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의 진짜 이름은 막금이다. 딸 셋에 또 딸, 금이들의 마지막이었다. 곧 죽으리라, 아랫목에 밀쳐둔 핏덩이는 언니들이 몰래 흘려준 밥물을 먹고 살아났다. 영화 <사바하>를 봤을 때, 생과 멸, 선과 악 등 여러 종교적 상징을 둘러싼 한국적 오컬트에 대한 매혹에 앞서, 단번에 이 일화가 떠올랐다. 이름 없는, 그러나 죽지 않은 여아 ‘그것’은 이것과 저것의 이분법에서 배제된 존재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것은 저것이 되고 저것은 이것이 되는 회로를 상기시킨다. 등록되지 못한 ‘그것’은 이미 죽은, 인식되지 않는 여아들을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강조컨대 여아 살해는 무던히 행해지는 가부장제 문화의 일부이다. 그러나 영화 <사바하>에서 대비되는 1899년과 1999년은 특별한 뜻을 함축한다. 1899년은 불사(不死)를 염원하는 남성이 태어난 해이다. 이때 식민의 전야 조선에 근대화의 상징으로 전차와 철도가 놓였다. 그리고 새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 ‘고것’이 태어난다. 이 시기 여전한 남아선호와 산아제한에 더해 산부인과 초음파 기술이 결합하여, 출생성비가 최악으로 불균형했다. 이제 2014년, 신에 가까이 간 사나이는 열반에 이르지도 영생을 얻지도 못하고 그저 살아 있다. 그리고 여아들은 매번 건너는 터널의 시멘트벽 속에 시신으로, 늘 올려다보는 대들보 위에 귀신으로 있다. 그러니까 100년을 격하여, 1899년생 남성이 영원히 살기 위해 1999년생 여아를 말살시킨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육손(이 영화의 영문명이기도 한 ‘The Sixth Finger’)에 피를 묻히지 않고, IMF 금융위기를 통과하고 성인이 된 1980년대생 아들들의 손을 빌린다. 아들들은 어머니의 노동에 기생하면서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였던 아비를 맨손으로 죽였다. 그리고 “군인의 살생은 애국이라”를 외치는 스승을 진짜 아버지로 섬겼다. 이 아버지는 일본의 식민지를 거친 근대성의 현현에 다름없다. 나아가 그는 인과론적인 선형적 시간을 지배하려고 했다. 그리고 초남성적 독재를 통과하며 실제로 무기(武器)까지 손에 쥐게 됐을 것이다.
1과 2로 성별화된 삶
이렇게 영화의 서사를 한국의 역사와 놓으면, 알다시피 “장군님이 지켜주십니다”는 거짓이다. 오히려 사천왕들, 그 아들들이 그를 동서남북으로 지키며, 분단 이후 사면이 막힌 한국의 경계를 드러낸다. 이들 식민지의 반향으로 경제발전을 우선하는 군사정권의 후손이 “아버지 지켜드립니다”를 되뇌는 것이다. 이때에 주민등록번호 제도에 근거하여 국민 개병제(皆兵制)가 실현됐다. 그렇다면 영화 <사바하>에서 여아 살육의 명부가 성별 지칭이 숨겨진 주민등록번호였던 것도 허술한 설정만은 아니다. 1과 2로만 배치되는 성별화된 삶과 죽음에서 이들 ‘아들-군인’들만이 진짜 국민이 될 수 있다.
여기에서 금화(이재인)는 마지막 남은 아들이 달성해야 할 미션을 방해하는 뱀이었다. 등록되지 않은 ‘그것’은 기어이 죽지 않은 여아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모두 아버지로부터 사주받은 여아 멸절의 사명을 흔들리게 한다. 애초 불길한 징표라던 ‘그것’의 육손은 아버지의 진짜 면모를 확인하게 하는 표식이 된다. 영화 <사바하>에서 아버지의 육손은 신성(神性)이지만, ‘그것’의 육손은 그의 몸을 뒤덮은 검은 털과 함께 비(非)인간적인 것이었다. 징병을 수행하는 건강한 젊은 남성성이 국민됨의 자질이라고 말하는 국가는 이 정상성을 훼손하는 존재들에 적대적이다. 그럼에도 소위 비정상성이 아버지에게도 찾아지는 것은 그 기준이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말해준다.
결국 ‘그것’은 식민지의 영향이 드리운 군사주의적 유신(維新)과 개발주의에 근간을 둔 근대성의 유산으로 없어져야 했던 존재들의 이름이다. 실제로 수많은 말띠나 범띠 여아들이 남자아이들의 기운을 저해한다는 주술적 이유로 태어나지 못했다. ‘그것’과 같이 여아, 장애인, 규범적 신체를 가지지 못한 자, 말할 수 없는 자들이 국가주의라는 공익(公益)과 경제적인 쓸모 등 우생학적 논리에서 배척됐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소녀의 몸에 깃든 뱀을 잡아라”고 했다. 이 계시는 눈에 보이는 표식을 쫓게 하여, “너희가 피 흘릴 때 같이 울고있는 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한다. 갇힌 ‘그것’의 울음은 사람도 짐승도 아닌 기괴한 소리로만 들렸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은 여성이다
단지 금화와 같이 살아남은 여성들만이 이 극단적인 출생성비에서 대대적인 여아 살해를 알아챘다. 실로 ‘그것’과 금화는 마귀이면서 동시에 수호신인 뱀으로, 이 둘은 서로 똬리를 틀고 있다. 이 둘 중 누가 진짜 뱀인지 부자(父子)가 격론할 때, 이 뱀들은 상대를 미워했다가도 결국 서로를 지킬 수밖에 없다. 아들들의 죽음을 밟고 홀로 영원히 살려는 아버지와 달리, 이 여성들은 더불어 살거나 또 죽고자 한다. “언니도 같이 죽여주세요. 다음 생엔 사람으로 태어나게”라는 금화의 말은 여성도 사람답게 함께 살자는 소망에 다름없다. 2015년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는 호전적인 여성들이 온라인에 등장한 후,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으로 “나도 오늘 우연히 살아남은 여성이다”를 외치는 수많은 금화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최근 여성이 가시화된 것은 페미니즘 리부트 혹은 페미니즘의 대중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2017년 촛불혁명으로 정점을 찍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이미 촛불소녀들이 있었다. 그들은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효순·미선 압사사건과 2004년 대통령탄핵소추안 통과 반대, 그리고 2008년 미국산쇠고기수입협상 철회시위 등 모든 현장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여기’ 여성 섹슈얼리티의 동원과 착취를 끝장내는 임신중단권 쟁취와 디지털성범죄 근절을 위해 여전히 광장에 있다. “아버지는 등불이십니다”가 아니라, 이들이 들었던 촛불이 바로 민주주의의 완성을 말하며 계속 타올랐던 것이다.
‘그것’들의 목소리를 들으라
그럼에도 아들들을 내세워 불사를 꾀하는, 뱀이 된 용들이 여전하다. 청년 문제를 젠더 갈등으로 호도하고, 초저출산을 단지 하향결혼을 기피하는 여성 문제로 일컫는다. 사실 젠더 모순은 단지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실패뿐 아니라, 인간을 젠더화시켜 자원으로 소모하는 식민지 근대성에 기인한다. 영화 <사바하>는 “너희가 아비라 부르는 그자가 뱀이니 그를 죽여라”고 했다. 자신만의 불사를 꾀하는 아버지의 늙지 않는 얼굴을 확인한 아들은 이제 “네 목숨이 백개라도 모자란다”라고 변모한다. 결국 미륵이라던 남성은 뱀이 되고, 뱀이라던 여성이 허물을 벗고 여래가 되듯 말이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리라는 ‘그것’의 예언은 인간으로 신이 되려는 욕망이 땅과 하늘을 나누었음을 폭로한다. 그러니 죽었어야 할, 마지막이라는 여아들은 민족과 국민, 그리고 시민에 여성을 위시해 소수자들도 포함되는지 질문하는 자이다. 더 나아가 그 대표적 얼굴이 특정한 남성일 뿐임을 고발한다. 마지막 ‘그것’이 인간의 육신을 미련 없이 떠날 때, 그의 분신 금화는 오래 울었다. 마침 들려오는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축포는 다른 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소리이다. “왜 이제야 오느냐, 너무 많은 피를 흘리었구나”, 이제 ‘그것’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