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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이하 <폴아웃>)을 표현할 때 제일 많이 보이는 언어는 ‘액션’이다. <폴아웃>이 과연 최고의 액션을 보여준 작품인가.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우선 최고의 액션을 정의하고 비교 및 계측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가능한가. 한편으로 액션을 잘 수행한 것이 좋은 액션인가, 반대로 단절된 몸동작 연기에 효과음, CG, 편집 등의 작업을 잘 입혀놓은 게 좋은 액션인가, 에 대한 대답도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를 것이다. 결국 액션에 대한 평가는 내 영역 밖이란 결론에 ‘쉽게’ 도달했다. 대신, 영화가 액션을 보여주는 방식을 먼저 살펴본 다음,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액션의 중심인 톰 크루즈가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읽어보기로 했다.
액션 하면 떠오르는 첫 작품이 D. W. 그리피스의 <동쪽 저 멀리>(1920)다. 클라이맥스에서 여자가 얼음판 위에 쓰러져 둥둥 떠내려가는 중이다. 릴리언 기시가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 액션 시퀀스의 특별함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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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송곳니>는 지적이며 독설적인 야심가의 작품이었다. 세상의 지배질서와 권력의 메커니즘, 그리고 그것에 길들여지고 순응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흡사 ‘황금족쇄’에 묶여 있는 무지한 자들의 블랙코미디로 그려낸 것이다. 영화에서 자본가이자 가부장으로 군림하는 한 남자는 아내와 아이들을 담장 높은 저택에 감금하고 훈육하며 살아간다. 저택 내부의 삶은 얼핏 안전하고 풍족해 보이지만, 그 유폐된 삶 이면은 왜곡된 성욕과 폭력, 지배와 복종으로 굴절되어 있다. 남자는 이제 곧 성인의 문턱으로 진입하려는 아이들에게, 담장 밖 세계는 야수와 괴물, 위험과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세뇌한다. 이 허술하고 터무니없는 거짓 논리는 아이들에겐 그 자체로 진리이자 세계가 된다.
<송곳니>에서 묘사되었던 이 왜곡된 세계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이후 선보였던 모든 영화적 세계의 요약이다. 비논리와 궤변, 금기
<킬링 디어>, 감정이 통제된 세계에서는 이미지가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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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이 열리자마자 펄떡거리는 심장이 시야를 육박해 들어온다. 혀를 날름대는 외계생명체와 같은 위협적 이미지로부터 카메라가 느린 템포로 트랙 백하면 수술 부위를 봉합하는 외과의사의 분주한 손길이 겹친다. 슈베르트의 <마태 수난곡>을 배음으로 깐 이 불문곡직(不問曲直)의 오프닝은 앞으로 맞닥뜨릴 상황과 정서를 다음과 같이 예고하고 있다. “이것은 유혈이 낭자한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이고, 심장의 박동과 멈춤(생명과 죽음)이라는 테마를 순환할 것이며, 서사는 작은 범위에서 큰 곳으로 옮아갈 것이다.” 예고는 현실이 된다. 에우리피데스의 고대 비극을 재작업한 것으로 알려진 <킬링 디어>는 주류영화의 미학과 정치학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신화에 대한 개작과 급진적인 재현 전략을 활용한다. 다다이스트의 호러 쇼라고 할 만한 이 우화를 통해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희생자를 격앙시켜 죄를 촉발한 측과 그에 희생된 측을 구별할 수 없도록 만드는 살육의 순환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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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디어>, 란티모스의 영화적 어휘와 비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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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새 영화 <킬링 디어>는 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는 그리스 비극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한다. 감독은 “거대한 딜레마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의 본능을 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나는 신의 시대가 아닌 현재에서, 자신의 자식을 죽이는 선택을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갖고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본 후 우선 떠오른 생각은 <킬링 디어>가 복수 서사의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피에타>(2012)에 대해 쓴 글에 따르면(<씨네21> 874호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그녀는 복수를 했는데 그는 구원을 얻었네”), 복수 서사의 성공은 계량화할 수 없는 ‘고통의 등가교환’의 문제를 창조적으로 돌파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2010)가 범인을 끊임없이 풀어
<킬링 디어>, 병을 알 수 없게 만드는 병원의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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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트맨과 와스프>는 여성 슈퍼히어로가 주인공인 첫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MCU)영화이다. 블랙 위도우나 스칼렛 위치와 같은 캐릭터들이 어벤저스 멤버로 등장하긴 했지만 그들은 단 한번도 자기 영화를 가진 적이 없었다. <에이전트 카터>와 <제시카 존스>는 텔레비전 시리즈다. 마블에서는 첫 흑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블랙팬서>에서 그랬듯, 2019년에 나오는 <캡틴 마블> 영화를 첫 여자주인공을 내세운 기념비적인 MCU 영화로 홍보하려고 하는데, <앤트맨과 와스프>가 그 김을 살짝 빼버렸다.
그렇다면 그 기념비적인 영화의 타이틀은 <앤트맨과 와스프>로 넘어가는가? 아니, 그 어느 것도 기념비적이지 않다. 생각해보라. 21세기도 거의 5분의 1이 지나가는 지금 초능력을 가진 여자주인공이 나오는 영화가 어떤 의미에서건 기념비적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이런
공식을 벗어나 현실적 디테일을 획득한 <앤트맨과 와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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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크레더블2>는 시대의 욕망을 잘 포장하고 상품화할 줄 아는 영리한 영화다. 생각해보면 픽사의 거의 모든 영화들이 그랬다. <토이 스토리>(1995)는 키덜트들의 향수를 공략했고 <니모를 찾아서>(2003)는 반려동물과 환경 문제를 연계시킨다. 2004년 <인크레더블>은 중산층 붕괴, 실직과 생계의 피로 등 당대 미국의 침체된 분위기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얼핏 세상을 뒤집는 역발상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 픽사의 상상력은 항상 속도조절을 해왔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는 온건한 권유 정도랄까. 물론 서 있는 시점이 바뀌면 풍경도 바뀐다. 다만 사실 그건 거울에 상이 거꾸로 비친 것일 뿐 픽사의 세계관과 구도는 언제나 익숙함을 전제로 해왔다. <인크레더블2>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위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해 캐릭터를 세팅하고 남녀의 위치를 전환시키지만 내막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훨씬 보수적이
<인크레더블2>, 픽사의 온건한 속도 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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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을 잠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버려야 할 것과 가져가야 할 것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로 숨도 쉬지 않고 안내 멘트가 쏟아졌다. 보험 판촉이었다. 보통 때 같으면 일하는 중이라고 둘러대거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종료 버튼을 누르곤 했다. 그런데 왠지 이번에는 정당하게 거절할 이유가 생긴 것 같아 바쁘게 쏟아지는 안내원의 멘트를 비집고 말했다. “안 되겠네요. 제가 외국으로 아예 나가게 됐어요.” 순간 영영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통신판매원의 말이 딱 멈췄다. 잠시 뒤 그녀는 말했다. “고객님 정말 잘되셨네요. 좋으시겠어요.” 이상한 반응이었다. “제가 어디로 왜 가는지도 모르시잖아요.” 하지만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어디든 여기보다 좋지 않겠어요.” 이상했지만 낯설지 않은 반응이었다. 외국에 나가는 것이 결정된 이후 나를 둘러싼 많은 여자들이 그렇게 말했다.
<오! 루시>의 세츠코(데라지마 시노부)에게서 나
<오 루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꾸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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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은 얼핏 지금의 청년세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금의 기성세대가 청년세대를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는지를 드러내는 작품에 가깝다. 영화 초반부 학수(박정민)가 <쇼미더머니> 오디션에 참가하는 일련의 상황과 그의 서울살이를 보여주는 몇몇 장면을 제외한다면, <변산>은 학수가 고향으로 내려가 자신의 어두운 과거 속에 가장 빛나는 순간이 있음을 깨닫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자신을 가두고 짓누르는 쓰라린 기억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하라고, 맞서 싸우라고, 그렇게 이겨내라고, 그럴 때 가장 빛나던 순간이 현재에 되살아날 수 있다고 말하는 영화가 바로 <변산>이다. 그것이 학수의 아버지(장항선)가 아들에게 뺨을 내어준 이유다. 하지만 <변산>에는 또 다른 아버지가 숨어 있는 것 아닐까? 무너뜨려야 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결국 그 품에 안기고 마는 아버지. 그것이 <변산>을 청년세대의 영
<변산>이 기성세대의 영화에 머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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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아이피>(2017)가 여혐 내용 때문에 집중적인 공격을 받을 거라고는, 박훈정 감독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몰랐던 것 같다. 박훈정은 <악마를 보았다>(2010)와 <신세계>(2012)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서커스를 다시 한번 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같은 서커스를 보는 관객의 태도가 바뀐 것이다. 서커스가 더 좋아졌다면 커버가 되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전 서커스가 재점검받아야 할 판이었다. 이 상황을 어쩔 것인가. 어떤 사람에겐 기회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손쉽게 주어진다. 박훈정은 <브이아이피>가 개봉되기 전에 이미 ‘한국판 <공각기동대>’라고 홍보했던 차기작 <마녀>를 준비 중이었다. 여혐으로 악평을 받았던 영화 다음에 차기작으로 여성 원톱의 ‘걸크러시’ 액션물을 내밀면 얼마나 그럴싸한 한방이 될 것인가. 하지만 여기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박훈정의 핸디캡이었는데
<마녀>, 박훈정 감독의 여성 캐릭터는 극복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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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이 <판타스틱 Mr. 폭스>(2009)를 3D로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을 때 사람들마다 해석이 분분했다. ‘3D 컴퓨터애니메이션이라는 건가?’, ‘아니, 아마도 3D 입체영화가 아닐까?’ 이후에 알려진 결과물은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이었다. 이런 혼선은 그 무렵 종종 일어났다. 팀 버튼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를 3D로 제작할 계획이라고 했을 때도 ‘스톱모션 신작을 하겠다는 말인가?’라는 추측도 끼어들었으니까. 그즈음은 정말 그랬다. 3D라는 말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정작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의 앞날은 어두웠다. 장편 스톱모션애니메이션 제작이 침체기에 들어갔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메이저급 규모의 장편애니메이션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원래 매년 일정 수량의 작품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것이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의 형편이었기 때문에 번영기와 침체기라는 사이클을 적용하는 건 의미가 없다. 다만 고되고 지루하고 손이
<개들의 섬> 웨스 앤더슨의 스톱모션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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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스토리>에서 당신이 본 것은 무엇인가.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기구한 삶인가, 그들의 몸에 남은 치욕적인 상처인가. 아픈 몸을 이끌고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간 여성들의 고단함인가, 뻔뻔한 일본 재판정의 법조인이나 반대시위자들인가. 그것을 마주한 당신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나. 심정적인 공감인가,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하지 않는 일본 당국에 대한 분노인가.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사명감인가, 적절한 피해 보상과 사과를 요구하는 데 동참하겠다는 다짐인가.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보았지만 어떤 것도 보지 못했고, 이 모든 것을 느꼈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허스토리>가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영화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투과한 세상의 이야기에 가까운데, 그렇다고 세상의 이야기를 위해 위안부를 소재로 이용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위안부 피해 여성의 사연은 영화의 모든 쟁점 속에서 단단히 중심을 잡는다. 영화
<허스토리> 미래의 통역자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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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위기는 예상 못한 지점에서 불현듯 치고 들어온다. 어쩌면 그건 갑자기 찾아온 게 아니라 잉크 번지듯 익숙한 의식 한구석을 점령하는 것 같기도 하다. 최근 몇편의 영화에 대한 글을 쓰다가 위기감에 휩싸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감, 밀도 등 비슷한 단어와 표현들을 남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스펜스, 스릴러, 호러 등의 장르영화를 연달아 봤기 때문이라고 위안해보지만 서로 다른 영화를 보고 같은 표현을 쓴다는 건 직업적으론 단어의 샘이 메말라가고 있는 위기 신호다. 그 와중에 문득 이상한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내가 보고 있는 영화들이 진정 다른 영화들인가. 대개 사람들은 같은 내용의 영화를 보고도 서로 다른 언어로 스토리를 설명하곤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완연히 다른 색깔의 영화를 보고 비슷한 지점에 도달한 건 하나의 징후로 읽을 수 있지도 않을까. 역량 부족을 통감하면서도 최근 몇편의 영화들이 지향하는 효과, 이른바 서스펜스에 대한 의구심이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와 <아직 끝나지 않았다>가 서스펜스를 대면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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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중생 A>에는 가정 폭력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 있다. 만약 이 장면에서 폭력을 그대로 보여줬다면,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원작 만화에도 영화에도 이 장면은 소리로만 표현된다. 특히 영화에선 방문 앞에 서 있던 카메라가 방문이 닫히고 미래(김환희)가 맞는 소리가 들리자 천천히 뒤로 물러난다. 바로 이 장면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멈춰선 카메라의 거리를 통해 따뜻한 감독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경섭 감독은 원작 만화가 보여준 이미지에 충실하게 영화를 촬영했다. 하지만 몇몇 장면에서 만화 텍스트가 보여준 이미지 외에 새로운 장면들을 추가해 영화적인 순간을 만들어냈다. 지금부터 그 장면들을 찾아가보려고 한다.
그날의 진실은
한 여학생이 텅 빈 전철 플랫폼을 따라 걸어가고 카메라는 그녀의 뒤를 따라간다. 그녀는 멈추고 가판대의 신문을 집어 펼친다. “여중생 A양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려, 2005년 10월 17일 그날의 진실은”이라는 신
<여중생 A> 속 카메라가 인물과의 거리로 보여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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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게 <버닝>은 일종의 성장영화다. 한마디로 실패한 성장담. 그것이 영화 엔딩에서 종수(유아인)가 벤(스티브 연)을 아버지의 칼로 찔러 불태우는 장면에 대한 내 입장이다. 오해는 말라. 나는 <버닝>을 실패한 영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입장은 오히려 그 반대쪽이다.
부서지는 아름다움
해미(전종서)는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다.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그런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 당장의 카드값도 해결할 수 없으면서 몇달을 모은 돈으로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오는 해미의 행동이 철없는 짓으로 느껴졌다면, 그것은 당신도 리틀 헝거라는 이야기다. 삶의 의미를 구하는 그레이트 헝거의 삶은 리틀 헝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이 현실이다. <버닝>의 리틀 헝거들을 보라. 동생의 안부를 묻기 전에 카드값 얘기를 먼저 꺼내는 해미의 언니, 오랜만에 만난 아들 앞에서 빚 얘기를 꺼내
<버닝>이 던지는 질문을 숙고함- 오늘날 영화의 형식은 어떠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