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염려와 불안에 마음을 졸여도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 밥을 먹는다는 것, 잠을 잔다는 것. 어른도 아이도 순전히 오롯한 그 행위만으로 힘을 얻고 새날을 살아가게 된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이 개봉했다. 다양한 관객층의 호평을 받았던 전작 <우리들>(2015)에 이은 두 번째 장편영화이자 <사루비아의 맛>(2009)이나 <콩나물>(2013)에서처럼 아이들, 특히 소녀들의 세계를 다사롭게 바라본다는 점에서 윤가은 세계의 확장편이다. 벌써부터 ‘우리 유니버스’니 ‘윤가은 유니버스’니 하는 팬들의 애정 어린 호명이 돌고 있다. 천진한 아이들의 세계, 하지만 조금 불친절하고 거친 세상, 다세대주택과 좁은 골목길이 즐비한 동네, 햇볕 쨍쨍한 여름 한낮의 풍경 등 윤가은 감독이 보여준 요소들이 이번 작품에도 고스란히 담겼다. 어쩌면 자신도 예상치 못한 호평과 주목을 받은 첫 작품 이후로 나아가야 했던 윤가은 감독에게 <우리집>은 우선은 먹고 봐야 하는 밥 같은 영화였을 것이다. 불안하고 두려워도 밥을 먹고 잠을 자듯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단계라는 점에서다.
스스로의 집을 만들어가는 소녀들의 행보
집이란 그 안에 살기 위한 건물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안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추상적 공간을 의미한다. 집은 있지만 가족들 사이에 서서히 균열이 일기 시작한 가족이 있다. 화목하고 따스하지만 살 집이 사라질 불안 앞에 놓인 가족도 있다. 영화는 그런 우리들의 ‘집’을 지키기 위한 소녀들의 분투와 결행을 다룬다. 하나(김나연)는 다툼이 잦아진 부모의 불화를 막기 위해 한때의 행복한 순간을 상기시키는 가족여행을 소망한다. 잦은 이사가 싫은 유미(김시아)와 유진(주예림) 자매는 지금 사는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계속 살아가고 싶다. 우연히 마트에서 만난 하나와 유미 자매는 가까워지고 각자의 ‘우리집’을 지켜내기 위해 머리를 모은다. 상자를 하나하나 쌓아가듯 뭐든 하다보면 되지 않을까. <우리집>은 집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집을 만들어가는 소녀들의 행보를 격려하는 영화다.
이번 작품에선 전작 <우리들>보다 조금 더 연령이 낮은 유미, 유진 자매를 등장시켜 7~12살 사이의 아이다운 논리에 더 충실하려 했다. 하나, 유미, 유진이 육교를 중심으로 한 공간에서 장난치고 해맑게 웃는 장면에서는 아이다운 무구함이 주는 선하고 강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아이의 시선으로 어른의 세계를 바라보되 냉소나 비판이나 포기는 없다. 영화는 현실 논리의 불가피성에 대한 불안함을 감지하되 그것과 마주할 각오와 용기를 낸 아이들을 세계로 떠나보낸다.
현실에 있을 법한 것들을 보다 자극적으로 제시하는 상업영화의 관습과 달리 경험함직한 소박한 풍경과 정서를 보다 무공해적인 시선으로 펼쳐내온 윤가은 감독의 영화가 세대를 불문한 환대와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은 201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사실 뜻밖의 일이다. 2015년 <우리들>에 대한 관객의 한결같은 호의는 한국영화계의 일탈적 현상에 가까웠다. ‘잃어버린 동심의 풍경’이라든지 ‘아이의 시선에 맞춘 사려깊은 관조’로 대중의 호감을 설명하는 방법은 쉽다. 타산과 논리를 벗어난 순수한 우정과 이해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대한 온기가 전달돼온다. 그럼에도 윤가은의 아동영화 내지 가족영화가 지닌 기이함이 있다. 가령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벌새>가 1990년대 초반을 지나온 시대의 가족의 풍경을 제시하며 리얼리티를 구축해간 데 비해 <우리집>은 동시대 가족의 풍경을 제시하지만 그것이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영화 속 두개의 이미지가 포개진다. 첫 번째는 하나가 선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다른 가족(이후 등장하는 유진 자매의 가족)의 여행 출발 장면이다. 영화에서 유진네 가족은 이후 단 한번도 그렇게 모인 바없다. 영화에는 다 제시되지 않았지만, 경제적인 문제에 몰린 가족은 지금 사는 집을 내놓았으며 아마도 빚추심 전화를 회피하며 어딘가에 도피 중이지 않을까 싶다. 다른 하나의 이미지는 부부싸움으로 인해 깨진 액자에서 나온 하나네 가족의 여행 사진이다. 과거의 화목한 한때를 상징하는 이 사진은 이후 하나의 레시피 노트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다. 영화는 가족여행이라는 환상의 이미지를 고수하는 하나의 애달픈 분투를 보여주는데, 관객은 아이다운 계책으로는 하나의 시도가 성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마치 상자와 계란 박스로 쌓인 집이 실제의 집이 아니듯 말이다.
영화는 ‘그 직전’에 멈추기를 선택했지만
골목이 즐비한 서민 동네, 다세대주택에 거주하는 사람들, 조금씩은 세속적이지만 악의 없는 어른들, 그리고 4인 가족. 이러한 설정은 동시대적인 것은 아니며 복고풍 서민드라마에 나올 법하다. 이는 이미 오늘날의 세계엔 파괴되어버린 비현실적인 설정일지 모른다. 차갑고 고독하게 단절된 주거공간에 거주하며 모니터 앞에서 유튜브를 보며 혼밥하는 일상이 익숙한 사람들에게 영화에서처럼 식탁에 모여 먹는 갓 요리한 따끈따끈한 오므라이스와 계란덮밥은 솔푸드의 가상이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는 독한 개인방송이나 자극적 외식으로 채워진 먹방의 대척점에 놓인 해독제와 비슷하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가 제시하는 것은 비현실적 판타지이자 회복 불가능한 소망의 풍경이기에 무의식적으로 더 매혹적이다. 가장 아이다운 시선에서 세계를 구축하지만, 실상 그 시선은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원초적 경험에 대한 이상화된 향수에 추동된 것이다. 독하고 자극적인 영상이 현실의 서글픈 반영인 것에 비해 어쩌면 윤가은의 영화는 그보다 더 추상화된 시뮬라크르일지 모른다. 윤가은식 해독영화가 대중문화와 미디어가 ‘리얼리티’라는 라벨을 붙인 힐링 프로그램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가족애, 우정, 순수한 자매애 등 이타적 관계성이 차가운 현실 속에서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은 어른들의 상식이다. 성장을 다루는 서사들은 아이가 거친 세계의 논리를 파악해가는 것을 본질로 삼기에 ‘악의 발견’은 이니시에이션 서사의 보편적 내러티브다. 그런데 영화 <우리집>을 비롯한 윤가은 감독의 작품은 악의 발견이라는 애달픈 지점으로 나아가기 직전의 장소에 인물을 놓아둔 상태로 작품을 마친다. 그러니까 마술 같은 화해로도 세계상의 파탄으로도 작품은 나아가지 않는다. 전작 <우리들>에서 선 밖으로 배척된 두 소녀의 시선이 마주하는 순간에, 이번에는 결국 실패한 듯 보이는 여행에서 돌아온 소녀들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데서 영화가 끝났다. 순수의 파괴와 악의 발견까지 나아가지 않고 그 직전에 호흡을 멈추는 전략은 두려움으로 인해 그다음을 유보하는 전략이다. 감독이 제시한 평온하고 호혜적이며 따스한 풍경의 시효는 길지 않을지 모른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아이들을 세상으로 내보낸 것에 대해 감독은 어떠한 책무를 이어가야 할 것인데, 이는 감독의 차기작이 아동영화가 되어야 함을 의미하진 않는다. 두려움을 넘어설 때 윤가은 유니버스의 확장성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