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드 아스트라>를 <지옥의 묵시록>(1979)과 대조하는 일은 자연스럽고도 필요하다. 그에 앞서 언급하려는 영화는 생뚱맞게도 한국영화 <1987>(2017)이다. 이 영화가 먼저 떠오른건 다음 장면 때문이다. 박 처장(김윤석)이 한병용(유해진)을 붙잡아 고문하는 남영동 대공분실 장면. 박 처장이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낸다. 한국전쟁 전 북한에서 지주로 살던 그의 부모는 동네에서 굶어 죽어가던 아이 하나를 거둬들여 먹이고 입혔다. 이후 ‘인민민주주의’에 투신한 아이는 박 처장의 부모와 누이를 “인민의 적”이라며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박 처장은 대청마루 밑에 숨어 이를 지켜봐야 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옆 고문실에서 넘어오는 처절한 비명이, 죽창에 쓰러져가는 박 처장 가족들의 외마디와 겹친다(적절한 시스템을 갖춘 극장에서만 제대로 들린다). 내재한 사운드와 외부에서 덧씌운 기억의 소리가 함께 울린다. 이로써 박 처장의 광기가 당대 공기와 공명한다. 음향 활용의 교과서로 꼽히는 <지옥의 묵시록>에서는, 첫 장면이 이와 같다.
<지옥의 묵시록>의 수송선에 작정하고 올라타다
윌라드 대위(마틴 신)는 전쟁에 지쳤지만 또다시 임무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기억 속 네이팜탄을 투하하던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와 현재 숙소에서 돌아가는 환풍기 날개 소리가 겹친다. 그의 얼굴과 침실 풍경, 베트남 전장은 카메라의 수평이동과 더불어 중첩된다. “사이공에 있을 때는 집에 가고 싶고 집에 있을 때는 정글로 돌아올 궁리뿐”인 그의 피폐한 전쟁 중독 상태가 음향 합성과 카메라 움직임, 디졸브 편집에 담긴다. <애드 아스트라>에서도 첫 장면이 이와 같다. 화면에 머나먼 별이 비치는가 싶더니 둥근 우주복 헬멧을 쓴 로이 맥 브라이드(브래드 피트)의 얼굴이 겹치고, 같은 실루엣의 지구가 카메라 수평이동과 디졸브에 의해 뒤따른다. 소리란 없는 우주에서 영화 속 사운드와 영화 밖의 그것이 서로를 넘나들도록 한 효과 역시 절묘하다. <애드 아스트라>는 <지옥의 묵시록>의 수송선에 작정하고 올라탄다. 그리고 명분에 중독된자 또는 그 집단의 광기를 말한다. 생각해보면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언제는 안 그랬나 싶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말처럼 영감을 받았다고만 하기엔, <애드 아스트라>는 <지옥의 묵시록>의 플롯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가져왔다. ‘<지옥의 묵시록> 우주 버전’이라 부르는 편이 차라리 정확해 보인다. 이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기에 앞서 이 영화가 차용한 수많은 작품들을 짚고 넘어가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의 인공지능 컴퓨터 ‘할’에서 빌려온 <인터스텔라>(2014)의 다중차원 공간 디자인은, <애드 아스트라>의 화성기지 조사실 설계에 활용됐다. 여기에 매튜 매커너헤이를 기용한 발상은 여간 짓궂은 게 아니다. <그래비티>(2013)의 태아 은유, 동료의 헬멧을 관통하는 피격, 지구 착륙 시퀀스도 대놓고 인용했다. <퍼스트맨>(2018)의 헬멧 이중창 반사를 통한 시점숏도 수시로 등장한다. 각각의 인용은 해당 작품의 맥락과 긴히 이어지는 듯 보이는데, <마션>(2015)에서 활약한 접착테이프까지 전격 캐스팅한 대목에 이르면 감독이 최근의 우주 진출 영화들을 놀려대겠다는 심산은 아닌지 의심도 든다. 이 영화의 인용들은 그래서 <마션>의 한 대사처럼, “Are you kidding me?”라는 문장이 지니는 다음의 두 가지 뜻 사이 어디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농담하는 거죠?” 혹은 “나 놀리는 거야?”
그렇다고 <애드 아스트라>를 메타영화라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이 노골적인 직접인용은 선행 작품들을 해체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심지어 영화 속 한 난파선의 모니터에서는 유성 영화 초기 작품이 흘러나온다. 테크놀로지가 영화 역사에 전환기를 가져온 시점에서부터 미국 영화사를 통째로 재구성하겠다는 야심일까. 그렇다면 <지옥의 묵시록>의 뼈대는 어쩌면 이렇게도 고스란히 가져온 걸까. 로이가 임무를 부여받고, 우주탐사에 이골이 난 윗세대(도널드 서덜런드)를 만나고. 이동 중 해적의 공격을 받고, 낯선 팀과 그 선장이 운항하는 우주선에 승객처럼 몸을 싣고. 임무를 발설하면 안 되는 이유로 팀원들과 갈등을 겪고, 항해 도중 다른 우주선을 점검하려다 불의의 사고를 겪고. 중간 기착지에서 자격을 의심받고, 끝내 목적지에 이르는 우주선에 몸을 싣고. 결국 ‘그’를 만나 임무를 수행하기까지, 이건 영락없는 <지옥의 묵시록>의 리메이크다. 그러고보니 올해는 <지옥의 묵시록>이 나온 지 40년 되는 해다. 40년 전 커츠 대령(말론 브랜도)이나 <애드 아스트라>의 클리프 맥브라이드(토미 리 존스)는 신념을 좇다 광인이 됐다. 로이가 자신의 아버지인 클리프를 찾아 떠나는 과정은 <인터스텔라>의 광인, 즉 만 박사(맷 데이먼)를 찾아나서는 얼개와도 유사하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무엇에 경고 신호를 보내려는 걸까.
관성의 법칙으로 밀려나가는 삶
<인터스텔라>의 인물들이 중력에 따른 시간의 상대성에 힘겨워했고, <그래비티>의 구원이 작용반작용의법칙에 지배받았다면, <애드 아스트라>가 광기의 기원으로 지목한 건 관성의 법칙이다. 우주에서 한번 던져진 물체는 다른 마찰력이 없는 한 같은 방향으로 영원히 나아간다. 누군가의 신념도 그렇다. 로이는 저 멀리 있는 아버지, 혹은 자신에게 묻는다. “왜 이 일을 계속하는 걸까. 왜 놓지 못하는 거지?” 클리프를 태양계 끝까지 날아가게 한 관성은 막을 수 없는 광기로 진행했다. 우리는 이런 관성을 주변에서 흔히 보곤 한다. <애드 아스트라>는 이처럼, 숱한 우주영화의 장면들을 따온 다음 우주 정글 속으로 꾸역꾸역 들어가며 써내려간 묵시록이다. 이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는 압도적인 추락의 이미지가 나온다. 바벨탑과도 같은 인류의 통신 안테나는 역설적으로 이 영화의 계시를 신호하는 설비처럼 보인다. 저 옛날 바벨탑을 쌓던 인간들은 커뮤니케이션 체계가 무너지는 형벌을 받았다. 프롤로그 속 통신 안테나는 외계 지적 생명체와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쌓였다. 앞서 클리프가 우주로 떠난 이유도 외계 생명체와의 소통을 꾀한 프로젝트 때문이었음을 떠올리면, 감독의 경고음이 향하는 지점은 명료해진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콘택트>(1997)에서 엘리(조디 포스터)는 아버지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이 넓은 우주에 지적 생명체가 우리밖에 없다면 공간 낭비 아니겠니.” 나는 칼 세이건으로부터 나온 이 대사에 멋과 낭만은 있지만 책임감은 없다고 여긴다. 우주 137억년 역사에서 인류의 역사는 찰나에 불과하다. 외계에 어떤 생명체가 있어서 우리의 찰나와 그들의 찰나가 동일시점, 동일지점에서 만날 확률은 0에 수렴한다. ‘어디에’ 만큼이나 ‘언제’ 존재하는지를 따져야 한다. 우주를 인식할 때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진리에 다가설 수 없다. 우리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천체과학 연구와 외계 생명체를 접촉하려는 시도는 그래서 구분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제임스 그레이는 여느 감독보다 과학에 가까운 SF를 인류 달 착륙 50주년에 내놓은 셈이다. 그 묵시록은 겉보기보다 엄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