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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중국의 신진 감독이 나올 때마다 붙던 ‘몇 세대’라는 수식어가 촌스러워진 지도 꽤 되었다. 지금은 중국의 모처에서 예상 못했던 인물이 툭 튀어나와 극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소개해 주목받는 시간이다. 중국 남부의 카이리시에서 자란 비간은 애초 시인을 꿈꾸었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책을 따라 <불안의 서>라 이름 지었던 시집은 심의 문제로 <노변의 피크닉>이란 제목으로 바뀌어야 했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SF소설에서 제목을 따왔나 싶겠지만, 기실 그 소설을 느슨하게 각색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1979)를 너무 좋아해 그랬다고 보는 게 맞겠다. 그리고 <노변의 피크닉>은 그의 데뷔작 <카일리 블루스>(2015)의 중국어 제목이 되었다. <잠입자>로 인해 감독이 된 시인답게 두 번째 작품 <지구 최후의 밤>(2018)은 척 봐도 시네필의 영화다. 한 강연에서 내가 했던 말- “<아비정전>으로
비간 감독의 <지구 최후의 밤>, <카일리 블루스>를 경유해 히치콕의 <현기증>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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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파브로 감독의 <라이온 킹>을 본 후 여러 질문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왜 25년이 지난 지금 <라이온 킹>을 리메이크했을까. 기본적으로 실사를 모방한 CG인 건 마찬가지인데 존 파브로의 <정글북>과 달리 동물들의 행동이 낯설고 어색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욘세가 부른 신곡 <Spirit>은 굳이 왜 필요했을까. 몇 가지는 즉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몇 가지는 숙고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남은 질문은 이거다. 1994년의 셀애니메이션을 보지 못한 이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일까. 그건 셀애니메이션을 먼저 즐긴 나로선 막연히 상상해볼 뿐 결코 경험하지 못할 미지의 영역에 있는 감각이다.
무서운 영화?
존 파브로 버전으로 <라이온 킹>을 처음 접했다는 이들의 반응을 수소문해서 몇 가지 확인해본 결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지루하진 않았다고 만족을 표하기도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갈림길에서 본 <라이온 킹>의 패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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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일부 장면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는 글입니다.
으스스함이란 무엇인가? 으스스함의 작동 원리는 서스펜스의 작동 원리와는 반대된다. 서스펜스는 히치콕의 말처럼 폭탄이 터질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의자 밑 시한폭탄의 초침을 보여줄 때 발생한다. 즉 서스펜스는 관객에게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발생한다. 그러나 으스스함은 관객에게 정보를 제한함으로써 발생한다. 예컨대 <팔로우>(2014)에서 느껴지는 으스스함은 관객도 주인공을 따라다니는 존재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데서 발생한다. 만약 이 미지의 존재가 낱낱이 밝혀진다면, 더이상 으스스함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단지 해결해야 할 문제만이 남을 뿐이다.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의 저자 마크 피셔는 으스스함은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질문과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없어야 하는 때에 있는 무엇, 있어야 하는 때에 없는 무엇, 돌연한 나타남 혹은 사라짐과 같은 것들이 으스스한 것들이다. 아이라 레빈의
<미드소마> 매혹적인 공포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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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의 그럴싸함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미국 코믹북 슈퍼히어로들이 대부분 그렇듯, 스파이더맨은 그럴싸함과 거리가 먼 존재이다. 방사능에 감염된 거미에 물린 뒤 거미의 능력을 물려받아 벽과 천장을 곤충처럼 붙어 돌아다닌다. 초등학생 수준의 과학지식만 있어도 이게 인간 크기의 동물에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 것이다. 직접 만든 유니폼을 입고 있다면 더욱더 그렇다. 수명이 긴 프랜차이즈가 대부분 그렇듯, 여기에도 그럴싸한 설명을 다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그래도 말이 안 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이더맨에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판타지와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그럴싸함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웹 스윙잉이다. 슈퍼맨은 그냥 하늘을 난다. 어떻게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난다. 퇴근 시간 지하철 안에 갇혀 있을 때는 부럽기 짝이 없는 능력이지만 전혀 감이 안 온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의 웹 스윙잉은 감이 온다. 스파이더맨은 정체불명의 능력으로 나는 게 아니다. 중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이 여전히 아이언맨의 자장에 머무는 일과 스파이더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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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이 스토리> 시리즈는 왜 부제를 달지 않을까. 4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그런 의문이 들었다. 3편까지는 그런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다. <토이 스토리>는 모두가 지나온 어린시절 한 페이지를 장난감에 투사한 성장 동화다. 영화마다 약간의 변주와 확장이 있긴 했어도 ‘아이들은 늘 장난감을 잃어버린다’라는 문장에서 출발한 상상이란 대전제만큼은 변함없었다. 굳이 과거형으로 표현한 것은 4편이 전작들과 결이 다른 세계관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무기질인 장난감에 ‘생명을 불어넣는 방식’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1, 2, 3편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시간에 대한 은유라면, 4편은 생명이 부여된 장난감들에 관한 직유다. 전자는 인간과 장난감의 관계를 통해서만 성립된다. 아이가 없으면 장난감도 의미가 없다. 후자는 장난감을 진짜 살아 있는 생물로 취급한다. 장난감 홀로 존재하는 독자적인 생태계가 꾸려지는 것이다. <토이 스토리4>는 전작의 여러 요소
장난감에 직접 생명을 부여한 <토이 스토리4>, 기본으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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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 영화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영화적 경험이란 과연 무엇일까? 미하일 하네케의 <해피엔드>는 지금껏 그가 선보여 온 모든 영화적 여정이 장면마다 담겨 있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몸 어딘가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겹다. 걷다가 이내 무릎이 뚝뚝 꺾일 것만 같다. 하네케는 이제 어디로 향할 것인가. 칸국제영화제에서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받은 <아무르>(2012) 이후 하네케는 모든 것으로부터 한뼘 더 거리를 두기로 결심한 듯싶다.
프랑스 북부지방은 역사적으로 영국과 인접해 양모가 수입되는 거점이었다. 근현대 국가로 기틀을 갖추기 전까지 오랫동안 릴을 비롯한 이 지역은 프랑스 왕조의 세력이 미치지 않았다. 오늘날의 벨기에, 네덜란드와 한데 묶여 플랑드르로 일컬어졌다. 수입된 영국산 양모가 바로 가공되면서 중세 직후 12세기부터 직물, 섬유산업의 중심지가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릴은 인구수로 프랑스에서 4번째에 불과하지만 가장 먼
<해피엔드>, 쉼표와 침묵 사이, 처절한 부르주아 가족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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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라짜로>를 보며 선명한 계급 격차를 의식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지주가 마을 사람들 전부를 속여 노동력을 착취하고 이주를 엄격히 금지한 사건은 분절된 두 부분을 잇는 주된 서사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계급 착취 문제와 이것이 영속되는 양상에 주목하지는 않을 작정이다. <행복한 라짜로>가 주는 감동은 명확한 현실 인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현실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원하는가. 그 이야기는 어떤 연유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가. 그것이 이 글의 관심사다.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는 실제 성인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렇다고 <행복한 라짜로>가 사전 지식을 요구하는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성경에 관해 알지 못하더라도, 어떤 성스러움에 관해 나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마을 사람들은 끊임없이 ‘라짜로’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 소리가 내겐 신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 소리처럼 들
<행복한 라짜로> 다른 세계와 접속하는 환희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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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서 라자로는 죽음에서 살아난 자다. 예수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 뒤 그의 마을을 방문한다. 이미 썩은 내가 진동하는 그를 죽음에서 일으켰다. 그는 예수 이전에 부활했으며 죽음과 삶을 통해 예수의 영성을 증명해냈다. 하지만 그의 부활을 통해 예수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오로지 보는 자들의 몫이었다. 누군가는 믿었고, 누군가는 여전히 의심했다. 믿음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의 태도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라짜로>에서 라짜로 역시 성서 속의 라자로처럼 자신을 보는 이들의 욕망을 성실하게 비춘다. 그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의 과정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끈질긴 착취의 역사 그리고 지금 이 세계의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서두의 낭만은 오해였으며…
<행복한 라짜로>의 시작은 낭만적이다. 가난하지만 대가족이 기거하는 집에 부족한 전구를 놓고 분쟁이 한창이다. 그때 창 밖으로 구애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방금 전까지 툭탁거리던 자매들
<행복한 라짜로>가 보여주는, 현재 경제구조 안에서 자발적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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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하네케는 자신의 열두 번째 장편영화 <해피엔드>에서 이전까지 했던 작업들을 한데 모으고 있다. 이를테면 작품 전반에 사용되는 ‘서스펜스가 동반된 퍼즐 맞추기’ 방식은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들>(1994)에서 이미 보았던 것이며, 햄스터가 죽는 오프닝 장면은 <베니의 비디오>(1992)의 돼지잡기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가족’이라는 기초 세포와 ‘타인’이라는 외부와의 관계는 <퍼니 게임>(1997)에서 보았던 대립의 양상과 비슷하고, ‘커뮤니케이션 가능성 없음’의 키워드는 <미지의 코드>(2000)에서 보았던 메시지와 같다. <피아니스트>(2001)에서 본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태도가 <해피엔드>에 일부 반복해 나타나며, <하얀리본>(2009)에서 보았던 반성적인 사유의 방식은 ‘난민 문제’와 만나서 새로운 주제를 드러낸다. 물론 가장 두드러지는 비교는 <아무르>
미하엘 하네케의 <해피엔드>가 보여주는 가족이 있는 신경증적 풍경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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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의 영화가 장르를 변주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봉준호의 영화에서 중요한 지점은 장르를 변주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장르 변주의 필연성에 있다. 이 필연성으로 인해 봉준호의 영화는 영화를 사유하는 영화가 된다. 지난 <씨네21> 1210호 <기생충> 비평 기획에서, 김영진 평론가가 이미 지적했듯, 봉준호는 “삶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또 다른 형태의 프로파간다”로서의 장르를 이탈한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장르적 규범은 현실을 왜곡하는 프로파간다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추리물은 근대적 사법제도와 합리적 이성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사건 해결을 통해 사회가 다시 안정을 찾는 결말이 있어야 한다. 이런 장르는 사회의 불합리에 대한 일종의 예방주사인 동시에 사회의 불합리가 교정되고 있다는 믿음을 주는 보수적 프로파간다이기도 하다. 만약 봉준호의 영화처럼 경찰이 진범을 찾는 것에 관심이 없거나, 피의자들을 고문해서 범인을 찾으려 한다면 이 장르는
<기생충>을 복기할 때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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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계급이란 없다. 신분만이 있을 뿐이다. 계급은 상승할 수 있다. 신분은 세습된다. 시험이라는 계급 사다리에서조차 가로막대가 사라지고 있다. 조건 좋은 월세방이 나오면 가난한 자들끼리 앞을 다퉈야 한다. 열심히 일해온 직장에서 쫓겨나도 해고 사유는 매끄러운 한 문장만 통보받는다. 뭘 잘못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알 수 있는 건 해고자 명단에 들 경우 어떤 신세가 되는지다. 연대해 저항하면 도매금으로 묶여 해고될 뿐이다. 힘을 합쳐 싸울 파놉티콘이 눈에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디지털과 금융자본이 대표하는 현대 권력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글로벌 가치사슬 중 어느 고리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연대할 수 있는 건 가족뿐이다. 개인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시스템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한다…. 이상은 <기생충> 이야기를 쓴 게 아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작 <레트로토피아>(Retrotopia)를 한국적으로 해제해본 것이다. 그에 따
<기생충>의 세계에 담긴 회귀 혹은 후퇴한 현재와 유동하는 약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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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봉준호만큼 자신의 영화를 명쾌하게 설명해내는 이도 드물다. 실은 적지 않은 감독 인터뷰가 영화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어떤 이는 자세한 설명을 거부하고 누군가는 일부러 모호한 미로를 만들기도 한다. 최악은 결과물보다 많은 의미를 말로 덧붙이는 경우다. 이런 경우 종종 장면이 아니라 말에 설득되는 때도 있다. <기생충>은 다르다. 솔직히 영화의 의미를 알고 싶다면 봉준호의 인터뷰를 읽는 것 이상의 정확한 가이드가 없을 것이다. 정교한 건축물처럼 영화를 설계하는 봉준호는 또 다른 의미에서 비평의 쓸모를 무력화하는 감독 중 한 사람이다. 어쩌면 그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 이토록 많은 말과 해석은 필요치 않을지도 모르겠다.
<기생충>과 관련하여 봉준호 감독이 남긴 무수한 말 중에 특히 눈에 들어온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칸국제영화제 수상 전 “이 영화에 대해선 여한이 없다. 할 만큼 다 했다”는 인터뷰였는데, 겸양의 표현이었겠지만 결과적으
<기생충>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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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 <보희와 녹양>은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중학교 1학년 보희(안지호)의 성장을 다룬 영화다. 영화는 어느 날 돌아가신 줄 알았던 아빠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보희가 동갑내기 단짝 녹양(김주아)과 함께 아빠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로드무비 형식을 취하고 있다. 외형상으로 얼핏 줄거리만 접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그렇고 그런 이야기라고 단정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주인공이 시련을 겪고 그 시련을 통해 성장하는 단순한 로드무비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이 영화가 돋보이는 점은 ‘영화 속의 영화’를 통해 영화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처음 이 영화를 보면서 의아했던 것은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두명의 남자(‘자살하는 남자’와 ‘모자 쓴 남자’)였다. 이들은 영화의 후반까지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들의 존재를 감독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왜 감독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이 두 남자의 뒷모습을 보여주는가
<보희와 녹양>의 오프닝 시퀀스의 두명의 남자, 두개의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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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면이 뿌옇다. 어떤 사태의 실체를 파악하기란 탁한 창밖을 내다보는 일과 같다고 말하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화면이 조금씩 선명해지면 차창 밖으로 취재진이 보인다. 저 기자들은 이번 사안을 선명하게 보여줄까. 영화 속 기자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취재하는 첫 국민참여재판의 부장판사가 누군지도 몰라본다. 실제 기자들이 그 정도로 수준 이하는 아니지만, 기자 생활 19년 중 8년 정도를 사회부에서 근무한 나는 이 장면이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범죄 관련 보도는 제한된 자료와 취재원의 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유명인의 비리 사건이 아닌 형사 범죄를 다루는 경우 더욱 심하다. 검경의 수사 결과 브리핑이, 언론이 보도할 수 있는 전부인 경우가 대다수다. 그 다수 중의 대다수는 법원 최종 판결이 아닌 수사기관의 영장신청 단계까지만 비중 있게 보도한다. 비난하기 쉽기 때문이다. 재판을 치르기도 전 ‘공소사실’은 종종 ‘사실’이 돼버린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한국 언론에 의해 수시로 훼
<배심원들>을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