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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영화의 경계가 어디까지냐고 묻는다

카메라 앞과 뒤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37분만 견디면’ 극한의 재미를 느끼게 될 것이라고,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이하 <카메라>)의 관객은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리저리 튀는 가짜 피에 어색한 연기, 억지스러운 극진행은 초반 37분(이하 1부)을 차마 볼 수 없는 마구잡이 B급 좀비물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1부가 끝나는 순간, 마치 영화가 끝나듯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한달 전’이라는 자막과 함께 새로운 이야기(이하 2부)가 시작된다. 시답잖은 재연 프로그램이나 노래방 영상이나 제작하는 감독 타카유키(하마쓰 다카유키)는 어느 날 좀비 방송국 개국 작품으로 ‘원컷, 생방송’ 좀비물을 연출해줄 것을 요청받는다. 수없이 변주된 ‘영화 속 영화’ 구조가 더이상 낯설 리 없으니 2부가 1부 영상의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무렵, 영화는 ‘클라이맥스’(결국 3부)에서 ‘재미 폭탄’을 터뜨리기 위해 여기저기 장치들을 심기 시작한다. 민감한 장 때문에 고생하는 녹음기사 역의 배우, 아이돌이라며 토사를 뒤집어쓸 수 없다고 우기는 여자배우, 취하지 않으면 일을 못하는 촬영감독 역의 알코올 중독 배우, 자의식에 가득 차 감독의 연출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대는 남자배우,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구석이 없다. 여기에 원컷, 생방송이라는 제약조건까지 갖추니 폭탄이 터지기 시작하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이다. 생방송 시작과 동시에 3부가 시작되고, 영화는 우리가 생각했던, 아니 그 이상의 갖가지 사건들을 속도감 있게 엮어나간다. 하지만 잘려나간 팔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또 도끼질에 흩뿌려진 피는 어떻게 촬영됐는지, 믿을 수 없게 굴러가는 촬영현장을 킬킬대며 한참을 보다보면, 이 ‘마구잡이 B급 좀비물’을 만들기 위해 어느 순간 한마음으로 힘을 합치는 스탭들의 모습에 문득 가슴이 뭉클해지기까지 한다. 이렇게 안정적인 3부 구조 위에 재치와 감동을 겸비하고, 뿌듯한 엔딩까지 갖추었으니 <카메라>를 본 관객은 마음 편하게 극장 문을 나설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의 고민은 사실 여기에서 시작된다.

먼저 첫 번째 질문. 1부에서 여주인공을 좇던 핸드헬드 카메라는 좀비와 몸싸움을 벌이다 쓰러진 그녀와 부딪쳐 바닥에 떨어진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일한 촬영감독은 이미 좀비가 됐고, 불쑥불쑥 카메라를 들고 등장하는 감독은 차 안에서 몸싸움을 벌이느라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렇다면 여주인공과 부딪친 건 누구일까? 두 번째 질문. 좀비의 등장으로 아수라장이 된 가운데 갑자기 녹음기사가 좀비들을 향해 뛰쳐나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감독이 자신의 카메라를 들고 정면을 응시하며 “촬영은 계속된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라고 말한다. 그는 누구를 향해 말한 걸까?

영화를 차곡차곡 따라온 관객이라면 쉽게 3부에 등장한 (1부의) 촬영감독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대답하는 순간 1~3부의 안정적인 구조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1부와 3부만 떼어놓고 보면 그 균열은 더 명확해진다. 1부가 카메라 ‘앞’이라면 3부는 카메라 ‘뒤’에 해당한다. <카메라>가 명확하게 구획지어놓았듯 1부의 세계와 3부의 세계는 말하자면 ‘상호배제적이면서 동시에 전체포괄적’(MECE: Mutually Exclusive but Collectively Exhaustive)이다. 카메라의 존재를 슬며시 지우고 관객의 눈인 양 인물들을 (몰래) 지켜보게 만드는 건 영화의 기본 작동원리에 다름 아니다. 인물들의 정면(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영화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고안해냈기에 우리의 관음증적인 시선을 정면으로 되받아내는 작품들에 우리는 여전히 움찔하고 만다. 그런데 <카메라>는 그런 영화의 관습들을 무너뜨리려는 듯 3부의 세계를 1부로 밀어넣는다. 카메라의 존재가 드러나다 못해 영화 속 인물과 물리적인 충돌을 일으키고, 주인공은 정면을 응시하는 것을 넘어 카메라에 소리까지 지른다. 그저 조악한 좀비물을 만든다는 설정의 일환이라고 치부하기에 <카메라>는 앞서 길게 설명한 대로 생각보다 정교하고 단단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원컷’이라는 전제조건 역시 장면을 숏으로 쪼개 쌓아나가며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영화의 기본 원리에 대한 도전으로 읽힌다. <허핑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좀비물을 만들 때는 여러 장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컷을 나누어서 찍어야만 합니다. 그게 상식이죠. 저희 촬영 스탭들도 한컷으로 찍는 건 무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만두자’라고 말하면 더 타오르는 성격이에요. (중략) 그런데 그런 말을 들으니까 더 하고 싶었죠.” 말하자면 그는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을 낱낱이 분해한 다음, 수술대 위에 올려놓는다. 이때 그의 목표는 단 하나처럼 보인다. 이렇게 해도 ‘영화’로 성립할 것인가? 영화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여기에 ‘진짜 vs 가짜’의 힘겨루기가 영화를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왜 울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안약으로 거짓 눈물을 흘리는 배우의 얼굴에 ‘입원을 앞둔 고독한 실업가’라는 내레이션이 붙자 이야기가 성립하기 시작한다. 진짜 눈물을 요구하는 감독에게 배우는 확실하게 눈물을 흘리기 위해선 ‘가짜’ 눈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정반대편에서 <카메라>는 거짓이 아닌 진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배우의 만족스럽지 못한 연기에 감독은 ‘진짜’를 보여달라고 소리친다. 그런데 3부에 와보니 감독의 (가짜에 대한) 이 분노가 ‘진짜’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3부가 없었다면 우리는 1부에서의 감독의 분노가 진짜임을 알 수 있었을까? 반대로, 안약을 넣는 카메라의 ‘뒤’를 보지 않았다면 고독한 실업가의 눈물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또 우리는 배역에 지나치게 몰입해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감독의 아내를 어리석다 말할 수 있을까? “거짓 하나 없는 게 바로 영화야”라고 감독은 말하지만, 영화의 ‘뒤’를 보지 않는 한, 그러니까 모든 영화의 ‘3부’를 보지 않는 한,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고 <카메라>는 의심한다. 하지만 ‘3부’를 함께 보여주는 영화란 (별도의 메이킹 필름을 제작하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지 않는가. 결국 이 의심은 (좀비) 영화 속 감독을 연기하는 감독(타카유키)을 통과해 고스란히 우에다 신이치로에게 돌아온다. 그렇다면 가짜가 아닌 영화를 찍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과연 진짜를 찍는다는 게 가능할 것인가?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 하나로 무작정 상경해 노숙자 생활까지 하다 영화로 돌아온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에게 어쩌면 <카메라>는 영화를 하려는 자신에게 던지는 커다란 질문처럼 보인다. 그 안엔 영화(의 경계)를 의심하며 벗어나려는 원심력과 어떻게 해서든 영화 안에 머물려는 구심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부디 그 힘이 우에다 신이치로를 영화 안에 머물게 해 그의 다음 영화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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