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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버나움>의 매 장면은 ‘도대체 이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관객에게 끊임없이 반성을 요구한다. 혼돈의 도가니 ‘가버나움’으로 환유된 베이루트 길거리에 내던져진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과 그를 둘러싼 삶의 풍경은 영화를 보는 행위를 하는 것 마저 죄스럽게 만든다. 이 영화에 대한 호평은 특히 자신의 존재를 배역에 완전히 녹여낸 소년 자인에게 쏟아졌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힘은 신파적 스토리나 네오리얼리즘을 연상케 하는 형식보다 자인의 얼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다른 요소를 말하기에 앞서 그의 스타성과 존재를 증명하는 눈빛(김소희)을, 관객을 당황하게 만드는 카리스마(김혜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이 글의 쓰게 된 가장 큰 동력 역시 자인의 얼굴이다. 하지만 스타성이나 카리스마에 매료된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연기는 보통 배우들의 명연기가 주는 울림과 차원이 다르다. 많
<가버나움>, 베이루트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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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빈곤의 이미지에서 동정을 구하지 않고 사람들을 찌를 수 있을까. 빈민을 다룬 최근 영화들을 보면 각국 영화 제작자들이 같은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불쌍한 이미지가 넘쳐서 사람들이 더는 그에 자극받지 않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빈민을 보고 싶어 하지 않기에 다른 전략을 쓰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빈민을 다룬 영화를 볼 때,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다른 보기 방식을 적용한다. 현실을 잊는 대신, 현실에서 나의 위치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가 영화를 본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담기기 때문이며, 극영화인 이상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진 않을 거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즉, 현실에 대한 예감과 극화에 대한 신뢰가 동시에 작동한다. 영화 제작자가 고민하는 부분도 이것이다. 주인공에 대한 타자화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가버나움>이 취한 전략은 두 가지다. 소년의 말, 소년의 자세다. 이 영화는 자인 알 라피아가
<가버나움> 나는 고발한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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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결말에 관한 중요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년 만에 완성한 빅 픽처? 창작자들의 호기 어린 발언을 믿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언브레이커블>(2000), 그리고 앞서 나온 <식스 센스>(1999)를 다시 보면서 M. 나이트 샤말란이 시작부터 하나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브레이커블>의 주인공은 데이비드(브루스 윌리스)인데, 영화는 이상하게도 엘리야(새뮤얼 L. 잭슨)가 태어난 순간으로 시작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마도 쉼터 같은 곳에 머물렀던 듯하며, 흑인 아기의 문제를 보살피러 온 의사도 흑인이다. 그는 세상 낮은 곳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비극적인 운명을 부여받았다. 부여받았다는 표현은 다소 이상하게 들리겠으나, 그가 (예언자의 이름에 어울리게) 이후 풀어나갈 사명을 생각하면 그 표현이 맞는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세상에 나와 평생 그 몸으로 살아야 하는 그는 무엇을 해야
M. 나이트 샤말란은 <글래스>에서 니체를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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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에 예고란 없다. 그것은 대개 길이를 가진 시간이라기보다 단번의 찰나다. 정의감 넘치는 과학자의 경고 따위는 현실에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우주전쟁>(2005)은 이 같은 재난의 속성을 침략자에 빗댄 적확한 활유(活喩)였다. 밑도 끝도 없이 닥쳐와 누군가의 세계를 순식간에 소멸시키고 사라지는 것이 재난의 실체다.
그런데 어떤 찰나는, 인간의 부적절한 대응과 만나 영원으로 늘어나는 경우가 있다. 침몰하는 배 안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지만 당연하고도 마땅한 조치들이 이뤄지지 않을 때 그렇다. 구조대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다른 종류의 감정으로 바뀌어가는 시간, 혹은 뭍에서 발을 구르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해 무력해지는 가족들의 시간… 원작이 된 책 <어 타임 투 다이>(A time to die)의 제목이 말하고 있듯, <쿠르스크>는 무고한 인간이 마주친 찰나와 영원의 상대성에 대한 기록이다.
러시아 전략 핵잠수함 쿠르스크호는 2000
실제했던 재난을 관통해 <쿠르스크>가 도달한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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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북>은 제목 ‘그린 북’(흑인 여행자를 위한 가이드북)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이 영화가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를 다룰 것이란 걸 충분히 예상하게 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연출은 <덤 앤 더머>(1994)를 비롯해서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1998)와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2001) 등 특유의 코미디영화 연출로 잘 알려진 피터 패럴리 감독이다. 그동안 감독이 연출한 영화의 주제와 스타일을 고려하면 이번 영화 <그린 북>은 그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주제의 작품이다. 하지만 막상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인물의 상반된 성격(바른생활의 교양과 우아함을 갖춘 완벽한 천재 피아니스트/원칙보다 반칙이 우선인 주먹만 믿고 살아온 다혈질 운전기사)을 비교해보면 우리가 익히 보아온 전형적인 인물 설정으로 대략적인 이야기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린 북>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백인 운전기사 토니
인물 설정은 전형적인 <그린 북>, 낯섦은 어디에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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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미완성이야.” 빅토르(유태오)는 마이크(로만 발릭)가 자신의 음악을 칭찬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어떤 방점도 없이 툭 던진 이 말이 유독 귀에 박히는 건 그가 빅토르 최이기 때문이며, 빅토르 최는 우리에게 처음부터 완성형이자 완료형으로 너무 늦게 도착한 가수이기 때문이다. 한국에 빅토르 최가 알려진 건 그가 죽고 몇해가 지난 뒤였다. 한 방송 다큐멘터리에서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이어지는 러시아의 추모 열기를 조명하면서 빅토르 최 붐이 일었다. 우리에게 빅토르 최는 요절한 천재 가수이자 영웅의 이미지로 박제되었다. 전파를 타고 들려오던 밴드 키노의 라이브 공연 장면은 선명하지 않은 음질과 의미를 알 수 없는 가사에도 나의 뇌리에 박혔다. 오래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가 당시 부른 노래 제목은 <여름이 끝났다>였다. <레토>는 끝나버린 여름을 다시 출발점에 불러 세운다. ‘여름이 끝났다’고 노래한 빅토르 최 이전에 ‘여름’을 노래한 또 다른 뮤지션 마이크를
<레토>, 미완의 노래를 완성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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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프라이빗 라이프>는 지난해 10월 5일 공개된 타마라 젠킨스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다. 불임으로 고통받는 레이첼 비글러(캐서린 한), 리처드 그라임스(폴 지아마티) 부부는 전형적인 뉴욕 예술가 사회의 일원으로 “나이 마흔이 훌쩍 넘도록 여전히 임대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한” 경제적 불안 때문에 결정적으로 우디 앨런의 세계와 분리된다. 어쨌거나 영화는 아슬아슬하나마 끝까지 품위를 유지하려는 지식인의 태도로 불임 치료와 입양 절차를 동시에 전개해나간다. 그런데 뉴요커를 그린 많은 영화가 대사 중심의 서사적 디테일에 주력한 것과 달리, <프라이빗 라이프>는 영화적 장치와 리듬감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숏의 크기, 몽타주의 반복 등을 통해 <프라이빗 라이프>가 체득하게 만드는 삶의 지속태가 흥미로웠다.
인스타그램 사이즈와 풀숏
<프라이빗 라이프>는 두개의 상반된 이미지를 오프닝 시퀀스로 나열한다. 가장 먼
<프라이빗 라이프>가 사생활의 클리셰를 마주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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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마이클 베이가 ‘워 룸’이라는 별명을 가진 라이팅룸을 운영한다는 풍문이 할리우드에 떠돌았다. 유능한 시나리오작가들을 고용해 한자리에 모아놓고 <트랜스포머> 프랜차이즈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건 피치 못한 선택인 듯 보였다. 2014년 개봉한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4편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에 쏟아진 혹평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지난 2007년 첫 <트랜스포머> 영화가 로봇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의 신기원을 열어젖힌 이래 이 프랜차이즈는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명분 없는 액션 장면과 개성이 부족한 로봇 캐릭터, 지나치게 헐거운 플롯은 <트랜스포머> 프랜차이즈의 단점으로 누누이 지적돼왔지만 4편에 이르도록 해법을 찾지 못하고 지지부진했으니 그간 꾹 참고 영화를 본 관객의 인내심이 바닥날 법도 했다. 마이클 베이로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기였다. 아니
<트랜스포머> 시리즈 안에서 <범블비>의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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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같아서는 <아쿠아맨>보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이야기를 하고 싶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지난 10년 동안 나온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영화 중 최고작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 수없이 쏟아져 나온, 같은 유니버스에 갇힌 비슷비슷하고 둔중한 코믹북을 각색한 할리우드영화들이 지금까지 어떤 즐거움을 놓치고 있었는지 발랄하고 경쾌하게 정곡을 찌르며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분이 그렇다고 해서 고객의 요청을 멋대로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큰 그림에 무심한, 유니버스 속 성공작들
제임스 완의 <아쿠아맨>은 DCEU에 속해 있다. 이는 ‘The DC Extended Universe’의 약자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DC 확장 유니버스라고 번역한다. 매스컴에서는 DCEU가 MCU, 그러니까 ‘Marvel Cinematic Universe’의 라이벌이라고 생각한다. 두 진영의 팬들에게 할리우드는 이 두 세력이 싸움을 벌이는
DC 확장 유니버스에 힘 실은 <아쿠아맨>, 하지만 유니버스 존속보다 더 신경 써야 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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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면 현관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카메라를 향해 총을 겨눈다. <더 파티>는 이 강렬한 오프닝부터 제어장치가 없는 폭주 기관차처럼 70여분 동안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달려간다. 그리고 집이라는 하나의 한정된 공간에서 리얼 타임으로 달리며 모두를 파국으로 몰고 갈 비밀을 폭로하고 복잡하게 얽힌 갈등을 증폭시킨다. 파티에 초대된 어느 누구도 이로부터 숨을 수 없다. 마지막까지 등장하지 않는 마리안조차 말이다. 카메라는 경쾌하고 빠르게 움직일 뿐만 아니라 2.35:1의 클로즈업으로 우정, 사랑, 헌신, 배신, 회한, 의심, 위기, 투쟁을 가로지르는 그들의 표정을 현미경처럼 가까이에서 관찰한다. 그것은 냉철하면서도 친밀하고, 지적이고도 열정적이며, 세련되면서도 원초적이고, 비극적이면서도 웃긴 시점이다. 샐리 포터는 이 시선을 ‘법의학적 친밀성’(forensic intimacy)이라 부른 바 있다.
검은색과 흰색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새삼 황홀하게 느끼게 해주는 이
<더 파티>, 샐리 포터의 작가적 스타일이 정점에 오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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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될까 싶었다. 다짜고짜 만화 프레임을 집어넣고 말풍선 내레이션이 끼어들고 새로운 스파이더맨이 등장할 때마다 코믹스 커버가 타이틀로 등장한다. ‘BOW’, ‘BooM’ 같은 타이포그래피 의성어가 그래픽으로 화면 한자리를 차지하고 위기를 알리는 스파이더 센서가 간단한 선 몇개로 처리된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이하 <뉴 유니버스>)를 보는 내내 적재적소의 만화적 표현에 감탄하면서도 이런 식의 파격적인 접근이 제대로 이해될까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 중간에 킹핀의 에피소드가 짧게 처리되는 순간 문득 그게 다 쓸데없는 ‘지식과 관습의 저주’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스쳤다.
겹쳐지는 세계
<뉴 유니버스>는 고갈되어가던 시리즈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코믹스의 인기 캐릭터이던 흑인 소년 마일스로 옷을 갈아입어 활력을 더함과 동시에 히어로 팀이라는 트렌드도 재치 있게 반영한다. 이 모든 신선한 변화의 동력을 한 단어로 정리한다면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움직이는 그림(moving picture)이라는 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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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는 1896년에 초연한 이래 전세계에서 수천번 무대에 올랐지만, 영화로 만들어진 적은 거의 없다. <갈매기>가 무대에 최적화된 텍스트이고, 누가 연출하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결과물이 나오는 작품이기에, 영화화 할 엄두를 내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이번 영화화는 매우 성공적이다. 마이클 메이어 감독은 19세기 희곡을 각색한 뮤지컬로 토니상을 받았던 관록을 십분 발휘하였다. 여기에 시나리오작가 스티븐 카람과 의상감독 앤 로스가 합류하고, 아네트 베닝과 시얼샤 로넌이 캐스팅됨으로써 드림팀이 완성되었다. 영화는 원작을 충실히 옮기면서도, 영화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다. 1900년대 러시아 코스튬의 완벽한 재현과 러시아 전원의 아름다운 풍광이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한다. 4막에 해당하는 부분을 오프닝 시퀀스로 끌어오는 등 편집의 묘미를 살린 데다, 딱 떨어지는 클래식 음악의 사용으로 관객의 감정선을 매끄럽게 조율한다. 영화는 클로즈업을 활용하여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 각색한 마이클 메이어의 <갈매기>, 다른 듯 같은 서사를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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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하나의 장면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에피소드4 ‘황금빛 협곡’에서 한 사내가 노인을 총으로 쏜다. 쓰러진 노인을 보던 사내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새 한 마리가 창공을 비행하고 있다. 왜일까. 사내는 잠시동안 홀린 듯 새를 응시한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나도 홀린듯이 그들을 바라본다. 총구를 겨누던 긴장은 어느새 사라지고 새를 향한 아득한 시선만이 이 장면을 가득 채운다. 곧이어 사내가 시선을 거두고 노인에게 다가가자 그는 갑자기 죽음을 맞는다. 지극히 코언다운 죽음이다. 다만 그 직전에 등장한 새의 형상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매혹적이다. <카우보이의 노래>에는 이런 순간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누군가의 죽음의 직전에 찾아오는 미혹적인 순간들. 그것은 위기의 상황에 홀연히 등장하여 주인공의 넋을 낚아채고서 어디론가 멀리 달아나버린다. 그 장면들을 회상하며 <카우보이의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시
코언 형제가 <카우보이의 노래>에 담고 싶었던 삶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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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결국 복수의 이야기였구나’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상문(유재명)과 향숙(김호정)에게 고백한 밤, “마음 주지 말걸…. 처음부터 우릴 찾아오지 말지”라는 향숙의 한탄을 우연히 엿듣게 된 영주(김향기)가 바로 다음 장면, 커튼 뒤에서 나타나 승일의 침대 곁으로 다가갈 때 나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영주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은 채 가만히 누워 있는 승일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딸깍’ 하는 소리조차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잠시 후 서서히 포커스가 승일에게서 생명유지 장치로 옮겨가면 향숙에게 선물받은 영주의 머리 끈이 장치에 묶여 있다. 이상하게도 이 신은 영화 전체의 분위기와 맞지 않게 마치 스릴러영화의 한 장면처럼 촬영돼 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영주가 승일의 생명유지장치를 뽑고 (딸깍 소리를 내며), 자신의 ‘소행’임을 알리기 위해 머리 끈을 남긴 게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지
<영주>, 영주가 왜 그렇게 고통받아야 했는지에 대해 영화가 더 생각했어야 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