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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죽었다!>의 웃음을 위해 거리를 둔 결과 생겨난 아이러니

너무 늦게 도착한 블랙코미디

공산주의 유머 하나. 미연방수사국(FBI)과 미 중앙정보부(CIA) 그리고 소련의 국가안보위원회(KGB)가 숲에서 토끼를 잡아오라는 미션을 받았다. FBI는 숲에 들어가 수색을 시작하고 24시간 뒤에 토끼가 도망쳤다는 결론을 내렸다. CIA는 숲을 수색한 지 4시간 만에 토끼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KGB는 숲에 들어간 지 20분 뒤 피투성이가 된 곰 한 마리를 끌고 나왔다. 그리고 곰이 소리쳤다. “제가 토끼입니다! 제 부모님도 모두 토끼였습니다!”

이 유머를 듣고 웃으려면 우리는 피투성이가 된 곰에게 감정이입을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피투성이 곰과 거리를 둬야 한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은 “희극을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하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거리두기는 단지 웃음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영화는 수동적이며 압도적이어서 선동에 쓰이기 좋은 매체였고, 이런 영화적 속성에 영화 스스로 저항하는 하나의 방식이 거리두기였다. 그래서 코미디와 선동영화는 공존이 어렵지만 ‘낯선 영화’와 코미디는 공존이 쉽다. 거리두기를 자신의 주요한 도구로 삼았던 장 뤽 고다르 영화에서 웃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그 예다. 장 뤽 고다르의 <주말>(1967)에서 “이 영화에는 미친 사람들밖에 안 나오는군”이라는 주인공의 푸념이나, 역시 고다르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1980)에서 죽어가면서도 “눈앞에 주마등이 스쳐 지나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죽는 것이 아니다”라는 남자의 억지가 코미디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죽은 권력에 대한 풍자는 풍자가 아니다

<스탈린이 죽었다!>의 웃음 또한 온전히 거리두기에서 나온다. 영화의 도입부를 보자. 1953년, 모스크바 라디오 방송국에서 공개 연주회가 끝나갈 무렵, 방송국장에게 연주회 녹음본을 가져오라는 스탈린의 지시가 내려진다. 녹음을 하지 않은 방송국장은 퇴장하려는 연주자와 관객에게 소리친다. “다시 착석하시오! 음악적 비상상황이오!” 사소한 실수에도 숙청될 수 있는 이들의 지나친 진지함은 웃음을 자아낸다. 절대 웃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웃음은 더 쉽게 터질 수 있는 것이다. 방송국장뿐만 아니었다. 스탈린을 제외한 모두가 진지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흐루쇼프(스티브 부세미)는 장관이지만,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스탈린을 웃게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흐루쇼프는 왕의 광대다. 그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인물이어서 스탈린과의 술자리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한 농담과 스탈린의 반응을 꼼꼼히 복기한다. 흐루쇼프는 스탈린 앞에서 철저히 코미디언으로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스탈린이 살아 있을 때는 스탈린의 눈치만 보면 됐지만 그의 사후에는 눈치 싸움이 더 치열해진다. 스탈린처럼 억압 통치를 계속하는 것이 무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흐루쇼프나 그의 라이벌인 비밀경찰의 수장 베리야(사이먼 러셀 빌)를 비롯한 대부분의 장관들이 내심 동의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스탈린이 죽었다 해도 그의 통치에 반대하는 것은 반동으로 몰릴 수 있는 일이었다. 다수와 다른 의견을 말하게 되면 숙청될 수 있는 상황인데, 문제는 자신의 의견이 다수의 의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들이 인민들을 옥죄던 잣대에서 그들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권력자들이 눈치 게임만 하고 있는 코믹한 상황 설정은 권력에 내재하는 신화적 힘을 강탈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영화가 해체하는 권력은 결국 과거의 권력일 뿐이다. 그리고 이미 죽은 권력에 대한 풍자는 풍자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1940)나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처럼 시대와 함께 호흡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어떤 관객에게는 과거 권력자들의 허위를 통해 현재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관객이 우리 사회 권력의 문제를 이미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이 영화가 직접 그런 문제의식으로 관객을 이끄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지금 우리의 현재와 1953년 소련은 확연히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상영 금지된 러시아에서만 현재적 의미를 가질 뿐, 지금 우리에게는 안온한 재현에 불과하다. 물론 이 영화에는 캐릭터가 있고, 배우들은 호연을 펼치며, 대사도 재미있고 상징성도 있다. 굳이 따지자면 신선한 영화에 속한다. 그러나 잘 만들어진 모든 영화가 메시지가 있는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영화가 반드시 관객을 사유하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닐 테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좋아하기 힘든 이유는 서두에서 말한 피투성이가 된 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피투성이가 된 곰(고통받는 인민)에 무관심하다. 이것은 시점의 문제이기도 하다. 영화는 차가운 전지적 시점에서 사건을 보고 있고, 영화 도입부를 제외하면 철저히 권력자들에게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관객은 권력자들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서 권력자들을 내려다볼 뿐 고통받는 인민과 수평으로 위치하는 순간은 없다. 초월적인 위치에 있는 관객은 스탈린, 베리야 그리고 흐루쇼프 모두 다를 바 없다는 냉소적인 판단을 하게 되지만, 여기에 관객 자신도 권력자들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나 혹은 베리야나 흐루쇼프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은 개입되지 않는다. 즉 영화가 관객이 위치한 도덕적 우월성에 도전하지 않기에 관객은 안전하게 죽은 권력자들에게 혀를 차며 극장을 나설 수 있게 된다.

고통받는 약자와 거리를 둔 채 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영화가 비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슬픔과 분노를 극장 안에서 휘발하게 하는 영화보다 이 영화가 더 윤리적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신체의 고통을 전시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예를 들어 아동 강간은 직접적으로 재현되지 않고, 학살의 참혹함 역시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강간이나 학살을 볼거리로 소비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일까? 전시되지는 않지만 암시되는 수많은 고문과 살인에 대해서, 단지 직접적으로 재현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직접적으로 재현되는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은 영화의 윤리를 탐구하기에는 너무 단순하지 않은가? 관객이 폭력의 이미지로부터 직접적인 쾌락을 얻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폭력을 행사하는 타자를 통해서 타자에 대한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폭력의 이미지로부터 간접적인 쾌락을 얻는 것은 아닐까?

정작 현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그리고 이 영화는 권력자들에 대한 풍자에 집중한 나머지 국가적 폭력을 권력자의 개인적인 것으로 축소해버릴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구조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사회 변화에 대한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스탈린이 인민을 억압했던 것은 그렇게 할 수 있어서였다. 흐루쇼프와 그 후 집권한 브레즈네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금도 러시아에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완전한 표현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스탈린이 죽었다!>는 재미있는 블랙코미디이지만, 코미디 같은 국가에서 살아야 하는 국민들에게 철저히 무관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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