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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과 <산책하는 침략자> 감독들의 작품 세계에서의 위치

고레에다 & 구로사와 월드, 변화하는 두 세계

※ 두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느 가족>

공교롭게도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이하 <크리피>)과 <태풍이 지나가면>이 함께 개봉했던 지난 2016년처럼, 2018년에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과 구로사와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가 함께 찾아왔다. 상반되는 영화적 지향점을 가졌지만, 두 감독은 모두 자신이 쌓아올린 영화적 세계에 안주하기보다는 그와 일정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려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더구나 그러한 변화가 자신이 발붙이고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은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당시 평론가 정지연은 <씨네21>에 기고한 비평(1070호, ‘재앙의 예언자/기록자 -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에서 “한국 주류영화의 중심축이 ‘지금 여기’ 한국사회를 외면하고 있는 것과 정반대로 일본의 작가주의 감독들은 자신들이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야만 하는지 여전히 칼날 같은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부럽게도(또는 아쉽게도) <어느 가족>과 <산책하는 침략자>는 이러한 정지연의 지적이 여전히 유효함을 입증한다.

불완전한 가족과 쇼타의 결단

평론가 홍수정은 <씨네21> 지난 1168호에 기고한 비평 ‘<어느 가족>을 마음 다해서 지지할 수 없는 이유’라는 글에서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쇼타(조 가이리)는 왜 뛰어내렸나”(또는 “뛰어내린 것은 왜 하필 쇼타인가”)라는 질문. 홍수정은 “하나의 가족 안으로 영화가 들어가는 방법”이 “어린아이의 몸에 상처를 새기는 것”으로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표한다. 내가 홍수정의 비평을 끌고 오는 것은 그에 대한 찬반의 어느 입장에 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질문을 영화의 다른 장면들과 함께 논의할 때 <어느 가족>에 대한 비평적 이해가 좀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쇼타의 추락하는 행위에는 서사적으로 어떤 ‘과잉’이 있다. 쇼타는 슈퍼에서 물건을 훔치다 걸린 유리(사사키 미유)가 잡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도망가다 다리에서 뛰어내린다. 그런데 그 행위의 결과만 놓고 본다면, 다리에서 뛰어내렸을 때와 그냥 잡혀서 경찰에 넘겨졌을 때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쇼타의 추락은 단순히 서사를 앞으로 전개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쇼타가 그런 행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상황을 극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삽입된 것이다. 그렇다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왜 ‘아이의 몸에 상처를 새기더라도’ , 쇼타를 다리에서 뛰어내리도록 한 것일까? 또는 무엇이 쇼타를 그리 절박한 심정으로 내몰았을까?

나는 쇼타의 행위에 어떤 ‘절연’을 위한 결단이 내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가족>은 이 사건을 전후로 해서 조금의 변화가 있는데, 초·중반부가 ‘노부요(안도 사쿠라) 가족’내부의 묘사에 집중한다면, 이 사건을 전후에서는 이들 가족이 사회의 시야에 ‘노출’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파장을 보여주는 데 치중한다. 쇼타는 가장 먼저, 아니면 가족 구성원 중 유일하게 ‘사회의 시선’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을 바라본 인물이다. 애초에 또래 어린이의 생활에 관심을 보이던 쇼타가 사회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유리와 함께 물건을 훔치다 “동생에게까지는 가르치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충고를 들으면서부터다. 그 한마디가 지금까지 쇼타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모든 것들을 뒤흔든다. 어쩌면 그 충고는 노부요 가족을 마치 혈연적 가족의 대안인 양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 했던 관객에게 그들의 ‘불완전성’을 상기시켜주는 계기일 수도 있다. 물론 이 불완전성은 그들이 ‘비혈연 가족’이라는 것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노부요 가족 속에서 성장한 쇼타가 미래에 어떤 청년으로 자랄까, 라는 질문, 또는 유리는 또 다른 아키(마쓰오카 마유)로 성장해 자신의 몸을 성적으로 팔면서 살아가지 않을까, 라는 질문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쇼타에게 건넨 충고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러한 이 질문과 맞닥뜨리게 하고, 노부요 가족은 ‘대안적’ 대신에 ‘불완전한’이라는 수식구와 만나게 된다.

결국 쇼타의 추락이라는 서사적 과잉은 이러한 불완전성에 대한 쇼타의 자각과 그로부터 자신을 절연시키겠다는 어떤 결단의 결과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에서 드러나듯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최근 영화들은 누군가 새롭게 가족의 일부가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는 경향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의 영화는 가족의 일부로 수용되는 대상이 아니라, 수용하는 부모(또는 유사 부모)의 입장에서 전개되곤 했다. 노부요와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쇼타의 행위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어느 날 갑자기 아저씨, 아줌마를 아빠, 엄마로 불러야 했던 두 어린 소년들에게 주어지지 않고 은닉되었던 질문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결국 쇼타의 행위에 담긴 질문은, 우리는 지금까지 (유사) 부모의 관점에서 가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거나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던 것이 아닌가, 라는 것이다. 쇼타의 추락과 함께 노부요와 오사무라는 (유사) 부모가 쌓아올린 세계는 허물어지고 만다. 물론 홍수정의 지적처럼 아이의 몸에 상처를 안긴다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가족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주체가 소년인 이상 그 결단의 몸짓은 결국 쇼타에게 주어져야 했던 것이 아닐까?

노부요 가족의 세계가 무너지는 후반부 과정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지금껏 구축했던 영화적 세계에 대한 자기 성찰적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느 가족>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영화를 집대성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로부터 한발 더 나아간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가족을 바라보고 문제를 제기하는 시선의 주체를 전환했다는 데 있다. <어느 가족>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중 가장 서늘한 작품처럼 느껴지는 것은 지금껏 자신이 구축했던 세계를 스스로 와해시키면서도 그것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의 영화적 시선 때문일 것이다.

노부요의 눈물과 침묵

취조실의 노부요의 모습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 중 하나로 남을 만큼 큰 정서적 울림을 준다. 노부요는 쇼타가 자신을 어떻게 불렀는지 묻는 경찰관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노부요의 침묵, 그리고 이어지던, “뭐라고 불렀을까요?”라고 말하던 그녀의 태도에는 자신이 생각하던 쇼타와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를 쇼타가 어떻게 생각했을지, 또는 사회적 시선이 이들 관계를 어떻게 판단할지에 대해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정말, 쇼타와 노부요의 관계는 무엇이었을까? 그 관계에 대해 마땅한 답을 갖지 못한 것은 노부요뿐만이 아니다. 그 질문 앞에서 말문이 막히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침묵할 때 우리는 그들을 감히 ‘가족’이라 부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우리는 유리의 몸에 난 상처 앞에서 아이를 꼭 안아주던 노부요(이 장면은 자신의 아픔과 동일한 상처를 가진 누군가를 감싸안는 행위처럼 보인다)가 해고를 감내하면서까지 유리를 지키려 하는 모습을 본다. 이러한 노부요의 모습과 더불어 (고레에다 영화에서 릴리 프랭크가 늘 그렇듯) 밝고 경쾌한 모습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오사무의 모습은, 노부요 가족의 비정상적이고 비도덕적인 모습에 눈을 감은 채 그들을 ‘온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이끈다. 노부요와 오사무가 자신들의 집단적 삶에 내재한 모순을 쉬 무시하며 엄마, 아빠가 되기를 바랐듯이, 관객 역시 온정적 시선 속에서 그들의 비도덕적이고 비정상적인 모순적 행태를 묵인해준 것은 아닌가? 쇼타의 추락은 이 맹목성에 눈을 뜨게 한다. <어느 가족>에서 가장 신랄한 묘사는 쇼타의 추락 이후 그를 버리고 떠나려던 노부요 가족의 모습이다. 만약 이 장면에서 그들의 행동에 어떤 당혹감이나 배신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당신이 온정주의 속에서 그들의 관계를 균형잡힌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노부요 가족의 해체 속에서 옳고 그름, 도덕과 비도덕,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흐릿해진 경계 위로 관객을 위치시킨다.

늘 아이들에게 아빠라 불리기를 원했던 오사무는 쇼타에게 “이제 아빠는 아저씨로 돌아갈게”라고 말한다. 그렇게 ‘어느 가족’의 구성원들은 각기 자신의 위치로 되돌아간다. 아니 흩어진다. 그들은 이제 각자의 삶 속에서 ‘또 다른 가족들’과 함께하는 삶을 통과해야 한다. 그 가족들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우리는 그 삶이 희망인지 비관인지 확정할 수 없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언젠가 움틀 희망의 싹을 포기하지 않는 듯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비관만이 가득한 현실 앞에 관객을 툭 하니 던져놓는 것은 작가의 윤리가 아니라고 믿는 감독에 가깝다. 그것이 쇼타가 버스 안에서 ‘아빠’라고 읊조리는 이유다. 쇼타가 그들과 함께할 때, 그는 최소한 고아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리워할 아빠, 엄마가 있으니.

언해피한 해피엔딩

구로사와 기요시의 호러 걸작이라 평가받는 <큐어> <회로> 등의 영화와 비교한다면, 최근 그의 영화는 현실과 상상의 세계가 뒤섞이는 설정 속에서 장르적 스펙트럼이 확장되는 경향을 보인다. <리얼 완전한 수장룡의 날> <은판 위의 여인> <해안가로의 여행>, 그리고 <산책하는 침략자> 등, 이러한 경향의 작품들이 그 이전의 호러영화에 비해 다소 날이 무뎌진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산책하는 침략자>의 엔딩과 그에 이르는 후반부 과정은 구로사와 기요시다운 문제 의식과 매력이 있다. 실제로 <큐어>를 되살린 듯한 <크리피>와 <산책하는 침략자>의 엔딩은 장르적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유사하다. 무너진 세상에 남겨진 부부의 모습을 담은 그 엔딩들 속에서, <크리피>가 구로사와 기요시의 현실 인식에 좀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면, <산책하는 침략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어떻게 버텨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에 좀더 가까이 자리한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큰 틀에서 <신체강탈자의 침입>(1956)과 유사한 설정에 의존하는 SF영화이면서도, 호러영화에서 시작해서 블랙코미디를 경유하여 로맨스영화로 나아간다. 게다가 팀 버튼의 <화성침공>(1996) 같은 SF 소동극이자 장 뤽 고다르의 <주말>(1967) 같은 희비극이기도 하다. 자유자재로 장르를 넘나드는 <산책하는 침략자>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호러에서 블랙코미디로 넘어가는 영화의 첫 시퀀스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아주 사소한 카메라의 움직임만으로도 일상에 내재한 불안과 공포를 끄집어내는 데 천재적인 감독임은 타치바나(쓰네마쓰 유리)가 일가족을 몰살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는 이 잔혹한 장면 바로 뒤에 온몸에 피를 칠한 타치바나가 거리를 배회하는 장면에서 시치미 뚝 떼고 호러영화를 블랙코미디로 전환시켜버린다. 왈츠풍의 무곡이 호러의 비극을 희극으로 전환할 때, 우리는 희비극의 부조리한 세계로 초대받는다.

<산책하는 침략자>가 여러 장르를 경유한다 해도, 궁극적으로 내게 이 작품은 로맨스를 가미한 멜로드라마다. 그것도 일반적인 장르영화라기보다는 후반부에 접어들면 점차 더글러스 서크풍으로 발전해가는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산책하는 침략자>에서 무표정의 신지(마쓰다 류헤이)와 달리, 나오미(나가사와 마사미)는 지속적으로 감정을 변화시키면서 영화 마디마디에서 그 표정을 우리에게 각인시키는데,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활기를 잃은 채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엔딩의 모습이다. 그 표정은 개념을 빼앗긴 다른 인간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소유의 ‘의’를 빼앗긴 청년, ‘자신’이라는 개념을 빼앗기며 남과 더이상 비교를 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경찰, ‘일’의 개념을 빼앗기며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로 돌아간 사장 등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개념의 족쇄에서 해방된 인간은 그 이전보다 더 활기차거나 평온한 표정을 짓는다. 오로지 ‘사랑’이라는 개념을 빼앗긴 나오미만이 활기를 잃는다. 하지만 영화 엔딩의 신지를 보자면 사랑은 개념이 아닌 ‘실천’이다. 그러니까 신지는 사랑을 개념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면서 그것이 실재함을 증명하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엔딩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나는 이 장면에서 더글러스 서크의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1955)의 엔딩을 떠올렸는데, 이는 무엇보다 그것이 기본적으로 ‘언해피한 해피엔딩’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결말에 이르는 과정에서 구로사와 기요시가 반복적으로 스크린 프로세스를 이용해 ‘현실의 비현실성’을 드러내려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물론 스크린 프로세스는 일본 특유의 촬영 제약 때문에 사용되는 것이긴 하지만, 프랑스에서 촬영한 <은판 위의 여인>(2016)에서도 이 기법을 사용했음을 염두에 둔다면, 단지 현실적 제약 때문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나오미와 신지가 집을 떠난 후 일련의 장면에서 그들이 탄 차 바깥의 풍경, 호텔 창문 너머의 흐릿한 광경, 그리고 절벽 앞에서 마주한 묵시론의 풍경 등에서 두 사람과 외부 공간을 이상하리만치 분리시키려 한다. 이 장면들은 지구가 종말에 이르는 과정이자 최상의 가치로서의 사랑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구로사와 기요시는 지구 종말을 막아내는 지상 최대의 가치로서의 사랑이라는 상투적 결말로 나아가면서도, 그것이 현실적 질감을 애써 지우려 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사랑이 쉽게 현실에 뿌리내릴 수 있다면, 그가 이전 영화에서 보여준 일상의 공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로사와 기요시의 세계와 사랑이라는 가치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추동시키는 능동적 기호로서의 ‘접촉의 금지’를 이야기한 바 있는데, 사랑은 ‘접촉의 승인’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나오미와 신지가 보여주는 사랑이라는 가치는 그의 영화적 세계를 뒤집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사람이 서로의 내밀한 영역을 공유할 수 있다는 믿음에 등을 돌리고 있는 감독에 가깝다. <크리피>에서 영화 후반부 니시노(가가와 데루유키)가 새로운 마을에서 또 다른 범죄 대상을 찾을 때 그가 눈여겨보는 것은 집의 배치다. 니시노는 사람의 마음 한켠에 있는 공허함이라는 빈틈을 파고들어 자신의 노예로 만드는 자이지만, 그는 굳이 특정 대상으로서의 사람을 찾을 필요가 없다. 이는 인간의 빈틈이란 어떤 누군가에게만 내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상 굳이 목표를 사람으로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인간은 그렇게 취약한 존재고, 그 취약함이 접촉의 금지를 만든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그 필연적 빈틈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달리 말해 <크리피>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절망의 상황 앞에 단지 살아남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부부가 그 처참한 현실을 어떻게 버텨낼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상투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해답. 구로사와 기요시는 ‘언해피한 해피엔딩’이라는 결말 속에, 사랑의 불가능성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신지가 나오미의 곁에 머무는 것처럼. <산책하는 침략자>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가장 이질적인 영화이자, 가장 구로사와 기요시다운 사랑영화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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