 부르는 개막 행사의 생경함은 그렇다치고, 우리를 진실로 경악하게 만든 건 국가 제창 뒤에 이어진 흑인 광대의 기묘한 서커스 때문이었다. 우스꽝스럽게 분칠을 하고 나온 흑인 피에로는 잠깐의 슬랩스틱 개그를 선보이더니 이내 큰 드럼통에 몸을 꾸깃꾸깃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한가롭게 서 있던 백마 한 마리가 그 드럼통을 발로 차며 굴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흑인 피에로는 드럼통을 빠져나왔다 다시 들어가는 것을 반복했고
[임필성의 영화비평] 배타적 공포 다룬 새로운 호러 스릴러 <겟 아웃>의 아쉬운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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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 부드러움과 나직함. 죄책감과 수치심. 목소리에는 많은 것들이 전달된다. <목소리의 형태>(聲の形)의 제목에서 목소리를 뜻하는 말은 일본어 약자체 声이 아니라 한문 정자체 聲으로 표기되었다. 사물의 개념을 표기하는 문자인 한자는 형태와 의미를 소리와 아울러 전하는 표의문자다. 형태, 의미가 소리와 어우러진다는 것. 가령 신카이 마코토가 <언어의 정원>(2013)에서 ‘언어’를 뜻하는 일상어 고토바(言葉) 대신 일본 고유의 시인 와카(和歌)를 의미하기도 하는 단어 고토노하(言の葉)를 선택했을 때, 언어는 문득 한잎, 두잎 떨어지는 이파리처럼 혹은 한구, 두구 읊조리는 시나 노래처럼 다가온다.
<목소리의 형태> 역시 그러하다. 목소리(聲)라는 말에는 울림으로 전달되는 소리(声), 소리가 전달되는 귀(耳) 그리고 소리 전달의 매개가 되는 손(又)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글자만으로도 소리가 전달되는 흐름이 이미지처럼 펼쳐진다. 이는 원작 만화가인
[송효정의 영화비평] 말이 아닌 것으로 전하는 진심 <목소리의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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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말에 노쇠한 허블 망원경의 뒤를 잇는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이 발사된다. 이 망원경엔 여러 기능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근적외선 영역에서 외계 행성의 대기를 관측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관측 영역에 지구의 것과 비슷한 생명체를 품은 행성이 있다면 관측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리들리 스콧의 신작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일어난 일, 그러니까 머나먼 개척 행성에 가려던 초광속 우주선이 중간에 갑자기 인간이 살 수 있는 행성을 발견해 방향을 트는 일은 없을 것이란 뜻이다. 만약에 A 태양계에 식민 우주선을 보낼 정도로 인류의 과학이 발달했다면 제임스 웹 망원경을 넘어서는 관측기구가 오래전에 만들어졌을 것이고, 지구를 중심으로 하고 지구와 A 태양계 사이의 거리를 반지름으로 하는 구 안에 있는 태양계의 행성들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확보한 상태일 것이다. 인간이 숨쉴 수 있는 행성이라면 놓쳤을 리가 없다. 그 행성 근처를 지나치다가 ‘
[듀나의 영화비평] <에이리언: 커버넌트>에 노출된 장르적 단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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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일 감독은 현대사회의 시스템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병폐에 대해 비판하고 줄곧 그것에 질문을 던져온 작가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머리를 깎던 아이가 엄마에게 낮에는 왜 별님이 없냐고 묻자 엄마는 별님이 있긴 있는데 해님이 너무 밝아서 안 보이는 것이며 안 보인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라고 답한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옴니버스영화 <시선 너머>(2011) 중 신동일 감독이 연출한 중편 <진실을 위하여>의 제목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신동일 감독은 계속 엉뚱한 것을 보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고발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고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한 과정에서 신동일 감독의 영화가 택한 장치 중 하나는 경계다. 경계의 영역은 양쪽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지만 어느 곳이나 속해 있는 제3의 영역이자 사유의 영역이다. 진실에 대한 인식은 이러한 제3의 영역과 만난다. 신동일 감독의 모든 영화에는 경계에 있
[김태훈의 영화비평] 경계를 향한 신동일 감독의 꾸준한 질문 <컴, 투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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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장르에서 가장 재미있으면서도 난처한 문제는 장르가 다룰 수 있는 무대와 소재가 종종 우리가 아는 인간 세계의 영역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과학적 아이디어와 상상력에 약간의 뻥을 섞으면 SF는 정말 어디든 간다. 우주의 끝이건 시간의 종말이건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딱 하나. 어딜 가도 인간이 있어야 한다는 걸 제외하면. 독자와 관객은 아직 인간뿐인데, 이 인간이란 동물은 자기와 상관이 없는 이야기엔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우주 끝에도, 시간 끝에도 어떻게든 인간을 보내야 한다. 아니면 인간과 아주 비슷한 어떤 존재이거나.
1950년대까지만 해도 그 ‘인간’은 백인 남자를 의미했다. 이 장르의 글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이 모두 백인 남자라고 치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지만 모두들 이를 당연시했다. 당연히 우주 어디를 무대로 해도 이 세계는 백인 남자들이 재미있는 모험을 할 수 있는 놀이터가 됐다.
그 때문에 SF 세상은 이상
[듀나의 영화비평] SF 장르로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 시리즈가 지닌 보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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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시민>(2016)의 박인제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통제 불가능한 정치적 세계의 메커니즘 속에서 인물이 보여주는 ‘리액션의 연쇄’를 꼼꼼히 기록하는 일이다. <특별시민>이 나선형의 매끈한 극적 구조보다는 에피소드의 나열처럼 구성된 것도 이러한 이유다. 도심 한복판에 싱크홀이 발견되었을 때, 그리고 아내의 고가 미술품 구입이나 자동차 사고 등이 폭로되었을 때, 그리고 심혁수(곽도원)로부터 비롯된 일련의 정치적 음모와 압박이 가해져올 때마다 변종구(최민식)가 보여주는 리액션 하나하나가 모여 변종구의 종합적 형상이 완성된다.
흥미로운 것은 변종구의 선택/리액션이 인간으로서는 최악의 것에 가깝지만 ‘선거의 결과로 평가받는 정치인’으로서는 최상의 선택/리액션이라는 점이다. 이 단순 도식을 극단화하면 최상의 정치인은 최악의 인간이라는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겠다. 변종구의 리액션 하나하나가 모자이크되어 완성된 형상은 ‘괴물’의 모습이다. 변종구(와 한국 정치의 메커니즘
[안시환의 영화비평] <특별시민>에서 박인제 감독이 고수한 영화적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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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일반화를 허락한다면,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을 포괄할 하나의 감정은 ‘불편함’일 것이다. 정제된 ‘날것’이 주는 불편함이랄까. 실제로 일인칭 핸드헬드 카메라에 몸을 실은 그(들)의 영화는 관객을 꼼짝없이 잡아 앉혀 날것 같은 불편함에 고스란히 대면하도록 했다. 그러니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다르덴 형제의 ‘팬’들은 이 불편함을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일 테다(나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10번째 영화 <언노운 걸>(2016)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안온(安穩)하다. 불법 이민자 소녀의 죽음과 이를 방조한 사회를 다루었으니 소재 탓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놓고 언급하는 죄책감이나 책임감이라는 문제 역시 그리 편안한 지점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렇다면 이 낯설기만 한 안온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문 밖’이 아니라 ‘문 안’으로 들어온 카메라
먼저 이 세 장면을 떠올려보자. 소년 환자로부터 호출을 받은 제니(아
[우혜경의 영화비평] 죄책감을 섣불리 해소한 <언노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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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뉴욕의 어느 출판사, 원고를 고치는 편집자의 손이 보인다. 타자기가 쓴 기계적 글자들 사이로, 그는 색연필을 든 손으로 원고에 줄을 긋고 있다. 건물 밖으로는 비가 내린다. 그곳에서 비를 맞는 남자는 바로 소설가 토머스 울프(주드 로)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 이 첫 장면을 다시 떠올린다면, 처음의 젖은 공간이 미래의 풍경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과거의 행위를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기차는 날 삶 속으로 데려다줬다. 인생의 길은 늘 흐른다. 때론 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오기도 하고, 다시 흘러들어가기도 한다.” 토머스 울프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첫 장면에서 교차된 컷들과 겹친다. 영화에서 울프의 처녀작 <천사여, 고향을 보라>의 탄생은 그렇게 미묘하게 그려진다. 출판사 건물을 사이에 두고서 두 남자는 안과 밖에 따로 서 있고, 그들의 사이를 잇는 두꺼운 원고 다발이 등장하며 이야기는 둘로 갈린다. ‘오, 잊혀진 것들’이라 이름 붙은 원고
[이지현의 영화비평] <지니어스>가 상기시키는 순환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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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운더>(2016)에 관한 평가는 곧 주인공 레이 크록(마이클 키튼)에 관한 평가와 직결된다. 맥도널드를 세계적인 패스트푸드점으로 탄생시킨 레이의 공력을 인정하는 이들은 어딘가 씁쓸한 뒷맛을 느끼면서도 영화 <파운더>를 받아들일 것이며, 레이 크록이 맥도널드 형제의 기술과 이름을 빼앗고 그에 관해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지 않은 것에 분개하는 이들은 <파운더>의 모호한 태도가 못마땅할 것이다. “자네가 대체 무슨 아이디어를 냈는지 하나라도 말할 수 있겠나?” 레이를 향한 맥의 일갈은 관객이 레이에게 묻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레이는 뻔뻔하게 답한다. 나는 승리의 컨셉을 고안했노라고.
<파운더>의 레이를 생각하다 한동안 불거진 조영남 대작 의혹 논란을 떠올렸다. 요는 무명화가인 조수가 그린 그림에 조영남이 덧칠하고 사인을 붙인 작품이 조영남의 그림으로 팔려나간 거다. 조영남은 이에 대해 작품의 최초 구상은 자신에게서 나왔다고 강조했다
[김소희의 영화비평] 시대를 앞서간 자본주의적 인간의 초상 <파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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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적 접촉이란 무엇인가. 일상적으로 이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맥락은 아마 연인과의 관계에서일 것이다. 이때 육체적 접촉이란 물리적 자극과 그에 따라 환기되는 정서까지 지시한다. 정서를 환기하지 않는 단순한 충돌을 가리켜 ‘육체적 접촉’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면 영화와의 그것은 가능할까. 시각과 청각으로 전달되는 영화의 특성상 촉각적 자극은 존재하지 않고, 4D영화의 자극이란 영화의 맥락에 어울리는 자극의 흉내일 뿐 영화 자체의 물질성은 아니다. 영화가 육체적 감각을 최대한 생생하게 재현하여 관객이 촉각적 감각의 전이를 경험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그 자극이 환기하는 정서는 대개 관객이 과거에 느꼈던 것을 상기하는 것이지, 그 영화만의 고유한 것을 새롭게 전달받은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촉각적 감각’을 거쳐 ‘그 대상만의 고유한 정서’를 환기하게 되는, 영화와의 육체적 접촉이란 가능한 일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랜드 오브 마인>(
[홍수정의 영화비평] <랜드 오브 마인>과 전쟁의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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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과 <싱글라이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혼자들의 시대다. 1인 가구가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4분의 1을 넘은 지 오래고(2015년 1인 가구 비중 27.2%), 2045년에는 36%로 늘어난다는 게 최근 정부 추계다. 한발 앞서 나 홀로 시대가 전개되고 있는 일본은 1인 가구 비중이 이미 3분의 1을 넘겼다. 고독사는 날로 증가하고 있는데(2011년 대비 2015년 증가율 179%), 눈에 띄는 건 고독사하는 연령과 소득층 분포가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시복지재단 조사에 따르면 무연고 사망자 중 69%가 60살 미만이고 무연고 의심 사망자가 가장 많은 지역은 강남구였다. 더이상 고독사가 저소득 독거노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김정연의 만화 <혼자를 기르는 법>에 나오는 한 독거 여성은 자신이 키우는 거북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제가 죽으면 얘가 상주예요.”
연결이 개인을 가두는 현대의 고독
혼자들의 이야기가 잇따른
[송형국의 영화비평] 고독과 소외의 시대에 <어느날>이 보여주는 구원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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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국가에서, 폭군의 도주가 저지된다. 만일 그가 혼자였다면 그의 나쁜 탈주는 성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 손자가 곁을 지키면서 상황은 난처해진다. <어느 독재자>(2014)는 독재자와 손자의 여정을 담은 영화이다. 여행의 사이에서 그들은 타락한 정권의 피해자들과 만난다. 과연 이 나쁜 대통령은 자신의 과거 행동을 후회하게 될까? 영화는 결말에 대해 관객의 기대와 다른 조언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왜 하필 독재자가 어린아이와 함께 도주하게 되었는지, 감독에게 아이의 ‘순진한 눈’이 필요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언뜻 영화 속의 우화는 평화적이라 아이의 시선과 맞물리지만, 실제로 아랍 사회에서 독재정권은 민주주의로 전환되지 못했다. 이 나쁜 결말 때문에 영화는 이런 장치를 심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완전히 새로운, 또 다른 시작을 해야 한다고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말하고 있다.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2014)을
[이지현의 영화비평] <어느 독재자>의 숨겨진 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