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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주체성을 잃은 인간들

구속된 사람들의 왕국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를 흥미롭게 만드는 지점은 은유가 아니라 과장이다. <송곳니>(2009)의 억압적인 가족은 독재국가를 은유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제도 자체에 내재한 독재적 요소에 대한 지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 랍스터>(2015) 또한 판타지가 아니라 과장을 통해 드러난 규율 사회의 한 단면으로 볼 수도 있다. <송곳니>와 <더 랍스터>, <킬링 디어>(2017)는 모두 가족 혹은 사적 관계 내의 권력 혹은 규율을 포착하는데, 이 규율은 인물과 동화되어 인물들을 기계처럼 만든다.

조르조 아감벤은 미셸 푸코의 디스포지티프(장치)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오이코노미아’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오이코노미아는 원래 ‘가정의 관리 또는 경영’을 의미하지만, 아감벤은 이를 “인간의 행동, 몸짓, 사유를 유용하다고 간주된 방향으로 운용, 통치, 제어, 지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실천, 앎, 조치, 제도의 총체”라는 의미로 확장해 정의한다. 오이코노미아는 <더 랍스터>에 등장하는 호텔이 의복을 획일화하는 것처럼 개인적인 부분의 통제, 육체와 행동에 관한 규율에서 시작된다. 또한 오이코노미아는 언어, 의식, 유희 등을 포함한다. 란티모스의 영화는 말하자면 오이코노미아의 지배와 균열을 보여준다. 위 세 영화에서 인물들이 기계처럼 행동한다면, 그것은 인물들이 기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킬링 디어>의 페티시즘은 인간을 육체, 즉 물질로 환원한다. 스티븐(콜린 파렐)이 마틴(배리 케오간)에게 건네는 시계는 심장의 대용품이며, 육체는 페티시의 대상이자 소유의 대상일 뿐이다. 스티븐과 안나(니콜 키드먼)의 섹스에서 안나가 물질만이 남은 인간(시체)을 연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질은 대체 가능하며, 그렇기에 안나는 “아이는 또 낳으면 된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합리적 결론을 도출할 뿐, 자유로운 선택을 하지는 못한다.

주체가 없는 게임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서의 인물들은 표면적으로는 전작의 인물들과 달라 보인다. 앤(올리비아 콜먼)과 애비게일(에마 스톤), 사라(레이첼 바이스)는 모두 정념을 가지고 있으며, 셋 모두 각자 다른 욕망을 향해 움직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인물을 포함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주권자의 지위를 갖지 못한다. 영화는 새 사냥, 오리 경주, 무도회 등 귀족들의 유희를 세밀하게 보여준다. 귀족들의 유희를 보여주는 건 단지 귀족들의 비도덕성이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표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귀족들은 유희의 대상인 오리를 자신의 분신처럼 들고 다니는데, 그들이 오리와 다르지 않음을, 즉 귀족들이 유희의 주체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귀족들이 무도회에서 추는 우스꽝스러운 춤은 일종의 의식처럼 보인다. 유희는 귀족의 의식이자 언어이며, 유희를 통해 귀족은 귀족임을 확인받는다. 애비게일이 능숙하게 새 사냥을 하는 시점과 권력을 가지게 되는 시점이 일치하는 것은 이 점에서 상징적이다(새는 권력에 희생당하는 생명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희 속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귀족들은 유희라는 장치에 속박된 존재들이다. 김혜리 기자의 표현에 따르면 귀족들은 체스를 하는 주체가 아니라 체스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은 모두가 체스의 말일 뿐 아무도 체스를 하는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라 또한 마찬가지다. 앤은 사라의 꼭두각시지만, 동시에 사라는 앤의 인형이다. 사라와 앤의 애정 관계에서 사라가 우위를 차지하는 것 같지만, 실상 사라는 오직 앤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앤을 거스를 수 있다. 앤은 퇴행적이며, 그렇기에 사라는 앤을 쉽게 조종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라는 대체 가능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사라와 앤이 사라가 말을 타고 등장했던 모습을 이야기하는 시퀀스에서, 정작 화면은 말을 타고 약초를 찾는 애비게일의 모습을 보여준다. 말을 타고 등장한 사람이 꼭 사라일 필요는 없다. 사라의 애국심에 대한 맹목적인 태도는 이 지점을 보지 못하게 한다(사라는 “사랑에는 한계가 있”지만 “애국심에는 한계가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승리했다고 믿는 애비게일도 다를 바 없다. 그는 자신이 게임의 주체라고 믿지만, 실상은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는 존재일 뿐이다. 애비게일이 궁으로 들어오는 장면에서 애비게일은 마차에서 떨어져 진흙에 빠진다(그 후로도 그는 끝없이 떨어지고 넘어진다). 그리고 “이 진흙은 고약하다”라고 말한다. 왕궁이라는 세계는 고약한 진흙의 세계다. 사라와 앤이 진흙 목욕을 하는 장면은 진흙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제8장의 제목인 ‘잠들어서 여기 빠지면 어쩌지?’도 사라가 겪는 위험을 암시하지만, 한편으론 애비게일이 빠져 있는 수렁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애비게일은 자신의 삶이 꼭 미로 같다고 말한다. 벗어난 줄 알았는데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애비게일의 말처럼 궁의 외부와 내부는 미로처럼 구성되어 있고, 어안렌즈는 공간을 왜곡해서 곧은길도 굽은 길처럼 보이게 한다. 애비게일이 앤의 휠체어를 밀고 가는 신은 어안렌즈로 촬영했는데, 앤과 애비게일은 중앙으로 갈수록 점점 커지다 다시 점점 작아진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와 상응한다. 애비게일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발을 주무르는 시녀가 권력을 누리다 결국 다시 발을 주무르게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발로 토끼를 누르던 애비게일은 마지막 순간에야 자신이 그 토끼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채워질 수 없는 욕망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앤과 애비게일, 그리고 토끼가 오버랩되는데, 재미있는 지점은 여왕 또한 여왕 자신의 소유물인 토끼와 겹친다는 점이다. 궁에 갇혀 사육당하는 토끼는 여왕의 다른 모습이다. 다시 말해 여왕 또한 포획된 존재이며 왕궁의 소유물일 뿐이다. 앤이 겪는 고통과 고립의 근원적인 이유다. 사라와 앤이 섹스를 하는 장면에서 앤은 사라의 손을 마치 먹을 듯이 입에 넣는다. 앤이 게걸스럽게 케이크를 입에 넣는 장면과 유사하다. 앤은 사라의 육체를 음식처럼 소유하려 한다. 앤이 음식을 먹는 행위는 완전한 소유를 위한 것이지만, 앤이 음식을 먹는 즉시 그의 소유는 사라진다. 그렇기에 앤은 끝없이 먹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앤의 소유욕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앤의 소유욕은 애초부터 충족될 수 없기에 앤은 그토록 벗어나고 싶은 고립과 고통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사라와 애비게일은 권력을 위해 투쟁하지만 그들은 파동만을 일으킬 뿐 흐름을 바꾸지는 못한다. 흐름 속에서 배경처럼 존재하는 인간들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의 아름다운 미술이 동원된다. 인물들은 화려한 배경과 동화되고, 부감숏과 광각렌즈는 배경이 되어버린 인물들을 조망한다. 이로써 모든 인물은 왕궁의 소품이 된다. 이와 반대로 배경이 보이지 않고 인물만 보이는 장면이 있다. 사라가 앤의 침실 바깥에서 용서를 구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이 순간, 사라의 배경은 사라지고, 사라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며,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된다. 포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짧은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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