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블록버스터를 좋아하는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으나, <애드 아스트라>는 분명 제임스 그레이 세계의 자장 안에 있는 작품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주에서조차 제임스 그레이의 인장이 고스란히 찍힌 영화다. 오랜 시간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를 따라온 관객이라면 그가 SF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그리 놀랍지 않았을 것이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레이에게 장르영화를 만드는 세공술이 장기라면 인물들의 심연을 그리는 건 태생적인 재능이다. 그의 영화의 중핵은 언제나 인물들의 심연에 있었다. 그러니 장르의 외피에 상관없이 인물 내면의 심연에 몰두해온 감독이 우주라는 심연을 만난다면 물 만난 고기처럼 자유자재로 유영하고 다니지 않을까, 하고 나는 내심 기대했다. 스스로의 좌표를 잃어버린 인물들이 광활한 우주를 부유하며 우리의 가슴을 내려앉게 만들겠지. 표현하기도 힘든 감정들이 온 곳에 스며들어 눅진해진 몸을 의자에서 일으킬 수도 없게 만들겠지. 적재적소에 들려오는 배경음악과 우아한 카메라 움직임이, 무중력 상태에서 유영하는 육체의 움직임과 만나 또 얼마나 헤어나오기 힘든 감정 속으로 우리를 이끌고 갈까. 영화를 보기 이전부터 나는 이리저리 감상을 가늠해보고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막상 <애드 아스트라>를 대면한 순간, 머리를 가격당한 기분을 피할 수는 없었다. SF 블록버스터의 명패를 건 영화가 이래도 되는 것일까. 태양계 외곽까지 간 최초의 인간이자, 한때는 영웅이었고 지금은 적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찾아 우주로 향하는 아들의 여정이 서사의 중심축이 될 것이란 사실은 예고편에서 확인했지만, 정말 그것이 거의 전부가 될 것이라고 나는 예측하지 못했다. 아니, 제임스 그레이의 오래된 서사가 우주에서조차 비슷한 형식으로 구현될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하겠다. 제임스 그레이의 전작을 본 관객이라면 모를 수 없는 사실 한 가지가 있다. 그가 이방인의 서사에 집중해왔다는 점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아버지와 아들 영화(들)
알려진 대로 제임스 그레이는 미국으로 이주한 러시아계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혈연적 계통에 대해 예민하게 인식해온 감독이다. 데뷔작 <리틀 오데사>(1994)부터 <더 야드>(2000), <위 오운 더 나잇>(2007), <투 러버스>(2008), 그리고 <이민자>(2013)에 이르기까지 제임스 그레이는 갱스터 범죄물이든 멜로드라마이든 그 영화가 입고 있는 장르에 상관없이 경계에 선 이방인의 서사를 그려왔다. 여기서 이방인이란 이주민의 역사 안에서 잉태된 비극적인 가족사와 직결된 인물이거나, 이민자 사회 안에서 미국의 질서를 수호하고 안착하려는 아버지의 질서에 따라야 할지, 가족의 굴레를 버리고 그 주변부를 부유해야 할지 선택해야 하는 경계에 선 자들이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어떠한 선택을 하든 그들은 사랑하는 이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운명에 휩싸이곤했다.
다소 말이 길어졌지만, 제임스 그레이의 전작들을 언급한 이유는 <애드 아스트라>에도 감독이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이민자의 역사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어김없이 이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관계 변화에 대해서는 조금 더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레이 영화에서 아들에게 아버지는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멀어질 수도 없는 세계의 질서와 동일시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잃어버린 도시 Z>(2016)부터 아버지는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를 빠져나와 새로운 세계로 향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물리적인 위치를 확인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다. 그러니까 기존에 속해 있던 세계의 경계를 벗어난 인물이 아들에서 아버지로 바뀐 것이다. <잃어버린 도시 Z>에 서구 문명을 앞선 문명의 흔적을 발견하고선 맹목적으로 아마존 밀림 속으로 이끌리는 아버지 퍼시 포셋(찰리 허냄)이 있다면, <애드 아스트라>에는 우주 저 멀리 이끌리는 아버지 클리프 맥브라이드(토미 리 존스)가 있다. 만약 <잃어버린 도시 Z>에서 퍼시 포셋의 아들 잭(톰 홀랜드)이 아버지와 함께 잃어버린 도시를 찾아 탐사에 나서지 않고 몇 백년이 흐른다면, <애드 아스트라>의 아들 로이(브래드 피트)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만큼 두 영화의 면모는 비슷하다.
두 영화의 아버지는 모두 미지의 세계로 이끌린다. 반면 두 아들에 관해서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잭 포셋은 아버지와 함께 탐사를 떠남으로써 아버지의 상징적인 질서 안으로 편입되지만, <애드 아스트라>의 아들 로이는 아버지에게 버림 받은 이후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었음에도 아버지의 상징적인 질서를 부여잡고 놓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가 우주비행사의 길을 선택한 이유도 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것이었고, 우주를 자신의 공간으로 받아들인 것도 그곳이 아버지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버지가 영웅이자 선구자로 추앙받을 때 그가 믿는 질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의 질서에 편승하며 “자기파괴적인 면”을 얻을 뿐이다. 말하자면 그는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스스로에게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실은 이 사실이 그레이의 어느 인물들보다 그를 위태롭게 만든다. 그러므로 로이는 아버지를 대면해야만 한다. 그것이 자신을 찾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애드 아스트라>는 여느 SF영화의 서사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운명에 대해 근심하며 영화를 출발시키지만 사실 인류의 운명에는 거의 무관심해 보일 정도로 로이의 내면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알다시피 인류의 운명에 무관심한 게 아닌 건 명백한 사실이고, 영화는 인류의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규격화된 방식으로 형상하고 있다. 그것은 통로다. 나는 어느 면에서 <애드 아스트라>가 우주 영화가 아니라 통로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을 지경인데, 이 영화에서 전혀 볼 수 없는 것이 우주의 초월적인 이미지라면 가장 자주 접할 수 있는 장면 중 하나는 인물들이 통로를 지나는 장면이다. 영화는 로이가 계속해서 공간들의 경계를 지나가는 장면들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우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내게는 부유하는 이미지보다 통로를 통과하는 육체의 움직임이 더 압도적으로 보인다. 실은 이러한 통로는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상당히 비중 있게 등장하곤 했다. 어둠에 잠긴 골목 또은 복도를 지날 때마다 제임스 그레이의 인물들은 비극적인 운명에 처하게 되고 그들의 주변세계와 그들의 내면은 무너지곤 했으며 그때마다 엄청난 파토스가 분출되었다. 하지만 <애드 아스트라>의 통로는 조금씩 다른 성격을 보유하고 있다.
영화의 초반부 로이가 첫 심리 진단을 할 때다. 그는 아주 편안한 상태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진술은 조금 믿기 어렵다. 그의 아내 이브(리브 타일러)가 집을 떠나는 세개의 장면이 그의 진술 사이에 삽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처음은 복도를 지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가고, 두 번째는 지나가는 그녀의 모습과 무력하게 이를 지켜보는 로이의 모습이 연결되어 보인다. 그리고 로이의 시점으로 멀리 서 있다 문을 열고 떠나는 이브의 모습이 포커스 아웃되어 보인다. 로이가 우주 안테나를 점검하러 나가는 장면들과 유사하게 진행된다. 이후 전류 급증 현상인 서지 사태가 최초로 발생한다. 그러니깐 로이 또는 로이가 붙잡고 싶은 인물들이 통로를 지날 때마다 로이의 세계는 조금씩 무너져간다. 화성의 지하기지 복도를 지날 때에도 해왕성을 향하는 기나긴 터널과 호수를 지날 때에도 그의 세계는 조금씩 무너진다. 그런데 그의 세계가 무너진다는 건 로이의 내부에 겹겹이 쌓여 있던 장막이 벗겨지는 과정과도 같다.
통로와 마찬가지로 <애드 아스트라>에는 기존의 우주영화들과 다른 면모들이 있다. 이 영화는 SF 장르의 외향을 두루 갖춘 것처럼 보이지만, 우주의 광활함을 위시하거나 무중력의 상태에서 아름답게 구현될 수 있는 신체 동작의 아름다움 혹은 그 유유한 리듬에 심취하지 않는다. 또한 로이가 달의 뒤편 어둠 속으로 진입해 완만한 언덕을 오를 때가 이전에 보이는 총격 장면들 혹은 자동차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보다 더 현기증이 난다. 사실 이는 얼마간 이상한 반응이다. 영화가 명백히 액션의 역동성을 발휘하고 있을 때보다 정적인 리듬으로 흘러갈 때 더 강렬하게 감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카메라 움직임의 역동성이 강조되거나 인물들의 액션이 화려하다고 해서 감흥이 증폭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애드 아스트라>를 보고 있으면 장르적인 쾌감을 의도적으로 억누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를테면 로이가 임무를 완수하고 귀환하는 장면에서다. 우주영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대목 중 하나는 주인공의 귀환 문제이다. 사실 이 장르의 긴장과 쾌감은 보통 이 지점에서 가장 고조된다.
담백한 귀환
그런데도 <애드 아스트라>는 너무나 심심하게 로이의 귀환장면을 보여준다. 해왕성에서 지구까지 날아왔는데 마치 아주 가까운 지역에서 이동한 것처럼,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편안하게 로이의 우주선은 지상에 착륙한다. 이 장면에서 <그래비티>의 장면을 떠올리는 이도 많은 것 같고 맥 빠진다고 불평하는 관객도 있는데, 나는 얼마간 그 반응들이 이해되지만 전혀 다른 감흥이 일었다. 이 담백한 귀환이 감동적이기도 하거니와 로이가 대지에 제대로 발을 딛지 못할 때 아버지와의 짧은 조우가 남긴 깊은 슬픔과 그가 우주에서 보낸시간이 체감되어 눈물을 참을 수가 없다. 물론 로이의 육체적 상태를 상투적으로 보일 만큼 자연스럽게 보여준 것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안일하게 남용되는 상투성과 공들여 대입하는 보편성은 분명 다르다. 게다가 실패를 인정할 수 없어 소멸되기를 원한 아버지를 우주에서 잃은 아들에게 애도의 시간을 주는 대신 환대의 시간을 먼저 부여한다는 건 위태로운 선택이다. 그렇다 해도 인류의 운명을 구한 영웅한테 대단한 긴장감도 없이, 환대도 없이 대단원의 막을 밋밋하게 내리는 결단은 여느 감독 내지 제작자가 내릴 수 있는 결단이 아니다. 그건 제임스 그레이고 브래드 피트의 조합이 아니면 쉽게 내릴 수 없는 결말이다. 또한 로이가 마지막 심리 진단에서 한 말이 나는 연약한 메시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고통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사랑하는 일이다. 우주의 심연에 아버지를 묻은 로이이기에 그 말은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